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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속의 영원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
이레네 바예호 지음 | 이경민 옮김
반비

2023년 04월 20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3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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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5.47MB)
ISBN 9791192908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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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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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출판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작품, 이레네 바예호의 『갈대 속의 영원』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19년 스페인 출간 직후 독자들과 비평가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동시대의 고전’으로 단숨에 올라섰다. 18개월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며 독자들 사이에서 책에 관한 무수한 이야기를 끌어내는 한편, 유럽 각국과 영미권을 비롯한 다수 국가에서 번역 출간될 때마다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스페인 국립에세이상과 ‘인문학 수호를 위한 시민참여상’ 등 여러 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40여 개국에서 출간되고 있다.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여러분이 다음 생에서도 읽고 있을 마스터피스”라 칭한 새로운 클래식, 『갈대 속의 영원』이 드디어 한국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레네 바예호는 어린 시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매료되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문헌학자이자 작가다. 바예호는 고대의 책과 도서관 세계를 연구하기 위해 뛰어든 방대한 자료 속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발견한다. 온 세상의 책을 전부 모으기 위해 말을 타고 누비는 책 사냥꾼들의 이야기, 절대적이고 완벽한 도서관을 만들고자 한 왕의 이야기. 바예호는 이들의 인내와 극기심과 추적의 아드레날린에 올라타 “폭력적이고 격렬한 고대 유럽의 길을 따라 책을 찾는 이들의 피부 속으로”(12쪽) 들어간다. 그렇게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발명품 중 하나인 책을 둘러싼 질문들을 하나하나 탐색해간다. 책은 언제 발명되었을까, 우리의 지식과 사상과 이야기가 글로 쓰이기 시작하며 인류로서의 우리는 어떻게 변신했을까, 어떤 역동이 책을 전파하려 애썼고 또 파괴하려 애썼을까? “책 사냥꾼의 모험을 이어가려는 노력” 속에서,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놀라운 면모를 만나고, 우리 세계의 토대를 쌓아 올리고 “타인과 만날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을 열어주며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511쪽) 만들어낸 책의 천일야화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

1부 미래를 상상한 그리스
즐거움과 책의 도시
온 세상도 그에겐 충분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 친구
심연의 칼날 위의 균형: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박물관
불과 통로의 역사
책의 피부
탐정의 작업
수수께끼이자 낙조로서의 호메로스
잃어버린 구전의 세계: 소리의 융단
알파벳의 평온한 혁명
안갯속에서 나온 목소리들
그림자 읽기
반역적인 말의 성과
최초의 책
움직이는 도서관
문화라는 종교
경이로운 기억을 지닌 자와 아방가르드 여성들
이야기를 엮는 여인들
나의 역사는 다른 사람이 이야기한다
웃음의 드라마와 상실에 대한 우리의 빚
말과 맺은 열정적인 관계
책의 독, 그 연약함
세 번에 걸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파괴
구명정과 검은 나비
우린 그렇게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2부 로마의 길
악명의 도시
패배의 문학
보이지 않는 노예제의 문턱
태초에 나무가 있었다
가난한 작가와 부자 독자
젊은 종족
서적상, 위험한 직업
페이지 책의 성공
물의 궁전에 있는 공공도서관
두 명의 히스패닉: 첫 번째 팬과 성숙한 작가
헤르쿨라네움: 보존하는 파괴
검열에 대항한 오비디우스
달콤한 관성
책 속으로의 여행, 그리고 책의 이름 짓기
고전이란 무엇인가?
정전: 갈대의 이야기
파편화된 여성의 목소리들
영원하다고 믿는 것의 일시성
기억하라

에필로그: 망각된 자들과 무명작가의 작품들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참고 문헌
인명 찾아보기

상하 이집트의 군주는 당시의 가장 강한 권력자로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세상의 모든 책을 채워 넣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왕들이 늘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도) 내줬을 것이다. 그는 유사 이래 모든 작가의 모든 작품을 모을 절대적이고 완벽한 도서관을 꿈꿨다.(11쪽)

