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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우리 시대

에세이. 관찰. 편지
음악의 글 13
토마스 만 지음 | 안인희 옮김
포노(PHONO)

2023년 06월 06일 출간

국내도서 : 2022년 12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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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8.07MB)
ISBN 9791189716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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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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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우리 시대》는 토마스 만의 장녀 에리카 만이 아버지 토마스 만의 글과 서신, 기고문 가운데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를 주제로 삼은 것들을 연대순으로 한데 묶은 것이다. 1902년 토마스 만이 절친이자 작가인 쿠르트 마르텐스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으로 1905년의 메모 속에서 세 줄짜리 짤막한 글까지 바그너에 대한 토마스 만의 기록을 세심하게 살려낸 이 책은, 편지나 발췌문, 작은 발언들 등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토마스 만의 즉흥적 발언들 사이에서 바그너에 대한 양가감정과 변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08년에 쓴 ‘연극 무대에 관한 시론’이나 1911년 잡지에 기고한 ‘리하트르 바그너 정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쓴 논란의 책 《비정치적 사람의 관찰》, 바그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은 1931년의 글 ‘바그너와 우리 시대’처럼 바그너와 그 작품들에 대한 경탄과 비탄 그리고 깊은 통찰이 드러나는 글들도 가득하다.
토마스 만의 가장 중요한 바그너 연구라 할 만한 에세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과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중요한 해설이 들어 있는 1937년의 글 ‘리하르트 바그너와 《니벨룽의 반지》’도 빼놓을 수 없다. 두 편의 글은 토마스 만의 지식의 총합을 보여주는데, 바그너 작품에 대한 그의 특별한 노고가 핵심을 이룬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이라는 에세이는 뮌헨의 괴테학회가 바그너 50주기를 맞이해 의뢰한 강연의 원고인데,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인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직후인 1933년 1월에 토마스 만이 뮌헨대학교 대강당에서 처음 이 내용을 발표하고 2월에 암스테르담, 브뤼셀, 파리 등지에서 강연한 바 있다. 바그너의 예술적 성과에 대한 뜨거운 찬사와 함께 바그너 숭배 이데올로기의 무비판적 태도에 들어 있는 위험을 경고한 이 강연 원고는 토마스 만이 독일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이 책에는 1902년부터 1951년까지 토마스 만이 49년간 기록한 바그너에 관한 41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토마스 만의 눈을 통해 위대함과 세련됨, 감각성과 섬세한 퇴폐성, 포퓰리즘과 악마적 기교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바그너의 작품들과, 인간 바그너를 향한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표현, 그리고 바그너의 내면 풍경과 그가 세운 위대한 성과 등을 만날 수 있다. 바그너라는 그 강력하고 다의적인 현상을 추적하면서 평생 그에 대한 비판적 관찰을 멈추지 않은 토마스 만의 지적·예술적 호기심 덕분에 우리는 바그너 세계에 제대로 진입할 기회를 얻는다.

여기 수집된 글들이 완전한 것이라고 요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토마스 만이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해 쓴 모든 것을 포함한다. (…) 토마스 만은 바그너에 대해 이따금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것도 시간과 공간이 서로 달라서 그의 발언들을 완전히 구분해줄 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에세이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을 때 문제가 있는 표현이나 구절들도 그대로 두었다. 수십 년이 흐르면서 그의 바그너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여러 번 바뀌었든 상관없이, 일정한 기본 특성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그런 것들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출판사와 발행인도 역시 완결된 글의 일부를 줄이는 일을 그만두었다.

