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이에요, 지금
2023년 03월 28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03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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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구효서 신작
[즐거리]
사랑하는 한 여자를 지키고자 결탁하는
전직 경찰과 수배자, 다정한 전쟁의 기록
동쪽 언덕에 자리한 카페 Tolo의 여주인은 운두가 깊은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고, 산양유로 부드러운 셔벗을 만들어낸다. 휴식차 통영을 찾은 37년 차 소설가 이로는 주인장의 손맛에 빠져들어 어느 순간부터 Tolo의 단골손님이 된다. 그곳에서 이로가 하는 일이라곤 최근 문학상 심사 자리에서 끝내 당선시키지 못한 투고 원고의 내용을 곱씹는 일뿐이다.
원고의 화자 박희린은 1980년대, 25세에 보안분실로 잡혀가 수차례 고문당하고 왼팔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연인 주은후가 주사파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보안분실에서 만난 ‘김상헌’이라는 경찰 공무원은 희린을 연모했는데 고문 수사를 양심선언하다가 파직되었다. 행방불명된 은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희린과 상헌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산다.
7년이 지난 시점에서 희린의 눈앞에 주은후가 나타나고, 얼마간 세 사람은 불안한 나날을 함께한다. 상헌은 희린의 흔들리는 마음까지도 이해하고 쫓기는 신세의 은후를 지키려 한다. 사랑하는 한 여자를 지키고자 결탁하는 전직 경찰과 수배자의 다정한 전쟁은 세 사람에게 불안하면서도 따뜻한 나날로 기억된다. 세월이 흐른 지금, 이로는 Tolo 주인장의 불편한 왼팔을 알아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소리 없이 끌어당기는
같은 도시에 머무는 우연
절박한 떨림에 중독된 자
미워할 수 없는 거라던 말
다른 풍경이지만 어딘가 익숙한
벚꽃이 지기 전에
한낮의 일성호가
오래된 이야기들
에필로그
그녀의 비법이란 그게 전부랬어요. 적은 양의 산양유 휘핑크림. 그래서 그런가 봐요. 아이스크림이라기보다는 셔벗에 가깝거든요. 시원하고 금방 녹고. 그래서 나는 먹을 때마다 셔벗이잖아,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요.
입자 굵은 아이스크림 위에 슬라이스 아몬드 조금 얹고 반으로 쪼갠 생딸기 한 조각(어떤 때는 슬라이스 키위 한 조각) 달랑 올려놓는데 정말 맛있어요.
그걸 한 스푼 떠먹고 나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거든요. 그래서 스프링 목 인형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끄덕끄덕해요. 아이스크림 맛이 낮고 허스키한 주인의 목소리를 닮았어, 하고 끄덕끄덕.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녀가 날 바라본다는 걸 느끼게 되죠. 끄덕끄덕거린 게 쑥스러워서 웃을 수밖에요. 그러면 그녀도 따라 웃어요.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중에서
나는 홀딱 그 집에 빠졌어요. 맛에.
맛에만 빠졌게요. Tolo의 위치. 아담한 크기. 유리창. 나무 테이블과 의자들. 전망.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에게. 네, 주인에게요. 첫날부터. Tolo의 모든 게 결국은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주는 걸 테니까요.
빤히 바라보는 것 같은 그녀의 눈길도 사람을 빠져들게 해요. 물론 그녀에게는 사람을 빤히 바라보겠다는 의지 따윈 없겠죠.
습관 같은 걸 거예요. 어떤 사람은 눈 한 번 깜빡하는 데 0.05초가 걸린다면 어떤 사람은 0.09초가 걸리겠죠. 그런 거겠죠 2초의 응시도. 그래서였을까요. 그녀의 약간 긴 목례를 대하고 ‘뭐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도 0.0몇 초에 불과했으니까.
- 「소리 없이 끌어당기는」 중에서
말 없는 시간이 흘렀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는 한 입 먹다 만 햄버거와 나를 번갈아 보았고 나도 먹다 만 햄버거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7년이 흘러서, 이제야 오다니. 그것도 이렇게, 이런 곳에. 도둑처럼. 또다시 도망쳐야 하는 사람으로.
입을 딱 벌려 먹지 않아서 좋은 햄버거였는데 먹다 만 햄버거라는 건 좀 그랬다. 채소라도 신선했다면 어땠을까. 토마토 슬라이스라도 있었다면. 물어뜯어놓은, 접두사 없는 햄버거의 내장이 너무 초라했다. 그 초라한 걸 언제까지고 내려다보고 있는데,
“팔은 왜 그래?”
그가 입을 열었다.