책은 시간의 시험을 뛰어넘으며 장거리 주자임을 입증했다. 우리가 혁명의 꿈에서 혹은 파국적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책은 거기에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하듯이 책은 숟가락, 망치, 바퀴, 가위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한번 창조된 이후로 그보다 나은 게 등장하지 않았다.(16쪽)

이 이야기는 책 사냥꾼의 모험을 이어가려는 노력이다. 이 이야기가 잃어버린 원고, 알려지지 않은 역사와 사라지기 직전의 목소리를 추구하는 여행의 불가능한 동반자가 된다면 좋겠다. 어쩌면 그 탐험가들은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왕들에게 봉헌하는 관료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들이 하는 과업의 중대함을 몰랐을 수도 있고 그 일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노천에서 밤을 보내며 모닥불이 꺼져갈 때면 어느 미친놈의 꿈 때문에 목숨을 걸고 있다고 중얼거렸을 수도 있다. 그들은 분명 누비아의 사막에서 폭동을 진압하거나 나일강의 화물선을 검색하는 일처럼 출세할 가능성이 높은 임무를 맡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흩어진 보물 조각 같은 세상의 모든 책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들은 그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이 세계의 토대를 세우고 있었다.(17~18쪽)

그는 다리우스의 소장품 중에서 가장 값비싸고 독특한 보물 상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얼마나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보관해야 할까?” 그가 물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돈, 보석, 향수, 향신료, 전리품을 들먹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을 상자에 보관하라고 명했다. 바로 『일리아스』였다.(31쪽)

프톨레마이오스는 방향을 잃은 채 고립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집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고 의식에도 익숙하지 않았으며 신하들이 자기를 비웃는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드로스로부터 과감함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대가 상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상징을 창조하라. 이집트가 유구한 역사로 위협한다면 과거가 없는 유일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로 수도를 옮기라. 그리고 그곳을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만들라. 신하들이 새로운 변화를 믿지 못하면 모든 사유와 과학이 너의 땅에 모이게 하라.
프톨레마이오스는 엄청난 풍요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박물관에 투자했다.(44쪽)

비록 명백한 증거는 없으나, 나는 알렉산드로스가 보편적인 도서관을 세우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알렉산드로스의 야망의 크기에 비례한 그 계획은 총체화에 대한 갈증을 보여준다. 그가 공포한 첫 번째 칙령은 “지구는 나의 것이다.”였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는 일은 세상을 소유하는 또 다른 상징적, 정신적, 평화적 형식이었다.(45쪽)

두루마리 책을 다루는 건 요즘 책의 페이지를 다루는 것과 다르다. 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인 텍스트 뭉치들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난다. 독자가 이를 읽어가면서 새로운 글을 보려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가고 왼손으로는 읽은 부분의 두루마리를 말아야 한다. 휴지기와 리듬을 요하는 느린 춤과 같다.(68~69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생각해보자. 지금 책을 펼쳐 손에 들고 있는 당신은 신비로운 행동을 하고 있다. 물론 습관이 돼서 스스로 하는 일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며,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글의 흐름을 침묵 속에서 따라가고 있다. 당신은 어느 방에 있을 것이며,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다시 말해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는 환영(바로 내가 쓴 글이라는 환영)이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곳에서 시간은 당신의 호기심 혹은 지루함에 달려 있다. 당신은 영화 장면과 유사한 현실을 창조하고 있다. 그 현실은 오직 당신에게 의존적인 현실이다. 당신은 언제든 이 문장에서 눈을 떼고 외부 세계로 들어가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는 당신이 선택한 현실의 가장자리에 머물게 된다. 이 모든 일에는 마술적 아우라가 있다.(71~72쪽)

알파벳은 인터넷보다 더 혁명적인 기술이었다. 알파벳은 처음으로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확장된 공동의 기억(메모리)을 건설했다. 한 사람의 기억에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문학이 저장될 순 없지만, 책은 모든 이야기와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소크라테스가 예언했듯이, 우리는 무식하면서 거만한 자가 되었다. 혹은 글자 덕분에 세상에 없던 크고 똑똑한 뇌를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견을 지닌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창안한 다양한 도구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책이다. 나머지는 인간의 몸이 확장된 것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며, 전화는 목소리의 확장, 쟁기와 검은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사뭇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154~155쪽)

