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과 분노 8월의 빛
2023년 09월 05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6월 1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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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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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문학 대표 걸작 《음향과 분노》
“한 권의 소설이 독자의 인생을 바꾼다”는 거창하면서도 시대착오적인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한다면 《음향과 분노》야말로 그 한 권의 책으로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다.
20세기 미국문학의 상징 포크너의 대표작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손꼽히는 걸작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연구와 토론을 불러일으키며 영원히 남을 명작 고전으로서 사랑받고 있다.
《음향과 분노》는 포크너 작품에 등장하는 가공의 땅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남부 귀족 콤프슨가(家)의 몰락을 묘사했다. 삼형제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제1~3부에, 흑인 유모 딜시를 중심으로 한 제4부가 덧붙여졌다. 콤프슨 일가의 캐디와 그녀의 딸, 두 모녀의 타락한 삶을 축으로 세 오빠의 굴곡진 인생, 시대의 흐름에 떠밀린 남부 명문가의 몰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남부 명문집안의 몰락, 시대의 잔혹사
포크너는 평생 《음향과 분노》를 쓴 것은 자기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이 작품에 무엇보다 큰 애착을 보였다. 그 애착의 중심에는 캐디라는 인물이 있다.
포크너는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기 위해,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비극의 소녀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캐디는 포크너가 사랑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고독한 예술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줄거리는 포크너가 가장 애정을 가진 인물 캐디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뜻하지 않은 임신, 출산, 이혼 그리고 방랑이라는 사건의 연속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의 화자이기도 한 세 형제들은 계속 변화하는 그녀에 대한 저마다의 애증에 마구 휘둘리는데, 그 양상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기발한 구성과 방식은 사회에 거부당하는 여성, 즉 현실에서 외톨이가 된 인간존재 그 자체를 부각시킨다. 또한 캐디의 불행한 변화가, 한때는 남부 상류계급의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콤프슨 집안의 몰락과 어딘가에서 겹쳐지거나, 또는 어딘가에서 서로의 몰락을 부추긴다는 식의 사회적인 파장도 작품에는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것과 형제라는 것의 숙명을 묘사한 비극, 또 그 숙명이 동시에 미국 남부지방의 숙명과도 호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포크너의 다른 작품에서 그려진 요크나파토파 지방의 이야기, 더 나아가 남부지방의 이야기가 역사, 비극을 향하여 이중구조처럼 이어져 나간다.
포크너 ‘살아 있는 상상력’의 뛰어난 증거
〈부록-콤프슨 일족〉은 《음향과 분노》가 발표되고 나서 15년 뒤에 쓰였다. 재판 출간 때 이 부록을 머리말로 쓸 것을 제안하고 작품을 부분적으로 고쳐 썼다.
부록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도 역시 캐디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그녀의 삶을 추적해 본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녀의 영상이 얼마나 오랫동안 포크너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포크너의 입장에서 등장인물은 소설 바깥에서도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만 처음 작품이 쓰인 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부록이 쓰여서,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 표현에 원작과 어긋나는 부분이 몇몇 있다. 따라서 이 부록은 작품을 이해하는 완벽한 모범답안은 아니다. 그러나 부록 자체는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포크너 상상력의 특질 및 특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요컨대 작품과 부록의 모순이야말로 포크너의 ‘살아 있는 상상력’이 남긴 증거인 셈이다.
《8월의 빛》
버려진 인간, 그 삶의 의미
《8월의 빛》은 《음향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과 더불어 포크너 장편소설 3대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포크너가 만들어낸 요크나파토파 제퍼슨시를 무대로, 금주법이 아직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 어느 주 금요일에 시작되어 약 11일간 진행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몸에 흑인의 피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애매한 입장 때문에 흑인과 백인 사회 어느 쪽에도 몸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조 크리스마스의 비극적인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어둠의 상징’이라 할 만한 인물에 대비하여, 자기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여행을 떠난 ‘자연의 여신’ 같은 리나 그로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거기에 남북전쟁으로 말미암아 비틀린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목사 하이타워 등의 이야기를 대조적으로 배치하여 소외된 인간의 운명과 그 구제의 주제를 깊이 추구하고 있다.
