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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한나 아렌트 지음 | 신충식 옮김
문예출판사

2023년 11월 06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09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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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6.33MB)
ISBN 9788931023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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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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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로 꼽히는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후 20세기 인류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한나 아렌트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치 에세이로, 아렌트의 조교 출신인 제롬 콘이 아렌트 에세이를 시기별로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아렌트가 46세(1953)부터 서거 직전인 69세(1975)까지 남긴 글, 강연, 서평, 대담 등 총 42편의 글을 집필 순서대로 실었고, 한 문단 분량의 글에서부터 길게는 64쪽 분량의 긴 논문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6편은 이미 다양한 지면에 실려 출간된 적이 있고 16편은 처음 출간되는 에세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집필하던 시기에 《인간의 조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을 출간했는데, 이 책들에 담긴 아렌트의 치열한 사유가 《난간 없이 사유하기》 속 에세이에 잘 녹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인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정치 사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난간’은 우리가 사유하고 판단할 때 기대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완전히 새롭게, 기준도 틀도 없이 사유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난간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우나 위험하며, 언제 끝모르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담을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사유란 그런 것이다. 위험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사유한 끝에야 세상과 인간, 자유와 삶, 정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과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렌트의 에세이에는 고전 철학부터 중세 철학, 근대의 지형을 바꾼 혁명들, 양차 세계대전 등 철학, 역사, 정치, 문화가 망라되어 있다. 아렌트는 대답하는 자가 아닌 질문하는 자로서 전통적인 기준과 틀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과 사건의 의미를 좇으며 진정한 난간 없는 사유를 보여준다.

한나 아렌트의 글은 치밀하고 밀도 높은 사유의 깊이만큼 독해하는 데 만만찮은 공력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층위의 글이 들어 있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에는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 사유의 단초와 핵심이 담겨 있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서문과 해제를 통해 아렌트 사유를 촘촘하게 훑고 정리하여 독자들이 아렌트 사유의 세계에서 지치지 않고 유영할 수 있도록 했다.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에서는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를 바탕으로 미국 공화국의 쇠퇴 원인, 혁명과 평의회 체제, 전체주의의 출현과 아돌프 아이히만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심도 있게 분석했고, 옮긴이 해제에서는 서문에서 다루지 않은 아렌트의 핵심 주제인 정치, 다원성, 판단의 문제를 세계성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의 사유가 담긴 에세이를 읽어나가는 데 서문과 해제가 작으나마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서문 _ 제롬 콘

카를 마르크스와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
위대한 전통
20세기에 권위가 의미하는 것
로버트 허친스에게 보내는 편지
헝가리 혁명과 전체주의적 제국주의
전체주의
문화와 정치
전통 윤리에 대한 도전: 마이클 폴라니에 대한 답변
1960년 미국 전당 대회를 돌아보다: 케네디 대 닉슨
행위와 ‘행복의 추구’
자유와 정치에 관한 강연
냉전과 서구
민족 국가와 민주주의
케네디와 그 이후
나탈리 사로트
“담벼락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요아힘 페스트와의 인터뷰
노동, 작업, 행위
정치와 범죄: 서신 교환
제시 글렌 그레이의 《전사들》 서문
인간의 조건에 관해
근대 사회 위기의 특징
혁명과 자유에 관한 강연
미국은 본래 폭력적인 사회인가?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대하여
“자유롭기 위한 자유”: 혁명의 조건과 의미
상상력
그는 철저히 드와이트다
에머슨-소로 메달 강연
아르키메데스의 점
80세를 맞은 하이데거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전쟁 범죄와 미국의 양심
《뉴욕 리뷰 오브 북스》 편집진에게 보낸 편지: 구분
현대 사회의 가치들
한나 아렌트에 대한 한나 아렌트
발언
프린스턴대학교의 철학 자문 위원회 연설
로저 에레라와의 인터뷰
공적 권리와 사적 이익: 찰스 프랭클에 대한 답변
《정신의 삶》 머리말
전환
위스턴 오든 추모사: 1973년 9월 28일 밤 서거

감사의 말
수록 에세이 출간 정보
옮긴이 해제 및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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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에게는 내면의 목소리가 없었다. 아렌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는 ‘하나 안의 둘’이 아니었다. 이는 그에게 함께 사유할 동료가 없었다는 의미다. 사유할 동료란 자기 자신보다는 타자에게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적어도 세계에 재현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너무도 빨리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해주는 사람이다. ‘아이히만은 헤아릴 줄은 알았으나 사유하지는 못했다.’ (29페이지)

