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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칭 더 보이드

조 심슨 지음 | 김동수 옮김
리리

2023년 07월 07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6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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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9.95MB)
ISBN 9791191037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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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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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고 2004년에 개정판 《난, 꼭 살아 돌아간다》가 출간된 지 20여 년 만에, 원작의 묵직한 감동을 섬세하게 살린 《터칭 더 보이드》가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돌아왔다.

1985년 남미 페루의 시울라 그란데에 올랐다가 끔찍한 상황에 직면한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전문작가가 아닌 이야기의 당사자 조 심슨이 서술의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탁월한 심리 묘사와 생생한 현장감이 돋보인다. 더불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벼랑 끝에 매달린 친구의 로프를 잘라야 했던 사이먼 예이츠의 서술이 교차되면서,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고뇌가 절절하게 울려 퍼진다.

《터칭 더 보이드》는 2020년 영국에서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졌고, 2022년에는 국내에서 연극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숭고한 의지력과 운명의 아이러니를 무심하고 무자비한 대자연을 배경으로 보여주는 원작의 스토리는, 이처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변주되며 우리에게 어디에든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추천의 글 - 크리스 보닝턴
1. 호수 아래 베이스캠프
2. 유혹하는 운명
3. 정상의 폭풍설
4. 위기
5. 재앙
6. 최후의 선택
7. 얼음 속의 그림자
8. 무언의 목격자
9. 황금빛 구멍
10. 마인드 게임
11. 잔인한 땅
12. 촉박한 시간
13. 한밤중에 흘린 눈물
후기
그로부터 10년 후
에필로그 - 끔찍한 기억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p.24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이먼의 느긋한 성격이 부러웠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을 끌고 가는 능력이 있는 그는 걱정과 의심 없이 상황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기보단 웃는 일이 더 많았고, 다른 사람의 불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불행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생의 장점은 거의 다 가진 반면 단점은 별로 없는 편한 친구였다. 진실해서 의지할 수 있었고 인생을 농담처럼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그는 숱이 많은 금발머리와 미소가 담긴 푸른 눈에, 소수의 몇 사람만 특별하게 만드는 약간의 광기도 있었다. 그와 단둘이서만 이곳에 오게 되어 기뻤다. 그토록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사이먼은 내가 아닌 모든 것, 내가 되고 싶은 모든 것이었다.

p.26
두어 시간 만에 경사진 모레인을 올라섰다. 그리고 부서진 바위지대 위에 있는 안부로 방향을 틀었다. 캠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곧 우리가 있는 곳에 고요가 엄습했다. 난생처음 사람과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이곳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고요했다. 나는 완전한 자유의 감정을 느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러자 갑자기 하루의 일상이 온전히 바뀌었다. 무기력 대신 활력이 넘치는 자립심으로.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끼어드는 사람도 구조하러 오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p.64-65
왼발이 미끄러지며 크램폰의 발톱이 바위를 날카롭게 긁었다. 절묘한 균형을 요구하는 이런 종류의 등반이 싫었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도로 내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두 개의 작은 바위 턱에서 균형을 잡고 있을 때 앞 발톱이 미끄러지려 하자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이먼에게 소리쳤다. 내 목소리엔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사이먼에게 그것을 들키다니 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다시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쉬운 곳에 도달하려면 몇 번의 동작이 더 필요했다. 이토록 아찔한 곳이 아니라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갈 수도 있는 곳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어봐도 두려움은 좀체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p.74-75
정상에서 우리는 의례적인 사진을 몇 장 찍고 초콜릿을 먹었다. 희열 같은 것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악순환이었다. 하나의 꿈을 이루면 잠시 조용히 지내다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꿈을 갈구하게 된다. 약간 더 어렵고 더 야심적인, 그러니까 더 위험한 목표를. 그런 꿈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이상한 방식으로 게임의 본성이 나를 조종하는 것처럼, 논리에 이끌리면서도 결국은 무서운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정상에 오른 이 순간, 폭풍설 뒤의 갑작스러운 이 고요는 늘 불안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이러다간 자제력을 잃어 걷잡을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정말 순수한 기쁨을 위해 산을 오르는 걸까, 아니면 이기주의 때문일까? 정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산으로 돌아오고 싶어 한 걸까? 그러나 이런 순간만큼은 좋았다. 감정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니까. 그럼 다음에는, 건전한 상식이 아니라 병적일 정도로 비관적인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p.91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는지, 설벽으로 첫 번째 추락할 때 둘 중 하나는 살아 있었다. 아무튼 추락은 멈춘 상태였다. 아마 튀어나온 바위 따위에 로프가 걸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숨을 건진 게 아니었다. 그것은 추락한 당사자들이나 공포에 질려 위에서 바라보던 목격자 모두에게 잔인한 반전이었다. 둘 중 하나에게 안전한 확보지점을 찾을 수 있는 5분 정도의 짧은 유예가 허락되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심하게 다쳐서 그럴 힘이 없었다. 어쩌면 다시 미끄러졌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걸렸던 로프가 다시 벗겨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졌건 결과는 잔인한 최후였다.

