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강의
2022년 11월 15일 출간
국내도서 : 2021년 06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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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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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철학은 현대 철학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자 최고의 종합으로 칸트의 책들을 읽지 않고 현대의 철학을 논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중에서도 『실천이성비판』은 『순수이성비판』에서 확립한 초월적 관념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자유와 윤리에 있어서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선을 위한 지침들을 도덕법칙으로 여겨왔던 기존의 철학에 맞서 도덕법칙을 따르는 것이 선이라는 관점의 전환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책 『실천이성비판 강의』는 이 새로운 자유와 윤리의 자리를 『실천이성비판』의 내용을 꼼꼼히 따라가면서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칸트 철학에 담긴 실천적인 지향을 독자들과 함께 발견해 내고자 한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1부 순수실천이성의 원칙들
1강 ㆍ ‘실천이성비판’의 의미
2강 ㆍ 준칙과 정언명령
준칙과 법칙 |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
3강 ㆍ 경험적 원칙과 행복의 원리
쾌·불쾌에 기초한 경험적 원리는 실천 법칙이 아니다 | 질료적 원리는 행복의 원리다 | 질료적 실천 규칙은 하위 욕구 능력에 속한다 | 행복의 원리는 보편적이지 않은 주관적 규칙이다
4강 ㆍ 형식의 차원에서 법칙을 발견하라
행복의 원리는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 |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자유의지 56 | 자유의 인식 근거로서의 도덕법칙
5강 ㆍ 정언명령의 매력
절반만 말해진 명령의 심연 | 의무와 강제로서의 도덕법칙
6강 ㆍ 정념의 원리와 윤리성의 원리
칸트에게 도덕적인 것이란 | 자기 행복의 원리는 비윤리적이다
2부 순수실천이성의 대상과 동기
7강 ㆍ 도덕법칙의 연역
실천적인 차원에서 열리는 예지계 | 도덕법칙 연역의 특수성 | 자유의 인식 근거로서의 도덕법칙
8강 ㆍ 흄의 인과론 비판
원인인가 습관인가 | 예지계에서 인과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가
9강 ㆍ 순수실천이성의 대상
물리적 가능성과 도덕적 가능성 | 선이 도덕법칙을 규정하는 경우 | 보눔과 말룸 | 도덕적 차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10강 ㆍ 지성의 역할과 도덕법칙의 범형
도식과 범형의 차이 | 경험주의적 도덕 비판
11강 ㆍ 실천이성의 동기
적법한 행위와 도덕적 행위 | 존경이라는 도덕감정 | 경탄의 대상과 존경의 대상 | 의무에 맞게 혹은 의무로부터 | 도덕적 광신과 인격성
12강 ㆍ 자유에 대하여
실천이성 분석학의 체계 | 심리적 자유의 한계 | 자유와 양심
3부 실천이성의 변증학
13강 ㆍ 변증성과 최고선
이율배반의 효용 |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의 한계
14강 ㆍ 이율배반과 최고선
실천이성의 이율배반 | 최고선의 가능성
15강 ㆍ 실천이성의 요청
영혼의 불멸에 대한 요청 | 신의 현존에 대한 요청 | 사변적 이념과 실천적 요청의 관계 | 순수이성의 실천적 확장 | 인식 능력들의 조화 |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
부록 _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와 정언명령의 의미
1 ㆍ 안티고네와 칸트적 윤리
안티고네의 문제 | 산 주검
2 ㆍ 윤리의 형식주의
형식적인 것 | 정념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 합법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3 ㆍ 칸트의 ‘외밀적’ 자유
자유의 자리 | 타자의 타자는 없다
4 ㆍ 윤리적 주체와 악의 문제
천재와 사도 | 정언명령과 악
참고문헌 | 찾아보기
각각의 비판서는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주체의 표상과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 능력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과제였다면, 주체의 표상이 대상과 인과관계를 맺는 욕구 능력을 다루는 것은 『실천이성비판』의 과제가 됩니다. 『판단력비판』의 과제는 대상의 표상이 주체에 미치는 효과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 비판서가 겨냥하는 것, 즉 인간 이성의 근본적 능력에 대한 질문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도 표현된 이 목표는 이성의 입법 능력에 대한 확인이라고 간략하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 따라 분류한 것들을 이제 이성의 입법 능력에 따라 새롭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사변적 관심에 있어 이성은 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법칙을 통해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에서 확인하고자 한 작업입니다. 마찬가지로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우리의 의지가 대상의 지배를 받는 대신 이성의 지배 속에서 자율적일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 관심을 탐구합니다. 『판단력비판』의 목표는 미감적이고 목적론적인 판단력을 대상이 아니라 이성의 능력 속에서 찾는 것입니다. (18~19쪽)
그동안 고귀한 욕구 능력과 저급한 욕구 능력의 구별은 그 욕망이 감각적인가 지성적인가 하는 점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의 쾌감과 결합해 있는 대상의 표상들이 감관에 기반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성에 기반해 있는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가령 따뜻한 햇살에 대한 욕망이 하위 욕구 능력에 속한다면 세계의 원리에 대한 앎의 욕망은 상위 욕구 능력에 속한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죠. 지적인 욕망이나 예술적 관심이 성적 욕망이나 신체적 욕망에 비해 고차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구분법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욕구를 규정하는 근거가 쾌적함이라면 그 대상의 표상이 어디서 유래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그 표상이 얼마만큼의 만족을 주는가 하는 양적 차이만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40~41쪽)