■아이히만은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재판받는 특수한 개인이었다. 이 사안을 두고 양심의 역할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유일한 양심이 나쁜 양심이며 이 양심은 다만 점잖은 신사와 숙녀에게만 말을 건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실제로 나쁜 양심은 인간 존엄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에 반해서 명료하거나 투명한 양심에는 목소리가 없으며 아무에게도 이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다. (29~30페이지)

■아렌트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고대 개념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고 판단했다. 정치적으로 아이히만의 평범성은 그가 쓴 가면 배후에 어떤 결정을 하도록 만든 근원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의 가면은 선택이나 우연의 강풍이 데려간 곳이 어디든 일관성이나 기대 없이 바뀌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자신이 “악의 평범성”을 범하지 않았다는 기괴한 행위에 대해 아이히만의 책임이라고 명명했고, 우리는 여기에 동의해야 한다. (34페이지)

■아렌트에게는 이러한 무관심이 “최악의 위험”이다. 최소한 판단의 힘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이는 사실 “전적인 판단”의 거부보다 더 위험하다. 유대감보다 무관심이 위험하다. (34페이지)

■모든 것이 종료할 때 진리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료 지점에 근접했을 때야 진리를 학습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반드시 우리의 삶으로 보상할 필요는 없더라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생생한 자극으로서 진리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48페이지)

■타자를 지배하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롭지 않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보편적 평등의 사실, 즉 정의상 그 누구도 지배할 권리가 없다는 조건과 정확히 부합한다. 그럼에도 지배의 배제,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오래된 구분을 없애는 것은 우리의 전통이 지배 없이는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자유의 유일하고 충분한 조건에서 아주 멀리 있다.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간주했다. 이러한 자유는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71페이지)

■인류가 민족이나 영토로 국가를 조직하는 한, 무국적자는 원래 시민이건 귀화했건 단순히 한 국가에서 추방될 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추방됩니다. 어떤 국가도 무국적자를 받아주거나 귀화시킬 의무는 없습니다. 이는 곧 무국적자가 실제로 인류에게서 추방됨을 의미합니다. (166페이지)

■헝가리에서 일어난 일이 폴란드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것은 우연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사실상 폴란드 인민의 눈앞에 헝가리의 비극적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고무우카는 초창기에 반란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고 폴란드 인민도 집단행동에서 오는 힘의 짜릿한 경험을 놓쳤다. 결국 이들은 국민이 자유의 깃발을 훤히 보이게 펼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204페이지)

■내가 《전체주의의 기원》을 집필하면서 평의회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크론시타트 반란과 이에 따른 볼셰비키당의 ‘소비에트’ 궤멸이 러시아 혁명의 전환점이었다고 줄곧 확신했다. 이런 상황은 자기 자식들을 집어삼킨 혁명이라는 매우 잘못된 비유가 실제로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혁명으로 태동한 자유를 위한 새로운 제도들이 무너졌으며 그 폐허 위에 일당 독재가 수립되었다. 이를 뒤이은 정부가 더는 혁명사 자체에 속하지 않을 스탈린의 전체주의 정부 수립이었다. (243페이지)

■예술가의 작업은 정치적 삶이 자리 잡은 공적 공간 문화와 정치에 적합하도록 장식하고 육성하는 데 봉사한다. 오로지 행위 활동, 생산 활동, 이 “결과물”(행동과 작업의 산물)이 공적 공간에 놓여 있기에 문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갈등과 관련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는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창출하고 거주하는 공적 공간에 궁극적으로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있다. 행위 또는 생산에 공통으로 적용할 기준이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기준인가, 아니면 특별히 문화적인 기준인가? (257페이지)

■우리는 예술가와 식자층이라는 이른바 문화 엘리트가 야만의 정치를 상대로 어떻게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 모든 “끝없는 수다”, 즉 신념의 상호 공유를 남긴 지식층을 어떻게 경외하는지를 자주 목격했다. 우리는 이 같은 사태에서 어느 정도 더 잘 적응할 수 있고 단순한 ‘지식인의 배반trahison des clercs’ 그 이상을 보게 될 수 있을 듯하다. 정치의 폭력성에 대한 믿음이 결코 야만성의 유일한 특권이 아니다. (265페이지)

