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고 글쓰고
2023년 06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6월 2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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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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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시인이 있다. 토끼를 잡기 위해 종일 들판을 쏘다녔지만 운이 없었던 탓인지 오늘은 수확이 없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발견한 버섯 조금이 전부다. 주린 배에서 소리가 요란히 울린다. 버섯은 허기를 채우기엔 너무 부실하다. 고기가 먹고 싶다. 말고기, 소고기, 토끼고기. 머릿속으로 말과 소와 토끼를 상상한다.
기원 전 17,000년 경 라스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린 한 원시인에게서 우리는 두 가지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나는 시종일관 계속되는 먹고살 걱정, 다른 하나는 상상한 것을 표현하고픈 욕구. 얄궂게도 이 둘은 양자택일의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먹고살 걱정에 골몰하면 표현하고픈 희망이 한갓진 얘기로 여겨지고, 표현 욕구에 몰두하면 궁핍한 삶이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내용은 ‘생업과 예술 사이의 긴장’이라는 말을 길게 늘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결국 쓰는 사람은 그 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줄의 단단함은 경제적 풍요가 아닌 쓰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벽화를 그린 원시인보다 현 인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더 풍요롭지만 위태로운 줄타기는 여전하다. 어쩌면 더욱 자주, 더욱 거세게 줄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책은 그럼에도 써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일하며 글 쓰는 작가 아홉 명의 모습과 생각을 담았다. 이 책을 통해 당신이 ‘그럼에도’ 써야 하는 이유를 다시 떠올릴 수 있길, 당신의 쓰는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길 바란다.
2. 이서수 미안하지만 쓸게요 39
3. 송승언 사실 당신이 쓰는 글에는 별 가치가 없다, 내 글이 그렇듯이 57
4. 김혜나 나를 위한 동작 79
5. 정보라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이야기 97
6. 전민식 중간쯤에서 보낸 한 철 117
7. 조영주 최저 시급으로 산다는 것 139
8. 김이듬 죽은 시계를 차고 다닌 일 년 159
9. 이원석 대작가가 되는 기분 183
일본에는 ‘아버지 발뒤꿈치는 피가 날 때까지 갉아먹어라’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기댈 구석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붙고 보라는 뜻 같은데, 글쓰기 같은 예술 쪽 분야에 뜻이 있다면 절대 돈 나오는 구멍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p.19)
당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행운아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고약한 일을 당했을 때 화가 나서 펄쩍펄쩍 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우리는 이를 악물고 종이에다 그 일을 두드려 댈 수 있지 않는가. (p.23)
베스트셀러 작가만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안 팔리는 책도 가끔은 작은 기적을 일으킨다.
(p.34)
나는 내가 걸작을 쓸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청탁이 없었던 5년이라는 기간이 나에게 남긴 그늘 같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그늘이다. 나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으니 소설을 쓰다가 슬럼프에 빠질 정도로 좌절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완성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단, 쓸 땐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이후의 일은 신의 뜻대로, 그것이 나의 기본자세다. (p.49)
해답을 찾아 헤맬 시간에 나는 결국 소설을 한 줄 더 쓴다. 마감은 지켜야 하고, 지키고 싶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나의 본업이 소설가이므로. 나중엔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p.53)
당신을 감동시키고, 전율하게 만들었으며, 생각하게 했고, 의문스럽게 했으며, 화나게 했고, 짜증나게 했으며, 슬프게 만들었고, 기쁘게 만들었으며, 시시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글을 써라. 그게 아마도 문학일 테니까. (p.68)
더는 아무런 희망도 영광도 없이. 그런 것 없어도, 그 순간에조차 누군가에게 문학은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었고, 문학을 하지 않으면 하나뿐인 잔인한 삶을 견뎌낼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문학이 그의 십자가였기에. (p.73)
요가 수련과 명상을 이어오며 되도록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지 않았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 숨 가쁜 현실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중 한 가지만이라도 온전히 바라보고 행하며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더욱 즐겁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다. (p.88)
많은 이들의 속을 썩이는 현실의 걱정과 불안은 대부분 육체의 질병이나 물질의 부재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먼저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p.90)
그러니까 나는 불쾌하고 비정상적인 존재,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폐가 되는 존재로 취급받는 게 어떤 것인지, 버려질까 쫓겨날까 끊임없이 두려워하며 생존을 구걸하며 ‘틀린’ 존재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일인지 조금은 안다. 스스로 그런 존재로 여기는 것이 어떤 삶인지 그건 정말 잘 안다. 그러니까 사회 전체에서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분들이 모여서 우리는 틀린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외치면 나는 그게 너무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다. (p.106)
나는 ‘작가가 된다’보다도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열망이 불치병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서 솟아나오는 의사소통의 열망, 사회적 관계의 열망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p.112)
수목장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았던 진수는 내 설명을 듣고 진저리를 쳤다. 왜 자꾸 중심에서 도망만 가느냐고 물었다. 어디가 중심이냐곤 묻지 않았다. (p.121)
이 길을 건너면 나의 일과 모순과 아이러니를 발견한 찰나의 순간들도 모두 잊히겠지. 잊히기 전에 기억하고 메모해서 남기려 한다. 기록으로 남기는 그 행위가 곧 나의 실존이기에.