p.92-93
나는 스토브에 불을 붙여 옆으로 밀어놓고 설동의 구멍을 통해 바깥을 내다봤다. 실수로 낸 동그란 구멍으로 예루파하의 동벽이 완벽하게 보였다. 이른 아침의 태양이 그림자를 만들며 능선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동벽의 홈통 끝 아래로 푸른 그늘이 한들한들 춤추고 있었다. 나흘 만에 처음으로, 나를 사로잡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전날 밤의 불안했던 투쟁은 잊어버렸고, 우리가 죽음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 실감했던 기억도 희미해졌다. 나는 지금의 이곳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나 자신을 축하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설동 안은 비좁아 갑갑했으나 전날 밤보다는 훨씬 따뜻했다. 사이먼은 몸을 내 쪽으로 붙인 채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엉덩이와 어깨가 내 몸 한쪽을 누르고 있어서 침낭 속으로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산을 그토록 오래 함께 다녔어도 이제야 갑자기 친밀한 느낌이 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나는 동그란 구멍으로 동벽을 보면서 혼자 웃었다.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p.104-105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임상적으로 관찰하고 있는 듯 내가 다리와 분리된 것 같았다. 무릎을 조금 구부려보다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숨을 헉헉 들이마시며 포기하고 말았다. 움직일 때마다 뼈가 으드득 으드득 서로 갈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엇갈렸다. 그러나 적어도 개방 골절은 아니었다. 어디가 축축하거나 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리에 아직 힘이 남아 있다고 느꼈으므로 어디에서도 피가 나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오른손을 뻗어 무릎을 쓰다듬으며 불덩이 같은 통증을 무시해보려고 애썼다. 다리는 뒤틀린 나무토막 같았다. 마치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고통은 뜨거운 불덩이를 다리 여기저기에 퍼부으며 돌아다녔다.

p.107
사이먼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실 그렇게 갑자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렸기 때문에 유난히 더 강렬하고 더 오래 나를 쳐다본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어떤 표정이 살짝 스쳤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무심함 같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불안감이 엄습했고, 갑자기 그가 전혀 낯선 사람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의 눈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연민이나 동정과 다른 그 무엇. 부상당한 동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길이었다. 그는 그런 생각을 숨기려 했으나 나는 그것을 보았고, 두려움과 걱정에 휩싸여 시선을 돌려버렸다.