고독과 비극의 성찰
《8월의 빛》의 주인공 조 크리스마스는 작품의 배경이 된 미국 남부사회를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포크너가 창조한, 아니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고독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흑인과 백인 어느 쪽에도 몸을 담지 못하는 조 크리스마스라는 한 사나이의 비극적인 삶은 미국사회의 영원한 숙제인 흑백 인종갈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꾀한다. 이기적 폐쇄성, 개인의 고립, 맹목적인 파국 등 인간의 어두운 면이 지닌 폐해를 냉혹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로 그려낸다. 또한 밝은 성품의 낙천적인 시골처녀 리나 그로브와 그녀가 낳은 아기를 통해 어둠을 이기는 빛, 삶의 긍정, 앞날을 비추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11일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뿐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면서 여러 상황의 발단이 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옛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누군가에게 듣는 형식, 직접 자기 과거를 밝히는 형식, 스스로 회상하는 형식 등등 그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곳곳에서 현재의 사건 속에 과거의 사건을 엮어 넣으면서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한 순간도 지루함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며, 평온한 삶을 살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사정과 그렇게 된 까닭을 알 수 있게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감정을 몰입하게 한다.
삶을 비추는 새로운 희망
이 작품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차례차례 나온다. 이를테면 조용한 마을을 뒤흔든 크나큰 사건이 있던 날 밤 크리스마스가 숲 속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잡지를 읽는 장면, 목사 하이타워가 창가에 앉자 창 밖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반복적인 장면, 버든 양이 일가의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장면, 고아원에서 크리스마스를 잘 돌봐주던 앨리스가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 하이타워의 회상 장면, 마지막 장에서 가구상이 잠자리에 누워 아내에게 들려주는 왠지 우습고도 조금 선정적인 장면 등등. 작가의 필력과 더불어 이런 장면들이 작품 전체의 효과를 높이는 데 참으로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다.
포크너는 문체에도 주의를 기울여, 그가 다루는 인물이나 제재에 따라 문체를 일일이 바꾸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예를 들어 리나 그로브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읽기 쉬운 구어체를 쓰고 있으며 어조도 가볍다. 반면 하이타워가 등장하는 다소 무거운 장면에서는 복잡한 수사법을 쓰고 있다. 특히 제20장 회상장면에서는 지금까지의 자기 삶을 재검토하는 하이타워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매우 복잡한 문체가 쓰이고 있다.
《8월의 빛》은 요약하자면 이러한 작품이며, 소설의 재미 면에서는 숱한 포크너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1928년 4월 7일…17
1910년 6월 2일…88
1928년 4월 6일…192
1928년 4월 8일…275
부록-콤프슨 일족…328
8월의 빛
8월의 빛…351
포크너의 사상과 작품세계
포크너의 사상과 작품세계…793
포크너 연보…809
p.102
모든 인간의 체험은 결국 무의미, 그리고 6파운드짜리 다리미 두 개는 재단사용 다리미 한 개보다 더 무겁다. 그게 무슨 죄악스러운 쓸데없는 사용법이냐고 딜지가 말하겠지. 할머니가 죽었을 때 벤지는 그 죽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울었다. 얘는 코로 맡아서 알아챈단 말이야. 얘는 코로 맡아서 알아챈단 말이야.
예인선은 하류로 돌아 내려왔고, 수면이 갈라져 물결은 긴 실린더가 굴러가는 모양새로 퍼지고, 그 반향이 부교에 부딪히고 흔들리며, 부교는 굴러가는 실린더에 맞춰서 마치 문짝이 닫히는 것 같은 소리와 끼익 하는 소음을 내며 파도를 탔다.