우리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에 나오는 도망자들, 중국의 학자들, 조로아스터교의 신도들 혹은 안나 아흐마토바의 친구들처럼 부지불식간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암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씨 451』의 한 인물은 “나는 플라톤의 『국가』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의 1장은 그린리버에 살고, 2장은 윌로우팜에 산다.” “스물일곱 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는 버트런드 러셀의 모든 에세이가 살고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나눠서 지니고 있다.”(159쪽)

도서관의 서가에는 서로 적대적인 나라들에서 쓰인 책들도 나란히 놓인다. 그 내용이 서로 적대적이어도 마찬가지다. 사진을 찍는 방법에 관한 책과 꿈의 해석에 관한 책. 세균이나 은하계에 관한 에세이. 탈영병의 회고록 옆에 어느 장군의 자서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작가의 낙관주의적 작품과 성공한 작가의 비관적 작품. 여성 기행작가의 노트들과 자신의 몽상을 세세하게 얘기하는 정주적 작가의 다섯 권의 책. 어제 출판된 책과 20년 된 책. 거기에는 시간의 경계도 지리적 경계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모두 거기 초대되었다. 외국인과 현지인, 안경 쓴 사람, 렌즈 낀 사람, 눈곱 낀 사람, 머리끈을 한 남성들, 넥타이를 맨 여성들 모두 말이다. 마치 유토피아처럼.(197쪽)

필사를 하던 시대에는 책을 보관하는 일이 까다로웠다. 책의 재료가 손상되기 쉬웠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사본을 만들어야 했다. 새로 사본을 만들 때마다 판본을 검토하고 이를 언급해둬야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현자들은 목록집에 있는 모든 책을 그렇게 관리할 수 없었고, 결국 선택을 해야 했다. 『궁극의 리스트』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리스트가 예술사와 문학사의 일부분으로서 문화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백과사전과 사전에서 리스트의 정교한 형식을 볼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들, 즉 문헌 목록, 참고문헌, 차례, 색인, 장서 목록, 사전 같은 것들을 통해 무한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199쪽)

정말 놀라운 사실은 헤로도토스가 그리스인의 버전이 아니라 페르시아인과 페니키아인의 버전만 기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의 역사는 타자의 관점, 적의 관점, 미지의 관점에서 설명함으로써 탄생했다. 이는 25세기가 지난 지금도 매우 혁신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낯선 문화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를 숙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정체성과 대조할 때라야 우리의 정체성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타자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사람이다.(231쪽)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 ‘깜둥이’라는 욕을 지워버린 교수들도 알고 있듯이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동 청소년 도서는 복합적인 문학작품인가, 행동 지침서인가? 수정된 허클베리 핀은 어린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지만 그들에게서 중요한 교훈, 즉 거의 모든 사람이 노예를 ‘깜둥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고 그런 억압의 역사로 인해 그 말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책에서 부적절해 보이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고 해서 청년들이 나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쁜 생각을 인식할 수조차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플라톤의 생각과 달리 사악한 인물들은 아이들이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하는 전통적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이다.(269쪽)

미국의 작가 플래너리 오코너는 “교화적인 책만 읽는 사람은 안전하지만 희망이 없는 길을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겐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연히 좋은 소설을 읽게 된다면, 자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책을 읽는 경험의 일부다. 안도감보다는 안절부절못함이 훨씬 더 교육적이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문학을 성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세상을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다.(269~270쪽)

망각, 말의 소멸, 국수주의, 언어 장벽은 늘 존재한다. 알렉산드리아 덕분에 우리는 번역가, 세계시민, 뛰어난 기억력을 지닌 사람이라는 희귀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사라고사 학교의 왕따였던 나를 매료시켰다. 알렉산드리아가 모든 시대의 무국적자를 위한 종이의 나라를 발명했기 때문이다.(318쪽)

