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뱀 메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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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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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의 구조, 로맨틱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상사뱀 메소드》는 리허설 없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미옥의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행위, 그리고 이를 이끌어내는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비춘다.
더블 캐스팅 61p
맥거핀 99p
키노드라마 135p
오마주 187p
논다이어제틱 사운드 223p
모티프 275p
시퀀스 319p
미장센 357p
작가의 말 369p
프로듀서의 말 373p
우리는 틈새에서 태어난다. 하지만 근원을 잊기 위해 무수한 시도를 하며 산다. 근원을 기억하는 일은 끔찍한 아름다움을 동반하니까. 사람에게는 다듬어진 껍질만 보려는 습관이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두려워하면서. 미학은 신이 부여한 원칙을 어기고 선악과를 깨물던 이브의 순간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본능은 아름다움에 이끌린다. 그러나 진실을 속삭이는 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한, 영혼은 굶주린 채 평생을 산다.
p. 9 | 인트로덕션
그는 세 번이나 이혼 경력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돈 많고 머리만 좋지 속은 변변찮은 남자임이 분명했다. 그보다 나는 정신이 다른 데 쏠려 있었다. 나와 상관도 없는 이혼남 이야기보다 더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이미 전속 피부과도 따로 있는 상황에서 굳이 병원을 옮길 필요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알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은…… 영현. 그 여자였다. 영현의 소식을 오랜만에 들었다. 나의 끔찍한 첫사랑.
p. 21 | 인트로덕션
그는 자신과 결혼해 주겠는지 물었고 나는 승낙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상한 그리움에 휩싸였다. 실체를 알 수 없 는 결핍, 무엇을 염원했는지조차 부질없어지는…… 공허하고 끈질긴 감각.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이 덧없는 고통도 끝날 테지. 내가 철중에게 바란 건 오직 이것이었다. 영현이 내게 절대 로 줄 수 없는 걸 이 남자가 줄 것이다.
p. 69 | 더블 캐스팅
가엾은, 정말로 가엾은 영현. 너는 온몸이 마르도록 날 원했다. 그는 안경 너머 움푹하고 깊은 눈으로, 얇은 뺨으로,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과 뱀이 그려진 목덜미로, 둥글게 굽은 어깨와 목으로 종이 앞에 앉아 글자마다 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기회가 지 났다. 나는 결혼했고 남편이 생겼다. 영현은 날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자꾸 극본에서 풍기는 비린 흙냄새가 떠올랐다. 그건 나를 갓 태어난 뱀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난 향수가 느껴 질 때마다 표지를 손톱으로 쓰다듬었다. 외국어로 적힌 활자들은 구불거리는 뱀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금방이라도 달려오려는 것처럼. 영현이 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종이 안에 넘쳤다.
p. 105 | 맥거핀
“참……. 오후에 CCTV 기사가 오기로 했어.”
“CCTV요?”
“그래. 이 집에 손님들이 오는 건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대부분 창고에 작품들을 보관하긴 했지만 여기 있는 다른 물건들도 꽤 가치가 높은 것들이잖아. 혹시 모르니 설치해 두는 게 좋겠어.”
“왜 아무런 상의도 없이 사람을 불렀어요? 그건 꼭 손님들 과 날 의심하는 것 같은데요.”
난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얼마 전 철중과의 대화가 생각났다. 잘 무마했다고 생각했는데, 철중은 한편으로 여전히 날 의심하고 있었다.
p. 154 | 키노드라마
여자들만 남은 저택에서 고민에 빠진다. 바깥에 나가려고 하면 가정부들이 앞을 막아선다. 철중의 지시대로 나의 외출을 방해한다. 난 코웃음을 쳤다. 여자들만 남기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철중의 지시에 순종하는 그들이 아니꼽다. 철중은 날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꾸준히 실패할 것이다. 나에 대해 진정으로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어떻게 날 가진단 말인가.
p. 228 | 논다이어제틱 사운드
“우리에겐 본질을 사랑하는 능력이 있어. 말은 수단일 뿐. 뼛속까지 느껴지는 네 감각만이 진짜야. 우린 〈사의 찬미〉로 연결되어 있어. 상사뱀들처럼. 한 번도 헤어진 적 없지. 절대로.”
