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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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인포크라시
소통행위의 종말
디지털 합리성
진실의 위기
주
“정말로 자유로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정보들이다. 정보사회의 역설은 사람들이 정보 안에 갇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소통하고 정보를 생산함으로써 자기를 사슬로 묶는다. 디지털 감옥은 투명하다. ”_15쪽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정보체제가 의식의 문턱보다 낮은 수준에서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정보체제는 의식적 행위에 선행하는 선반성적, 충동적, 감정적 행동 층들을 장악한다. 데이터에 의해 추진되는 정보체제의 심리정치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행동에 개입한다.”_23쪽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인지 수준에서 시작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 짧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 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는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는 인지 시스템을 동요시킨다. 정보에 내재하는 가속 강박은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시간집약적 인지 실행들을 몰아낸다.”_35쪽
“밈 전쟁은 디지털 소통이 시각적인 것을 텍스트적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주지하다시피 그림은 텍스트보다 더 빠르다. 담론과 진실은 바이러스적이지 않다. 소통의 시각화가 강화되는 것도 민주주의적 담론을 방해한다. 왜냐화면 그림은 논증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느리고, 호흡이 길고, 지루하다. 따라서 정보의 바이러스적 확산 곧 인포데믹은 민주주의적 과정을 심하게 훼손한다. 논증과 정당화를, 바이러스와 맞먹는 속도로 확산하고 증식하는 트윗이나 밈에 집어넣을 길은 없다.” _43-44쪽
“디지털 종족들의 탈사실적 우주에서 발언은 더이상 사실 관련성을 아예 띠지 않는다. 따라서 발언은 어떤 합리성도 없다. 발언은 비판 가능하지도 않고 반드시 정당화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 발언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소속감을 얻는다. 요컨대 담론은 믿음과 고백으로 대체된다. 이제 각각의 종족 구역 바깥에는 단지 적들만, 무찔러야 할 타인들만 존재한다.” _58쪽
“인공지능은 정당화하지 않고 계산한다. 논증의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선다. 논증은 담론 과정에서 개선된다. 반면에 알고리즘은 기계적 과정에서 계속 최적화된다. 이를 통해 알고리즘은 스스로 자신의 오류들을 수정할 수 있다. 디지털 합리성은 담론적 배움을 기계학습으로 대체한다. 그렇게 알고리즘이 논증을 흉내 낸다.”_65쪽
“포스트모던이 선도하는 장대한 이야기(grand narrative, 거대서사)의 종말은 정보사회에서 완성된다. 이야기는 정보들로 파열한다. 정보는 이야기의 맞수다. 빅데이터는 장대한 이야기와 대립한다. 빅데이터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디지털은 프랑스어로 ‘numérique’(‘수적인numerisch’이란 뜻도 있음-옮긴이)이다. 수적인 것과 서사적인 것, 셀 수 있는 것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질서에 속한다.”_93쪽
“감염병 대유행 위기에서 ‘사건번호’나 ‘발병률’ 같은 순수한 수들은 근본 불안을 고조시킨다. 왜냐하면 순수한 수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낱 숫자 세기는 이야기를 향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감염병 대유행 위기는 음모론의 온상이다. 음모론은 총체적 설명 혹은 총체적 거짓말로 견디기 힘든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단번에 제거한다.”_94쪽
“진실은 지난날의 짧은 에피소드가 될 것이다.”
정보체제가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방식에 대한 세밀한 묘사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 변화는 우리의 지각,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 우리의 공동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우리는 소통과 정보에 도취하여 혼미한 상태다. 정보의 쓰나미가 파괴적인 힘들을 발휘한다. 어느새 그 쓰나미는 정치 분야마저 덮쳐 민주주의적 과정에 막대한 혼란과 장애를 유발한다. 민주주의가 인포크라시로 변질하고 있다.”(27쪽)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정보’를 키워드로 삼아 그린 사회적 초상을 담은 《정보의 지배》가 출간되었다. 그는 《투명사회》《심리정치》와 같은 저작부터 최근작인 《사물의 소멸》에 이르기까지 ‘정보의 현상학’을 천착하면서, 디지털 문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선보여왔다. 이번 책에서 한병철은 드디어 ‘정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고 우리가 매 순간 다루고 있거나 그것의 일부가 되고 있는 정보가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특히 어떻게 민주주의적 과정에 거대한 균열을 내고 있는지를 밝힌다.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강화하는 음모론, 정보 전쟁이 된 선거전, 이야기하지 않고 계산하는 빅데이터, 선동과 증오를 퍼트리는 소셜 봇과 댓글 부대, 바이러스적인 특성을 보이는 밈 등을 살펴보면서 말이다.