한편 독서를 사랑하는 자유인은 다소 의심을 받았다. 오직 텍스트를 듣는 사람, 글자에 자신의 목소리를 종속시키지 않고 타인이 읽는 것을 듣는 사람만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키케로가 그랬듯이, 사람들에겐 독서 노예가 별도로 있었다. 그 노예들은 책을 읽는 순간 자신이기를 멈췄다. 그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나’를 말해야 했다. 그들은 타인의 음악을 위한 악기에 불과했다. (……) 책을 읽는 것은 알지도 못하는 작가에게 몸을 빌려주는 난잡한 행위였다.(349쪽)

이 농담에는 독서의 역사적 변화가 감지된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로마에서는 새로운 독자, 바로 익명의 독자가 태어났다. 오늘날 친척과 친구들만 읽게 될 책을 출판하는 건 슬픈 일이겠지만, 로마 작가들에게는 그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안전하고 편안한 조건이었다. 경계를 허무는 일, 누군가 한 줌의 데나리우스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많은 작가에게 트라우마적 경험이었다.(377쪽)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트릴세』를 어머니께 선물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집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없었다면 그 뒤로 이뤄진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독서는 장벽을 허물고, 어떤 독서는 낯선 이에게 마음을 열게 한다. 나는 세사르 바예호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를 내 가계도에 접목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증조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세사르 바예호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382쪽)

1990년대 마드리드의 그날 아침, 아버지는 흥미로운 광물을 캐냈다. 겉보기엔 『돈키호테』였다. 천으로 된 표지에 깡마른 돈키호테가 있었다. 첫 장엔 오래된 방패와 결투 이야기가 있을 터였다. 그런데 두 번째 장이 나와야 할 자리에서 다른 작품이 시작됐다. 『자본론』이었다. 아버지는 전에 없이 환히 웃으셨다. 세르반테스와 마르크스로 이루어진 2인승 자전거. 그건 이상한 실수가 아니라 지하에서 유통되던 판본이었으며, 젊은 시절의 살아 있는 기억이었으며, 당대의 유령이었으며, 그가 살아낸 환경이자 속삭임이자 비밀이었다. 수많은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세르반테스에 마르크스를 접붙인 그 책은 그에게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 책이 숨어서 몰래 하던 독서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나는 모르는 시대의 기억과 위협이 내 머리 위를 나는 듯했다. 우리 부모님은 독재자 프랑코가 살아 있는 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하셨다고 한다.(386쪽)

마오쩌둥은 창사시에 서점을 열었다. 사업이 잘되자 그는 여섯 명의 직원을 고용했다. 그의 자본주의 모험은 놀라울 정도로 수익성이 좋았으며 이를 통해 그는 혁명가로서 경력을 시작하던 시기에 수년간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 전에 그는 대학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그곳에서는 독서광으로 기억되고 있다. 46년 후, 그는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그 결과 책이 불타고 지식인들이 굴욕적인 자아비판을 하고 투옥되거나 암살되었다. 호르헤 카리온이 지적하듯, 현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통제, 억압, 집행 시스템을 설계한 사람들, 책을 가장 효율적으로 검열한 사람들은 문화연구자이거나 작가이거나 훌륭한 독자였다.(390쪽)

페이지 구성에 큰 변화가 발생하며 민첩한 독서가 가능해졌다. 텍스트가 단락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제목, 장, 쪽 번호는 독서를 안내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새로운 참조 도구인 목차, 각주, 구두점의 규칙이 통일성을 갖춰갔다. 인쇄된 책은 점점 읽기 쉬워졌다. 목차는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됐다. 독자는 보다 자유롭게 책을 탐색할 수 있게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진땀을 흘리며 읽어야 했던 폐쇄적인 글자의 정글은 평화로운 보행자를 위한 질서정연한 단어의 정원이 되었다.(452쪽)

그녀들은 이야기의 직조자였다. 수 세기 동안 여성은 물레를 돌리며 이야기의 실을 감았다. 그녀들은 그물망을 쳐서 세계를 붙든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은 기쁨, 환상, 고뇌, 공포, 내밀한 믿음을 엮어나갔다. 그녀들은 단조로운 세계에 색깔을 입혔다. 그녀들은 동사와 털실을, 형용사와 실크를 얽어 짰다. 그래서 텍스트(text)와 직물(textile)은 수많은 단어를 공유한다. 우리는 줄거리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 논쟁의 매듭을 짓고, 서사의 갈등을 풀어내며, 연설을 미려한 말들로 수놓는다. 그렇기에 고대 신화가 페넬로페의 천, 나우시카의 튜닉, 아라크네의 자수, 아리아드네의 실, 모에라이가 관장하는 목숨의 실, 셰에라자드의 마법의 양탄자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다.(490쪽)