초감성적 세계에서 성립하는 자유는 우리가 심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현상계와는 차원이 다른 자유, 그래서 초월적 자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그 초월적 자유의 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얘기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사변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한 발 물러섭니다. 만약 이 자유를 사변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면 그것 자체가 변증적 가상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초감성적 영역에 대해서는 사변이성에 의해 그 객관적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대신 그 자유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서만 남겨둡니다. 그런데 이제 ‘실천이성’이 바로 저 초감성적인 초월적 자유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유는 오직 실천적으로만 그 객관적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일관된 주장입니다.(60쪽)
어떤 행위가 의무에 합치된다고 해서 의무로부터 생긴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마음씨가 도덕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덕성을 평가할 때는 다른 어떤 주관적 원리도 동기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물론 타인에 대한 사랑과 호의에서 선한 일을 하거나 질서에 대한 애착에서 정의로운 것은 아름다운 일이겠습니다. 하지만 의무의 사상을 무시하고 지시 명령과 상관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의 쾌에 기반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의 처지에 맞지 않는 도덕적 준칙입니다. 우리는 이성의 훈육 아래 있고 오직 여기에만 복종해야 합니다. 자기애에 대한 망상에서 우리 의지의 규정 근거를 법칙에 대한 존경 이외의 것에 둠으로써 법칙의 위엄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도덕법칙과 우리의 관계는 오직 의무와 책무라는 명칭 아래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도덕적 국가의 법칙 속에서 우리는 신민이지 군주가 아닙니다. (149~150쪽)
칸트는 진정한 자아를 재발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자유가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 깊은 곳으로 찾아가 발견하는 가장 깊은 신념들이 근본적으로 정념적이고 타율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는 행위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욕망 속에서 자유로운지 어떤 다른 외적인 표상들이 우리의 욕망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욕망이야말로 타자의 것이라는 정신분석적 주장은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하지 않았습니까. 주체의 심리적 층위에서 자유의 기초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232~233쪽)
『순수이성비판 강의 』/『실천이성비판 강의 』
지은이 인터뷰
1. 책의 서문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도 칸트의 원전을 직접 읽어 낼 수 있도록 해설서를 집필하셨다고 밝히고 계신데요. 어떤 점에 중점을 두고 책을 집필하셨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 저의 개인적인 고민과도 연결이 되는 질문인데요. 저도 원래는 현대문학을 전공했고, 철학 자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경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철학과 아예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석박사 논문을 위해서는 연구 방법론이 필요한데, 여기서 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석사논문을 쓸 때는 지젝과 정신분석학을 이용했고, 박사논문을 쓸 때는 푸코의 철학을 이용했습니다. 그래도 철학에 있어서는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인 것은 확실합니다. 학위를 마치고 문학에서 철학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혼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원전을 독파해 내야 하는 부담감이 굉장히 컸습니다. 세미나도 하고 해서 겨우 만들어 낸 성과물이 스피노자에 대한 해설서(『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였습니다. 이때 공부를 하고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에티카』라는 원전을 이해할 수 있게 누군가 곁에서 친절하게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해설서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심하게 고생을 했거든요. 비전문가의 어려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스피노자를 공부하고 나서 자연스레 칸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금 칸트의 원전이라는 커다란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칸트의 3대 비판서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이렇게 난해하고 두껍고 혼란스런 책을 제대로 읽어 낸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몇 년간 칸트의 두꺼운 원전(박영사판과 아카넷판)을 붙잡고 씨름하면서 이 철학 공부하기의 힘겨움에서 나를 구해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좌절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물론 해설서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해설서의 정제된 해설과 정리가 원전의 방만한 체계와 문체를 독파해 내는 데 있어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책은 철학의 원전을 직접 읽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원전을 독파하는 데 있어 작은 디딤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저처럼 철학 원전 앞에서 좌절한 독자들이 많을 것입니다. 