p. 283 | 모티프
흐릿한 윤곽만으로도 그가 꽤 불안정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미옥은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고, 수족을 가만두지 못했다. 갑자기 손목을 뒤틀다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귀신에 빙의된 사람처럼 섬뜩했다. 혹시 뱀들을 가져오기 직전인가? 저 여자가 왜 저러지? 김 씨는 미옥이 하는 일을 정확히 보려 화면을 확대했다. 미옥은 석고상 사이를 돌아다니며 허공을 향해 소리치거나 무언가를 읽었다. 그 손에 해진 종이 뭉치가 보였다. 철중이 미옥과 경찰들에게 보냈다던 70장의 고발장이 떠올랐다. 그걸 읽는 중인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미옥이 하는 행위들은 일종의 연극 리허설 같았다. 은퇴한 배우가 하는 행태치고도 수상했다. 굳이 저 장소에서 저러는 이유가 뭘까. 어디 사이비 종교의 의식에라도 빠진 건 아닐까.
p. 336 | 시퀀스
지하에서 뱀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과거의 허물을 찢으며, 자신의 사인(死因)을 찬양한다.
당신이 죽은 자리, 내 욕망이 태어난 자리에서.
p. 367 | 미장센
어느 여배우에 관한 오해
그러나 나이가 들고 눈가에 주름이 하나둘 늘자 날 버리려 했다. 그들에게 뱀이란 매끈하고 유연하며 언제나 번들거리는 모습으로 상대에게 감겨들어야 하니까. 미끈거리는 살갗으로 그들의 육체를 만족시켜야 하니까. 멍청이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뱀들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다. 뱀은 자신을 찢고 나온다. 매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언제든 독니를 드러내어 상대를 통째로 삼킨다. (……) 나라는 여자는 섹스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존재임에도 사람들은 내 육체만을 보았고 육체로만 소비했다. 〈상사뱀〉. 그 작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화였다. 철중에게 그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늙은 남자의 환상을 깨는 짓은 가혹하니까.
정이담의 장편 소설 《상사뱀 메소드》의 미옥은 주인공을 유혹하고 만족시킨 다음 희생되는 팜 파탈로 소비되다 잊힌 배우다. 그는 안정 이상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자신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의사 철중을 유혹하고, 이 과정은 그가 출연한 숱한 영화에서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수월하다.
“그렇게 하죠, 어쩌면 의사 선생님께는…… 제 본모습을, 모든 밑바닥을 보여 드려도 괜찮을 것만 같아요. 이상한 예감이죠. 그런데 제 감은 틀린 적이 없어요. 선생님, 이게 여자에게 어 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 어느 예술가에 관한 진실
영현을 생각하자 온몸이 차가웠다. 목을 쥐인 냉혈 동물처럼. 모든 피가 심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목덜미의 반점이 욱신거렸다. 고온의 불은 오히려 푸르고 서늘한 법 이다. 영현은 그만큼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열렬히 끌렸다. 지금 이 욕망은 여배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 집착은 예술가의 열망이었으니까. 난 그와 함께 예술로 승화되고 싶었다. (……) 영현의 살을 깨물고 싶다. 이를 박고 보랏빛 뱀이 요동치도록 독을 주입하고 싶다. 당신의 혈관이 오직 나만을 부르짖도록. 세상이 우리만의 무대이도록. 그가 날 떠난 바람에 모든 시절을 잃었다. 하지만 영현이 돌아온다면 단절된 시공간이 움직일 것이다. 영현, 당신은 내게 빚을 졌지만 난 용서할 준비가 되었다.
놀랍지 않게도 그런 미옥에게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다. 이 사랑은 미옥을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늘 주연으로 끌어올렸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기에 아직 유효하며, 이제는 주연을 넘어서 감독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한다. 이 사랑은 과거의 연인 영현을 향한 것이자 박제를 거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에, 미옥은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랑을 연출해나간다. 연기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한 로맨틱 스릴러 《상사뱀 메소드》는 자아라는 윤곽을 뭉갤 수도 있는 메소드의 위험, 그러나 관객과 감독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미끄러져 나아가는 배우의 궤적을 과감하고 섬세하게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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