- 「같은 도시에 머무는 우연」 중에서
낚시할 때 손맛 같은 거야. 물속의 고기가 사력을 다해 몸부림치는 게 낚싯줄과 낚싯대를 통해 손에 전해지잖아. 그걸 손맛이라고 하잖아. 낚시꾼들이 왜 그 맛에 환장을 하게? 절박함이지. 거기엔 절박함이 있거든. 사력을 다해 몸부림친다고 했잖아. 살려고. 생명이니까. 그걸 잃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게 절박함이고, 진짜지. 생명을 건 것이라야 진짜인 거야. 나는 진짜를 맛보고 싶은 거야. 넌 진짜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세상에 진짜가 얼마나 될까. 있다고 해도 그걸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을까. 사람은 말이야, 진짜라는 걸 진짜로 느끼고 알게 되면 웬만해서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어. 중독이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어. 진짜여야만 해소되는 게 있는 거거든. 절박한 떨림. 그건 뭔가와 통하고 닿아 있지. 확실히 느껴지거든. 왜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테러하고 학대하는 줄 아나? 순간이지만 완전한 해소를 느끼려는 거지. 완전한. 세상에 그것처럼 진짜인 게 없으니까. 힘센 놈이 저항하는 것보다 너처럼 연약한 게 더 좋아. 힘센 것은 섬세함이 덜하거든. 외려 손맛을 버릴 수가 있어.
- 「절박한 떨림에 중독된 자」 중에서
창밖 저 멀리 그가 있었다. 주은후는 아까 있던 그 자리,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자정이 넘었으므로 전날이 되어버린 아까의 그 자리에 서서 김상헌이 그랬듯 어두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광경은 내가 김상헌의 곁에 누워 소리로써 떠올렸던 그림과 완전하게 일치했다.
나는 상헌의 곁에 나를 뉘어놓은 채, 혼령이 되어 밖으로 나갔다. 주은후에게 다가갔다. 그가 기대했다는 듯이, 아니면 의외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내가 혼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 「벚꽃이 지기 전에」 중에서
벚꽃 날리는 한낮, 밸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울음이라는 것. 울음과 웃음이 오래 버티기 시합을 한다면 승리는 단연 울음이 차지할 거라고 이로 씨는 확신했다. 몇 사람의 웃음을 이어 붙여도 한 사람의 울음을 따라잡지 못할 거라고.
해가 설핏 기울었으나 밸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무언가의 끝, 바닥에 육박해 버리려는 몸부림. 끝도 없이 한계를 넘어버려 이제 더는 거부할 수조차 없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체념하여 모름지기 울음소리에 순응하게 하고, 마침내는 깨끗하고 어딘가 시원해지게까지 만드는 긴긴 울음.
애끊는 한 곡조의 일성호가치고는 너무 길어서, 끊겼던 애가 도리어 길고 질기게 다시 붙어 하늘과 바다와 공원을 친친 감고 또 감는 것 같았다.
- 「한낮의 일성호가」 중에서
그동안 나는 나이를 먹었다. 더 나이를 먹겠지.
바다 위를 나는 저 갈매기가 없다면 과연 시간은 흐를까.
바람과 저 낙화가 없다면.
나는 그것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산다.
흘러가줘서 고맙다.
- 「오래된 이야기들」 중에서
“흘러가줘서 고맙다”
‘구효서 슬로&로컬 라이프 문학’ 세 번째 작품
벚꽃 핀 남쪽 땅에서 펼쳐지는 운명적인 로맨스 이야기
작품의 소재와 방식에 대한 끝없는 실험 정신으로 문단 내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고 독자의 호평을 받아온 소설가 구효서가 신작 장편소설 「통영이에요, 지금」을 선보인다. 「통영이에요, 지금」은 2021년 제10회 황순원작가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에 이어 ‘구효서 슬로&로컬 라이프 문학’으로 소개되는 세 번째 소설이다.
통영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쪽 언덕에 자리한 카페 Tolo의 주인장은 매일같이 두 팔을 으쌰으쌰 움직이며 운두가 깊은 프라이팬에 생두를 볶고, 산양유로 부드러운 셔벗을 만들어낸다. 휴식차 통영을 찾은 37년 차 소설가 ‘이로’는 운명처럼 Tolo에 흘러들고, 주인장의 디저트에 녹아든 특별한 맛과 깊은 사연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작품은 이로의 일상, 이로가 쓰는 편지, 이로가 읽는 원고, 세 형식을 불규칙적으로 교차하며 시점을 달리하는 독특한 서술구조를 취한다. 많은 청춘들이 푸르게 푸르게 스러져가던 1980년대의 과거와 현재가 병렬되며 조각처럼 흩어져 있던 인물들의 삶은 점차 한 방향으로 수렴해 간다. 사랑하는 한 여자를 지키고자 결탁하는 전직 경찰과 수배자의 전쟁 같은 운명 속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점점 복잡하게 얽혀가는 가운데 사랑과 증오, 뜨거움과 차가움, 기다림과 서두름과 같은 인간의 복합적인 면모와 감정이 낱낱이 드러난다.