■사유 자체가 생각이 솟구치는 언덕에서든, 가라앉아야 하는 심연에서든 자체를 잃지 않는 것이라면 그 지침에 따라 사유의 모든 면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유 활동이 그리는 곡선은 원이 그 중심에 붙들려 있듯 사건에 매여야 합니다. 인간 활동 중 가장 신비스러운 이 활동에서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어떤 정의나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천천히 진행되는 발견과 아마도 어떤 사건이 찰나의 순간에 완전히 밝혀줄 지역을 지도 제작하듯 조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300페이지)

■제게 자유는 철학자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인간의 역량 안에서 이리저리 위치시키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자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인간이 외적 강제에서 도피하려는 이른바 내적 자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뒤늦게 찾아온 현상이고 객관적으로는 부차적인 현상입니다. 자유란 원래 세계 소외의 결과물인데, 어떤 세계 경험과 주장들이 외부 세계에서 기인하고 우리가 그 경험과 주장들을 감지할 수 있는 실재로서 처음 접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자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텐데도 자유는 각자 자기 자아 내부의 경험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과 교류하면서 처음으로 자유와 그 반대를 의식합니다. (321페이지)

■자유가 본질적으로 정치 현상이라는 제 주장에서 자유란 주로 의지와 사유가 아닌 행위 안에서 경험되며, 따라서 자유에는 행위에 적합한 영역인 정치 영역이 필요합니다. (335페이지)

■정치적 자유는 “내적 자유”가 아닙니다. 이는 한 인간의 내부에 숨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자유란 행위가 나타나고 보이며 효과적일 수 있는 공간을 이 자유에 부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의지의 자기주장 역량은 이러한 정치적 자유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42페이지)

■우리가 민주주의를 국민의 통치로 이해한다면, 또는 통치라는 단어가 이 구문에서 진정한 의미를 상실했듯이 모든 국민이 공적 사안에 관여하고 공공의 영역에 등장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권리로 이해한다면 역사상으로도 민족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그다지 좋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375페이지)

■민족 국가가 근대 세계의 삶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은 오래전에 드러났으며 국민이 이에 더 오래 고착될수록 민족 국가와 민족주의가 왜곡되어온 방식은 더욱 무모하면서도 사악하게 자기주장을 할 것이다. 우리는 전체주의, 특히 히틀러 체제의 형태가 민족 국가의 붕괴와 민족이라는 계급 기반 사회의 해체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의 권력 관계에서 민족 국가의 주권 개념은 어쨌든 절대주의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위험한 과대망상증이다. (376페이지)

■당신이 알듯,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것과 그 실행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어요. 알고서도 외면하고 떠난 사람과 실행에 옮긴 사람들 사이에는요……. 따라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자리를 뜬 사람이 “우리는 모두 유죄”라고 말한다면 그건 실제로 철저히 실행에 옮긴 사람들을 감싸는 게 돼요. 바로 이게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책감을 일반화해서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죄인들을 감싸는 짓일 뿐이니까요.(410페이지)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의 정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도 커진다.” (414~415페이지)

■“아우슈비츠가 모든 정치의 뿌리를 들춰냈다”라는 말은 전체 인류가 유죄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누구도 죄가 없습니다. 온갖 재료를 넣은 일반 스튜에는 구체성과 특수성이 빠져 있습니다. 한 독일인이 이 사안으로 글을 쓸 때 이는 우려할 만한 이유가 됩니다. 이 소멸의 의미는 재앙을 일으킨 장본인이 우리의 아버지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444페이지)

■자유 개념은 오랫동안 정부의 목적이 자유가 아니라 인민의 복지,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생각에 찬성하며 정치적 논의에서 사라졌는데, 이 개념이 다소 완곡한 형태이긴 해도 이제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유는 정의, 권력, 평등과 같은 정치 영역의 많은 현상 중 하나일 뿐만이 아닙니다. 자유는 위기의 시대, 즉 전쟁 또는 혁명의 시대에만 정치 행위의 직접적인 목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이 애초에 정치 조직체 내에서 함께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의 존재 이유는 자유이며, 자유 없는 정치적 삶은 무의미합니다. (481페이지)

■결국 자유가 항상 특권, 즉 소수의 특권이었음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민권을 지닌 공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소극적 측면에서조차 자유는 특권이었습니다. 소수만이 자유롭게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데요, 자유liberty의 소극적 의미는 이제 타인들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요소로 구성되는 듯했습니다. 현재 우리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연관된 공포에서의 자유뿐만 아니라 가장 특징적이고 심지어는 우선적으로 결핍에서의 자유였습니다. (492페이지)