책의 주제이자 독일어판 원제이기도 한 ‘인포크라시(Infokratie)’는 저자가 새로이 발굴해 사용하는 개념어로, 정보체제 내에서 민주주의(Demokratie)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지배 형태를 뜻한다. 본래 민주주의의 정치적 공론장 형성에는 책이라는 미디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중매체의 등장 이후 지배 형태는 텔레크라시와 씨어터크라시로 변질했으며, 여기에서 또 변화한 인포크라시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은 정보의 정치학에 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는 공론장의 구조변동과 의사소통행위에 관한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롯, 루소·니체·벤야민·푸코·아렌트·쇼샤나 주보프·해리 프랭크퍼트 등의 이론을 경유하여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정보체제는 우리의 감각과 인지를 어떻게 분열시키며
그것은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오늘날의 정보체제는 산업자본주의의 지배 형태인 규율체제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생명정치적인 규율체제의 예속된 주체들은 억압적 권력에 순종적이고 고분고분하지만, 심리정치적인 정보체제의 예속된 주체는 “자기가 자유롭고 진정성 있고 창조적이라고”(10쪽)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능동적 송신자다. 모든 사람이 항상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제 중독적이고 강박적인 형태마저 띤 소통 도취가 사람들을 새로운 미성숙 상태에 가둔다.”(34쪽)
스마트폰과 인터넷과 SNS를 통해 다루어지는 정보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무의식의 차원에서부터 바꿔놓는데, 그 변화는 소통과 담론과 정치, 즉 민주주의적 과정들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35쪽) 또 정보의 이런 특성은 사실성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하는 총체적 거짓말인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확산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는 종족주의와 정체성 정치의 강화로 이어진다.
정보체제에서 많은 시간을 거쳐 구성되는 ‘담론’이나 시간적 연속성을 창출하는 ‘이야기’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하지만 이 과정이 시간적 연속성만 와해시키는 것은 아니다. 주장은 반박될 가능성을 지닐 때만 소통적 합리성을 지니며 타인의 목소리가 있어야 비로소 나의 의견에도 담론성이 주어지는데, 정보체제는 반박가능성과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린다. 담론과 타당성 주장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과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계적 계산을 통한 관리가 남는다.
“정치는 데이터 주도의 시스템 관리로 대체된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정들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내려진다.”(69쪽) 하지만 정보에는 ‘방향 설정력’이 없다. “진실은 정보의 옳음 혹음 맞음 그 이상”(91쪽)인데 말이다. 소통적 합리성이 아니라 산술적 합리성을 지닌 인공지능으로 진실을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이 챗 GPT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인공지능의 세기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희미해져가는 ‘진실을 향한 충동·의지·용기’와 ‘경청 능력’이 민주주의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며 그 실마리를 찾는다.
대립되는 두 개념과 낯선 비유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가
변증법적 논증과 문학적인 형식 속에서 고유한 빛을 발하는 철학적 사유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현상과 관련하여 대립되는 두 개념항을 설정하고 비교·대조를 통해 해당 현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측면을 탁월하게 포착해내고 있으며, 환유와 제유와 같은 비유와 묘사, 용어 분석 등을 통해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언어화하기 어려웠던 현상에 대한 통찰을 준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대립항으로는 규율사회와 정보사회, 고립과 연결, 생명정치와 심리정치, 담론과 정보, 정치와 관리, 정당화와 계산, 정치인과 전문가(컴퓨터과학자), 소통적 합리성과 디지털 합리성, 이야기와 숫자, 거대서사와 빅데이터, 의견과 정체성, 행위와 소비, 손과 손가락 등이 있는데, 이 개념과 그 현상을 천천히 보는 과정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두 대립항의 절대적 구분과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이 개념항을 도구 삼아 변화와 차이 속에서 무엇이 지속되고 있는지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1959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고,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했다. 베를린예술대학교 철학·문화학 교수를 지냈다. 전 유럽과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피로사회》를 비롯하여 《사물의 소멸》 《리추얼의 종말》 《고통 없는 사회》 《폭력의 위상학》 《땅의 예찬》 《투명사회》 《심리정치》 《타자의 추방》 《시간의 향기》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선불교의 철학》 《권력이란 무엇인가》 《죽음과 타자성》 《하이데거 입문》 《헤겔과 권력》 등 예리하고 독창적인 사회 비평서와 철학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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