_ ‘발행인의 말’, 308-309쪽
서문 _ 빌리 슈

쿠르트 마르텐스에게
쿠르트 마르텐스에게
‘메모’에서
‘연극 무대에 관한 시론’에서
발터 오피츠에게
리하르트 바그너 정산
에른스트 베르트람에게
율리우스 바프에게
《비정치적인 사람의 관찰》에서
에른스트 베르트람에게
파울 슈테게만에게
요제프 폰텐에게
한스 피츠너에게
‘독일 편지’(6)에서
‘그들은 세계시민 이념에서 무슨 덕을 입었나?’에서
어느 오페라 연출가에게
입센과 바그너
‘시립 극장의 추억’에서
바그너와 우리 시대
발터 오피츠에게
에른스트 베르트람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
답변
빌리 슈에게
레네 시켈레에게
카를 포슬러에게
빌리 슈에게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와 《니벨룽의 반지》
‘쇼펜하우어’에서
카로이 케레니에게
《안나 카레니나》에서
〈코먼 센스〉 편집자에게
아그네스 E. 마이어에게
아그네스 E. 마이어에게
아그네스 E. 마이어에게
내가 좋아하는 음반들
‘《파우스트 박사》의 형성 과정’에서
에밀 프레토리우스에게
리하르트 바그너의 서한집
바젤 시립 극장 감독 프리드리히 슈람에게

발행인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여기 모아진 글은 작가 토마스 만이 예술 행복감과 예술 인식의 측면에서 음악가이자 연극쟁이인(그의 연극 이론을 토마스 만은 비난하는데) 바그너의 덕을 입었다는 증언들이며, 또한 그가 이 ‘마법사’를 향해 일종의 예술적·도덕적 의무로 여겨 유지하는 비판적 거리두기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_ 서문, 9쪽

그렇게 해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 우리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 현대음악을 처음으로 만났다. 내가 절대로 물리는 법 없이 체험하여 알고자 하는 이 거대한 문제적 작품, 영리하고 속 깊은,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교활한 마법, 극장 바깥에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극장에 묶인, 무대의 즉흥곡을 말이다. 이 음악, 오로지 이것만이 나를 평생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_ ‘연극 무대에 관한 시론’에서, 32쪽

리하르트 바그너 덕분에 예술의 즐거움과 예술 인식을 얻은 것을 나는 절대 잊을 수 없지만, 정신에서는 그를 멀리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_ 리하르트 바그너 정산, 46쪽

독일인들에게 ‘괴테냐 아니면 바그너냐’를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둘이 함께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바그너’라고 말할까봐 걱정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닌가요? 어쩌면 모든 독일인이 가슴 밑바닥에서 괴테가, 폭발하는 재능과 지저분한 성격의 작센 출신 코맹맹이 난쟁이와는 비할 바 없이 존경할 만한, 믿을 만한 지도자이자 민족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아는 걸까요? 의문입니다. _ 율리우스 바프에게, 53-54쪽

바그너처럼 우리의 생산 본능을 자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간적·문학적 관심은 괴테를 향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바그너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빚을 졌어요. 처음에 그리고 계속해서 바그너 작품을 체험한 흔적이 분명 내 생산품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죠. 〈로엔그린〉을 맨 먼저 알았고, 이 작품을 수없이 보아서 지금은 그 텍스트와 음악을 거의 외우다시피 합니다. _ 어느 오페라 연출가에게, 97쪽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의 종種에서 완전한 것은 모두 자신의 종을 넘어 무언가 다른 것, 비할 바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이팅게일은 많은 소리를 낼 때 그냥 한 마리 새일 뿐이다가 갑자기 새라는 종을 넘어서면서, 모든 새에게 노래가 대체 무엇인지를 알려 주려는 것처럼 노래한다.” 바로 이와 똑같이 바그너는 오페라를, 입센은 시민극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예술을 무언가 다른 것, 비할 바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괴테의 나이팅게일 예에 나타나는 저 머뭇거림과 퇴행도 그들에게서 드러난다. 이따금, 그것도 이미 높은 곳으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파르지팔〉에 이르기까지 바그너에게는 여전히 오페라가 있었다. 입센의 경우에도 이따금 뒤마 2세 연극의 삐걱거림이 드러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완벽하게 만드는, 종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인 사람들이었으니, 그들은 내적으로 변하면서 처음의 것에서는 짐작도 못할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_ 입센과 바그너, 102-103쪽