p.125
마침내 굴뚝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길은 돌담을 끼고 뻗어 갔다. 나무들이 햇빛을 얼룩덜룩 받으면서 담 위로 늘어져 있었다. 담장의 돌은 차가웠다. 그 옆을 걸으니 냉기가 느껴졌다. 다만 우리 고향 남부는 이 고장하곤 달랐다. 그곳은 단지 걸어가기만 해도 무엇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영원한 공복조차 채워 주는 고요하면서도 맹렬한 풍성함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주위에 넘쳐흐르는 것이지, 한낱 돌 하나하나까지 품어서 먹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고장에선 풍성함도 임시변통과 같아서 겨우 초록빛이 나무들 사이에 번지도록 해놨을 뿐으로, 저 멀리 보이는 푸른색에도 그 환상적인 풍부함은 없었다.
p.126
이곳 뉴잉글랜드 공기 속에서는 소리마저 약해지는 모양이다. 소리를 멀리 운반하는 동안 공기가 지쳐 버리기라도 하는 듯싶었다. 개 짖는 소리는 기차 소리보다도 멀리까지 들린다. 특히 어둠 속에서는.
p.204
그때에 10시 종이 울렸다. 나는 전신국으로 갔다. 그들이 말한 바와 같이 시세가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나는 모퉁이로 가서 전보를 확인하려고 다시 꺼냈다. 내가 전보를 쳐다보는 동안에 또 속보가 들어왔다. 2포인트가 올랐다는 것이다. 모두 사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는 얘기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모두 늦기 전에 이 열차에 올라타란 거지. 마치 그 수밖엔 없다는 듯이. 사들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금지된 법률 따위라도 있다는 듯이. 그렇지, 동부의 유대인들도 살아야겠지. 그러나저러나 참 어이없는 일도 다 있지. 신이 정해 준 나라에선 제대로 살지 못하는 외국인 놈들이, 줄줄이 이 나라로 와서 미국인 주머니에서 돈을 마음껏 긁어내고 앉았으니.
p. 275
이제는 예스럽다 못해 한물간 색깔의 옷은 그녀의 마른 어깨에 걸쳐진 채 척 늘어진 가슴께에서는 헐렁하게 흘러내리다가 뚱뚱한 배 위쪽에서 팽팽해지더니 다시 축 늘어져 있다. 그러고는 봄이 무르익어 날씨가 따뜻해지는 대로 한 장 한 장 벗어 버릴 겹겹의 속바지 언저리에선 불쑥 또 부풀어져 있었다. 녀는 한때는 몸집이 컸으나 이제는 뼈다귀만 앙상하게 솟았을 뿐이고, 속이 텅 빈 살가죽이 마치 부르튼 가죽처럼 엉성하게 뚱뚱한 배를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근육과 조직이 마치 용기와 인내와도 같아서 날이 가고 해가 바뀜에 따라 소모되어 다 사라지고 마침내는 단지 불굴의 골격만이 남아, 졸고 있는 듯 무감각한 내장 위에 폐허와 기념비처럼 솟은 모양새였다. 그리고 그런 몸뚱이 위엔 뼈다귀 자체가 살 밖으로 비어져 나온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망가진 얼굴이, 숙명적이기도 하면서 갑작스러운 실망에 놀란 어린애 같기도 한 표정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하루를 향해 들려 있었다.
pp. 314~5
그는 자기의 운명과 의지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힘이, 돌이킬 수 없는 만남의 교차점을 향하여 급격하게 접근하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p. 315
그는 파멸의 냄새를 코로 맡아 알 수 있었고, 그 냄새가 지끈지끈 쑤시는 머릿속에까지 진동하는 듯했다.
p.317
그는 아무런 충격도 느끼지 않고 상대의 도끼를 움켜쥐었는데 자기가 지금 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생각하면서, 이제 곧 죽음이 닥쳐오리라 믿었다. 그때 무엇인가가 자기 뒤통수에 닿아 퍽 하는 소리가 났으므로 그는 어떻게 상대가 그런 데를 쳤을까 생각했다. 아니, 그는 나를 오래전에 갈겼지만, 나는 그것을 이제 느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끝나라고 생각했다. 빨리 끝나라. 이런 건 얼른 끝나 버려야 해. 그러나 다음 순간 죽지 않겠다는 불타는 욕망이 그를 엄습했다.
