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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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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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다짐한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둥글”(「검은 절 하얀 꿈」)어 일견 연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편편의 시들은 그 유연함이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임을 확인케 한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낸 두부처럼, 부드럽게 내려와 모든 것을 감싸안는 순백의 눈처럼 희고 고요한 힘을 지닌 시가 여기 도착했다.
솥/ 테니스/ 미선 언니/ 어떤 공동체/ 거기 여름/ 추자도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캐넌/ 순무는 순무로서만/ 소설처럼/ 화염/ 밤 친구
2부 열두 장의 흰 종이
하지/ 미선의 반죽/ 초기화/ 기호와 소음/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인터뷰/ 본업/ 생활과 소음/ 혁명과 소음/ 조사/ 미선의 생활/ 초기화
3부 조용하고 둥글게
가을과 경/ 내일 날씨/ 검은 절 하얀 꿈/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밤은 없고/ 신(scene)/ 박태기나무 아래서 벌어진 일/ 목적지를 입력하세요/ 다른 나라에서/ 사과의 모습/ 이브나 파커/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관객 되기
4부 여름의 초원과 겨울의 초원을 지나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소설가/ Beauty and Terror/ 나이트 사파리/ 없는 사람/ 공터의 왕/ 기차는 울산을 지나쳤다/ 눈 속 밤/ 겨울 소설/ 다정한 옷장에 걸려 있는/ 미선씨, 소식 없음/ 초기화
해설 | 미선 언니와 나
조대한(문학평론가)
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모는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솥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마당이 연기로 가득해 경보 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_「솥」에서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_「초기화」에서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마주볼 수 있는 눈과 귀였지
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나를 서서히 망쳤고
나도 사실은 너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나 두려웠어
안전하고 무해한 것들만 믿으며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채
_「초기화」에서
나는 순간 황홀해진다
눈밭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얀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하얀 눈
정지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_「검은 절 하얀 꿈」에서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되었다가 나를 이 절로 보낸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절에 있다 그것은 이 절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절 뒷마당에 있는 연못도 아니고 연못에 기울어진 버드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버드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_「검은 절 하얀 꿈」에서
시인과 경찰과 교수 역할을 맡은 아이들 틈에서
푸르게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
이브나 파커는 곁눈질로 아담의 눈물 젖은 얼굴을 눈치챘다
정말 아름다운 시냇물이구나, 생각하며
_「이브나 파커」에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얀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_「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에서
짙은 어둠 작은 열차를 타고
우리는 고요한 잠을 찾아가고 있었지
작은 무늬들로 가득한 기린의 뒷모습
그의 어깨가 가만히 오르내리면 우리는 그의 평화로운 꿈
여기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_「나이트 사파리」에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얀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_「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에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라는 제목과 새하얀 표지가 건네는 첫 느낌대로 한여진의 시에서는 유독 흰색이 도드라진다. 표제작을 포함해 여러 시의 배경이 하얀 눈으로 가득한 겨울날인데다 양(「어떤 공동체」)과 흰고래(「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밤은 없고」)부터 순무(「순무는 순무로서만」), 밀가루 반죽(「미선의 반죽」), 그리고 “하얀 문”(「검은 절 하얀 꿈」)까지 주요 이미지가 온통 하얀 까닭이다. 이 넉넉한 흰빛은 시집 전체를 눈 덮인 세상과도 같은 고요한 아름다움 속에 자리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처럼 시집의 고즈넉한 정경에 힘을 실어주는 흰색은 한여진의 화자와 만나 또다른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바로 흰색이 무언가를 써내려갈 수 있는 하얀 종이의 모습으로 드러나면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_「솥」에서
신촌 골목길을 걸으며 네가 해준 이야기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한참을 울더니 소설로 쓰겠다고 했다
너는 희미하게 웃었고
사실은 말야, 나도 뭔가를 쓰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때 기차가 굉장한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_「소설처럼」에서
앞서 인용한 시편들에서 알 수 있듯 한여진 시의 화자는 많은 경우 ‘쓰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의 쓰기는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인다. 같은 이야기를 공유한 누군가가 그것을 “소설로 쓰겠다고” 선언하는 동안 ‘나’는 “나도 뭔가를 쓰는 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소설처럼」).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꿈은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되고(「초기화」), 완성한 줄 알았던 글은 어느 순간 ‘초기화’되어 ‘나’는 “눈을 뜨면 다시 빈 노트 앞”에 있다(「초기화」).