“진짜 인내는 큰 탄력에서 나온다”라고 노발리스는 쓴 적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내심이 진짜 용기라고 찬양했다. 이 사람 바그너가 자신의 소명을 완성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신체적·도덕적으로 탄력, 인내심, 용기 등이 통합된 힘이다. 천재의 독특한 생명 유지 체질, 곧 감수성과 힘, 연약함과 끈질김이 이렇게 잘 통합된 경우를 다른 예술가의 생애에서는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스스로 놀람’이 혼합된 말이다. 이런 혼합에서 그 위대한 작품들이 나왔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만의 과제에 의해 연장된다는 느낌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작품의 형이상학적인 고집을 믿지 않기가 어렵다. 곧 저의 완성을 지향하면서, 작품 생산자의 삶을 단순한 도구로, 자발적/비자발적 제물로 삼아버리는 의지 말이다. “정말이지 비참한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있다.” 이것은 바그너의 편지에서 나온, 절망해서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비웃는 외침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통과 예술성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아냈다. 예술과 질병이 같은 재난임을 파악했던 것이다. _ 바그너와 우리 시대, 151쪽

바그너의 매체가 오로지 문학 언어일 뿐이었다면 그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음악가이기도 했지요. 문학 언어나 음악 언어 둘 중 하나를 주로 삼고 다른 하나를 곁들이거나 아예 둘 중 하나만 쓰는 게 아니라, 둘을 동시에 그것도 근원적 통일성 안에서 이용하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작가이면서 음악가였고, 음악가이면서 작가였던 겁니다. 문학에 대한 그의 관계는 음악가로서의 관계였지요. 그의 음악이 그의 언어를 원시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기에, 음악이 없으면 그의 대본들은 단지 절반의 작품이었을 뿐이죠. 음악에 대한 그의 관계는 순수하게 음악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기도 했어요. 그의 음악의 정신성과 상징성, 그 의미 매력, 기억 가치와 연관성 마법[주로 문학적인 요소들] 등이 이 관계를 결정적으로 규정한다는 방식으로 말이죠. 그의 음악적 문학성은 그가 전통적인 오페라 형식을 점차 버리도록 이끌었고, 주제-동기에 따른 새로운 구성 기법을 그에게 부여했던 것입니다 ─ 이 기법은 연관성이 풍부하게 확장되어 작품 전체에 적용되었기에 새로운 것이었죠. _ 리하르트 바그너와 《니벨룽의 반지》, 246-247쪽

나치즘이란 바로 다음과 같은 뜻이지요. “나는 어떤 종류든 사회적 해결책에는 관심이 없어.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민속 동화야.” 현실에서 나치즘은, 정치의 영역에서 동화는 거짓말일 뿐이라는, 또 다른 사실에서 튀어나온 지저분한 야만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온갖 비열함을 지닌 나치즘은 독일 정신이 지닌 신화 성향과 정치적 순진함의 비극적 결과입니다. 여기서 비어렉 씨보다 조금 더 나아가보지요. 나는 문제 많은 바그너의 문헌에서만 나치즘의 요소를 보는 게 아니라, 그의 ‘음악’,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으니까요. 물론 더욱 높은 의미에서 그러는 거지만. 지금도 나는 바그너 작품 세계의 몇 소절이 내 귀를 때릴 때면 마음이 깊이 설렐 정도로 그것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열광, 우리를 자주 사로잡는 장엄한 감정은 오로지 가장 위대한 자연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감정하고만 견줄 수 있지요. 높은 산봉우리 위의 저녁놀이나 폭풍우 치는 바다가 불러내는 감정 말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르네상스 이래로 지배적인 사회와 “문명에 맞서도록” 창조되고 지휘된 이 작품이, 히틀러 사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부르주아-인문주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_ 〈코먼 센스〉 편집자에게, 271쪽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나치즘은 물리쳐야 합니다. 이 말의 실질적 의미는 불운하게도, 독일을 물리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주 분명한 의미로 말하는 것이며, 또한 영적인 의미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독일이 있을 뿐, 좋은 독일과 나쁜 독일이라는 두 개의 독일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온갖 끔찍한 모습을 지닌 히틀러는 우연히 생겨난 현상이 아닙니다. 특별한 심리적 전제 없이는 절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인플레이션, 실업, 자본주의 투자, 정치적 음모 등보다 더 깊은 곳에서 찾아내야 하는 전제입니다. [이 나라 저 나라] 국민들이 항상 동일한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참입니다. 그들의 지속적인 특질이 어떤 모습인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늘날의 독일은 매우 섬뜩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세계를 괴롭히고 있죠. 그것이 ‘악해서’가 아니라 동시에 ‘착하기도’ 해서입니다. 앵글로색슨 유머는 이런 모습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저 존경할 만한 [영국 정치가] 해럴드 니컬슨의 말도 그 사실을 입증합니다. “독일의 특성은 인간 본성의 발전 중 가장 섬세한 것이면서도 매우 불편한 것 중 하나다.” _ 〈코먼 센스〉 편집자에게, 272쪽