(p.134)
돈이 없으면 사람은 우울해진다. 말수가 줄어들고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하는 게 싫어진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죄다 소속이 있는데 나 혼자 백수면 더욱 그렇다.
20년 전의 내가 딱 그랬다. (p.139)
10년 후의 나는, 20년 후의 나는 어떨까. 그때의 나 역시 지금처럼 고민하고 있을까. 여전히 불안해하면서도 어떻게든 글을 쓰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렇게 살며, 쓰며,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것 같다.
(p.154)
세계는 예술로서만 존재한다고 적힌 두꺼운 노트에 나는 입출금 내역을 기록해 왔다. 돈을 좋아해서 은행원이 된 사람은 없겠지만 어두워져야 켜지는 가로등처럼 나는 돈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갔다. 은하수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면 빛나는 시절을 찾을 수 있을까. 글만 쓰며 먹고살 수 있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을까. 빚이 많아져서 빛을 발음할 때에도 은행 빚을 떠올리게 된다. (P. 166)
이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다니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신은 있는가. 사랑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까. 사회가 만든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시를 써서 뭐하나? 시가 꼭 뭘 해야 할까. 아직도 내가 차고 있는 시계는 죽어 있다. 설날이 되면 죽은 시계는 죽은 채로 두고 새 시계를 사야지. 세상과 시차 없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p.179)
부자는 망해도 삼대를 가고 계획이 웅장하면 실패해도 중간은 간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냥 작가도 아니고 보란 듯이 그럴 듯이 ‘대작가’가 되어보기로 하는 것이다.(p.184)
고생이라 생각하면 불행했지만 후일에 술을 마시며 주워섬길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면 조금 나았다. 평생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없었지만 생각을 돌이켜 차를 타고 지나가는 풍경이길 바랐다. 차창처럼 빠르게 잘 지나가지지 않으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그도 아니면 걸어서 지나가는 산책길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은 여전히 지나쳐지지 않고 지금도 백팩처럼 내 등 뒤에 붙어 다니지만 고통스러운 마음은 지나가서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p.197)
사실 이 기획은 편집자의 개인적인 궁금함에서 시작되었다. 편집자이자, 북디자이너이자, 마케터이자, 경리부 직원이자, 영업부 직원으로 (쉽게 말해 1인출판사 대표로) 일해 오며 항상 소설가를 꿈꿨다. 출판업을 시작한 데엔 여러 동기가 있지만 그중 책을 마음껏 읽으며 일할 수 있으리란 점, 그것이 창작에 도움이 되리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달리 사업은 현실이었다. 단순히 책이 좋아 시작한 출판 사업 뒤엔 수많은 노동자들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나는 호기롭게도(또는 무모하게도) 그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로 오랜 시간 일과 스트레스에 들들 볶여야 했다. 남들은 잠들 법한 시각에 워드 프로그램을 켜 피로를 이기며 억지로 공상을 끄적였다. 그렇게라도 적은 날엔 차라리 다행이었다. 창작을 위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면 흥미로운 상상보다는 낮에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이 먼저 떠올랐다. 그러면 힘들게 마련한 창작 시간이 능력이 부족한 사업가의 핑곗거리, 또는 허영심의 발로쯤으로 여겨졌다. 나의 창작 욕망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글쓰기가 두려워졌고 언젠가부터 일기도 쓰지 않았다.
