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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박이강 지음
교유서가

2023년 09월 15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09월 0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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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26.81MB)
ISBN 9791192968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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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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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이강의 첫 작품집이 나왔다. 앤솔러지 『폴더명_울새』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저자는 『안녕, 끌로이』로 제10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문장과 작품의 높은 완성도로 주목받고 있다. 9편의 단편을 모은 이번 작품집에서 저자는 관습처럼 이야기하는 ‘믿음’의 실체를 거침없이 파헤친다. 누군가에게 ‘믿음’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디는 방패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얻고자 하는 것, 보고자 하는 것, 결국 욕망으로 단단히 응고된 환상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헛된 믿음’이다. 저자가 건네는 무표정한 문장들은, 한때는 ‘믿음’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욕망을 비난하고 한때는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위로를 건넨다. 특히 오피스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작가적 통찰이 끌어낸 인물의 형상화가 큰 공감을 준다. 이는 오랜 시간 직장인의 삶을 살았던 저자의 사유와 경험들이 작품 속에 알알이 박힌 때문일 것이다. 소설가 심윤경은 “‘진짜가 나타났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회사생활에 영혼이 묶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토록 정치하게 조망할 수 있는 작가가 탄생했다는 것은 한국 문학의 축복”(추천사)이라고 평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욕망을 꿰뚫어 보는 눈과 그것을 세련된 문장으로 풀어낸 이번 작품집은 신인의 새로움만에 머무르지 않는다. “분명 두 눈으로 문장을 좇아 읽었는데, 매우 중요한 뭔가를 목도한 마음으로 놀라 눈을 뜨는 발견의 경험”(소설가 이만교, 추천사)을 접할 수 있다.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 몰두하느라 충동이 멋진 추동이 되는 순간을 오랫동안 잊은” 모두에게 이번 작품집을 권한다.
흔들리는 것들
오피스
도시는 밤
파라다이스 리조트
방문객
디디를 기다리며
2백만 원어치 마음
무탈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해설 | 워커홀릭의 짧은 휴가 _황현경(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카드명세서를 받고 한숨을 쉬면 월급날이 오고,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고비가 지나면 희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수년을 함께 한 부장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바탕 나를 들볶아대면 한동안은 잠잠할 걸 알기에 안도하는 것처럼, 잠깐 불편하고 오랫동안 편해지는 원리를 터득하면 관계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나는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늘 제자리를 맴돈다.
_「흔들리는 것들」 에서

내 마음은 변화를 갈구하는 만큼 변화에 저항했다. 부장을 참을 수 없어 하면서도 10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늘 자책하면서도 여전히 습관처럼 공과금 연체료를 내며. 하물며 전 남자친구와는 그만 만날 결심을 하면서 몇 년을 더 만나지 않았던가. 어쩌면 변화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_「흔들리는 것들」 에서

내심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부서장으로 승진하지 않을까 그녀의 방이 내 차지가 되지 않을까 한동안 설렜던 사실이 씁쓸했다. 나는 어떻게 그렇게 순진한 기대를 했던 걸까. 하지만 그런 기대 때문에 지난 3개월 동안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일했다는 걸 깨달았다. 변한 건 없었다.
_「오피스」 에서

나를 주시하는 낯선 이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런 경계의 시선은 익숙한 사람들이 타성적으로 범하는 무례보다는 낫기에 개의치 않았다.
- 「도시는 밤」 에서

그런 생각이 들면 내 방을 한 번씩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어. 비닐 커버를 벗기지도 않은 세탁물, 먹다 만 샌드위치, 냉장고 속에 있는 쉬어빠진 김치, 냄새나는 스타킹과 속옷 뭉치, 각종 변비약, 한글로 쓰여서 해독 불가일 일기장, 그리고 거기에 적힌 헛된 희망과 자책까지. 그럼 나는 만성변비에 시달리다 악취나는 김치를 남기고 위아래 짝이 안 맞는 속옷 차림으로 죽어버린 외국인 여자가 되겠지?
- 「도시는 밤」 에서