쇤베르크의 집에서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만났는데, 그의 톡톡 튀는 대화를 나는 언제나 몹시 좋아했다. 특히 주제가 바그너가 되고, 또 이 위대한 선동가[바그너]에 대한 그의 태도의 우스꽝스러운 모호함이 주제가 되면, 아이슬러가 공중에서 손가락을 흔들며 쇤베르크에게 덤벼들어 “이런 늙은 악당 같으니!” 하고 외쳐대면 나는 자주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아이슬러와 쇤베르크가 나의 권유로 피아노 앞에 앉아 파르지팔-화음에서 녹아들지 못한 불협화음을 찾아보던 일이 기억난다. 정확하게 따져서 그런 불협화음이 단 하나 있었다. 제3막의 암포르타스 부분에 나타나는 것. 이어서 내가 여러 이유에서 탐색하고 있던 옛날 방식의 변주들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쇤베르크는 내게 그런 몇몇 예들을 보여주는 악보와 부호들로 구성된 연필 자필 서명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_ ‘《파우스트 박사》의 형성 과정’에서, 281-282쪽

의기소침, 장애, 곤궁, 절망은 위대한 착상에 방해물이 되지 못한다. 특정한 경우 이런 것들은 오히려 가장 유리한 토대가 된다. 강인한 생명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수호신이 이리로 흘러들도록 끌어들이는 것이고, 과제를 지닌 사람은 죽지 못한다. 이 사람은 어려서는 가냘프고 병약한 아이였고, 어른이 되어서도 언제나 피부염, 소화불량, 불면증, 전반적인 신경쇠약 환자였다. 서른 살에 이미 “자주 주저앉아 15분쯤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탄호이저〉를 끝내기도 전에 죽을까 두려워했고, 서른다섯 살에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니벨룽의 반지》 구상을 완성하려는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항상 지쳐 있었고, 모든 순간에 “거덜 나” 있었으며, 마흔 살에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더니 거의 일흔 살이 다 되어서 평생 작품이라는 구조물, 마법적 지성의 매우 치밀하고 위대한 구조물 위에 〈파르지팔〉이라는 왕관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야 각자 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 이것은 경이롭고 놀라운, 영원히 매혹하는 창조의 삶이다. _ 리하르트 바그너의 서한집, 301쪽

19세기를 대변하는 바그너에 대한 뛰어난 평전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토마스 만 자신에 대한 전기

이 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힌다. 19세기를 대변하는 위대한 작가 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 토마스 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경탄과 비판이 한데 어우러진 최고급 바그너 평전이면서 토마스 만의 내면 풍경과 예술론이 솔직하고 생생하게 담긴 역사적 자료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제1급의 독일 예술가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생생한 육성 기록이다. 바그너(1813-1883)는 어지러운 독일 통일 과정(1806-1871)을 고스란히 살아내며 19세기를 대변하는 작가 겸 음악가, 토마스 만(1875-1955)은 양차대전과 히틀러 시절을 고통으로 체험한 20세기의 대표적인 작가다. 이들의 만남에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특별한 두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와 니체(1844-1900)도 함께한다. 이런 지성과 예술의 만남은 다시 한 예술가, 곧 토마스 만의 내면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경탄과 충격과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_ ‘옮긴이의 말’, 316쪽