■저는 이를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고 부릅니다. (…) 즉, 여러분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난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제가 저 자신에게 이 난간을 말하는 방식이죠.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제가 하려는 일입니다. (671페이지)

■의심할 나위 없이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어요. 당신의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최소 인원이 당신에게 있다면 폭력은 권력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수없이 목도했죠. 폭력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권력의 생성입니다. 즉, 일단 폭력이 권력 구조를 파괴하면 새로운 권력 구조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666페이지)

■‘사유’는 이 위기에 대면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사유가 위기를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유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이 사유 후에 어느 정도 비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제가 위험한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하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682페이지)

■사유는 무슨 생각이든 비판적 검토에 부치는 작용이죠. 실제로 사유는 엄격한 규정, 일반적인 의견 등에 속할 만한 무엇이든 그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위험한 사유가 존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무사유, 즉 생각이 없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사유가 위험하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무사유가 훨씬 더 위험하다nepas réfléchir c’est plus dangereux encore’라고 말하고 싶어요. (706페이지)

■고대에 유대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는 동안에도 이미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음을 보세요. 여러 다른 형태의 정부와 국가가 있었던 수 세기를 거치면서, 실제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은 유일한 고대 민족인 유대인은 전혀 동화되지 않았어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동화되었겠죠. 로마 시대와 스페인 시대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고, 당연히 18세기와 19세기에도 동화될 기회가 있었죠. 한 민족, 한 집단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요. (709페이지)

■아렌트는 무사유의 인간을 몽유병자로 취급했다. 사유에 특정한 목적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삶의 목표에 일말의 실수라도 발생하게 되면 이 실수의 원인은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생각이 없었거나 생각이 짧아서라고 흔히 말한다. 무지가 지식의 부정이라면 사유의 부재는 의미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사유가 의미에 관여하는 반면에, 인식은 진리를 추구한다. 진리가 강제력을 지닌 데 반해서, 의미의 추구에는 강제력이 없다. (776~777페이지)

■간단히 말해서 “확장된 사유 방식”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일찍이 아렌트는 우리 인간은 상상력 없이는 세계에서 방향감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정신에 유일하게 내장된 “내부 나침반”이 곧 상상력이다. 그녀는 상상력, 즉 확장된 사유 방식에 의거한 판단이 칸트의 세 비판서 중 진정으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는 반면에 실천 이성으로서의 입법의 이성은 정치가 아닌 도덕성에 귀속한다고 주장한다. (778~779페이지)

이전에 아무도 사유하지 않은 것처럼 사유하라!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치열하고 밀도 높은 정치 사유

20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로 꼽히는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후 20세기 인류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한나 아렌트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치 에세이로, 아렌트의 조교 출신인 제롬 콘이 아렌트 에세이를 시기별로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아렌트가 46세(1953)부터 서거 직전인 69세(1975)까지 남긴 글, 강연, 서평, 대담 등 총 42편의 글을 집필 순서대로 실었고, 한 문단 분량의 글에서부터 길게는 64쪽 분량의 긴 논문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6편은 이미 다양한 지면에 실려 출간된 적이 있고 16편은 처음 출간되는 에세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집필하던 시기에 《인간의 조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을 출간했는데, 이 책들에 담긴 아렌트의 치열한 사유가 《난간 없이 사유하기》 속 에세이에 잘 녹아 있다.

한나 아렌트의 글은 치밀하고 밀도 높은 사유의 깊이만큼 독해하는 데 만만찮은 공력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층위의 글이 들어 있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에는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 사유의 단초와 핵심이 담겨 있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서문과 해제를 통해 아렌트 사유를 촘촘하게 훑고 정리하여 독자들이 아렌트 사유의 세계에서 지치지 않고 유영할 수 있도록 했다.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에서는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를 바탕으로 미국 공화국의 쇠퇴 원인, 혁명과 평의회 체제, 전체주의의 출현과 아돌프 아이히만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심도 있게 분석했고, 옮긴이 해제에서는 서문에서 다루지 않은 아렌트의 핵심 주제인 정치, 다원성, 판단의 문제를 세계성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의 사유가 담긴 에세이를 읽어나가는 데 서문과 해제가 작으나마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질문하는 자의 난간 없는 사유

