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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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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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우산이 언제부터 신발장 안에 있었는지 너는 아니?”
“글쎄…?”
“누군가가 좋아지는 것도 그런 거 같아.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 _9쪽
소녀와 관련한 나의 기억에서 그날의 장면은 언제나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있다. (...) 그 장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는 소년은 내가 이 그림들을 통해 담고자 했던 이미지이기도 했다. 담고 싶고 닮고 싶은 그 어떤 것. _183쪽 「제일 먼 곳에 있는 아이」 에서
한 장 한 장 그림을 넘기면 밀려오는 첫사랑의 풋풋함
상상 속에서 그애에게 건넨 말들은
내 주변에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20편의 만화는 인물도, 에피소드도 달라 전체적으로 옴니버스 형식을 띠지만 공통점이 있다. 인물들이 오가는 배경은 운동장과 골목, 가게 등 하나같이 등굣길 하굣길에 지나던 정감 있는 공간들로 독자들의 추억과도 포개진다는 점이다. 또 그곳에서 움직이는 소년들은 진지하지만 감정을 전하는 데 서투르며, 때론 허세를 부리거나 엉뚱한 면모를 보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응답하라 1998〉의 만옥이를 짝사랑하던 순정의 정봉이(안재홍 분)가 시간을 돌려 과거로 돌아간다면 책 속의 소년들과 닮지 않았을까. 작가가 일상적 공간에서 섬세한 눈으로 채집한, 뭉툭한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들은 독자들의 공감 버튼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언덕길에서의 재회 이후 한동안 그애 생각이 났다. 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그애의 잔상과 기억이 난데없이 튀어나왔다가 슬쩍 사라지곤 했다. 특히 그 완만한 언덕을 오를 때 그랬다. 그 언덕길에서, 그애는 때론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때론 사복을 입은 모습으로 겹쳐지며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마다 난 그애를 다시 마주치면 어떻게 할지를 상상했다. 또 모르는 체할까, 손만 들어서 인사할까, 메롱을 한번 해볼까, 이럴까, 저럴까. 나는 그애와 더는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싶었다. 그러면서도 늘 또 한번의 만남을 상상하곤 했다. _20쪽 「친구를 마주치기 좋은 언덕」에서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서정을 만드는 또다른 장치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움직이게 하는 그림이다. 곁눈질하는 눈동자, 발그레해진 볼, 한쪽만 삐져나온 교복 남방 같은 외양의 디테일과 컷마다 달라지는 인물의 동세, 향수 가득한 풍경 컷들의 표현은 어떤가.
한 시절을 지그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우리가 통과한 순간들의 서정을 환기하고 그 시절에만이 품을 수 있던 순정한 마음을 헤아리게 할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풍광이나 한없이 편지를 썼다 지웠다 했던 시간 같은 것들을, 다시는 되돌릴 수도 가질 수도 없는 것들을.
친구를 마주치기 좋은 언덕
# 02 자신감
# 03 아무렴 어때
너의 목소리는
# 04 네 생각
# 05 코피
귀찮은 친구
# 06 더 중요한 것
# 07 오르락내리락
# 08 치사한 너
·오동도는 누구였나
# 09 그래도 난
# 10 낯선 기분
# 11 마음의 속도
# 12 그만
오버하네
# 13 그게 왜 궁금해?
# 14 유명하다는 애
# 15 다 똑같아
# 16 남학생 5, 6
# 17 멍청이
나만의 룰
# 18 소년은 웃지 않는다
# 19 웃음의 의미
# 20 생각나는 사람
제일 먼 곳에 있는 아이
작가의 말
다리 건너편 너머에는 기다란 언덕길이 있었고 그 언덕길 끝자락 어딘가에는 그애의 집이 있었다. 나는 다시 다리 건너편을 향해 걸었다. 다리 중간쯤에 다다르자 바람이 다시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바람은 다른 소리를 지워내며 불고 있었다.
바람소리에 다른 소리들이 떠밀려가는 와중에, 상상 속에서 그애에게 건넨 말들은 내 주변에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 말없는 소년과 말없는 소녀의 대화라.
나는 다만 그애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행여나 바람에 실려올까, 나는 좀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_38~39쪽 「너의 목소리는」
언젠가 쉬는 시간에 코피를 쏟았을 때, 나와 친하던 남자애들은 어김없이 “또 코 팠냐?”라고 물었고, 나와 친하지 않던 부반장 여자애는 휴지를 갖다주었다. 나는 그 휴지를 돌돌 말아 콧구멍에 끼우며 다음 반장 선거에서는 그 여자애를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 나는 그날 코피가 멎고 나서도 콧구멍에 끼운 휴지를 그대로 두었다. 그건 부반장 여자애의 호의에 대한 나의 호의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호의에 나는 혼자서 흐뭇해했다. 한편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나와 친하지도 않으면서 부반장 여자애는 어째서 휴지를 갖다줬을까? 부반장으로서의 책임감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나는 코에 끼운 휴지를 만지작거렸다. 역시나 코에 휴지를 끼우면, 없던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것도 같았다.
나는 때때로 아무 이유 없이 코에 휴지를 끼우고 다녔다. 코피가 났든 안 났든, 코에 휴지를 끼운 나는 늘 허리를 펴고 턱을 당긴 채 걸었다. _52쪽 「귀찮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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