바그너는 문학과 음악, 춤과 무대장치, 연기 등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예술 작품인 ‘음악연극’을 최초로 만든 예술가다. 많은 오페라 작품을 작곡한 음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작품의 대본을 쓴 작가이기도 하고, 나아가 당대 유럽의 대표적인 지휘자였고 자기 작품을 무대에 직접 올린 연출가이기도 했다. 토마스 만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바그너의 음악연극을 “신화[문학]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제3의 장르인 연극”으로 승화한 것이라 보았고, 그래서 바그너를 기존 오페라 관습에서 벗어난 예술의 혁명가로 평가했다. 그래서 바그너 작품의 위대함이자 그 어떤 오페라 음악에서도 느낄 수 없는 매력이 토마스 만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 특히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 전편의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하고, 이를 무대에 올리고자 바이로이트 극장을 건설하여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 전편을 초연하기까지 20년 이상 씨름한 이야기가 토마스 만 특유의 만연체로 펼쳐진다.
토마스 만은 “바그너 작품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작품들을 향한 열정과 경탄이 줄곧 자신의 삶과 함께”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경탄과 열광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며 “세계와 예술과 삶의 현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자 태도라고 단언한다. 바그너 또한 예술가의 능력이란 경탄 또는 공감 능력 덕분에 자라는 것이라고 여겼다. 토마스 만은 1902년 ‘쿠르트 마르텐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바그너라면 쪽을 못 쓰는 사람”이라며 “〈파르지팔〉을 보면 2주 동안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소설 《트리스탄》, 《벨중의 혈통》, 《부덴부로크가》, 《요셉과 그 형제들》 등을 생각해보면, 바그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더 밝고 새로운 예술 영역으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바그너 작품에 경탄하고 열광하면서 토마스 만은 자신만의 위대한 재능을 발휘하였고, 바그너의 작품은 그런 그에게 예술적 환상에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옮긴이 안인희의 섬세하고 친절한 번역으로
토마스 만과 바그너의 위대한 세계 안으로

바그너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아들뻘 니체와는 한때 절친이었을 만치 깊게 교류했다. 또한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왕과 20세기의 문제적 인물 히틀러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바그너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토마스 만이다. 토마스 만은 말년까지 바그너에게 매혹되었고, 그의 정신적 모습을 19세기 자체처럼 고통스럽고 위대해 보인다고 표현했다. 또한 바그너가 자신에게는 가장 강력한 체험이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따라서 19세기와 20세기의 음악, 철학, 문학, 역사 등 여러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예술가 바그너를 20세기 독일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토마스 만의 문장으로 만난다는 것은, 21세기 독자들에게는 전무후무한 경험이자 특별한 선물과도 같다.
그러나 토마스 만이나 바그너의 세계를 제대로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인문학자이자 경륜 있는 번역가 안인희도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검토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에서도 문장가로 손꼽히는 토마스 만은 사유의 굴곡이 난해하고도 복잡한 지식인인데, 이 책에서는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그너 또한 삶의 굴곡과 사유의 굴절이 극심한 문제적 인물이었으니, 그의 삶의 궤적에 대해 상당히 정통하다 해도 여전히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들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고 일일이 해결하는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원문을 뚫어져라 바라볼 때도 많았고, 일부는 길을 걸으며 머릿속에 지닐 때도 있었다. 교정 과정에서만 전체 원고를 여러 번이나 거듭 읽고 자주 원문과 대조했다. 그 과정에서 천천히 광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역 원고의 여기저기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부는 찬란한 아름다움이었다. 아니, 언어가 이렇게 빛난단 말인가? _ ‘옮긴이의 말’, 321-322쪽

옮긴이 안인희는 차츰 토마스 만의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에 깊이 빠져들었고, 그 기쁨이 작업의 추진력이 되어 그 힘든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덕분에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의 대표적인 예술가, 토마스 만과 바그너의 세계에 안착할 수 있게 되었다.
_

