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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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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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맨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태풍의 계절』은 그해 후보작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빈곤이 불러 온 절망적인 현실과 거기에서 파생된 다양한 폭력을 그대로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몇몇 독자는 이 작품이 온갖 폭력과 혐오로 장식한 ‘빈곤 포르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강렬한 것은 실제로 이 소설의 배경인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살았던 독자가 쓴 리뷰였다. “나는 그곳에 살았었고, 이 소설에 묘사된 폭력은 전혀 과장돼 있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베라크루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기를 원했던 페르난다 멜초르는 이 소설의 설정을 ‘문학적으로’ 순화하지 않았다. 대신에 멜초르는 이야기 자체에 신선하고 강렬한 매력을 불어넣는 방식을 선택했다.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몽환적인 문체와 보도 저널리즘의 냉철한 플롯을 접붙였고, 그 결과 탄생한 『태풍의 계절』은 21세기 라틴 아메리카가 탄생시킨 최고의 문제작으로 알려지며 세계 문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오게 되었다.
II
III
IV
V
VI
VII
VIII
감사의 말
우두머리가 소들이 지나다니는 좁은 길 가장자리를 손으로 가리켰고, 다섯은 일제히 마른 풀밭 위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한 몸처럼 바짝 붙어서 움직이던 그들 주변으로 파리 떼가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들은 마침내 누런 물거품 위로 떠오른 것을 보았다. 그건 갈대와 길에서 바람에 날려 온 비닐봉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죽은 이의 부패한 얼굴이었다. 한 무더기의 검은 뱀들 속에서 거무죽죽한 빛깔의 가면처럼 꿈틀거리는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12~13쪽
그녀는 자기 손톱이 아이의 살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손톱으로 모기한테 물린 곳을 심하게 긁다가 피가 날 때 느껴지는 안도감과 비슷했다. 어쩌면 그 망할 새끼도 그때 안도감 비슷한 걸 느꼈는지도 모른다. 녀석이 줘 터지고 나면 언제나 조용해지고, 심지어 더 이상 그녀를 약 올리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 듯했다.
-56~57쪽
다행히 그날 밤 루이스미는 그녀에게 키스를 하지 않았고, 그녀의 몸을 만질 때도 수줍은 듯 손가락 끝으로 간신히 애무하기만 했다. 그래서 노르마는 그의 손가락을 땀 냄새를 맡고 살짝 열어 둔 방문 틈으로 날아들어와 몸 위를 떠다니는 벌레들의 날개로 착각하기도 했다.
-165쪽
브란도는 엄마가 그 둔한 머리로도 자기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끔 그 얼굴에 발과 주먹을 꽂아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아예 그렇게 죽여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 더 이상 기도와 설교, 탄식과 통곡 따위의 지겨운 소리를 듣지 않을 수만 있다면. 주님, 제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아이가 이렇게 되었나이까? 사랑스러운 내 아들, 그토록 정이 많고 선하던 브란도는 정녕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주님, 어째서 사탄이 그 아이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하셨나이까? 그럴 때마다 브란도는 문 밖에서 소리를 지르며 맞받아쳤다. 아, 엄마, 진짜, 엄마, 이 세상에 사탄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사탄은 무슨, 씹할 잘난 주님도 없다고요. 그러면 어머니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아들의 불경스러운 말을 막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열심히 기도문을 외웠다. 그럴 때마다 브란도는 씩씩거리며 화장실로 뛰어들어 가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면 그의 검은 눈동자와 검은 홍채가 점점 커지고 퍼져 나가다 결국 거울의 표면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소름 끼치는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지옥의 눈부신 불꽃이 주는 위안마저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죽음처럼 황량한 어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를 구해 낼 수 없는 공허한 어둠.
-305~306쪽
그는 얼굴과 가슴과 손을 다 씻고 나서 자기 방으로 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았다. No sé tú(넌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루이스미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pero yo te busco en cada amanecer(나는 매일 동이 틀 때마다 너를 찾아), 루이스미는 자기 집 매트리스 위에 누워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mis deseos no los puedo contener(난 내 욕망을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어), 그는 이왕 시작한 일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도록 브란도가 자기 곁으로 와 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였다, en las noches cuando duermo(내가 잠든 밤에), 꾀죄죄한 그 매트리스 위에 누운 채, si de insomnio(불면증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들이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yo me enfermo(나는 몸져눕고 말거야). 섹스를 나누다 서로를 죽이는 순간을. 어쩌면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스페인어로 쓰인 부분은 멕시코 가수 루이스 미겔의 노래 〈No sé tú〉의 가사임
-330~331쪽
어떤 리얼리즘은 악몽보다 깊은 곳에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들은 실제로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멕시코에서 위험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베라크루스주의 한 마을에서 마녀로 불리던 자가 살해당하고, 그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사연이 하나씩 풀려 나가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한편, 빈곤 속에서 살아온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들은 지나치게 열렬히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미워한다. 그리고 그 무차별적인 사랑과 증오를 즉각 행동으로 옮긴다. 빈곤이 매 초마다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내리는 그곳에서 가만히 생각하거나 망설이는 일은 사치일뿐더러, 가끔은 위험한 결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2020년 맨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태풍의 계절』은 그해 후보작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빈곤이 불러 온 절망적인 현실과 거기에서 파생된 다양한 폭력을 그대로 노출시켰기 때문이다. 몇몇 독자는 이 작품이 온갖 폭력과 혐오로 장식한 ‘빈곤 포르노’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짧고 강렬한 것은 실제로 이 소설의 배경인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살았던 독자가 쓴 리뷰였다. “나는 그곳에 살았었고, 이 소설에 묘사된 폭력은 전혀 과장돼 있지 않다.”