시도하고 좌절하고 다시 시도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좌절과 새로운 시도 사이의 간격이 점점 길어졌고, 나는 내 이야기가 낯설어졌다. 그럴수록 조금 더 슬퍼졌다. 어느 날엔가 나와 같은 사람이 많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비슷한 상황을 극복하고 작가로서 발을 디딘 사람들 역시 많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그 둘을 잇는 기획, 즉 생업과 창작을 병행해온 작가들이 현재 어려움을 겪는 예비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이 나오면 어떨까? 도움을 주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현실적인 조언일 수도 있고,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해줄 수도 있다. 출판 시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일 수도 있고 일하며 글 쓰는 작가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여전히 소설 쓰기는 부진하고 재능 없음을 한탄하는 날이 많지만. 아니, 그런 날이 많을수록 오히려 이따금 작가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때문에 더욱 만족한다. 이 책에 실린 아홉 개의 이야기에 대한 공통적인 설명은 없다. 각양각색의 내용, 다종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고를 청탁하며 작가들에게 요구한 것은 ‘말해주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였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아주 알맞았다고 생각한다. 여러 색을 통과한 후 어렴풋하게나마 스스로의 색에 대한 예감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 책의 문을 연 김현진 작가는 〈네 멋대로 해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20여 년 동안 일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어도 먹고살고 글 쓰는 삶의 모습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 이서수 작가는 신춘문예 등단 후 오랜 기간 플랫폼 노동자와 자영업자로 일하며 장편 소설을 준비했다. 등단부터 처음 작품을 펴내기까지 있었던 5년간의 시간 동안 마음을 되돌아보며 독자들에게 소설 쓰는 마음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한다.
- 송승언 작가는 문학 출판사의 편집자이자 시인이다. 출판업계 종사자로서 원고 노동자의 암울한 현실을 낱낱이 밝힌다. 그가 도착한 결론 역시 얼핏 봐선 지독히 어두워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론 속에서 행복한 글쓰기에 대한 가능성이 엿보인다.
- 김혜나 작가는 소설을 쓰며 안 좋아진 건강을 회복하고자 요가를 시작했고, 그걸 계기로 지금까지 소설 쓰기와 요가 강의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 이 책에선 창작하며 자신의 몸을 바로 세우는 것을, 돌보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해선 안 됨을 이야기한다.
- 정보라 작가는 오랜 시간 창작 활동과 러시아문학 연구를 병행했다. 이 책에서는 소설을 쓰기까지 그가 살아온 삶의 모습과 막 시작하는 초보 작가에게 건네는 실질적 조언을 담았다.
- 전민식 작가는 다양한 일을 하며 글을 써왔고 현재도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이 책에서는 그가 수목장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오토픽션 형식으로 담아냈다.
- 조영주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로 시작해 세계문학상 수상 작가를 거치며 작품 활동을 하기까지 카페 바리스타 일을 해왔다. 그 기간 동안의 일과 소회를 진솔하게 적었다.
- 김이듬 작가는 ‘책방이듬’을 운영했고 산문, 소설, 시 등 다양한 글을 썼다. 이 책에 실린 「죽은 시계를 차고 다닌 일 년」에서 세상의 시간과 달리 흐르는 시인의 시간을 느낄 수 있다.
- 이원석 작가는 시를 쓰고 주짓수를 가르친다. 그는 「대작가가 되는 기분」에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아니 현실을 긍정하며 창작 활동을 해나갈 것을 격려한다. 그의 재치 넘치는 글에서 우리는 그가 논하는 이 시대 '대작가'의 면면을 미리 학습해볼 수 있다.
작가정보
소설도 쓰고 러시아와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권 문학작품들도 번역하고 방역수칙을 잘 지키며 데모를 열심히 한다. 2021년에 『저주토끼』가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2022년에 부커상 국제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2011년 제6회 디지털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카카오페이지, 예스24 등의 웹소설 공모전은 물론 김승옥문학상 신인상, 세계문학상 등을 연달아 수상하며 추리소설가로 입지를 다졌다. 『붉은 소파』,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도 좋아』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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