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표류기
2023년 08월 21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7월 1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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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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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족 구성원 중 주방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엄마’, ‘주부’로 불리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주방을 맡는 순간, ‘가족을 위해서’라는 다소 일방적인 의무를 지게 된다. 남편과 아이가 거실에서 하하호호 단란한 시간을 보낼 때 홀로 주방에서 벽을 보고 설거지를 하며, 주방을 표류한다. 심지어 자신의 생일 선물마저도 가족들을 위한 조리 도구를 고른다.
하지만 저자는 더 이상 좋은 것, 싫은 것에 대한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숨기지 않기로 한다. 바닥을 새카맣게 태운 스테인리스 냄비는 버리지 못하면서, 예쁜 그릇을 모으는 ‘그릇 덕후’가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취향으로 채운 주방이 가장 주체적인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
글 쓰고 책 읽는 작업실로, 가족들의 사랑방으로, 이웃과의 소통의 장으로 변화무쌍하게 주방을 사용한다.
이 책은 외딴섬처럼 존재하고 있던 주방을 집 안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주방만을 위한 ‘주방 특화 에세이’다.
Part 1. 너는 어떻게 우리 집에 왔니?
-그녀의 마음 : 네스프레스 시티즈 룽고 잔
-미니멀라이프 최대 장애물 : 사은품 컵과 굿즈 개미지옥
-그들만의 리그 : 컷코
-외로웠다 : 스타우브 베이비웍
-내 이야기 들어보실래요? : 밀폐형 반찬통
-찬란했던 빈곤의 시간 1 : 바닥 3중 스테인리스 냄비
-찬란했던 빈곤의 시간 2 : 해리포터 버터 비어잔
-내 인생 첫 사치품 : 빌레로이앤보흐 디자인 나이프
-편의점 한정판에는 진심인 편 : 빨강머리 앤 접시
-가족의 탄생과 접시 : 로얄코펜하겐 이어 플레이트
-귀하신 몸 : 노리다케 로얄 오차드
-만남의 광장 : 8인용 식탁
Part 2. 설거지는 싫어합니다만
-실크 블라우스보다 커피잔
-오늘도 벽보고 벌서기
-식기 세척기의 배신
-식탁에서 누리는 아침과 밤
-설거지 백배 즐기기
-젊어 게으른 년, 늙어 보약보다 낫다
-주방에서 이탈리아를 꿈꾸는 방법
-설거지와 거리 두기
-크리스마스 고오급 문화
-주방 장비발도 가족의 몫
-뜨거운 안녕을 위한 준비
-쓰레기 임시 보관소
Part 3. 주방에서 너와 나, 우리
-돌아서면 또 컵 하나
-출렁임은 컵 안에서만
-알겠어! 잠시만
-설거지하는 남편의 등
-한정판 DNA
-손에 물 묻히기 싫었던 아이
-티스푼 달궈봤니?
-어서 와! 제빵은 처음이지?
-나도 제일 좋은 걸로
-금쪽이에게 건네는 사과의 커피
-식탁 밑 내 밥친구
-고양이의 사생활
-타인의 주방
-우리 집 심야 식당
에필로그 : 설거지를 마치며
그날 저녁, 베이비웍 뚜껑이 깨지면서 깨달았다. 내가 이고 지고 살고 있는 이 그릇들은 내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나는 외로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외로움을 나만의 방식으로 달래주고 있었다는 것을. 나도 나름대로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었구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웃으며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었구나. -p.48
철마다 해외여행을 가는 것도 아니고 신상 명품 가방이나 귀금속에 대한 갈망도 없다. 그것들에 비하면 내 성공한 삶의 기준은 매우 낮다. 그저 놀이동산에 가서 큰 망설임 없이 밥을 먹고 자잘한 기념품을 사는 데 별 거리낌 없는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이미 충분하다.
얼룩진 바닥 3중 스테인리스 냄비, 별 볼 일 없는 플라스틱 해리포터 버터 비어잔을 마주할 때면 머릿속 기억 저장 서랍 중 한 곳이 스르륵 열린다. 그곳은 도쿄의 ‘지유가오카’이고 ‘키치죠오지’이고 ‘시나가와’이다. 거기에 찬란한 미래를 꿈꾸던 젊은 우리 부부가 서 있다. -p.67
다른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 냄새를 맡으면, 소리를 들으면 관련된 어떤 일이 영화처럼 떠오른다고 하지만 나는 그릇을 볼 때 그렇다. 나에게 그릇은 머리를 한 대 맞으면 특정 시간으로 순간 이동되는 뿅망치다. 짝이 맞지 않지만, 여전히 나는 그 그릇들을 제일선에 두고 하루에 한 번 이상 쓰고 있다. 억척스럽게 지켜낸 노리다케 접시에는 나만 가지고 있는 서사가 있다. 내가 발붙이고 살 터전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때 그 이야기. -p.99
“엄마, 엄마, 엄마.”