p.323
딜지는 벤을 침대로 데려가서 앉히고는 그를 끌어안아 좌우로 천천히 몸을 흔들어 어르면서, 치맛자락 끝으로 입가의 침을 훔쳐 주었다. “자, 그만.” 그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쳐. 딜지가 네 곁에 있잖아.” 그러나 그는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느릿하게 비탄에 찬 소리를 우렁우렁 내질렀다. 그 소리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 나지 않는 불행을 나타내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음성이었다.
pp.326~7
한순간 벤은 멍하니 정신 빠진 사람같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곧 울음을 터뜨렸다. 울고 또 울고, 그의 목소리는 점점 올라갔으며, 거의 숨 쉴 틈도 없었다. 그 울음 속엔 놀라움 이상의 무엇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공포요, 충격이요, 맹목적이며 말 못할 고뇌요, 음성이라기보단 차라리 그저 음향이었다.
〈8월의 빛〉
p. 407
이것으로 추문은 완성되었다. 사람들 상상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추어졌다. 바이런은 이런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면서 사람들은 어디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다만 작은 동네에서는 비밀을 보장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도시에 비해서 악을 이루기가 어려우니만큼,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악을 만들어 다른 사람 속에다 집어넣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악을 조작한다는 것은 아주 간단했기 때문이다. 즉 그런 생각, 말 한마디가 바람에 날리듯이 이 사람 마음에서 저 사람 마음으로 옮겨 가기만 하면 된다.
p. 410
그러나 바이런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 사람들은 이 면목을 잃어버린 목사에 대해서 확신도 없이 이러쿵저러쿵하는 버릇이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버릇이 너무 오래 이어졌기 때문에 이제 와서 고칠 수가 없는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생각한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지 버릇이 돼 버리면 그것은 어느새 진실과 사실로부터는 아주 멀어지고 마는 법이니까.’
p. 411
‘그렇지만 난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알겠어.’ 바이런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란 현재 부딪치고 있는 괴로움이나 쓰라림보다도 앞으로 올지도 모르는 고뇌를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다른 것으로 바꾸느라고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이미 익숙한 괴로움에 달라붙는 것이지. 그렇고말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고 흔히들 말해. 그래도 인간에게 정말로 큰 타격을 주는 것은 죽은 자들이야. 죽은 자들은 한군데 조용히 누워서 인간을 사로잡으려고 하지도 않지. 그런데도 인간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단 말이야.’
p.420
능란한 거짓말쟁이가 남을 속인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능란하고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는 자기만 속일 때가 많다. 오히려 일생 동안 진실밖에 말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사람일수록, 그 거짓말은 재빨리 신용을 받을 수가 있다.
p.436
크리스마스는 담배에 불을 댕기고는 성냥개비를 열린 문으로 튕겨 버리며, 그 빛이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꺼진 성냥개비가 바닥에 떨어질 때 내는 가볍고도 조그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정말 그 소리를 들은 것처럼 느꼈다. 이어서 캄캄한 방 안 침대에 앉아 있는 그에게, 마찬가지로 조그만 소리들이 무수히 들리는 것 같았다-온갖 목소리, 중얼거림, 속삭임, 나무와 어둠과 대지의 소리,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음성, 그 밖에 이름과 시간과 장소를 불러 대는 온갖 목소리-그것들은 그가 살아오는 동안 알지도 못하는 새에 의식해 온 것으로, 말하자면 그의 삶 자체이다.
p. 567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기억해 둬라. 네 할아버지와 오빠가 총에 맞아 여기 누워 있다. 그것은 한 백인이 쏜 총이 아니었다. 그건 네 할아버지나 오빠나 나나 너를 미처 생각하시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한 인종 전체에 내리신 저주에 의해서 쏘아진 총이었어. 그 인종은 언제나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백인종의 운명과 저주의 일부가 되는 운명을 지니고 저주를 받은 인종이야. 그걸 잘 기억해. 백인종의 그 운명과 그 저주를 말이다. 영원히 끊임없이. 내 운명이기도 하다. 네 어머니의 운명이기도 하고. 아직 어린애지만 네게도 마찬가지야. 이미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백인의 자녀에게는 이 저주가 붙어 다녀. 아무도 거기서부터 도망칠 수가 없다.’