희수는 월급을 받는다는 건 24시간을 회사에 바친다는 묵계라고 믿었다. 그녀는 근무시간에 딴짓하는 부하 직원을 보면 항상 이렇게 야단을 쳤다. “월급을 받는 한 당신 시간은 당신 게 아니야.” 희수는 그들이 회사가 기대하는 이상으로 헌신해야만 부가가치 높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길 바랐다.
_「파라다이스 리조트」 에서

“왜 열 개가 아니고요?”
“어차피 보스는 열다섯 개를 원할 거고 그럼 결국 열 개 정도로 합의를 보게 되죠.”
아니쉬가 와, 하며 웃었다.
“뭐, 그렇다고 좋아할 건 없어요. 해마다 따야 할 코코넛 수는 점점 더 많아지니까. 새 코코넛나무를 미리 심지 못했든 아니면 찾지 못했든, 어떤 이유도 용납은 안 돼요. 정 안 되면 바나나나 파인애플이라도 따야죠.”
_「파라다이스 리조트」 에서

도시에서는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남자는 이 집에 이사 와서 깨달았다. 세상에는 멀리서 바라보고 위에서 내려다볼 때 비로소 최고조에 달하는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햇볕조차 여기에서는 유난히 투명하고 따뜻했다. 남자에게 이 테라스는 그의 삶이 안락한 지대에 속해 있음을 상기시키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_「방문객」 에서

“난 말이야. 신은 안 믿어. 이런 걸 매일 마시게 해주는 사람을 믿지.”
나는 제프 강이 경도되어 있는 삶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매혹적인 액체에 맛을 들이면, 이게 설령 백만, 천만 개의 눈물방울이 모여 만들어졌다 해도, 맛의 아름다움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내게 바랐던 삶은 이런 순도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음미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_「디디를 기다리며」 에서

“오늘 나보고 하라고 한 게 고깃집 입구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대는 풍선인형 노릇 아니었습니까?”
“입 닥치지 못해?”
“아니 아티스트한테 이렇게 함부로 하셔도 되겠습니까? 존경하는 이사장님께서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겠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정신을 잃고 엎어져버렸다. 미친놈. 이사장한테 찾아가 싹싹 빌고 또 빈 주제에.
_「디디를 기다리며」 에서

이거 5백 달러짜리 캠프인 거 알지? 꼭 피와 살이 되는 경험을 하고 와야 해. 맞다. 나와는 꼭 한국말을 썼던 엄마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이라는 표현도 좋아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나를 위해 쓴 달러가 내 몸속에서 흐물흐물하게 녹아 혈관을 타고 돌다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몸에서 돈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다.
_「2백만 원어치 마음」 에서

세상엔 돈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상했다. 그들의 사연을 읽고 있으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요. 너무 힘들어요.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요. 이번 학기도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됐어요.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아르바이트를 더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내 사연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할 만한 이야기가 못 되었다.
_「2백만 원어치 마음」 에서

좋아 보인다는 그의 말이 여운처럼 귓가에 머문다. 어쩌면 그가 받은 인상은 결백한 것인지도 모른다. 좋아 보이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지 않은가. 남들 눈에 좋아 보이기는 쉽다. 그리고 남들 모르게 가라앉기는 더 쉽다.
_「무탈」 에서

오늘 하루가 지났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오늘이 어제와 비슷했듯이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겠지. 따지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 날들일 뿐이다. 무탈해 보인다고 무탈한 건 아님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보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삶이 무탈하기를 바라는 건 누군가의 순정한 얼굴만을 보길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으면 된 것이다.
_「무탈」 에서

싫은 것들?
말하자면 끝도 없지. 하나도 안 웃긴 사장의 농담에 사람들이 크게 웃는 거,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회사 사람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를 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이메일 쓸 때 상습적으로 숨은 참조 쓰는 인간들, 한국말 잘하면서도 꼭 영어로 말하는 교포들, etc. etc. 어느 땐 그냥 사람 그 자체가 피곤해. 내가 사람이라는 거조차도.
_「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에서