그놈의 ‘엄마’ 소리는 끝이 없다. 제발 엄마 좀 그만 불러 주라. 아이들은 항상! 언제나! 늘! 한창 손에 비눗물을 묻히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엄마!” 하며 애타게 부르거나 옷을 잡아
당기며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럴 때면 ‘아, 이거 하나만 씻으면 되는데, 조금만 더 씻으면 되는데.’라는 생각에 즉각적으로 손을 놓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니,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이럴 때 엄마가 등을 돌리고 설거지하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엄마의 얼굴을 보여주며 설거지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굳이 하던 일을 멈추지 않고도 아이의 눈을 보며 아이가 원하는 것을 귀담아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괜히 개수대 위치에 핑계를 대본다. -p.120
아침에는 나의 하루를 열게 하고 밤에는 나의 곤비함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것은 식탁이다. 보잘것없이 작은 공간이 주는 위로는 그 어떤 물질적인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다. 값비싼 그릇과 화려한 음식들로 덮인 식탁보다 깨끗이 텅 비어 있는 식탁이 건네오는 유혹은 뿌리칠 수 없이 치명적이다. 당장 책을 펼치고 노트북을 열고 싶어진다. 오늘도 다른 곳은 제쳐두고 식탁만은 열심히 치우고 닦는다. 내일의 위로와 평안을 위해. p.135
저녁에 아이가 샤워를 하고 나와 세탁실로 옷을 가져다 놓는 것을 식탁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눈길이 발뒤꿈치에 닿았다. 발뒤꿈치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맨들맨들, 보들보들해 보인다. 아직 발뒤꿈치가 굳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땅을 많이 딛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말일 테다. 샤워하고 나온 딸아이의 발뒤꿈치를 보고 불현듯 깨달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발뒤꿈치가 굳고 각질도 생기고 심지어 갈라지기도 한다. 아직 어린데, 뭘 몰라서 그런 건데, 내 굳어진 발뒤꿈치의 세월만큼의 지혜와 상식을 한꺼번에 요구했던 것을. -p.212
늘 최신 기기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핸드폰을 고를 때도 통화되고 인터넷만 되면 오케이, 요금제도 기본이면 됐다(하지만 늘 무슨 무슨 약정이라는 것 때문에 무제한으로 계약해야 했다). 각종 최신 기기들에는 원래도 관심 없었지만, 굳이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고 높은 사양의 전자기기는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여러 기능을 갖춘 최신 기종을 나도 욕심내어 보련다. 얘야, 어머니는 짜장면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단다. -p.250
우리, 주방 ‘살림’에 강박을 갖지 말아요.
글에는 ‘낯섦’과 ‘익숙함’의 절묘한 배합이 필요하다. 이 둘의 황금 비율을 찾아냈을 때, ‘글 맛집’이라고 불릴 수 있을 거다. 『주방 표류기』가 그렇다. 그야말로 글 맛집이다. ‘주방’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끌어와 신선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뿜어낸다.
어릴 때부터 주방에서 일하는 이의 모습을 보아온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고됨’과 ‘찌듦’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관습적으로 당연히 주방에 있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던 이들이 그곳을 잠시 버려두고 직장으로 나갔을 때의 죄책감도 보아왔을 것이다. ‘주방’이라는 공간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의 엄마, 할머니의 삶을 접하며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는 여성들에게 ‘주방’은 희생과 헌신의 공간이자, 끊임없는 노동의 공간이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나’는 없어지고 오로지 ‘가족’만 남게 된다. 그래서 저자도 자신의 생일 선물로 가족들을 위해 ‘인스턴스 팟’이라는 조리 도구를 샀다. 매우 익숙한 희생이다. 그러면서도 다음 생일부터는 꼭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고르겠다고 다짐한다. 매우 낯선 ‘바람’이다.
『주방 표류기』는 그래서 익숙하지만 낯설고, 낯설지만 익숙하다.
저자는 사회가 부여해 온 주부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도 조금씩 삐딱선(?)을 탄다. 그 삐딱한 시선이 때로는 장난스럽게, 때로는 진중하게, 때로는 사랑스럽게 드러나며 독특하고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시원한 혼잣말로 아줌마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고, 예쁜 그릇을 모으며 소녀들의 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밤을 삶다가 스테인리스 냄비를 태워 먹으며 지나간 젊은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설거지를 하다가 엄마의, 할머니의 삶을 위로하기도 한다.
‘주방’이라는 공간에서 생겨난 이야기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솔직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은 명랑하고 유쾌하다. 낯섦과 익숙함을 잘 섞어 ‘주방’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와 재미’를 선사하는 글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음에 즐거웠다.
편집 기간 중에 원고를 읽고 나면, 주방에 가서 싱크대를 괜히 한 번 쓱 닦아보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러면 문득, ‘주방’이라는 ‘섬’에서 표류하면서도 예쁜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한 손에는 책을 펼쳐 든 채 발을 까딱이는 저자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빙긋 웃음이 났다. 저자가 표류하는 섬으로 되돌아가 황금 비율로 섞인 이야기와 문장들을 다시 음미하고 싶어졌다.
때로는 혼자만의 작업실로 때로는 커뮤니케이션 허브로
주방의 하이브리드 활용법
주방의 주된 기능은 주로 ‘먹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주방은 점점 그 기능과 모습이 융합되고 있다. 저자의 주방도 작업실, 가족들의 정상회담실, 이웃과의 다과실, 심야 식당 등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속에서 저자는 주부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을 더욱 견고하게 다져나가고자 한다. ‘주방’이라는 외딴섬에 갇혀 마냥 순응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신만의 재미와 즐거움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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