p.110
조는 다리가 부러졌다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으나, 그 순간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런 젠장. 친구, 넌 이제 죽었어….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조 역시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즉시 받아들였으며, 그가 죽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당연히 혼자서도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p.134-135
눈보라가 몰아치는 속에서 서로의 로프를 확보해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따뜻한 우정을 주고받았다. 마치 삼류 전쟁영화의 진부한 대사처럼. “여러분, 우린 모두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 난공불락의 어떤 적과 대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사이먼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사이먼도 미소를 지었으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미소 뒤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의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에겐 너무나 힘든 일일 터였다. 그는 핼쑥해 보였다. 추위로 움츠러든 그의 얼굴에는 그동안의 긴장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의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대신 그 눈에는 염려와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으나 얼굴에 번진 어두운 그림자는 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p.146
나와 사이먼의 죽음을 생각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죽음을 신경 쓰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더 열심히 싸웠어야지. 하지만 이런 생각도 곧 외면해버렸다. 토니 쿠르츠Tony Kurz는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에서 죽어가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싸움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살기 위해 로프에 매달려 발버둥 치다 갑자기 떨어져 죽고 말았다. 구조대는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쿠르츠와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도 왜 나는 발버둥 치지 않은 걸까. 이상했다…. 추워서 그런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아침까지 버티지도 못하겠지…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도 다시는 못 볼 거고. 사이먼이 죽지 않아야 할 텐데. 너무 가혹한 일이야… 나 때문에 사이먼이 죽어선 안 돼….

p.152-153
나는 살아남았다. 잠시 동안은 오로지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로프가 끊어진 뒤 오랜 고요 속에서 조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의 무게는 나로부터 떨어져나가, 이제 나에게는 바람과 눈사태만이 남았다. 조는 사라졌다. 아, 내가 그를 죽인 걸까? 마음 한구석은 그렇게 대답하라고 재촉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없었다. 몸을 꽁꽁 얼리는 추위와 마비된 침묵 속에서 충격을 받은 나는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눈보라를 넋 놓고 바라봤다. 슬픔도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헤드램프의 불빛이 눈보라를 뚫고 나가는 것을 보자 텅 빈 허공이 무섭게 느껴졌다. 조를 불러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지만 꾹 참았다. 들을 수도 없을 텐데 뭐. 추위가 등을 타고 올라와 몸이 떨렸다. 눈사태가 어둠 속에서 내 위를 또 덮쳤다. 위험할 정도로 추워지고 있었고, 눈사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폭풍설이 몰아치는 산에 홀로 남겨진 나는 아침이 될 때가지 조에 대한 생각은 잊어야 했다.

p.154
설동이 완성되자 침낭 속으로 힘겹게 들어가 입구를 배낭으로 막았다. 바람과 눈사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고요한 어둠 속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되돌아보고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해 마음을 안정시키려 했다. 사실을 기억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것이 너무 나 극명하게 현실적이어서 아무 결론도 내릴 수 없게 되자, 잠시 후 그만두고 말았다. 나는 내가 한 일을 신문해, 나 자신을 기소하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p.169
그러나 로프는 가볍게 떨어져 내렸고, 그와 동시에 내 희망도 떨어져 내렸다. 나는 늘어진 로프를 끌어당겨 해어진 끝을 살펴봤다. 아, 로프 끝이 잘려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흰색과 분홍색의 속심이 잘린 로프 끝에서 삐져나와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그 사실을 믿다니 미친 짓이었지만 모든 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씨팔! 여기까지 왜 왔지? 사이먼은 나를 능선 마루에 버리고 가버렸어야 했어. 그랬다면 생고생도 하지 않았을 것 아냐? 이 모든 일을 겪었는데,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왜 그토록 발버둥을 쳤지?

p.179-180
이토록 비참하게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나는 승자가 될 수 없었다. 지난밤 설동에서 어쩔 수 없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이유가 이제야 이해되었다. 로프를 자르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 죽었을 것이다. 빙벽을 보니, 거기서 떨어져선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났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이 이야기를 하면 과연 누가 믿을까? 아무도 로프를 자르지 않아. 그것은 아주 나쁜 짓이야. 왜 이렇게 하지 않았어? 왜 저렇게 해보지 않았어? … 질문들이 내 귀에 들려오고, 내 이야기를 믿어주던 사람들의 눈에서조차 의심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기이하고 잔인한 눈빛. 조의 다리가 부러진 순간부터 나는 패자 쪽에 선 셈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바꿀 수 없었다.

