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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

조너선 갓셜 지음 | 노승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3년 03월 15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02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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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68129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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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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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이야기는 우리 사회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수많은 책이 스토리텔링의 미덕을 칭송한다. 하지만 ‘이야기 과학’ 연구자 조너선 갓셜은 이야기는 부작용이 있는 ‘필수적 독’이며 이를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문명을 건설한 바로 그 전통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오늘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갓셜은 문학, 사회학, 철학, 진화심리학, 신경생물학에서 가져온 탄탄한 연구 결과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엮어 넣어 독자를 설득한다. 원시시대 동굴 들소의 출현에서 고대 아테네의 황금시대와 트로이목마까지, 도시괴담과 음모론에서 넷플릭스와 《해리포터》 까지 이야기를 종횡무진하며 스토리텔링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러는 사이 독자들은 이야기가 우리 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이 인류의 진화와 문명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런데 그랬던 이야기가 어떻게 환경파괴, 무자비한 선동, 전쟁 같은 문명의 최대 병폐를 일으켰는지 탐구하게 될 것이다.

갓셜이 이 책을 통해 제시하는 문제와 해결책은 사실 동일하다.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사랑하는 동물’ 호모 픽투스임을 자각하라는 것. 책을 통해 이 의미를 알고 나면, 잠에서 깨어나서 맞닥뜨리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의미심장하게 보이는 모험이 시작될 것이다.
머리말: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 011

1. “이야기꾼이 세상을 다스린다” 033
이야기나라의 삶 036 │ 당신이 그 소녀다 043 │ 이야기꾼 045 │ 미디어 등식 048 │허구의 동성애자, 흑인, 무슬림 친구들 055 │나불나불 수다쟁이 061
2. 스토리텔링의 흑마술 066
“이야기의 잘못이 가장 크다” 070 │ 은밀한 설득 073 │ 함정 081 │ “들려주지 말고 보여주라”의 과학 085 │ “비밀 선전원” 088 │ 스토리텔링의 영원한 숙제 092 │ 스토리넷 098 │새로운 판옵티콘 101 │ 2016년 전격전 104 │ 시적인 철학자 108
3. 이야기나라를 장악하려는 대전쟁 111
예술은 전염이다 116 │ 이야기꾼 왕중왕 121 │ 불구가 된 마음 129 │ 팬케이크 지구설 133 │ 유사 종교의 위력(과 위험) 139 │ 승리하지 못하는 이야기 142 │ 쾌활한 선행자의 거대한 음모 146
4. 이야기의 보편문법 148
해피엔드의 고충 153 │ 나쁘지 않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157 │ 공주와 호랑이의 끝없는 전쟁 163 │ 데우스 엑스 마키나 167 │ 제인 오스틴 도식 172 │ 이야기는 부족을 만든다 176◦도덕적이 아니라 도덕주의적 179
5.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면 184
공감적인 사디즘 188 │ 내집단 호의, 외집단 적의 193 │ “역사의 상처” 195 │ 고매한 거짓말과 비루한 진실 199 │ 책들의 전쟁 205 │ 악당 없는 역사 209 │ 악마에 대한 공감 213
6. 현실의 종말 220
당신은 서사의 주인이 아니다… 서사가 당신의 주인이다 226 │ 자유롭지 않은 의지 23
│ 이야기우주 236 │ 몽매화 241 │ 미국 최초의 픽션적 대통령 243 │ 자연적인 것 247 │ 후기 251 │ 학계의 개혁 254 │ 데모칼립스 262 │ 플라톤의 국가, 중국 269

결론: 모험에의 소명 272
감사의 글 287 │ 참고문헌 288 │ 주 332 │ 찾아보기 346

우리가 평생 끊임없이 주고받는 소통에는 하나같이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이란 타인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 최종적으로는 행동을 내가 바라는 쪽으로 하게 구슬리는 것이다. 우리는 소통할 때마다 소소하고 시시한 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약간이나마 구슬리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려 한다.
우리가 입김을 내뿜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노래하는 것은 십중팔구 구슬리기 위해서다. 스스로에게 내뱉는 말조차 그렇다. 내면의 목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긴 힘들지만 오래전부터 심리학자들은 “혼잣말은 충동을 억누르고 행동을 유도하고 목표 달성을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고 단언했다. 말하자면 혼잣말은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스스로를 구슬리는 방법이다.
_ 16쪽 〈머리말: 결코 이야기꾼을 믿지 말라〉 중에서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전 세계 어느 부족에서든 이야기꾼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 이를테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최근 게재된 연구에서 밝혀졌듯 필리핀의 수렵채집 부족 아그타족은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후한 특전을 베푼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고 더 많은 자녀를 낳고 집단 내에서 더 높은 인기를 누린다. (⋯)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훌륭한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며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안겨준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고 높은 지위를 누리는 사람 중에는 스타 작가, 영화 제작자, 배우, 코미디언, 가수처럼 허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포브스》에서 발표한 세계 최고 부호 유명인 명단의 맨 위에는 이런 이야기 장인들이 올라 있으며 운동선수는 그다음이다.
_48쪽 〈1. “이야기꾼이 세상을 다스린다”〉 중에서