몽환적인 문체와 냉철한 르포르타주 정신의 조합
사람들은 빈곤이 불안을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불안이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 또 그 깊은 곳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되는지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빈곤은 소재의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문학적인’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널리스트 출신인 멜초르는 『태풍의 계절』을 쓰면서 베라크루스의 오늘날을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목표를 고수했고, 그러면서도 매력적인 소설을 선보이기 위해 복고적인 모험을 선택했다. 바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멜초르는 『태풍의 계절』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한 멕시코 문학의 수호신인 후안 룰포의 흔적 역시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몽환적인 묘사와 노골적인 구어체가 마치 본래부터 하나의 스타일이었던 양 섞여 있고, 최대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각 장은 거의 한 문단으로 이어져 있고, 그 안에서는 독백과 대화와 서술이 엉겨 붙어 있다. 이렇게 휩쓸려 밀려가는 텍스트의 압력은 무척 강해서, 때로는 독자마저 그 흐름에 빨려들 정도다(자신이 왜 이 작품을 손에서 놓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해외 독자의 리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멜초르는 문체가 아닌 플롯에 있어서는 선배들의 ‘마술적’인 환상성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이 작품이 추구하는 냉철한 사실성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멜초르가 플롯을 작성하면서 염두에 둔 작품들은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비롯한 르포르타주들이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한 멜초르는 꼼꼼하게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여러 인물의 알리바이를 연결하는 작업에 익숙했고, 『태풍의 계절』에서 그 특기를 십분 발휘한다. 중심이 되는 사건을 향해 섬세하게 시간을 되돌리며 그 사건을 둘러싼 작중 인물들의 기억과 알리바이를 하나씩 덧붙이는 것이다.
범죄 소설을 연상케 하는 이 섬세한 ‘알리바이 게임’은 작품에 강렬한 감정을 불어넣는다. 서로 얽혀 있는 등장인물들이 알지 못하는 것, 즉 서로에 관한 진심과 각자의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오직 독자만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 안타까움이 그들에게 인간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외 없이 악행을 저지른 그들은 처음에는 독자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안타까움을 통해 어느새 한 명의 인간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그토록 혐오스러운 세계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작품 속 악당-인간들을 통해 많은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내 연대와 유대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달리 말하면, 나는 어떤 인간까지를 인간답다고 간주하는가. 나는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구별 짓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얼마나 합당한가. 암실문고가 선사하는 이 세 번째 어둠, 빈곤과 폭력을 비추는 어둠은 그 어려운 질문들을 통해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작가정보
Fernanda Melchor, 1982~
1982년 멕시코 베라크루스에서 태어났다. 베라크루스대학에서 저널리즘 학위를 취득한 뒤 저널리즘 기사와 단편 소설을 여러 곳에 기고했다. 이내 뛰어난 필력을 인정받은 그녀는 국내 언론은 물론 『뉴요커』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 해외 매체에도 기사와 에세이를 실었다. 2013년에 그간의 저널리즘 산문을 모은 책 『이것은 마이애미가 아니다Aqu? no es Miami』와 첫 소설 『가짜 토끼Falsa liebre』를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작가로 데뷔했다. 2017년에는 베라크루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살인 사건 등 여러 실화에 영감을 받아 쓴 『태풍의 계절Temporada de huracanes』을 발표했다. 그해 멕시코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은 이 작품은 독일 문화의 집이 수여한 국제 문학상과 안나 제거스상을 수상했고, 맨부커상 국제 부문과 더블린 국제 문학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21년에는 『파라다이스Paradais』를 발표하며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 작가는 멕시코 문학의 가장 강력한 미래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라틴아메리카 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카테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알베르또 푸겟의 『말라 온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우리였던 그림자』, 그 외 공살루 M. 타바리스의 『작가들이 사는 동네』, 『예루살렘』, 로베르토 아를트의 『7인의 미치광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의 『계속되는 무』, 돌로레스 레돈도의 『테베의 태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영혼의 미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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