아렌트에게 사유 활동에 관여한다는 것은 어느 한쪽 난간에 의지하지 않고서 자신이 떠안은 엄청난 부담을 보살피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과 유사하다.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비유 중 또 다른 면, 즉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의 흐름에 걸쳐진 전통 규범이라는 다리가… (18페이지)

저는 이를 난간 없이 사유하기라고 부릅니다. (…) 즉, 여러분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넘어지지 않도록 항상 난간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제가 저 자신에게 이 난간을 말하는 방식이죠.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제가 하려는 일입니다. (671페이지)

이 책의 제목인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정치 사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난간’은 우리가 사유하고 판단할 때 기대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완전히 새롭게, 기준도 틀도 없이 사유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난간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우나 위험하며, 언제 끝모르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담을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사유란 그런 것이다. 위험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사유한 끝에야 세상과 인간, 자유와 삶, 정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과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렌트의 에세이에는 고전 철학부터 중세 철학, 근대의 지형을 바꾼 혁명들, 양차 세계대전 등 철학, 역사, 정치사가 망라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 내용을 하나하나 짚으면서도 전통적인 기준과 틀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과 사건의 의미를 좇는다. 대답하는 자가 아닌 질문하는 자로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진정한 난간 없는 사유를 보여준다.


멈춰서 생각해보라

‘사유’는 이 위기에 대면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사유가 위기를 제거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유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이 사유 후에 어느 정도 비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제가 위험한 사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유하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하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682페이지)

이러한 의미에서 사유는 무슨 생각이든 비판적 검토에 부치는 작용이죠. 실제로 사유는 엄격한 규정, 일반적인 의견 등에 속할 만한 무엇이든 그 기반을 무너뜨리는 작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위험한 사유가 존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는 무사유, 즉 생각이 없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믿습니다. 사유가 위험하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무사유가 훨씬 더 위험하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706페이지)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사유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흘려버리게 되고 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흘러가는지 인식도 판단도 하지 못하게 된다. 비판하고 검토하면서 주어진 것을, 대면하게 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게 사유의 과정이다. 그러니 사유는 위험할 수밖에 없고 아렌트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사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이히만이 무사유의 전형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사고 정지, 사유하지 않음을 극히 경계한 아렌트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위험할 정도로까지 사유를 밀고 나가기 위해 일단 “멈춰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어쩌면 아렌트의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시대에 절실하다. 사이버 공간 속 허상에 집착하고 타인의 심상한 말 한 마디에조차 상처받는 저변에는 사유하지 않음이 있다. 혼돈과 속도의 시대에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누구도 생각에 침잠할 수 없다. 이는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정보

Hannah Arendt, 1906~1975
1906년 독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1941년부터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다. 아렌트의 삶은 격동의 20세기에 걸쳐 있었다. 유대인이었던 아렌트는 1933년 독일을 탈출하여 프랑스로 망명한 후, 발터 벤야민 등 많은 지식인과 교류하며 유대인 운동을 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수용소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1941년에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뉴욕으로 갔다. 이후 노터데임대학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프린스턴대학교, 시카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은 뉴스쿨 사회과학대학원의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아렌트는 두 명의 위대한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와 평생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신을 철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현상과 사건의 의미를 찾는 사상가였으며,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주로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자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썼고 정치와 자유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한 가닥 한 가닥 용기 있게 엮어나갔다. 지은 책으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과거와 미래 사이》(196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혁명론》(1963),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1968), 《폭력론》(1969), 《공화국의 위기》(1972), 《라헬 파른하겐》(1958/1974) 등이 있으며, 《정신의 삶》은 1978년 아렌트 사후에 출간되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뉴스쿨 사회과학대학원 철학과에서 타자성과 시간 현상학에 관한 논문 “The Living Present and Otherness”(2005)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관심 분야는 현상학, 해석학, 정치 이론, 공직 윤리, 교양 교육이다. 최근 논문으로 〈슈미트와 하이데거: ‘정치현상학’의 가능성 모색〉, 〈책임의 역설과 행정악行政惡의 문제〉, 〈해석학으로서 행정학의 가능성에 대한 검토〉, 〈아렌트의 초기 시간 분석과 이웃사랑의 가능성〉,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 〈가다머와 아렌트: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보수주의와 보수의 정치 철학》(공저), 《생태 문명 생각하기》(공저), 《공직 윤리》(공저) 등이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다른 하이데거》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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