p.196
천장에 난 조그만 구멍에서 황금빛 햇살이 들어와 크레바스 속의 깊은 벽에 밝은 반사광을 흩뿌렸다. 진정한 바깥세상에서 둥근 천장을 통해 타오르듯 들어오는 그 햇빛은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나는 아래가 불안정하다는 것도 잊은 채 로프를 마저 풀며 내려갔다. 그 햇빛에 닿아보고 싶었다. 나는 내 기대를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 언제 닿을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p.207-208
이토록 온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렵기도 했으나 힘도 났다.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게임이 시작되었으니까. 포기하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모험을 한답시고 찾아와서 내가 찾던 것보다 더 힘든 모험에 갇혀버린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전율을 느꼈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고 독을 몰아내거나 호수를 향해 뻗어 있는 모레인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은 아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흥분을 곧 가라앉혔다. 나는 아름답지만 외로운 곳에 버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면서 현실이 날카롭게 직시되었다. 의식이 있는 채로 살아나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곳에는 눈과 고요와 생명이 없는 맑은 하늘,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있었다. 나에게 대항하려는 어둠의 세력은 이제 없었다. 머릿속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뚫고 냉정하고 이성적인 목소리로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p.221
리처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어둡고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말없이 나에게 차 한잔과 죽 한 그릇을 건네줬다. 나는 별 맛도 못 느끼며 서둘러 먹고 나서 텐트로 돌아가 세면도구를 챙긴 다음 강에 있는 깊은 물웅덩이로 향했다. 그리고 옷을 벗고 얼음같이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급히 몸을 담그느라 숨을 헐떡거렸다. 면도를 하려고 밖으로 나와 앉으니 햇볕이 몸을 말려줘 등이 따뜻했다. 나는 옷을 빨고 얼굴에서 햇볕에 탄 살갗을 벗겨내며 하루 종일 물웅덩이 옆에서 지냈다. 그것은 더러워진 내 마음을 씻어내는 조용한 종교의식 같았다.

p.255
그 밤은 나에게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많은 말을 했고,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나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태양을 기다리며 그곳에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상에 빠졌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다 깨어나선 같은 별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내 동의도 없이 말을 계속 걸었고, 환청인 줄은 알고 있었으나 무시할 수 없는 공포가 속삭였다. 그때 목소리가 나에게 말했다. 너무 늦었어. 시간이 없어.

p.276
눈송이가 얼굴에 부딪혔고 바람에 옷이 펄럭였다. 밤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얼굴에 붙어 있던 눈이 녹은 차가운 물과 뜨거운 눈물이 뒤섞였다.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내 힘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겐 누군가가 필요했다. 아무라도. 어두운 밤의 폭풍이 나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많은 일로 울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와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울었다. 고개를 가슴에 떨구고 어둠을 무시한 채 분노와 고통이 울도록 내버려뒀다. 나에겐 너무나 가혹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도와줘어어어.”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어둠 속으로 퍼지는 순간 바람과 눈에 파묻혀버렸다.

p.285
“네가 날 살린 거야, 알아? 너한텐 그날 밤이 끔찍했을 거야. 널 욕하지 않아. 달리 방법이 없었을 테니까. 난 이해해. 왜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알고 있어. 넌 할 수 있는 걸 다했어. 능선에서 날 내려 보내줘서 고마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리처드의 침낭 속에 누워 있는 그를 넘겨다보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p.304-305
결국, 산에서든 일상생활에서든 우리는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 내 말은 우리가 이기적이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잘 돌봐야 남도 도울 수 있다는 의미다. 산을 떠나 복잡한