인종, 피부색, 출신지가 아닌 무엇으로 스코틀랜드, 갈리아, 히스파니아, 시리아, 카파도키아, 모리타니 주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 방대한 확장을 통해 로마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열망을 공유하고, 하나 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언어, 사상, 신화, 책이라는 날실이었다.(495쪽)

책은 끔찍한 사건을 정당화하기도 했지만, 과거에 인류가 건설한 최고의 이야기, 상징, 지식, 발명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우리는 한 노인과 그의 아들을 살해한 살인자 사이의 가슴 아픈 화해에 관해 깊이 생각해본다. 사포의 시에서 우리는 욕망이 저항의 한 형태임을 발견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우리는 타자의 관점을 배우게 되고, 『안티고네』에서 우리는 국제법의 존재를 엿본다. 『트로이아 여인들』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야만성에 직면하며, 호라티우스의 글에서 우리는 “감히 알려고 하라.”라는 문장을 만난다.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는 쾌락을 엿보고, 타키투스의 책을 통해 우리는 독재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며, 세네카의 목소리에서 우리는 최초의 평화주의자의 외침을 듣는다.(506~507쪽)

책은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선례를 물려주었다. 인간의 평등, 지도자 선택의 가능성, 아이들에게 노동보다 교육이 낫다는 직감,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이 모든 발명은 고대의 발견, 즉 불확실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을 통해 가능했다. 책이 없었다면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507쪽)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어둠을 몰아내고, 이야기를 통해 혼돈과 공생하는 법을 배우고, 언어의 공기로 모닥불을 부채질하며, 낯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를 공유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다.(510~511쪽)

이야기란 무엇인가? 그건 말의 연속체이다. 폐를 떠나 후두를 통과하는 공기의 흐름이 성대에서 진동하고 혀가 입천장, 치아, 입술을 어루만지며 최종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깨지기 쉬운 것을 구해내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는 글과 책을 발명

역사, 에세이, 우화를 넘나드는 매혹적인 스토리텔링

책, 독서, 도서관의 역사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테크놀로지의 발전,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책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묵시록적 예언에 반박하는 책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갈대 속의 영원』은 단순한 역사책도 아니고, 책의 중요성에 대한 당위적인 주장도 아니다. 일찍이 『독서의 역사』 등으로 이 장르를 일군 대가 중 한 명인 알베르토 망겔이 언급하듯, 바예호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선택한다. 이 천부적인 스토리텔러는 세계화를 꿈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비전부터 말(구전성)과 글(문자언어)의 싸움, 번역의 탄생, 복제와 상업화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책의 전파까지 무수한 에피소드를 넘나들며 잘 알려진 역사의 새로운 판본을 엮어낸다. 여기에 “모든 시대의 무국적자를 위한 종이의 나라”(318쪽)에서 비로소 존중을 맛본 왕따 어린이였던 저자의 경험, 서슬 퍼런 프랑코 정권 아래에서 『돈키호테』로 시작하지만 두 번째 장부터는 『자본론』이 접붙여진 책으로 금서를 읽었던 부모님의 기억이 겹쳐지며, 독자들 저마다가 간직해온 책과 나눈 이야기로 이끈다.
연구자일 뿐 아니라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은 독특한 소설들을 발표하고 유수의 예술가들과 협업해 그림책을 펴내고 있는 픽션 작가이기도 한 이레네 바예호는 책을 다룬 논픽션인 『갈대 속의 영원』에서도 ‘이야기’를 펼쳐내는 유려한 재능을 발휘한다. 가장 값진 것을 보관하는 상자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뒤통수에 문신을 새겨 말 그대로 피부에 쓰인 비밀 문서를 운반한 고대의 전령, 수레에 책을 싣고 시장과 객줏집에 자리를 잡은 이동서점 상인들, 사서들의 아버지이자 최초로 분류법을 고안한 칼리마코스, ‘시민’에서 배제되었지만 말과 지식을 엮어낸 여성들 사포와 클레오불리나, 서점 장사를 통해 혁명 자금을 댄 마오쩌둥, 금서를 은밀히 필사해 보존한 이교도들 등, 고대 세계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신화적 인물과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책은 그야말로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다. 그리고 이 서사시에 담긴 모험은 그 어느 영웅의 일대기보다 다채롭고 짜릿한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지식과 꿈과 저항을 보존해온 발명품,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

