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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 보낸 7일

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
신정일 지음
창해

2022년 10월 28일 출간

국내도서 : 2022년 10월 2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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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3.02MB)
ISBN 9791191215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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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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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걷기 열풍을 일으킨 선구자인
신정일(우리땅걷기 이사장)의 지난했던 삶!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간첩으로 끌려가 겪은 영화 같은 이야기, 숨기고, 숨겨온 그 비밀의 숲, 해파랑길, 소백산 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 고도 옛길을 기획했고, 수학여행을 현장체험학습으로, 11월 11일을 길의 날로 지정하는 운동을 펼쳤으며,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를 《신 택리지》로 저술한 신정일!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천재 소리를 듣는 그가 지옥에 들어가 처음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던 안기부 취조관과의 영화 같은 이야기와 영화 같은 만남이 41년 만에 한 권의 책으로 펼쳐진다.
그 지옥에서 보낸 일주일을 통해 대학 졸업장을 받았고, 삶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롤로그 _ 우연한 만남 뒤에 돋아난 상처

불현듯 떠오르는 사람들
인생의 길에서 아주 낯선 길을 만나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산다는 것.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를 하다.
내 운명을 바꾸어 준 친구를 만나다.
강원도 철원에서 보낸 3년.
대중 속으로 들어가 사회의 구성원이 되다
화려한 휴가? 쓸쓸한 휴가?
유격장에서의 추억
연애편지 대필시대
그들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
그 어린 날의 방황
나는 지금도 그 지하실에 있고
신 선생, 대학 졸업한 것 맞지요
양식 주방장 사촌 여동생의 정체
치욕의 시간도 세월 속을 흐르긴 흐른다.
자의가 아닌 명령에 의해 내가 나를 추억하다
나의 이상향, 이어도 신제주
나의 이름은 곰방
고백을 해? 간첩이라고?
행복과 불행의 이차방정식
제주에서 나를 살게 했던 음악들
작가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아름다웠던 장송곡들
제주도에서 출륙금지령이 풀리다
어설프게, 참으로 어설프게 사업을 시작하다
말해도 믿지 않고, 더 큰 진실만을 요구하는 사람들
내 살아온 삶을 낱낱이 되돌아보며 자술서를 쓰다
참고 기다린 고독했던 세월들
드디어 군 제대를 하다
자술서를 마치고 대학 졸업장을 취조관에게 받다
중요한 시대에 태어나는 저주를 받으라
당신은 지금 안기부 지하실을 떠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음표(?) 밖에 있던 사람.
말조차 하지 못하고 참고 참으며 보낸 그 세월
슬리퍼와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걸었다
그해 겨울의 합창교향곡
유치환 시비를 보고 마음을 다스리다
마지막 돌파구로 느티다방을 열다
욕심은 시련을 재촉하는 길
양식 주방장을 다시 만나면서 숨겨진 비밀이 풀리다
〈그때 그 사람〉을 길에서 만나고 내 인생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에필로그 _ 나는 방외지사의 삶을 살았다

■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일으킨 선구자 ‘우리땅걷기’ 이사장 신정일!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쉼 없이 걸을 수밖에 없었던 걷기의 비밀!

김용택 시인은《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의 발문에서 신정일을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그는 다양한 사람을 찾아 나서서 겪어보고, 배우고 깨달아서 한 가지에 능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한 가지 것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면서 온갖 것들을 겪어내며 산다. 어떤 이는 한 가지 것에 능통함으로써 한 가지 일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만 가지와 통하는 안목을 갖고 살기도 한다. 나는 뒤쪽이다. 인간이 몇 억 년을 산다고 해도 나는 이 작은 마을의 작은 산, 강, 논, 밭, 나무, 하늘, 별, 집,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정일이는 나와는 다른 인간임이 분명하다.
그는 다양한 사람을 찾아 나서서 겪어보고, 배우고 깨달아서 한 가지에 능통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왔다. 그가 앞으로 무슨 일을 벌려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지 나는 모른다. 아니 신정일이 저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가 그리고 꿈꾸는 높고 푸른 산맥들이 김제 만경평야에 들어서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일을 벌이고, 그가 곳곳에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심어준 것이 옳다고 믿으면 그는 주저함이 없이 행함으로써 행복한 것이다. 어느 잘난 사람이 자기가 뿌리고 자기가 당대에 거두려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려 하는가. 역사가 어디 그런 것인가.”

