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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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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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사랑이 처음 배운 단어인 것처럼 고백이 하고 싶었어요 _「어제」 부분
그날은 모두가 웃고 있었고
당신은 술병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헝클어진 신발들 틈에서
나는 당신의 신발을 한눈에 알아본다 _「사랑의 방」 부분
“한국 최고의 연애 시집”(황현산)이라는 찬사를 받은 유진목 시인의 첫 시집 『연애의 책』을 문학동네포에지 57번으로 새롭게 복간한다. 『연애의 책』은 2016년,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투고받아 검토한 다음 펴내는 삼인시집선 1번으로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인 바 있다. 평론가 황현산과 시인 김정환, 김혜순 세 선정위원의 3년여에 걸친 엄밀한 선정과정의 첫 열매였다. 유진목 시인은 문예지나 신춘문예에서 몇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완결된 고유한 한 권의 세계로 등장한 것이다. 초판 해설을 쓴 조재룡 평론가에 따르면 유진목 시인은 사랑의 자취와 행위, 그 순간 피어오르는 제 마음을 적는 데 몰입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은 그가 지나온 ‘저기-삶’을 ‘여기-현실’로 붙들어 매며 장면과 장면(scene)에 밴 사랑의 자국과 상흔을 탁월하게 연출해낸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내비추어 보여주는 것은 삶의 슬퍼서 찬란한 어둠이고, 삶의 저 즐거워서 컴컴한 빛이다. 그는 상징을 어루만지며, 타인을 호명하는 방식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그리움’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특이하고도 독특한 시적 순간을 연애의 사건으로 시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아직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연애시는 도착한다. 어느새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놓고, 다른 곳을 보게 하는, 그런 시를.(조재룡)
우리 이제 뭐할까
한번 더 할까
그래
그러자
너는 아랫목에 놓인 홍시 같아
너는 윗목에 놓인 요강 같아
너는 빨개지고
너는 차오르고
우리는 이제 무엇이 될까
그사이 마당은 희어지고
너를 버릴 때도 이렇게 뜨거우면
너가 그대로 다른 땅에 스미면
아직은 깊은 밤에 혼자 나와
너를 안고 둥글게 울었다
-「동지」 전문
개정판 시인의 말
신체의 방 / 잠복 / 낮잠 / 소설 / 뒷문이 있는 집 /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다 / 접몽 / 에밀 졸라 / 동산 / 호텔 니케로 / 동지 / 그믐 / 수화 / 사이렌의 여름 / 밝은 미래 / 망종 / 울음의 순서 / 반송 / 미경에게 / 리의 세계 / 미선나무 / 벚꽃 여관 / 교대 / 식물의 방 / 혼자 있기 싫어서 잤다 / 아침에 / 매장 / 자목련 이후 / 뒤에 / 동정 / 너라고 말하면 된다 / 지상의 피크닉 / 오늘의 날씨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푸른 모서리 / 부재중 통화 / 타전의 전말 / 배꼽 부근 / 아버지와 소와 어머니와 / 미경에게 / 시월 병동 / 당신의 죽음 / 당신의 기원 / 당신, 이라는 문장 / 어제 / 잠보앙가 델 수르 / 첩첩산중 / 사이 / 한밤 / 사랑의 방
이럴 때 당신은 꼭 내가 낳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낮잠」 부분
가끔씩 내가 다른 사람이 꾸는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밥을 먹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릴지도 모릅니다
-「망종」 부분
빈방에서 사랑을 했는데
당신은 어느덧 살림이 되고
나는 봉지처럼 느슨하게 묶여서
서랍에 들어 있길 좋아한다
움켜쥔 창틀 쪽에서
매일 밤 돌아오지 않는 꿈을 꾼다
나는 당신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그게 더 슬펐다
배꼽에 흐르던 당신의 일들
내게서 당신이 가장 멀리 흐를 때
나는 오래 덮은 이불 냄새
우리는 닫힌 채로 집을 나왔다
─「접몽」 전문
엄마는 내가 제일 처음 떠나온 주소입니다
─「반송」 부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구나 지병처럼
─「벚꽃 여관」 부분
나의 꿈은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_「아침에」 부분
오늘도 한참을 머뭇거리다 당신 옆에 쉼표를 놓아두었습니다 나는 다음 칸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쉼표처럼 웅크려 앉는 당신 그보다 먼저는 아주 작고 동그란 점에서 시작되었을 당신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이 시작되는 문장을 생각합니다 당신이 있고 쉼표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는 문장 나와 당신 말고는 누구도 쓴 적이 없는 문장을 더는 읽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깜빡이고 있습니다 거기서 한참 아득해져 있나요 맨 처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당신,
-「당신, 이라는 문장」
미선나무 기슭에서 나는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었다
겨울이었고
차라리 땅에 묻히기를 바랐다
이걸 알면 슬퍼할 사람을 떠올렸다
맨 처음 너가 울었다
그러면 너를 안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아 있어서 많이 힘들지
너는 더 크게 울고
지금은 미선나무를 헤치고 바람이 분다
해가 지고 멀리 불빛이 보인다
가보면 사람들이 문을 닫고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섭다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은 그럴 줄 알았다고도 했다
예감이란 게 있었다고
그들은 틀린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도 사람이 싫었다
-「미선나무」 전문
그거 알지
이제 몸을 움직이면 당신 소리가 난다
언젠가 몰래 신어본 신발처럼
크고 딱딱하고 무거운 당신
-「사랑의 방」 부분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현재의 세계에는 틀림없이 결여가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한때 우리를 벅차게 했으나 이제는 읽을 수 없게 된 옛날의 시집을 되살리는 작업 또한 그 그리움의 일이다. 어떤 시집이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시는 충분해질 수 없다.
더 나아가 옛 시집을 복간하는 일은 한국 시문학사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장을 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예술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 시인 엘리엇의 오래된 말이다. 과거가 이룩해놓은 질서는 현재의 성취에 영향받아 다시 배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빛에 의지해 어떤 과거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게 시사(詩史)는 되돌아보며 전진한다.
이 일들을 문학동네는 이미 한 적이 있다. 1996년 11월 황동규, 마종기, 강은교의 청년기 시집들을 복간하며 ‘포에지 2000’ 시리즈가 시작됐다. “생이 덧없고 힘겨울 때 이따금 가슴으로 암송했던 시들, 이미 절판되어 오래된 명성으로만 만날 수 있었던 시들, 동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들의 젊은 날의 아름다운 연가(戀歌)가 여기 되살아납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고 귀했던 그 일을 우리는 이제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문학동네포에지 6차분 리스트
051 이규리 『뒷모습』
052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053 허영선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054 유 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055 안정옥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056 이희중 『푸른 비상구』
057 유진목 『연애의 책』
058 김홍성 『나팔꽃 피는 창가에서』
059 김명리 『적멸의 즐거움』
060 권대웅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작가의 말
초판 시인의 말
당신이 죽고 난 뒤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는 당신의 물건들이 놓여 있다
어떤 것은 나대로 사용할 것이고
어떤 것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끝내 찾지 못해서
방에 앉아 울었다
내가 죽고 난 뒤로
방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책은 돌아와 마저 쓰인 것이다
2016년 5월
유진목
개정판 시인의 말
내가 자는 동안에 눈이 내렸다.
깨어났을 때 눈은 녹고 없었다.
온 세상 사람이 그 눈은 정말 대단했다고 말했다.
그래요?
세상에 그런 눈은 처음 봤다니까요.
나는 눈물을 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022년 10월
유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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