p.574
이 국면의 마지막은 맨 처음 국면처럼 뚜렷하지도 않았고 극적인 면도 없었다. 그것은 셋째 국면으로 너무 서서히 옮겨 갔기 때문에 그는 어디서 옛것이 멎고 어디서 새것이 시작되었는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가을철로 접어들기 시작한 늦여름에 이미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빛의 그림자처럼 차갑고도 무자비한 가을의 정취가 여름 위에 벌써부터 떠돌고, 쇠잔한 여름이 꺼져 가는 석탄처럼 가을 속에서 다시금 불붙어 오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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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음향과 분노》
현대미국문학 대표걸작 《음향과 분노》</b>
“한 권의 소설이 독자의 인생을 바꾼다”는, 거창하면서도 시대착오적인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난다고 한다면 《음향과 분노》야말로 그 한 권의 책으로 주저 없이 꼽을 수 있다.
20세기 미국문학의 상징 포크너의 대표작으로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손꼽히는 걸작이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연구와 토론을 불러일으키며 영원히 남을 명작 고전으로서 사랑받고 있다.
《음향과 분노》는 포크너 작품에 등장하는 가공의 땅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남부 귀족 콤프슨가(家)의 몰락을 묘사하였다. 3형제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제1~3부에, 흑인 유모 딜시를 중심으로 한 제4부가 덧붙여졌다. 콤프슨 일가의 캐디와 그녀의 딸, 두 모녀의 타락한 삶을 축으로 세 오빠의 굴곡진 인생, 시대의 흐름에 떠밀린 남부 명문가의 몰락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b>남부 명문집안의 몰락, 시대의 잔혹사</b>
포크너는 평생 《음향과 분노》를 쓴 것은 자기에게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이 작품에 무엇보다 큰 애착을 보였다. 그 애착의 중심에는 캐디라는 인물이 있다.
포크너는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기 위해, 나를 위해서 아름다운 비극의 소녀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캐디는 포크너가 사랑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고독한 예술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줄거리는 포크너가 가장 애정을 가진 인물 캐디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뜻하지 않은 임신, 출산, 이혼 그리고 방랑이라는 사건의 연속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의 화자이기도 한 세 형제들은 계속 변화하는 그녀에 대한 저마다의 애증에 마구 휘둘리는데, 그 양상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기발한 구성과 방식은 사회에 거부당하는 여성, 즉 현실에서 외톨이가 된 인간존재 그 자체를 부각시킨다. 또한 캐디의 불행한 변화가, 한때는 남부 상류계급의 손꼽히는 명문가였던 콤프슨 집안의 몰락과 어딘가에서 겹쳐지거나, 또는 어딘가에서 서로의 몰락을 부추긴다는 식의 사회적인 파장도 작품에는 존재한다. 가족이라는 것과 형제라는 것의 숙명을 묘사한 비극, 또 그 숙명이 동시에 미국 남부지방의 숙명과도 호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포크너의 다른 작품에서 그려진 요크나파토파 지방의 이야기, 더 나아가 남부지방의 이야기가 역사, 비극을 향하여 이중구조처럼 이어져 나간다.
<b>포크너 ‘살아 있는 상상력’의 뛰어난 증거</b>
〈부록-콤프슨 일족〉은 《음향과 분노》가 발표되고 나서 15년 뒤에 쓰였다. 재판 출간 때 이 부록을 머리말로 쓸 것을 제안하고 작품을 부분적으로 고쳐 썼다.
부록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도 역시 캐디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그녀의 삶을 추적해 본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녀의 영상이 얼마나 오랫동안 포크너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포크너의 입장에서 등장인물은 소설 바깥에서도 언제나 계속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만 처음 작품이 쓰인 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부록이 쓰여서,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성격 표현에 원작과 어긋나는 부분이 몇몇 있다. 따라서 이 부록은 작품을 이해하는 완벽한 모범답안은 아니다. 그러나 부록 자체는 재미있기도 하거니와, 포크너 상상력의 특질 및 특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요컨대 작품과 부록의 모순이야말로 포크너의 ‘살아 있는 상상력’이 남긴 증거인 셈이다.