자전소설《지옥에서 보낸 7일-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의 지은이 신정일(우리땅걷기 이사장) 은 〈에필로그〉에서 자신이 ‘방외지사의 삶을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방외지사(方外之士)의 삶을 살았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고 오래도 살았다. 그러다가 보니 내가 사람 들로부터 여러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현대판 김정호’, ‘현대판 이중환’, ‘현대판 신삿갓’, ‘향토사학자’, ‘걷기 도사’라는 별칭 외에 작고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라고 했고, 도종환 시인은 ‘길의 시인’, 조용헌 선생은 ‘방외지사’라고 했으며, 김지하 시인은 나를 두고 ‘삼남 일대를 걸어 다니는 민족민중사상가’, ‘제주 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걸어 다니는 네이버’라는 별칭을 과하게 붙여주었다.
그중 내가 살아가는 방식만 놓고 보면 거기에 가장 걸맞는 말은 아마도 ‘방외지사’라는 말일 것이다. 강호동양학연구소장인 조용헌 선생이 나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방외지사》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방외지사(方外之士)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첫 번째 자격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을 위해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방외지사가 될 수 없다. 월급쟁이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독만권서 행만리로 교만인우(讀萬卷書 行萬里路 交萬人友)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면 만 리를 가 보아야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생각나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 번째는 되도록 많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차를 타고 발통 위에 얹혀 다니면 주마간산에 그치고 만다. 산천을 두 발로 딛고 다녀야만 스파크가 튄다. 스파크가 튀어야 깊이가 생기는 것 아닌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인물이 전주에 사는 신정일이다.”

말이 좋아서 방외지사지, 달리 말하면 할 일이 없어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세울만한 직업도 없고, 비빌 언덕도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들이건 그 누구에게도 조그마한 금전적 혜택을 줄 수 없는 무능력자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영혼이 자유로운 프리랜서’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자유로운 직업이라고 모두가 선망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소속이 없으므로 자유롭지만, 글을 쓰지 않거나 일을 안 하면, 통장에는 일 원 한 푼 들어오는 법이 없다. 프리랜서의 삶은, 철저한 자기 관리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신정일 자전소설이 작은 위안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 책의 지은이 신정일(辛正一)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며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이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100권 넘는 책을 펴냈다.

이번에 펴낸 신정일 자전소설 《지옥에서 보낸 7일》은 41년 전인 1981년 8월 어느 날, 지옥 같은 안기부에 인간 이하의 고문을 받은 7일간이 기록이다. 부제에서 암시하듯 최종 학력 국민(초등)학교 졸업인 그가 어떻게 ‘안기부로부터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는가를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이 의해 이유도 모르게 간첩죄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지만 이름도 없이 살았던 많은 이들을 대신해 이 책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다. 삶이 힘들고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 펴낸 신정일 자전소설이 작은 위안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지옥에서 보낸 7일’ 이후 41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앞으로 삶에 대해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지상에서의 삶을 ‘객사(客死)’로서 마감할 것을 소원한다.
나는 이것저것들을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두려움, 망설임, 슬픔과 고독, 그것들이 나의 친구였고, 그 속에서 내가 나,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었고, 그러다가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하루의 3분의 2를 남을 위해 쓰는 사람은 노예고, 하루의 3분의 2를 나를 위해 쓰는 사람은 자유인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는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자유인으로 내가 원하는 삶을 올곧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길 위에 삶이 있다. 그 삶의 길로 머뭇거리지 말고 나서라. 그리고 받아들여라.’
나의 운명, 나의 지론이다. 그곳이 천국이건, 지옥이건, 그 길을 따라 떠돌다가 어느 날 문득 지상에서의 삶을 ‘객사(客死)’로서 마감할 것을 소원한다.
왜 그런가? 길을 좋아하는 사람은 길에서 생(生)을 마감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길을 가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좋아하므로 길에서 죽는 객사를 꿈꾸었다. 하지만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 옛사람들 의 말을 터득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세상에 살면서 길보다 더 좋아한 것이 어쩌면 책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자를 알고서부터 어느 날 문득 문자중독증에 걸려 문자 조립공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이것은 병인가? 기쁨인가? 이렇게 지금도 헤매고 헤매는 나, 나도 어느 날 용재 성현 선생의 말처럼 최후를 맞고 싶다.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이다.”