통영 바다처럼 잔잔히 흘러가는 나지막한 삶 속에서
흐드러지는 벚꽃처럼 생동하는 문장들
2021년 장편소설『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로 ‘슬로&로컬 라이프 문학’의 첫 시작을 알린 구효서 작가는 지방을 배경으로, 음식과 꽃나무를 매개로 하는 경장편 소설의 매력을 전했다. 신간『통영이에요, 지금』의 배경 도시는 음식과 예술의 고장이자 동양의 나폴리로 잘 알려진 ‘통영’이다. 에메랄드빛 동피랑마을, 짭조름하고 따뜻한 바다 내음이 가득한 강구안,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이순신공원, 하루 치의 제 몫을 다하는 중앙시장 상인들의 걸걸한 목소리. 작가가 그려내는 통영 풍경은 그 공간에 직접 와 있는 듯한 생생한 체험으로 다가온다.
소설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활기를 더해주는 또다른 요소로 ‘음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작중 인물들은 산양유셔벗, 랑그드샤쿠키콘아이스크림, 삼계탕라면, 도다리쑥국 등 소설 속 새롭고 낯선 특산물을 나눠 먹으며 오밀조밀한 정을 나눈다.
한적한 마을에서 기쁘게 먹고 천천히 움직이는 구효서 ‘슬로&로컬 라이프 문학’에서 음식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이미지이자 사건의 전개를 암시하고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정성껏 내린 Tolo식 에티오피아 커피는 과거의 기억처럼
뜨겁고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하고, 주인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산양유셔벗은 가슴 아픈 사랑처럼 차갑지만 달콤하다. 생소한 음식을 보고 듣고 맛보는 감각, 더 나아가 음식으로부터 얻는 위안은 봄날의 벚꽃처럼 포근하다. 생명이 시작되는 이 계절, 경이로운 통영 풍광과 운명적인 로맨스 서사가 어우러지는 진한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등장인물]
이로 등단 37년 차 소설가. 서른여섯 권의 책을 냈다. 휴식차 통영에 머무르게 되고, 카페 ‘Tolo’에 방문한다. 통영으로 떠나오기 전, 소설 심사에서 우연히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발견했다. 다른 심사자들과 의견이 엇갈려 당선시키지 못한 바람에 아쉬움이 남아 작가에게 연락한다. 최근 그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을 편지로 기록한다.
주은후 27세에 주사파 요인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연인 ‘박희린’을 두고 행방불명되었다가 저수지에 빠져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으나, 7년이 지나고 희린의 앞에 나타난다.
박희린 25세에 주사파 ‘주은후’와 연애했다는 이유로 보안분실에 끌려가 수차례 고문받았다. 주은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안분실에서 만난 경찰공무원 ‘김상헌’의 적극 구애로 그와 교제하게 된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르고 눈앞에 주은후가 나타난다. 중년에 이르러 그 이야기를 원고로 써낸다.
김상헌 20대에 보안분실에서 경찰공무원으로 일했다. 희린을 연모하여 고문 수사 실태를 양심선언하고 파직한다. 희린의 전 연인 주은후가 나타나자 희린과 은후의 안위를 지키고자 한다.
작가정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 작품으로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동주』『랩소디 인 베를린』『나가사키 파파』『비밀의 문』『라디오 라디오』『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빵 좋아하세요?』, 소설집 『웅어의 맛』『아닌 계절』『별명의 달인』『저녁이 아름다운 집』『시계가 걸렸던 자리』『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깊어간다』『인생은 지나간다』『소년은 지나간다』가 있다. 이상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의 소재와 방식에 대한 끝없는 실험 정신을 선보임으로써,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독자와 평단 모두에게 사랑받는 작가로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작가의 말
먼 이야기는 저 먼바다로부터 오는가 봐요”
동피랑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산양유 셔벗에 에스프레소를 부어 먹다가 김필의 〈청춘〉을 듣게 되었지요.
그 노래에 붙들려, 앉은 자리에서 이 소설의 첫 챕터를 썼어요. 아는 사람은 알지요. 김창완이 1981년에 부른 노래라는 걸.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정말로 많은 청춘들이 다 피기도 전에 푸르게 푸르게 스러져갔던 엄혹한 시절이었어요.
그래요. 먼 이야기는 저 먼바다로부터 오는가 봐요.
푸르지만 시리고 못내 아팠던 청춘의 빛깔이니까요.
깊게 사무쳐 좀처럼 바랠 줄 모르는.
다시 봄이 오고, 올해도 남쪽 바다 그 도시엔 길 따라 벚꽃이 피겠지요.
소설 속 박희린은 저와 같은 해 태어났어요. 그해 발표된 노래가 있어요. 박재란 선생의 〈산 너머 남촌에는〉이죠. 해마다 봄바람은 남에서 오고, 어느 것 한 가지도 실어오지 않는 게 없다는 노랫말이 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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