옛날의 너는 이렇게 한심하지 않았어. 너 자신이 더 잘 알잖아. 너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어. 불편해지는 게 두려우니까 안 하는 것뿐이야. 늘 똑같은 고민을 하는 거, 버릇처럼 불평만 하는 거, 지겹지 않아? 맨날 시커먼 정장만 입고 그렇게 살고 싶어?
_「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에서

자리로 돌아오자 사장이 평소처럼 퍼붓지 않은 게 아쉬웠다. 덜 후련했다. 한껏 당하고 나면 죄의 대가를 치른 자에게 찾아오는 편안함, 그 마조히스트적인 쾌감이 없었다. 회사란 마조히스트로 훈련되는 새장이다. 그 새장 속에서는 영혼이 빠져나가 머리가 작아져야만 가볍게 훨훨 날 수 있다.
_「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에서

‘내일’을 위해 바치는 오늘은 기쁨일까 고통일까,
공감 가는 인물들의 공감할 수 있는 ‘헛된 믿음’

10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미소, 소규모의 광고대행사에서 8년간 일을 하다 글로벌 기업에 입사한 세영,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된 후 옛 동료의 부탁으로 시작한 계약직을 3년째 돌고 있는 지수, 지난 2년 동안 휴가를 간 적 없는 마흔둘의 희수. 이들은 모두 기업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오피스’를 배경으로 그들만의 각기 다른 ‘내일’을 위해 “하이힐 속에 발을 집어넣고” “종일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싸우”며 오늘을 사는 직장인이다. “변변한 전리품도 못 챙기고 부상병으로 돌아오는 때가 더 많”은데도 말이다.(「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흔들리는 것들」의 미소는 10년 차 직장인이다. 카드명세서를 받고 한숨을 쉬면 월급날이 오고 고비만 넘기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희미해지는 반복의 시간을 보낸다. 그녀는 들볶는 부장 앞에서 한동안은 잠잠할 걸 알기에 안도한다. 휴가로 계획한 발리행은 “무의미한 무위”다. 미소는 휴가 첫날 아침, 침대에서 5분 간격으로 울리는 알람을 끄며 “환태평양조산대에 위치한 발리의 공항이 지진으로 폐쇄되거나 북한의 도발로 인천공항이 난장판이 될 가능성”을 생각한다. 내일이 오늘과 다를 거라 믿지 않는 미소는 다음으로 유보하는 대신, 다음을 기대하지 않음으로써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을 택한다. “변화를 갈구하는 만큼 변화에 저항”하는 미소에게는 “어쩌면 변화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오피스」의 세영은 “미래의 가능성을 조그만 회사의 초라한 사무실에 한정한다는 건 스스로에게 비겁한 일”이기에 가족처럼 8년을 지냈던 직장을 그만두고 글로벌 기업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세영의 자리는 “영예의 공간”인 피 이사의 개인 오피스 문 앞이다. 세영은 반투명 유리벽 너머에서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 웃음소리로 그 공간을 상상하며 닫힌 문 안으로의 편입을 욕망한다. 피 이사에게 “비굴에 가까운 선의”를 보이면서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은 ‘내일’을 꿈꾼다.
「도시는 밤」의 지수는 이상적인 출근시간을 정확히 8시 55분으로 정하고, 점심 먹자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면 이제는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는 계약직이다. “계약직은 마지막이 제일 힘들어. 마음은 떠났는데 몸은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고 있어야 하는 시간을 견뎌야 하거든”이라는 지수의 무심한 표정은 전 직장에서의 상처 때문이다. 전 직장에서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된 후 평소 다감하고 성실했던 상사는 괴물이 되어갔다. 따르던 그 상사에게 “넌 가장은 아니잖아”를 세번째 들었을 때, 지수는 회사를 나올 결심을 한다. 그후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방임이라는 철칙을 지키며 3년째 계약직을 돌고 있다.
「파라다이스 리조트」에서는 2년째 휴가도 반납하고 회사일에 전념하는 희수의 휴가를 그린다. “어떻게 생겼든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몰디브가 그녀의 휴가지가 된 이유는 “열대 리조트 풀장에서 마티니를 마시며 밀린 책을 읽는 것”이 최고의 휴가라는 신임 사장의 말에 맞장구를 친 탓이다. “기업도 하나의 생태계와 같아서 같은 종끼리 짝짓기를 하는 법”을 아는 희수는 직속 상사와 닮아 보이기 위해 사장이 휴가지에 꼭 가져간다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까지 챙겨들고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인사고과를 앞둔 시기인데 혼자 휴가를 온 자신을 자책하며 하루 반 동안 체크하지 못한 이메일부터 찾는다. 희수는 마흔이 되었을 때부터 초조함에 시달리고 있다. 희수의 삶은 일을 제외하고는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참고 보는 지루한 영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착지는 일-삶, 달리 말해 그저 그들 자신일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삶이라는 것도 결국 먹고살고 먹고사는 ‘일’ 아닌가. 이 인물들의 구체성, 정확히는 이 소설들의 구체성이 기업 세계에 대한 묘사의 독보적 디테일에만 힘입은 것이 아님도 이로써 명백해진다. 삶의 목적 삶의 가치 삶의 이유 삶의 의미, 그런 말들과 함께 자주 추상화되곤 하는 삶이 이렇듯 박이강에게는 ‘일’만큼이나 단단한 구체다. 한마디로, 일은 곧 삶의 현현이다.
-문학평론가 황현경, 「해설」 에서