앎에 대한 강한 열망이 꺾이지 않도록 작은 격려 같은, 혹은 작은 참고서 같은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가급적 칸트의 원전에 있는 내용을 그 문체를 이용해 가면서, 그리고 원문을 이용해 가면서 해설을 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현란한 정리는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원전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원전을 이용해 새로운 사유를 우리가 직접 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이번에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해설서를 함께 출간하셨는데요. 칸트 철학이 철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이번에 해설서를 집필하신 두 권의 원전은 칸트 철학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지 간단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칸트는 ‘자유’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인간 이성의 진보와 자유를 확신했습니다. 그만큼 자유라는 실천적 주제를 칸트와 분리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간에게서 자유라는 것이 환원 불가능한 근본적 요소라는 것이 철학적으로 확인된 것입니다. 이 자유가 바로 『순수이성비판』에서 확보되는 것입니다. 칸트는 우리 마음의 관심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사변적 관심, 실천적 관심, 미적 관심. 사변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고 실천적 관심을 다루는 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사변적 관심이란 대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진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칸트 이전까지 인식이란 대상에 의한 것, 다시 말해 대상에 종속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상에 종속되게 되면 우리 인식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상의 특수성과 경험적 다양성에 따라 인식이 매번 달라질 것이니까요. 그래서 칸트는 발상을 전환합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르는 것이죠. 대상이 우리 의식 표면에 비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상을 직접 구성한다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성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상’들을 우리의 지성 안에 있는 ‘범주’가 종합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 인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상’이 아닌 ‘물자체’는 우리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영역에 있게 됩니다. 이를 칸트는 ‘예지계’라고 불러 ‘현상계’와 구분합니다.
이제 칸트와 더불어 인간의 현실과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게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계와 그 경험의 한계로 작동하는 예지계로 분리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인간의 자유가 태어납니다. 현상계는 경험의 세계입니다. 이곳은 인과의 보편적 법칙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지계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지계는 경험적인 인과율이 지배하지 못하는 세계, 따라서 자유인과의 법칙이 있을 수 있는 세계로 상정됩니다. 여기까지가 『순수이성비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사변적 관심 속에서는, 다시 말해 인식에 있어서는 결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칸트에게 경험이란 철저히 현상과 지성의 만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사변적 관심을 넘어 실천이성의 영역으로 넘어간다면 거기서 우리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인 것이죠. 그리고 이 자유의 실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입니다. 도덕법칙은 자유의 법칙이고, 무조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자유’의 명령이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떤 행위를 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것이 자유의 형식에 맞아야 한다고만 명령합니다. 실천해야 할 행위의 내용이 사라지고 그 행위가 따라야 할 규칙과 형식만을 요구하는 법칙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이것이 『실천이성비판』입니다. 이제 칸트 이후로 자유는 더 이상 금지나 억압이 없는 무제약의 상태가 아니게 됩니다. 자유는 모든 정념적인 내용을 스스로 제한하고 오직 도덕법칙이라는 형식에 맞추는 무서운 실천적 명령이 됩니다. 자유라는 명령, 이 모순어법 속에 칸트적 윤리의 새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칸트는 인식과 실천에서 모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달성합니다. 칸트와 더불어 인식은 대상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표상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 구성 행위가 됩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것은 계율처럼 주어진 선한 행위 목록의 실천이 아니라 형식으로 주어지는 도덕법칙의 실천적 수행이 됩니다. 칸트에게는 선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은 도덕법칙과의 일치 속에서만 결과적으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선의 목록이 미리 있고 그것을 실천만 하는 행위가 윤리라면 주체적 자유라는 것은 존재할 이유도 없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철저히 주체의 자유라는 심연 속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들의 상호 이익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윤리와 같은 철학은 칸트와 완전히 낯선 것이 됩니다.