■ 줄거리를 대신할 본문 인용문

그런데 그날, 나를 찾아왔던 그 사람이, 나는 그날 이후로 그를 잊었고, 한 번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이 그림자처럼, 아니 저승사자처럼 내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이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어?”라는 노래 구절이 있다. 그런데 그때 그 일이 있은 뒤, 이런 비극적인 만남이 예정되었다는 것을 나는 꿈속에서도 예감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지?
“아~!”
신음처럼 내뱉는 나의 한숨 소리를 들었는지.
“이 새끼? 신정일, 너 나하고 이렇게 만날 줄 몰랐지?”
“…….”
“신정일, 내가 네 놈의 뒤를 8개월 동안을 쫓아다녔다. 너, 간첩이지? 맞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낮게 깔려오는 무거운 목소리.
“너 간첩이 맞잖아.”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놀라서 여기저기를 바라보자 창문이 없는 것이 지하실이 분명했다. 둘러보니 사면이 다 하얗다. 하얀 방에 오래된 낡은 여관과 같이 침대가 하나 놓여 있고, 나무로 만든 가리개 사리로 욕조와 양변기가 보였다.
견고한, 누가 망치로 내려쳐도 흔적도 남을 것 같지 않은 철제 책상과 그 앞에 의자, 그리고 의자가 두 개가 더 있다. 밝은 형광등, 눈이 부시다.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생각하는 사이에 그 사내가 의자에 앉은 채 내게 조용히 말했다.
“신정일, 옷부터 벗어!”
*
“너, 제주도에서 북한을 간 것 맞잖아? 그때 너에게 북한 사람들을 소개한 사람이 그중 누구야?”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나는 자취방과 공사장, 그리고 휴일에는 제주 시내나 제주 중산간(中山間) 일대와 제주도 곳곳을 쏘다 닌 것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만난 사람이라야 벽돌 오야지, 방수 오야지, 그리고 공사판에서 노동을 했던 벽돌을 쌓는 조적공을 포함한 노가다 일꾼들만 알았을 뿐인데, 저 사람은 나에게 만나지도 않은 북한 공작원을 대라고 말한다.
“그런 일 없었고, 그런 사람 없습니다.”
“조금 있으면 다 드러날 건데, 거짓말하지 마. 알았어?”
*
“다시 한 번 묻겠는데,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지?”
나는 다시 국민(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대답했다.
“이 새끼 국민학교만 졸업한 것 맞아? 아니지? 너 대학 졸업하고 위장으로 노동판에 들어갔지? 일부러 숨긴 것이지? 거짓말했지?”
“아닙니다.”
“너, 국민학교 밖에 안 나온 놈이 어떻게 그렇게 어려운 책을 읽어? 똑바로 말해, 이 새끼야.” 내가 아무리 혼자 독학을 했다고 해도 아니라고 우기며 바른대로 말하라고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 바르게 말하고 있는데, 취조관은 더 바른말을 하라고 한다. 내 말이나 모습이 진정성이 결여되어 보여서 그런 건 아닐까?
*
“이 새끼 생각보다 독하네. 금방 실토할 줄 알았는데, 내가 잠시 나갔다가 올 테니 김 계장 자네가 저놈 잘 데리고 놀아봐.”
“예, 알았습니다. 잘 놀아보겠습니다.”
놀다니, 이게 바로 그들의 놀이라는 말인가?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공포 속에서 순간순간을 겨우 넘기고 있는데, 그들은 나를 취조하는 것을 논다고 말한다.
잘 논다. 잘 논다는 것은 스스로가 즐거울 때가 아니면 가능하지 않다. 어떠한 장애도, 어떠한 경계도 없는 상태에서만 잘 놀 수 있다. 잘 논다는 것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모든 것으로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이 잘 노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무 거리낌도, 어떤 가책이나 변명도 없이 타인의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내서 자백을 받기 위한 취조를 하거나 고문을 하는 것을 ‘잘 논다’고 말한다. 하긴 알렉산더 3세를 모신 필로타스도 말했지 않은가?
“어쨌든 고문은 약한 인간이 발명해 낼 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나를 심문하던 실장이라고 불리는 취조관이 나가는 소리 들리고, 나하고 잘 놀겠다는 김 계장을 비롯한 네 명이 나를 둘러쌌다.
“이 새끼, 생각보다 질기네. 그래 한판 놀아볼까?”
*
“너 참 질기구나.”
“자, 다시 물맛 좀 볼래?”
그들은 나의 머리를 약간 세우고 물에 젖은 수건을 씌웠다. 무슨 일을 하려고 이러지? 한참의 시간이 흐르더니, 이마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참 싱겁기는, 이게 무슨 놀이지, 조금 있다가 한 방울, 또 한 방울, 처음에는 시원하기도 하고, 장난처럼 느껴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공포감으로 변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똑, 똑, 똑, 일정한 시간을 두고 떨어지는 물소리가 지옥의 문을 열고 저승사자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떨어져 콧등을 적시고 흐르는 물이 마치 바늘로 콕콕 세부(細部)를 찌르는 듯했다. 이러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이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내 이마를 뚫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념이 들어올 사이를 주지 않고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물방울, 문득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떠올랐다. 천국에서 내려오는 천사가 구원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오며 노래를 부르듯 내 가슴에 사뿐히 스며들었던 곡, 감미로우면서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했던 그 음악…. 그런데 내가 즐겨 들었던 그 음악이 저렇게 공포감으로 모골이 송연하게 하면서 내 육신을 두드리면서 지금 내 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을 후비고 있다. 구원의 꽃다발을 든 천사가 아니라, 지옥의 물길로 끌어가는 저승사자가 되어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끼, 물맛이 어때? 좋냐? 그래도 안 불 거야?”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날의 그 상처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분명한 것은 시고니 위버의 〈진실(원래 제목은 죽음과 소녀)〉은 허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내가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보낸 7일은 ‘진실(眞實)’이었다.
*
“악악!”
내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는 시간, 절망의 늪에서 점차 숨소리가 잦아들어 가는 듯한 그 시간에 뜻하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살살 녹는 듯한 달콤한 목소리였다.
“어, 친구, 잘 쉬었나?”
친구라니,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보았다. 그 취조관이었다. 재미있다는 듯한 그의 웃음이 더 가증스러웠다. 그렇게 부모 죽인 원수처럼 분노로 나를 개 패듯이 패면서 ‘간첩’이라고 닦달하더니, 지금은 친구라고 나를 놀린다. 웬 친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자, 다시 놀아볼까?”