‘음악의 글’ 시리즈
‘음악의 글’은 음악 전문 출판사 포노가 선보이는 시리즈로, 음악을 좀 더 깊이 읽고 폭넓게 이해하는 통찰이 담긴 글들을 한데 모읍니다.
제1권은 최초의 근대적 음악평론가 가운데 한 사람인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과 음악가 _ 낭만시대의 한가운데서》, 제2권은 리트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평생 헌신했던 성악가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리트, 독일예술가곡 _ 시와 하나 된 음악》, 제3권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음악가, ‘미국 음악의 목소리’ 에런 코플런드의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_ 세계적 작곡가의 음악 사용 설명서》, 제4권은 프랑스 음악의 위대한 정신 클로드 드뷔시가 자신의 분신 크로슈 씨를 통해 들려주는 음악 이야기 《안티 딜레탕트 크로슈 씨 _ 프랑스 음악의 한 정신》, 제5권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신학자 한스 큉의 《음악과 종교 _ 모차르트-바그너-브루크너》, 제6권은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담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모차르트, 사회적 초상 _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제7권은 작곡가, 지휘자, 저명한 음악 교육자였던 이모겐 홀스트가 집필한 음악 교육서의 고전 《음악의 ABC _ 입문자를 위한 음악 기초 문법》, 제8권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격변의 시대에 예술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음과 말 _ 에세이와 강연록》, 제9권은 음악과 음악가의 위대성에 대해 논하는 알프레트 아인슈타인의 《음악에서의 위대 _ 위대한 음악가는 누구인가》입니다. 제10권은 시인 오든이 “역사상 최고의 음악평론가”라 칭송했던 버나드 쇼의 《쇼, 음악을 말하다 _ 거장 극작가의 음악 평론》, 제11권은 세기말과 세기 초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성찰이 담긴 《사색과 기억 _ 예술과 인생에 대하여》, 제12권은 새로운 지휘자상을 확립한 브루노 발터의 경험과 지성, 통찰이 깃든 《음악과 연주 _ 창조와 재창조에 대하여》입니다.

작가정보

저자(글)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

20세기 독일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평론가. 독일 북부의 뤼베크에서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기말의 암울한 데카당스 분위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일찍부터 문학,?예술, 철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1891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편이 어려워지자 보험회사에서 잠시 근무했고, 뮌헨으로 이사 가 1933년까지 살았다. 이때부터 집필 활동을 시작했고,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 등에 심취했다. 1898년 단편집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발표하고, 1901년 《부덴브로크가》를 출간하여 작가로서 자리를 잡는다. 이어 1903년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등을 집필한다. 1905년에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하여 그해에 장녀 에리카 만을 얻는다. 1911년에는 휴양지에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듣고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발표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0월에 600쪽이 넘는 방대한 논문집 《비정치적인 사람의 관찰》을 완성하는데, 여기서 그는 세계대전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경향에서 멀어져 나중에는 민주주의와 시민계급을 옹호했고, 이러한 세계관이 반영된 대작 《마의 산》을 1924년 발표, 소설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192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1933년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난과 위대함’이라는 제목으로 국외 강연 여행 도중 히틀러의 집권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을 포기한다. 이후 스위스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을 집필하여 1943년에 4부작을 완성한다. 1936년에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1938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보내는데, 여러 강연과 연설로 바쁜 와중에도 1947년 음악과 독일에 관한 소설이라 할 만한 《파우스트 박사》를 내놓는다. 1952년 미국에서 스위스로 거처를 옮기고 3년 후인 1955년 취리히에서 영면한다.

인문학자이자 도이치어권 대표 번역자. 북유럽 신화, 유럽의 문화와 역사 등 다양한 인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밤베르크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안인희의 북유럽 신화 1, 2, 3》, 《한 권으로 읽는 북유럽 신화: 반지 이야기》,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등이 있고, 번역서로 《데미안》, 《돈 카를로스》, 《르네상스의 미술》, 《히틀러 평전》, 《광기와 우연의 역사》, 《니벨룽의 반지》(전4권),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 있다. 2022년 한독문학번역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번역가상(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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