“들려주지 말고 보여주라”라는 격언은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메시지보다 간접적이고 은근한 메시지로 더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깨달은 이야기꾼들의 집단적 지혜다. 이것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진부한 클리셰 중 하나지만 여느 진부한 클리셰가 그렇듯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 최근 연구자들은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보다는 암묵적이고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가 더 설득력이 있음을 밝혀냈다. 의사소통 연구자 마이클 달스트럼(Michael Dahlstrom)은 《국립과학원회보》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사적 설득을 저해하는 것으로 알려진 몇 안 되는 실수 중 하나는 설득하려는 의도를 들켜 청중이 휘둘리지 않으려고 저항하게 만드는 것이다.
_ 86쪽 〈2. 스토리텔링의 흑마술〉 중에서

내가 보기에 그는 플라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 같다. 하지만 플라톤 시대부터 사람들이 꿈꾼 모든 전체주의 유토피아의 으뜸가는 통치 법칙이 이야기를 통제하고 독점하는 것이라는 포퍼의 말은 옳다. 이 법칙은 나치 독일, 소련, 북한, 크메르 루주 치하 캄보디아, 마오쩌둥 치하와 현재의 중국을 비롯한 20세기의 모든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실험에 예외 없이 들어맞는다. 이 정권들은 모두 언론에서 예술에 이르는 모든 형태의 스토리텔링을 독점하려 들었다. 국가의 메시지 전달 요구를 따르지 않는 이야기꾼은 살해당하거나 굴라크로 추방되었다. 현실을 허구화한 버전을 (적어도) 믿는 척하길 거부한 사람들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이 정권들은 이야기나라를 우선 지배하지 않고서는 현실 세계를 지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_ 114쪽 〈3. 이야기나라를 장악하려는 대전쟁〉 중에서

음모론에서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이해해야 할 것은 명칭 자체가 오류라는 사실이다. 이론이라는 낱말을 들으면, 거짓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서사를 사람들이 믿는 것은 이성적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끝없이 다채로운 음모론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성이 아무 이유 없이 천방지축 날뛰기 때문이 아니라 효과적인 이야기 때문에 천방지축 날뛰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편집증적 판타지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도록 하자. 그것은 ‘음모담(陰謀譚)’이다.
_ 130쪽 〈3. 이야기나라를 장악하려는 대전쟁〉 중에서

이야기라는 낱말에 담긴 심판자적 의미는 고대 그리스의 지식과 더불어 사멸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에 담긴 판단은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미디어 심리학자 돌프 질먼 말마따나 이야기는 소비자를 “등장인물의 의도와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도덕 감시자”로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감시자 역할을 신나게 수행한다. 우리는 의분의 감각과 정의 실현의 만족감을 좋아한다. 문학자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비평의 해부A》(1957)에서 말하듯 “잔혹한 스릴러의 멜로 드라마를 읽으면서 우리는 린치를 가하는 군중의 순수한 자기의(自己義)에 예술이 정상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최대치까지 다가간”다. 연구는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들은 범죄자가 용서받는 이야기보다는 처벌받는 이야기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_ 183쪽 〈4. 이야기의 보편문법〉 중에서

언젠간 우리 후손들이 과거를 돌아보며 공장식 축산이나 고삐 풀린 탄소 경제처럼 우리가 아는 죄뿐 아니라 우리가 알았어야 마땅한 죄까지 거론하며 우리 중에서 가장 계몽된 사람들에 대해서조차 비난을 가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악당으로 몰아세운 것을 보고서, 도덕적 판단의 지독한 위선을 보고서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백인과 흑인, 진보와 보수, 신자와 불신자, 여성과 남성이 상대방의 도덕주의 연극에서 악당으로 단순화된 것을 보고서 말문이 막힐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악당으로 만들어 그를 비인간화함으로써 (증오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결함에 탐닉할 수 있는 자유 이용권을 스스로에게 발급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악당으로 만든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악행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거나 배상 의무를 면제해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서툰 판단으로 우리의 도덕적 행운을 도덕적 선함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_ 218쪽 〈5.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면〉 중에서