『갈대 속의 영원』은 무엇보다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을 고안하고 지켜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지금껏 무수한 파괴에 맞서며 자리를 지켜왔다. 화재로부터, 홍수로부터, 분서갱유로부터, 검열로부터.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열한 명의 친구들은 작가에게 생길지 모르는 불행에 대비해 작가가 쓰고 있던 『레퀴엠』을 모두 암기해뒀다. 그리스어 텍스트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까지 발견되며 교육과 문화의 기회가 전파되었음을 증명했다. 바예호는 이들이 지식과 사상과 이야기를 지켜냄으로써 우리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음을, 정신적 영토의 경계를 확장해주었음을, 낯선 시대와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주었음을 밝혀낸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 책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위협에 처했다는 불안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레네 바예호는 “책은 숟가락, 망치, 바퀴, 가위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한번 창조된 이후로 그보다 나은 게 등장하지 않았다.”(16쪽)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는 순진한 낭만주의나 낙관의 발로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책이 견뎌온 시간과 여정은 그 자체로 바예호의 단언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이 책은 말을 타고 달리며 책을 찾아 나선 왕의 사냥꾼들로 시작해, 말등에 책을 잔뜩 싣고 험준한 애팔래치아산맥을 누비는 여성들로 끝맺는다. 이 여성들은 왜 책을 짊어지고 깊은 산속으로 향했을까? 그 책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갈대 속의 영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비로소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기원전 3세기 고대인들의 야심과 연결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망각에 맞서 이야기와 지식과 발명을 보존하고 저항과 꿈을 가능케 한 최고의 발명품에 바치는 찬가이며, 책 속에서 연결되는 경험을 해본 모든 독자들을 위한 사랑스러운 선물이다.

작가정보

(Irene Vallejo)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에 매료되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고 사라고사 대학교와 피렌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피렌체 도서관에서 집필한 『갈대 속의 영원』은 출간 직후 독자들과 비평가들의 엄청난 찬사를 받으며 스페인 출판계에 커다란 돌풍을 가져왔다. 2020년 스페인 국립에세이상, 스페인공영라디오의 엘오호크리티코 내러티브상, 스페인 서점조합상, 인문학 수호를 위한 시민참여상 등을 수상했으며, 번역 출간되는 곳마다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40쇄 이상 인쇄됐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40개국이 넘는 지역에서 출판을 앞두고 있다.
학교, 대학, 도서관 등에서 강의하며 고전 세계에 관한 지식을 열정적으로 알리고 있다. 《엘 파이스》를 비롯한 여러 저명한 매체에 기고한다.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역사 소설 『묻힌 빛(La luz sepultada)』과 『궁수의 휘파람(El silbido del arquero)』을 썼다. 여러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여행 발명가(El inventor de viajes)』, 『잔잔한 파도의 전설(La leyenda de las mareas mansas)』 등의 그림책을 펴내 어린이들에게 고전 세계의 이야기를 더욱 가깝게 들려주고 있다. 2020년 말 출판인조합의 의뢰로 독서에 바치는 짧은 찬가인 『독서 마니페스토(Manifiesto por la lectura)』를 출간했으며, 아동병원에 예술과 문학을 전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대학교 유럽언어문화학부(스페인어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제3제국』, 『참을 수 없는 가우초』, 『살인창녀들』(공역), 『보편인종, 멕시코의 인간상과 문화』, 『영원성의 역사』(공역), 『죽음의 모범』(공역) 등이 있으며 엮은 책으로 『로베르토 볼라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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