뭘 논다는 걸까? 그들은 노는데 나는 아프다. 이렇게 불합리한 일이 어디 있으랴. 잘 노는 것 때문에 사람이 아프고 슬프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으랴. 그렇지 않아도 좁고 연약한 어깨가 으스러진 것 같았고, 갈비뼈가 부러진 듯 아팠다.
*
“내가 선생 집에서 가지고 온 책과 소지품들을 보니 문학도였지요? 나 역시 청소년 시절 문학에 심취했던 사람이요. 나는 소설가 김승옥을 좋아했고, 그중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이요. 얼마나 좋아했던지 필사도 했었지요. 시는 미당 서정 주 시인의 시와 폴 발레리를 좋아했었소. 〈해변의 묘지〉에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지금도 좋아하는 절창이지요. 당신은 어떻소?”
내가 그에게 지금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가? 지금 내 마음이 그토록 한가하지가 않은데.
“신정일 선생은 어떤 시인들을 좋아하시오?”
*
“안녕하세요.”
화들짝 놀랐다. 온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아니, 이럴 수가! 지반이 흔들리는 듯, 나는 말 그대로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지다’라는 의미를 지닌 그 말은 이런 때를 예상하고 만들어진 사자성어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만 아연실색하여,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여자! 양식 주방장의 사촌 누이동생이 아닌가? 얼굴이 갸름하고, 눈웃음이 예쁜 그 아가씨가 왜 이곳에 와 있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저 아가씨가 이곳의 직원이었던가? 아하!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고, 이해될 수 없었던 그 모든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그 내용이 드러나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랬구나.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바로 저 아가씨로부터 비롯되었구나.
그 순간 구역질이 치밀었다. 조금 전에 먹었던 음식물들이 용수철이 튀어나오듯, 총구에서 총알들이 튕겨져 나가듯 목구멍을 지나 입을 열고 뿔뿔이 흩어져갔다.
아! 찬란하게 파편처럼 흩어져 간 밥알이여!
*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그 취조관이 그와 나의 합작품인 ‘자술서’를 내밀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에 서명을 하고 지장을 찍으시오. 이 글은 〈영구 보존함〉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시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다짐하듯 전에 했던 말을 했다.
“여기에 왔던 일, 여기 와서 겪었던 일을 죽는 날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 와서 겪었던 것은 당신의 가슴속에만 남아 있어야 하고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야 하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생이 여기에 온 것은 선생의 행적이 수상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온 것이니까 일체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소. 여기 또 하나 만들어진 조항을 보고 그곳에도 서명을 하시오.”
*
“수고했소, 이제 옷을 입어도 됩니다.”
문득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낯익은 목소리,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란 말인가?
내 일생을 통해 가장 눈물이 나도록 고맙게 느껴졌던 그 소리, ‘옷을 입어도 좋다’는 그 소리였다. 그때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 만인가, 내가 마치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닷가, 은빛 모래사장이 빛나는 해변의 나체촌에서처럼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내던 내가 다시 옷을 입다니…….
옷이란 무엇이며 행복이란 무엇인가? 좋은 옷이건 여기저기 떨어져 해진 옷이건 사람들이 밖을 나설 때는 옷을 입고 나선다. 그것이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살다가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의 이 세상의 정해진 질서이고, 삶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입고 있는데, 홀딱 벗은 채로 며칠이 되는지도 모르는 나날을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옷을 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채 지냈으니.
*
“다 왔습니다. 내리십시오.”
낮은 음색의 사내가 나를 내려준 뒤, 차에 오르며 말했다.
“우리가 간 뒤, 한참 뒤에 수건을 풀면 됩니다.”
차는 곧바로 떠났고, 그들의 말을 좇아서 잠시 후 수건을 풀자 낯익은 풍경이었다. 바로 가게 옆 연화당 한약방 건물 앞, 눅눅하면서도 산뜻한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우러러보자, 새벽빛이 서서히 내리는 아직도 어둔 밤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분명 낯익은 간판들인데, 마치 이국의 어느 도시에서 바라보는 듯한 낯선 간판들이 나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지고 볶고, 사랑하고 싸우고 하는 세상, 가난을 걱정하고 병든 아버지와 하루하루를 버티기도 힘든 세상에서 노닐다가 멀리 떨어진 외계 같은 곳이자 이름 모를 먼 행성으로 잠시 소풍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지구라는 자그마한 행성 중에서도 작은 나라 대한민국, 그 나라에 서도 작은 도시 전주의 한 빌딩 앞에 행려병자나 노숙자처럼 나는 떠났다가 도착한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그곳으로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데려갔던 그들이 그 공간에서 다시 나를 데리고 와 헌신짝처럼 내려두고 간 것이다.
*
나는 유치환 시비 뒤에다 내 가슴에 쌓이고 쌓인 슬픔과 분노를 내려놓고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옆에 절망마저 내려놓고서야 경주를 떠나올 수 있었고, 키케로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그렇게도 크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의 그 힘은 무한히 크다. 어디를 걷든지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그래, 옛말이 있지 않은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살아갈 방편을 마련한 뒤에는 이 땅을 매월당 김시습 선생이나 이중환, 그리고 김삿갓처럼 떠돌자, 우리 국토 어느 곳이건, 다 크고 작은 역사와 문화가 있을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는가? 이제 남은 생애는 다 덤이다. 우리 국토의 아프면서도 아름 다운 속살을 보기 위해 한 발 한 발 걸어보자. 그때부터 운명적인 걷기, 그 걷기가 시작되었다.