나의 논점은 인간의 마음이 이야기의 공백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질서한 사건들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면 미리 만들어둔 서사 거푸집을 꺼내어 무질서에 대고 힘껏 찍어 누르거나 신뢰하는 정보 공급원을 찾아가 자신이 선호하는 서사를 찍어 누른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서사로 찍어낸 복제품을 얻게 되며,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으깨거나 잘라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서사 거푸집을 이용하여 자신의 진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날조한다.
_ 231쪽 〈6 . 현실의 종말〉 중에서

“이야기꾼이 세상을 다스린다.
이야기꾼을 모조리 추방하라! ”
플라톤이 태어난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는 ‘살육의 시대’였다. 당시 아테네는 대역병(Plague of Athens)과 잔혹한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아테네인을 극한의 분열로 몰아붙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곧바로 내전에 돌입했다. 찬란했던 민주정이 막을 내리고,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많은 목숨을 앗아간 중우정치가 고개를 들었다. 이로 인해 플라톤은 정치가의 꿈을 접고 철학자가 되어, 2400년 동안 명성을 떨칠 주저 《국가》를 집필한다. 한데 ‘이상국가’ 건설에 대한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조목조목 담은 이 책의 마지막 권에는 뜬금없지만, 의미심장해 보이는 대목이 등장한다. 유토피아에 이르려면, “이야기꾼(시인)을 모조리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왜 아테네의 멸망을 보며 이야기꾼을 내쫓으라고 갈파했을까? 그때 그는 무엇을 봤던 걸까?(66~70쪽)
그로부터 2400년 후 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해 ‘이야기 과학’을 연구하는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코로나19의 대유행, 계속되는 전쟁, 포퓰리즘 선동가의 부상, 불평등과 양극화로 인한 계급적 긴장, 그리고 각종 궤변 때문에 동일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탈진실 세계의 도래를 보며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생존과 진화를 보장한 연장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오늘날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실은 ‘이야기’가 세상에 수많은 혼돈, 폭력, 오해를 일으키는 주범인데,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대로 흘러가게 그냥 둔다면, 플라톤이 목도했던 것을 나도 보게 되는 게 아닐까?
그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마지막 메시지처럼 이야기꾼을 모조리 추방할 순 없었다.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본성이므로 그건 또 다른 종말을 의미했다. 갓셜은 ‘이야기 과학’ 연구자답게 문학, 사회학, 철학뿐 아니라 진화심리학과 신경생물학에서 근거를 가져와 인류를 설득할 작품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사람을 구워삶는 데 이야기만큼 힘이 센 것은 없으므로, 작품의 서술 방식은 당연히 ‘이야기’다.