“나는 참을 수 없는 육체적 한계에 도달했고,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고통을 겪었으며,
거의 죽다 살아났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분도
내가 느꼈던 고통을 한껏 즐기기 바랍니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조 심슨

산에 홀로 남겨진 한 남자의 절대 고독
그리고 그를 홀로 남겨둬야 했던 또 다른 남자의 고뇌

1985년, 남미 페루의 안데스에 위치한 해발 6,344m 높이의 시울라 그란데에 오른 조 심슨과 사이먼 예이츠는 미등의 서벽 등반에 성공한 뒤 하산하는 길에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바로 조가 다리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 “끼어드는 사람도 구조하러 오는 사람도 없을” 이 고립된 산속에서, 부상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부상을 당한 조뿐만 아니라 그를 데리고 내려가야 할 사이먼에게도….
조는 부상의 고통과 싸우는 동시에, 사이먼을 죽음으로 끌어들였다는 미안함과 자책과도 싸워야 했다. 반면 사이먼은 이런 상황을 만든 조를 탓하지도 그렇다고 걱정하는 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조를 아래로 내리는 일에만 집중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원망 속에서도 우정의 불씨를 되살리며 한 가닥 로프로 서로를 묶고 하산하는 도중, 조가 그만 가파른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절벽 끝에 매달린 조의 무게는 사이먼을 죽음으로 한 발짝 더 끌고 들어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사이먼은 최후의 선택을 한다.

“나는 살아남았다. 잠시 동안은 오로지 그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로프를 잘라 친구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사이먼은 조가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하며 충격과 죄책감에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베이스캠프로 돌아온다. 그러나 조는 크레바스 속으로 떨어져 목숨을 구했고, 이제는 절대 고독의 상황에서 홀로 살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위로 올라가는 대신 크레바스의 심연 속으로 내려가기로 결단을 내린 조는, 기적처럼 그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다줄 ‘황금빛 구멍’을 발견한다.

“이토록 온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두렵기도 했으나 힘도 났다.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 게임이 시작되었으니까. 포기하고 도망칠 수는 없잖아?”

조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가 견뎌온 시련은 언제 어디서 그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크레바스가 널린 땅을 다 으깨진 다리로 건너야 하는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갈증과 환청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다시 삶으로 인도하는 내면의 강인한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딛는다.

고독한 설산에서 펼쳐지는 마인드 게임과 심리적 트라우마를
섬세하게 그려낸 생존의 대 서사시

이 책은 우리가 삶에서 직면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상황을 전제한다.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없는 곳에서 조난을 당하고, 그래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결국 더 나쁜 상황에 빠진다. 살아남은 자 역시 승자가 될 수 없다. 살아 돌아갔을 때 받게 될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극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와 생존 본능,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인한 선택을 해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가 진솔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자신을 위해 어떤 결단을 내리겠는가.

작가정보

저자(글) 조 심슨

Joe Simpson은 1960년 아버지의 주둔지였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그는 14살에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의 《하얀거미The White Spider》를 읽고 산에 이끌렸다. 1985년 페루 안데스에서 당한 사고로 2년간 6번의 수술을 받고 재활에 성공했으나 1991년 네팔 히말라야에서 또다시 왼쪽 발목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된 《터칭 더 보이드Touching the Void》를 비롯해 8권의 책을 썼다.

한국외국어대학교산악회원으로 1976년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해 한국대학산악연맹, 아시아황금피켈상조직위원회, 산서회, 울산울주세계산악영화제 등에서 활동해왔다. 현재는 리리 퍼블리셔 전문 감수위원, 하루재클럽 프로젝트 매니저 및 히말라얀클럽 한국 명예비서를 맡고 있다. 번역서로는 《사이코버티컬》(2013), 《산의 전사들》(2020), 《카트린 데스티벨》(2020), 《WINTER8000》(2021), 《M4》(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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