‘믿음’이 필요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헛된 믿음’
“어쩌면 잘 산다는 건 헛된 믿음을 헛되지 않다고 믿으며 사는 것”

복층구조에 널찍한 테라스와 미니 정원을 가진 서울의 고급 빌라에 사는 부부.(「방문객」) “블랙 앤드 화이트 콘셉트의 모던한 인테리어”에 모든 가구와 소품의 “미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고” 손님을 맞기 전 소더비 경매 도록을 커피테이블 위에 자연스럽게 펼쳐놓을 줄 아는 여자와, 공들여 모은 고가의 고서와 희귀 제본 원서를 거실 천장까지 빼곡히 쌓아두고 값비싼 와인으로 대형 빌트인 와인셀러를 채우는 남자. 이들 부부의 행복은 자신들의 고급스러운 안목이 찬사를 받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방문객은 부부가 제대로 된 삶이라면 응당 갖추어야 한다고 믿는 ‘지성, 세련된 매너, 문화예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책은 시간 낭비고, 신선한 고급 원두로 정성스레 내린 커피보다는 봉지에 담겨 있는 인스턴트커피를 즐기고, 식재료를 차별하지 않는다며 유기농을 믿지 않는다는 방문객을 통해 저자는 이들 부부의 욕망을 보란 듯이 조롱한다.
고급 파티장 빌라 그레이. 「디디를 기다리며」의 장소이다. 사모펀드 알파 인베스트먼트의 창업자로 금융업계의 거물이며 미술계의 큰손이기도 한 ‘디디’의 첫 방한을 기념하기 위한 파티가 열리는 곳이다. 아버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기업의 메커니즘에 격분하여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둔 ‘나’는 예술재단에 입사해 한때 꿈꿨던 미술계 일을 한다. 이사장의 지시로 재단 소속의 행위예술가 이효를 디디에게 보이기 위해 오래전 직장 동기였던 알파 인베스트먼트 한국지사 부사장 제프 강, 강중식을 수소문하고 기회를 얻는다. 강중식은 고가의 샴페인을 들고 “이런 걸 매일 마시게 해주는 사람을 믿는”다는 인물이다. 이효의 돌발 행동에 “돈이 불만인 거야? 그럼 더 줄게”라며 예술을 돈으로 제압하려는 그는 디디의 말을 인용하며 “사모펀드는 자본의 미학을 추구하는 현대예술”이고 자신은 “수익이라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가”라고 당당히 떠든다. 그곳 역시 자본의 논리로 작동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나’는 패자인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야만 한다.
「2백만 원어치 마음」의 혜린과 혜선은 소식을 끊고 산 지 20년 만에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한다. 혜린은 엄마가 보낸 천 달러를 환전한 120만 2900원을 봉투에 담아 조의금으로 전달한다. 130만 원을 채울 수도 있었지만 엄마와 죽은 아빠, 그 두 사람의 “마지막 교류”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혜선은 혜린을 찾아와 5백만 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어쨌든 우린 다시 만났고 넌 이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가족”이라며 스스럼없이 대하는 혜선의 ‘핏줄’에 대한 믿음이 혜린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고 불편하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할 때 이미 다섯 살이었던 아빠의 딸 혜선. 엄마와 아빠는 결혼생활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엄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간 혜린의 ‘가족’은 새아빠와 남동생 폴인 것이다. 5백만 원이 혜선의 남편 재판을 위한 변호사 선임비라는 사실을 알게 된 혜린은 부탁을 무시한다. 혜선의 남편을 돕는다면 정말 혜선과 ‘가족’이 될 것 같다.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탈」에 등장하는 ‘나’는 은행에서 감사일을 하고 있다. 1년 내내 아무리 철저히 감사해도 갖가지 금융사고는 그녀가 숨을 쉬는 동안에도 늘 일어난다. “규칙에 예외를 두면 예외는 반복된다.” 그녀가 삶에서 원하는 것 역시 예외 없는 ‘무탈한 매일’이다. 오늘은 특히나 다음날이 혁과 이혼을 위해 법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예외 없이’ 하루가 소란하다. 퍽치기를 당해 혼수상태인 세탁소 주인, 출근시간인데 위층에 멈춰 서 내려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매장에서 받아온 커피까지 주문한 것이 아니다. “별일 없으면 좋은 거죠” 인사를 나눴던 박 전무의 모친상 소식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믿고 있던 부하 직원 하영이 퇴사를 원한다. “저는 완성형을 찾거나 원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은 있다고 믿어요.” 하영의 “막연한 믿음”이 걱정스러운 ‘나’는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 자신 역시 하영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잘 산다는 건 헛된 믿음을 헛되지 않다고 믿으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는 하영의 말에 ‘나’는 그저 ‘무탈’을 바란다.