“진화는 이야기를 위해 마음을 빚었고,
마음은 이야기에 의해 빚어진다”
갓셜의 이런 주장에는 사실 꽤 근거가 있다. 일단 그 근거이자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인 ‘스토리텔링 본성’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1908년, 모험가들이 프랑스 튀크 도두베르 동굴에서 진흙으로 빚은 들소 형체를 발견한다. 동굴 입구에서도 강물을 건너고 수직굴을 기어 올라 1킬로미터는 가야 볼 수 있는 이 진흙 들소는 약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이 들소 두 마리가 종교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통로 주변의 어른과 아이들의 발자국으로 신, 정령, 기원, 종말 등 부족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부족원들이 이곳을 찾았음을 알아냈다(274쪽). 이 연구는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스토리텔링이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본성이라는 것. 둘째는 우리가 이야기를 탐닉하기 위해 목숨도 거는 종이라는 것.
인간의 본성 깊숙이 새겨진 ‘이야기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강력해서 인류의 진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어떻게 이 모든 지혜를 이해 가능하고, 전달 가능하고, 설득 가능하고, 실행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한마디로 어떻게 착 달라붙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해법이 발견되었다. 스토리텔링이 해법이었다”라는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말처럼(46쪽), 인류는 이야기를 통해 지식을 전수하고, 서로를 설득해 이해를 증진했으며, 공감을 강화하여 집단을 결속했다. 그렇게 문명을 건설했다.
인류의 이야기 사랑은 수만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이야기’ 같은 고리타분한 것에 요즘 누가 관심을 쏟느냐고 반문하기 전에 당신의 일과를 되짚어보라. 당신은 교재나 책, 뉴스기사를 읽는 데 몇 분을 쓰는가? 리얼리티쇼, 시트콤, 다큐멘터리 등을 보는 데는?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커뮤니티를 일별하는 데는? 게임을 하는 데는? 대중가요나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듣는 데는?
기술 발달 이전에는 춤, 노래, 미술, 대화 정도가 이야기의 전부였지만, 오늘날 인간은 비대면으로도 24시간 내내 계속되는 ‘이야기 과잉 시대’에 산다. 물론 이야기가 문명을 발전시킨 것처럼 좋은 쪽으로 힘을 발휘한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야기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어두운 측면으로도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다. 이야기꾼이 그렇게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이야기 과학’의 핵심 ‘서사이동’부터
‘이야기에 빠진 뇌’의 비밀까지
이야기의 다크 포스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에겐 풀어야 할 의문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대체 인간의 ‘뇌’와 ‘이야기’에 어떤 메커니즘이 숨어 있기에 우리를 쥐락펴락하느냐는 것이다.
‘이야기 과학’의 핵심을 하나 꼽자면, ‘서사 이동(narrative transpor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사이동이란 “책을 펼치거나 텔레비전을 켜고 일상에서 벗어나 대안적 이야기 세계로 정신적 순간이동을 하는 미묘한 감각”을 말한다(52쪽).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때는 몇 가지 현상이 잇따른다. 첫째, 서사이동을 할 때 우리는 현실 세계뿐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분리된다. 둘째,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이야기의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선입견이나 편견을 잊는다. 셋째, 이를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도 한다(52쪽).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에 ‘빠진다.’
이야기가 강력할수록 우리는 주인공에 깊이 이입해 허구에 대한 불신을 유예하고(61쪽), 강렬한 감정을 활성화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119~120쪽). 한마디로 우리는 ‘설득’당한다. 《뿌리》의 쿤타킨테를 보고 흑인에 대해 관대해진 것도, J.K. 롤링의 《해리 포터》를 읽고 소외된 ‘타자’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줄어든 것도(186쪽), 약 2000년 전 한 줌의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널리 퍼뜨려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전 세계 31.5%를 차지하게 된 것도 다 이 덕분이다(121~128쪽).
그런데 서사이동에도 치명적인 양면성이 있다. 서사학 교수 톰 판라르(Tom van Laer)에 따르면 “서사이동은 신중한 판단과 논증 없이도 지속적 설득 효과를 낳는 정신 상태”다. 즉, 엄청나게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있다면, 인간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무력화’한 채, 정보와 믿음을 ‘주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54쪽). 그것이 파벌적 단합을 부추기는 선동이나 구매 권유, 《나의 투쟁》 같은 소수 집단에 대한 악의적 메시지일지라도 말이다(100쪽).
실제로 ‘이야기에 빠진 뇌’에 대한 비밀을 푼 학자, 기업, 종교인, 정부기관들은 이미 디지털 데이터를 수집해 더 솔깃하고, 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궁극적으로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는 맞춤형 서사를 우리에게 공급하고 있다(101~104쪽). 러시아는 이를 ‘전술’로 사용하고, 중국은 ‘정책’에 반영하며,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각종 온ㆍ오프라인 광고, 그리고 뉴스기사, 음모론과 사이비종교, 카더라 소문까지, 이는 예외 없이 적용 중이다.