3. 원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현대 철학의 논의를 가져와서 설명하시는 부분도 많습니다. 책을 집필하시면서 어떤 철학자들의 논의를 참조하셨는지, 오늘날 독자들이 칸트를 더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순수이성비판』은 선험적 인식의 구성적 종합이라는 과제를 다룹니다. 감성적 표상들을 지성의 선험적인 개념(범주)들이 어떻게 종합하는지 그 과정을 다루고, 이를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철학자 들뢰즈는 이 종합의 과정을 경험론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칸트의 종합론에서 영감을 받았으면서도 관념론을 경험론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죠(‘초월론적 경험론’).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칸트는 아직도 분명 현대 철학의 중요한 원천입니다. 대신 그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철학과 그를 계승하려는 철학으로 나눠져 있지요. 니체나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야말로 칸트의 제자이면서도 칸트에 대한 대단한 비판자이지요. 따라서 칸트를 풍부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제가 보기엔 경험론적인 계열보다는 관념론 쪽 철학을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특히 바디우나 라캉과 지젝과 같은 정신분석학 쪽 계열은 칸트 철학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의 구도를 바디우가 실정적 존재와 사건의 진리의 구도로 전환하고 있다면, 라캉은 상상계와 실재계라는 구도를 생각합니다. 바디우의 책으로는 그의 철학을 확실한 구도 속에서 설명하는 『철학과 사건』(오월의 봄, 2015) 정도가 좋습니다. 그리고 라캉 정신분석학의 경우는 난해하기는 해도 지젝의 해설과 정리가 무난하기 때문에 그의 책을 참고하면 좋습니다. 라캉의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을 읽으면 되고,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 체계와 라캉의 관계를 알려면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가 좋습니다. 그리고 칸트 윤리학의 경우는 문학작품을 예로 들어 날카롭게 설명하는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8)를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4. 책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칸트의 개념어나 논리 체계는 여전히 ‘철학적’인 듯합니다. 칸트 철학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지침, 혹은 메시지 같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너무 도덕적이라고 니체에게 자주 비판받는 칸트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순수이성비판』 머리말(재판)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폐기해야만 했다.” 니체의 비판은 타당합니다. 칸트는 지식(앎)의 자리 바깥에 신앙(종교)을 놓아둠으로써 합리적 비판의 대상에서 종교를 제외하는 우를 범한 것이죠. 오히려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더욱 믿겠다는 그런 뉘앙스로 읽히는 구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이 구절을 최대한 칸트 식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열어 줍니다. 신앙의 자리가, 다시 말해 믿음의 영역이 지식 너머의 세계에 있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칸트에게 앎(인식)은 철저히 사변적 관심의 세계이고, 여기서 주재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지성의 입법 아래 다양한 감성적 표상들이 종합되면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지성 말고 이성이라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성은 기본적으로 절대자(무조건자)를 추리하는 능력입니다. 자유, 영혼, 신과 같은 대상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그런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이성입니다. 그러나 이 이성의 세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경험 불가능한 것은 지성에 의해 종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이성의 세계를 경험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때 이율배반이 발생한다고 칸트는 경고합니다. 신앙의 자리란 객관적 인식의 한계 바깥의 것이기 때문에 그 영역을 인식하려고 하는 순간, 다시 말해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가당찮은 허상에 빠져들고 맙니다. 신을 경험했다고, 자유의 나라를 인식했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광신입니다. 우리는 저 예지적 세계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칸트에게 그 세계는 인식의 세계(지식)가 아니라 실천의 세계(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진리)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부조리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과거 근대적인 ‘혁명적’ 운동들은 대개 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우리의 앎(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전제 아래 가능했습니다. 전체주의든 파시즘이든 대규모로 대중을 동원하는 운동들은 자신의 목표를 진리라고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동이 역사적인 필연적 법칙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서 파생되는 폭력은 부득이한 것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이 과정은 역사적 진리이기 때문이죠. 진리(라고 간주되는 것)가 명령할 때 대중의 광신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칸트는 실천(신앙)에 있어 이 진리(지식)의 자리를 비워둡니다. 윤리적 행위는 진리(지식)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라는 행위에 돌입할 때 그때는 우리의 앎이 그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입니다. 인식이 끝나는 자리에서 윤리적 실천과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 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작가정보
만만치 않은 이 시대를 인문학자이자 번역가로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다. 문학과 철학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 공부했으나 성과는 『권력이란 무엇인가』, 『섹슈얼리티와 광기』, 『명랑철학』,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정도가 있을 뿐이다. 옮긴 책으로는 『요하네스버그의 천사들』이 있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강의했으며, 현재는 ‘남산강학원’, ‘감이당’, ‘문탁네트워크’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작가의 말
해설서들은 친절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해설서를 읽고 나서도 원전을 독파할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해설서와 원전의 문체가 다르고 난이도가 현저히 차이 나기 때문입니다. 해설서들은 최대한 난이도를 떨어뜨려야 해설서로서 성공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 해설서들을 여러 권 섭렵하고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원전을 집어 들어 봅니다. 하지만 그 난해한 원전의 번역문 앞에서 낭패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원전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해설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설서는 당연히 원전의 문장과 문체에서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원전에서 따온 문단 전체를 본문과 구별해서 인용하는 방식은 쓰지 않았습니다. 해설서에서 이렇게 인용된 원전 부분이 나오면 어렵다고 생각하고는 대개는 그냥 건너뛰고 맙니다. 가급적 칸트의 (번역된) 언어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해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필요치 않다면 직접 인용도 최대한 자제했습니다. 칸트의 언어와 해설의 언어가 구별되지 않게끔 했습니다. 이런 방법이 원전을 읽어 내는 힘을 길러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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