<b>《8월의 빛》
버려진 인간, 그 삶의 의미</b>
《8월의 빛》은 《음향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과 더불어 포크너 장편소설 3대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포크너가 만들어낸 요크나파토파 제퍼슨시를 무대로, 금주법이 아직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 어느 주 금요일에 시작되어 약 11일간 진행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자신의 몸에 흑인의 피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는 애매한 입장 때문에 흑인과 백인 사회 어느 쪽에도 몸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조 크리스마스의 비극적인 삶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어둠의 상징’이라 할 만한 인물에 대비하여, 자기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여행을 떠난 ‘자연의 여신’ 같은 리나 그로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거기에 남북전쟁으로 말미암아 비틀린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목사 하이타워 등의 이야기를 대조적으로 배치하여 소외된 인간의 운명과 그 구제의 주제를 깊이 추구하고 있다.
<b>고독과 비극의 성찰</b>
《8월의 빛》의 주인공 조 크리스마스는 작품의 배경이 된 미국 남부사회를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포크너가 창조한, 아니 문학작품에 나타난 가장 고독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다.
흑인과 백인 어느 쪽에도 몸을 담지 못하는 조 크리스마스라는 한 사나이의 비극적인 삶은 미국사회의 영원한 숙제인 흑백 인종갈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꾀한다. 이기적 폐쇄성, 개인의 고립, 맹목적인 파국 등 인간의 어두운 면이 지닌 폐해를 냉혹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로 그려낸다. 또한 밝은 성품의 낙천적인 시골처녀 리나 그로브와 그녀가 낳은 아기를 통해 어둠을 이기는 빛, 삶의 긍정, 앞날을 비추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11일간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뿐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면서 여러 상황의 발단이 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옛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진다. 누군가에게 듣는 형식, 직접 자기 과거를 밝히는 형식, 스스로 회상하는 형식 등등 그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곳곳에서 현재의 사건 속에 과거의 사건을 엮어 넣으면서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야기 전개는 한 순간도 지루함 없이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며, 평온한 삶을 살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사정과 그렇게 된 까닭을 알 수 있게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감정을 몰입하게 한다.
<b>삶을 비추는 새로운 희망</b>
이 작품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차례차례 나온다. 이를테면 조용한 마을을 뒤흔든 크나큰 사건이 있던 날 밤 크리스마스가 숲 속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잡지를 읽는 장면, 목사 하이타워가 창가에 앉자 창 밖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반복적인 장면, 버든 양이 일가의 과거사를 이야기하는 장면, 고아원에서 크리스마스를 잘 돌봐주던 앨리스가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 하이타워의 회상 장면, 마지막 장에서 가구상이 잠자리에 누워 아내에게 들려주는 왠지 우습고도 조금 선정적인 장면 등등. 작가의 필력과 더불어 이런 장면들이 작품 전체의 효과를 높이는 데 참으로 크나큰 공헌을 하고 있다.
포크너는 문체에도 주의를 기울여, 그가 다루는 인물이나 제재에 따라 문체를 일일이 바꾸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예를 들어 리나 그로브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읽기 쉬운 구어체를 쓰고 있으며 어조도 가볍다. 반면 하이타워가 등장하는 다소 무거운 장면에서는 복잡한 수사법을 쓰고 있다. 특히 제20장 회상장면에서는 지금까지의 자기 삶을 재검토하는 하이타워의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매우 복잡한 문체가 쓰이고 있다.
《8월의 빛》은 요약하자면 이러한 작품이며, 소설의 재미 면에서는 숱한 포크너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작가정보
번역 오정환
미국 인디애나대학 수학. 동아일보 외신부장ㆍ동화통신 편집국장ㆍ미국문학번역학회 총무 역임. 옮긴책 서로이언 《인간희극》 포크너 《압살롬 압살롬》 마크 트웨인《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 헨리밀러 《북회귀선·남회귀선》 카슨 매컬러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ㆍ슬픈 카페의 노래》 등이 있다. 미국문학 명번역가로 정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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