서사를 지닌 한 편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하는 한여진의 시들을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몇몇 힌트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솥뚜껑에 맞아 죽은 ‘나’의 이모와 솥 아래서 불타 죽은 ‘나’의 언니(「솥」), 그리고 영동고속도로에서 트럭 전복 사고로 죽은 ‘나’의 삼촌(「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을 통해,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맞이한 ‘결말’을 통해서다.
한여진의 화자에게 있어 기록은 일어난 일을 고정시켜버리는 행위인 듯하다.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유일한 결말”(「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고정시키지 않기 위해 화자가 택하는 것이 바로 ‘다시 쓰기’이다. 그는 하얀 종이 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검은 글씨를 다시금 하얗게 덮어버리고, 그렇게 만들어낸 흰색 위에 또다시 새롭게 쓴다.
“해피 엔딩은 믿을 수가 없”(「미선의 생활」)다던 미선 언니는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실로 두려운 것은 끝도 없이 펼쳐진 막막한 현실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진 채로 너절하게 모습을 드러낸 미래가 아닐까. 그렇기에 시인은 과거의 기억들을 붙잡고 닫힌 엔딩을 거부한 채 초기화된 첫 문장으로 자꾸만 되돌아가려는 것 같다. _조대한(문학평론가), 해설에서
그러니 ‘미선 언니’가 ‘해피 엔딩’을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일 테다.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짚어 보였듯 그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닫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여진의 화자는 이미 쓴 종이 위에 계속해서 흰색을 덧입히고 또 덧입히며 끊임없이 미래를 다시 써낸다. “계속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남은 하얀 반죽만이 우주가 될 수도 있고 이불보가 될 수도 있으며 천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얻으므로(「미선의 반죽」).
내가 숨쉴 수 없는 공간인 줄도 모르고 공허와 폐허인 줄도 모르고
다른 건 배운 적 없는 나는 그런 세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
눈을 뜬다 숲속에 앉아 있다 고요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한 숲 안경원숭이 비단고사리 하늘말나리 소사나무 코럴블루 양떼구름 새털구름 이런 이름 말고도 그들에겐 다른 이름들이 있을 것이다 진짜 이름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나에게도 나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이 있다고 하면 보지 않을래?
숲의 경계선에 서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바라본다 오래된 길
하지만 오랫동안 인적이 없던 길
손에 불씨를 들고
그리고 생각한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오래 살았다는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나의 미래를
_「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에서
그렇게 한여진의 화자가 다시 쓰고자 하는 미래는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화자는 “오래 살았다는 남자”가 만들어놓은 “내가 숨쉴 수 없”는 세계 위에 “남자 아닌 여자/ 아닌 여자/ 아닌 여자”들도 숨쉴 수 있는 세계를 세우겠다고(같은 시), 오늘 현장에서 죽은 동료의 이름을 기억하고(「기호와 소음」) 끝없이 총성이 울리는 곳에서 스러져간 이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써내려가겠다고 말한다.
잊혀진 기억의 실마리를 끈질기게 붙들고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려는 한여진 시인이야말로 무명의 위 세대들이 남긴 유산의 정당한 계승자일 것이다. 그 미래와 과거가 충돌하는 틈바구니 속에서, 아직 도착하지 못한 존재들과 실패한 기억의 흔적 위에서, “내가 잊어버린 것”과 “네가 잊어버린 것// 사이의 간격”(「초기화」) 너머에서, “지나간 기록에 대한 기록”과 “앞으로 일어날 이야기들”(「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이 겹쳐지는 바로 그곳에서 시인의 시는 시작되는 것 같다. _조대한(문학평론가), 해설에서
그러므로 조용하고 둥근, 아름다운 흰빛을 연상케 하는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검은 절 하얀 꿈」 「밤 친구」 「나이트 사파리」 같은 시편들에서부터 시작해 여성주의적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는 「솥」 「캐넌」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과 ‘미선 언니’ 연작, 시사적인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팔레스타인에서」 「화염」 「Beauty and Terror」 「혁명과 소음」 등의 작품들까지 경유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지닌 흰색이 마냥 무구하고 투명한 빛깔이 아니라 다양한 색과 “공허와 폐허”마저 모두 감싸안은, 부드럽고도 강인한 눈과 같은 빛깔임을 알 수 있다. 창밖으로 하얀 눈이 내리고 두부는 평화롭게 구워지고 있는 가운데 다시 마주한 빈 노트 앞에서(「초기화」),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말
이 시들을 엮는 동안 여러 번의 겨울이 왔다 갔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자주 졸았는데
가끔은 이대로 계속 잠들어도 좋겠다 싶은 밤이 있었다.
2023년 10월
한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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