북 트레일러

https://youtu.be/jf9tAa0h9fg

작가정보

저자(글) 신정일

이 책의 지은이 신정일(辛正一)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이며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이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으로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가져온 도보답사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길 위의 인문학’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하여 금강·한강·낙동강·섬진강·영산강 5대강과 압록강·두만강·대동강 기슭을 걸었고, 우리나라 옛길인 영남대로·삼남대로·관동대로 등을 도보로 답사했으며, 400여 곳의 산을 올랐다. 부산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동해 바닷길을 걸은 뒤 문화체육관광부에 최장거리 도보답사 길을 제안하여 ‘해파랑길’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었다. 2010년 9월에는 관광의 날을 맞아 소백산자락길, 변산마실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을 만든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의 저서로 자전적 이야기인 《홀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모든 것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와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조선의 천재 허균》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것들》 《왕릉 가는 길》 《홀로 서서 길게 통곡하니》 《조선 천재 열전》 《섬진강 따라 걷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전3권) 《낙동강》 《영산강》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꽃의 자술서 시집》 《신정일의 신 택리지(전11권)》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기》《나는 그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 -살아생전에 살고 싶은 곳 44 / 1권. 강원 경상 제주편 22곳》(2022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등 10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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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지옥에서 보낸 7일
    안기부에서 받은 대학 졸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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