스토리텔링의 ‘보편문법’과 ‘흑마술’
물론 이 맞춤형 서사를 주입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의 자물쇠를 열어 서사이동의 황홀경에 빠뜨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전제가 따른다. 그러나 갓셜에 따르면 ‘성공하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요소’는 매우 단순하다. 또한 놀랍게도 원시시대 구술 민담부터 현대의 유튜브 쇼츠에 이르기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궁금해할 그 비법은 단 두 가지다. 첫째, 이야기는 말썽에 관한 내용일 것. 둘째, 이야기에 깊은 도덕적 층위가 있을 것(152쪽).
수렵채집 생활의 황금률은 무척 단순했다. “집단을 단결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라. 집단을 분열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지 말라.” 이야기의 보편문법은 이런 원시적 집단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부족은 ‘시적 정의’라는 주제의 이야기를 끝없이 되풀이함으로써 ‘이기적 악인’보다 ‘이타적 선인’이 더 큰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강 건너 부족을 ‘악마화’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기게 하고 집단을 결속시켰다. 그리고 이 옛 이야기꾼의 후손인 우리가 땅을 물려받았다. 문제는 이렇게 오래된 우리의 스토리텔링 본성이 현대 사회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해 ‘격차’가 생겼다는 것이다(193~194쪽).
우리의 서사심리가 진화하는 내내 조상들은 작은 공동체를 이뤄 살며 혈연, 언어, 민족, 그리고 같은 문화적 정체성 이야기에 의해 하나로 뭉쳐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현대인들은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 살며, 셀 수 없이 다양한 정체성으로 갈가리 찢겨 있다. 한쪽에선 ‘말썽’과 ‘권선징악’이란 보편문법에 맞춰 자신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다른 쪽에선 그것을 이용해 타자에 대한 ‘적의’를 부추긴다. 테크의 발달로 우리는 편향된 ‘이야기우주’에 24시간 틀어박혀 살며, 자신이 솔깃한 이야기들을 주변인들에게 끝없이 공유한다. 이제 인류는 같은 현실에 살면서도 다른 것을 보는, 탈진실의 ‘인포칼립스(Infocalypse)’에 들어섰다(264쪽).

“호모 픽투스여,
새로운 모험을 떠날 시간이다”
오늘날 문명이 실존적 위기를 맞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여러 학계에서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만, 우리는 ‘이야기’라는 낱말이 주는 호감과 무해함 때문에 그것이 원인임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갓셜이 이 책을 내놓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슬기로운 동물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이야기에 중독된 동물 ‘호모 픽투스’임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과 사회에 작용하는 은밀한 방식을 똑똑히 알리고, 각성시키기 위해서. 인문학과 과학에서 연구된 탄탄한 학문적 근거에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야기’를 엮어 넣어 그는 이 책을 썼다. 만약 갓셜의 이야기가 우리를 서사이동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책장을 덮고도 그의 메시지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의분(義憤)를 일으킬 때, 그 이야기꾼이 과장, 위조, 비논리 같은 허튼소리를 끼워 넣은 건 아닌지 의심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인류는 플라톤이 본 광경을 또다시 목도하지 않을 수 있다.
갓셜이 제안하는 것은 현생인류가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모험’의 길이다. 힘겨운 도정을 떠나는 호모 픽투스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가 제안하는 너그러운 경험칙을 남긴다(285쪽).

이야기를 증오하고 거부하라.
하지만 이야기꾼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라.
그리고 평화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이야기에 말 그대로 반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들을
경멸하지 말라.

작가정보

Jonathan Gottschall
워싱턴·제퍼슨대학 영문학과의 연구원이며 과학적 인문학 운동의 선두 주자다.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 밑에서 연구했다. 대표 저서인 《스토리텔링 애니멀》은 《뉴욕타임스》 ‘편집자의 선택’으로 선정되었으며, 《동굴 속 교수The Professor in the Cage》는 《보스턴글로브》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 밖의 출간작으로는 《트로이의 강간The Rape of Troy》 《문학, 과학 그리고 새로운 인문학Literature, Science, and a New Humanities》 《진화, 문학 그리고 영화Evolution, Literature, and Film》가 있고, 과학과 예술을 교차하는 그의 연구는 《뉴욕타임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뉴요커》 《애틀랜틱》 등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스티븐 핑커는 조너선 갓셜에 대해 “탁월한 젊은 학자로, 그의 저작은 명료함과 재치, 흥미를 두루 갖추었다”라고 평했다. 펜실베이니아주 워싱턴에 산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컴퓨터 회사에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환경단체에서 일했다. ‘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한다. 박산호 번역가와 함께 《번역가 모모 씨의 일일》을 썼으며, 갓셜의 전작 《스토리텔링 애니멀》을 포함하여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오늘의 법칙》 《서왕모의 강림》 《에 우니부스 플루람》 《여우와 나》 《끈 이론》 《유레카》 《시간과 물에 대하여》 《향모를 땋으며》 《약속의 땅》 《자본가의 탄생》 《새의 감각》 《나무의 노래》 등 다수의 책을 한국어로 옮겼다. 2017년 《말레이 제도》로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제35회 한국과학기술도서상 번역상을 받았다. 홈페이지(http://socoop.net)에서 그동안 작업한 책들의 정보와 정오표, 칼럼과 서평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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