낮시간을 견디고 쏟아낸 밤의 언어들
“가보면 알겠지. 추락하게 될지, 하늘로 날아갈지”

마지막 작품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 등장하는 ‘나’는 “하려다 말고, 하고 싶은데 못 하고,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안” 하는,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 몰두하느라 충동이 멋진 추동이 되는 순간을” 잊어버린 인물이다. 그녀가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안 하는 이유는 “회사에 돈값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죽어라 안간힘을 써서 120퍼센트는 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결국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가 된다. 작품 말미에서 ‘나’는 사무실이 있는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층수 버튼 누르는 것을 놓치고 옥상까지 향한다. ‘의지’인지 ‘능력’인지 답을 정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보면 알겠지. 추락하게 될지, 하늘로 날아갈지.”

소설을 쓰는 일로 기업 세계에서의 삶을 견디는 시간을 지나왔다. 퇴근 후에도 글 쓸 여력이 남아 있는 날엔 낮의 허물을 벗듯 옷부터 갈아입고 노트북을 챙겨 집 근처 카페로 갔다. 카페가 문을 닫을 즈음 터벅터벅 집으로 향하는 길이면 삶의 무의미와 열심히 싸우다 돌아가는 기분에 종종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자주 허탈했다. 소설은 지금까지 내가 일해온 세계에서 익숙한 가치들과 정반대 극단에 위치한, 지독히도 비효율적이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세계였다.
_「작가의 말」 에서

이번 작품집은 “회사라는 거대한 맷돌 속에 영혼을 갈아 넣으며”(소설가 심윤경, 추천사) 하이힐 속에 발을 감추고 낮시간을 견뎌낸 저자가 가슴 벅차게 쏟아낸 밤의 언어들이다. “아직은 여유가 없으니까 다음에. 아직은 괜찮으니까 다음에.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다음에”, 저자의 읊조림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 공감의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작가정보

저자(글) 박이강

앤솔러지 『폴더명_울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로 2022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았다. 장편으로 제10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안녕, 끌로이』(근간)가 있다. 2022년 아르코 창작기금을 받았다. 여러 글로벌 기업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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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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