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핑하는 정신
2022년 11월 07일 출간
국내도서 : 2022년 11월 0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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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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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롭고 황폐하며, 절박하고 고독한 “인물 군상을 질서정연한 플롯 속에 우아하고 첨예한 방식으로 담아”낸(소설가 정이현) 단편들이 담긴 첫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출생의 비밀’과 ‘자살’이라는 화두를 다루며 “화가의 문체와 철학자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소설”(문학평론가 정여울)이라는 평가를 받은 첫 장편 『거짓말』, ‘맥도날드 할머니’로 알려진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한 두 번째 장편 『레이디 맥도날드』 등 한은형 작가는 2012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출간되는 소설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굳건히 해왔다.
『서핑하는 정신』은 파도타기 스포츠의 일종인 ‘서핑’이라는 소재를 통해 현실에서 실시간 재생되는 우리 일상의 이야기들을 따듯한 필치로, 그러나 사실감 있게 담아낸다. 하루하루에 진심을 다해 살았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그럼에도 나를 나이게 하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온화한 웃음을 닮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소설은 따스하고 다정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 보통 이상으로 애쓰고, 보통 이상으로 힘들어하는 ‘보통 사람’들을 향해서. 작가는 “그 힘듦을 잠시 다독거려는 주는 작은 호사”와 같이 이 소설을 우리에게 건넨다. 다채로운 맛의 크래프트 맥주나 둥둥 파도 위에 떠 있는 서핑보드처럼. 산뜻하고 가벼우면서도 균형감 있게, 『서핑하는 정신』은 우리 마음 가장 가까운 어딘가에 부드럽게 안착하고 있다.
한 번쯤은 온화한 웃음을 닮은 소설을 쓰고 싶었다.
라운지 음악처럼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그런 소설을.
그 나른한 기운에 둥둥 떠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소설을 말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 향〉 소설, 향香을 담다 : 소설, 반향響을 일으키다 : 소설, 향向하다
작가정신 〈소설, 향〉은 1998년 “소설의 향기, 소설의 본향”이라는 슬로건으로 첫선을 보인 제1세대 ‘소설향’에 이어 제2세대 ‘소설, 향’을 선보이는 중편소설 시리즈다. “소설의 본향, 소설의 영향, 소설의 방향”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통해, ‘향’이 가진 다양한 의미처럼 소설 한 편 한 편이 누군가에는 즐거움이자 위로로, 때로는 성찰이자 반성으로 서술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2. 오아후 시절
3. 해변 아파트
4. 베드서핑
5. 제9호 투자 품목
6. 서피 비치
7. 서퍼
8. 와이키키 하우스
9. 파도 잡는 법
10. 인 더 수프
11. 에고서핑
12. 분홍 코끼리
13. 빗질하는 법
14. 파도 타는 법
15. 규칙 없음
서핑 용어
작가의 말
작가 인터뷰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평소에는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데 크리스마스이브나 설날 같은 날에는 혼자 있기가 어렵다. 냉장고는 텅텅 비어 있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고 싶지 않다. 컵을 쥐는 손동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가 살성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든가 하는 상대에 대한 불만은 잠시 접어놓고, 어떻게든 짝을 이루고 있는 이들 앞에서 이런 날 밥 먹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 만큼 꿋꿋하지도 못해서.
_12쪽
자본주의 시대에 가성비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게 내 입장이다. 환상은 환상에 빠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때 태어나는 법. 아니면 ‘가성비’라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을 동원하기에는 어휘력이 부족하거나. 가성비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돈의 효용 가치에 합당한 것이 주어지고, 그게 자본주의의 합리성이라고 생각하지만 템플 스테이는 좀 다르다. 이 시대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낭만적인 도피처랄까.
_14쪽
열 살의 내가 지금의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커도 내가 될 뿐이니까.
열 살의 내게 운전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아는 나라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강원도의 7번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_29쪽
몰개성한 게 나의 개성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걸 추구한다고 해도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몰랐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확실히 알았다. 내 인스타그램의 목표가 하나 있다면 이거였다. 현실 세계의 나를 아는 사람이 본다고 해도 나인지 알아볼 수 없을 것.
_54~55쪽
싫어요는 없고 좋아요만 있는 세계. 하트의 반대는 슬퍼요나 화나요가 아니라 무無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기만 하고 반응을 하지도 않고 댓글을 달지도 않는 사람들. 나는 중립적인 듯 중립적이지 않고 따뜻한 듯 따뜻하지만은 않은 하트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_56쪽
누구나 아파요.
말발굽처럼 평평하면서 좁은 무언가가 내 왼쪽 가슴을 꾸욱 하고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잘 안 쉬어질 정도로 꾸욱. 마치 현실의 일 같았고, 나는 잠시 거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_239~240쪽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보통 이상으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의 내가 보통 이상으로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내 인생이었다. 나는 나의 이 하루를 사랑하고,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_259~260쪽
번아웃, 7일간의 급행 휴가,
유산으로 받은 해변 아파트
그리고 한겨울 연말연시의 ‘서핑’
공유 오피스를 운영하는 다국적 스타트업 기업을 다니는 ‘나’는 ‘홀로연말족’을 면하고자 양양으로 향한다. 때는 2020년 12월 23일. 수요일이고, 크리스마스이브 전날이었으며, 코로나 확진자 수가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는 3차 대유행의 시기였다. 그러나 7일간의 급행 휴가를 쓴 건 사실은 ‘유산 상속’ 때문이었다. 피상속인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아니라 다름 아닌 큰이모. 이모의 죽음은 자살이었고, 유산 대리인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큰이모에겐 직계존속, 직계비속, 배우자, 형제자매가 모두 없어서 조카인 내가 상속인이 되었다. 그렇게 내게 해변 아파트가 생겼고, 나는 양양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미친 듯이 바쁜 일과 속에서도 미치도록 무료한 일상을. 번아웃이 와도 멈출 수 없는 번아웃을. 공허를. 때론 분노와 억울함을.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한다. “어디에도 점점 맞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한 외로움과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수시로 찾아드는 막막함, ‘누구나 아파요’라는 인터넷 댓글을 보고 밀려오는 먹먹함에 나는 줄곧 갇혀 있었으니까.
“일상의 투쟁들을 잠시 멈춤”하고
온기를 찾아 모여든
단톡방의 ‘분홍 코끼리’들
그래서 양양으로 오게 되었다. 나의 생의 이력은 조금은 남달랐는데, 해양학 연구원인 아버지를 따라 서핑의 나라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열 살 때까지 자랐다. 그러나 서핑을 해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우연치 않게 한 게스트하우스의 서핑 강습에 가입하게 되고 그곳에서 해파리, 돌고래, 우뭇가사리, 상어 등의 닉네임으로 불리는 회원들을 만난다. 한겨울에 그것도 연말에, 서핑을 하겠다고 모인 서핑 초보들이라니. 처음부터 쉬운 일이란 없겠지만 이들의 서핑은 예상대로 허술한 모양새다. ‘나한테 말 걸지 말았으면’ 하는 분위기를 풍기며, 서핑 강사 양미 씨의 말대로 ‘좀 어두운’ 낯빛을 한 사람들. 좋아하는 맥주를 마시거나 플로깅을 할 때엔 조금 밝아지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안을 들여다보는 ‘에고서핑’의 시간에 이르러 비로소 언 마음을 녹이는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거리두기 3단계 격상을 앞둔 시기, 사무치도록 ‘인간의 온기’가 그리웠던 건 아닐까. 강습이 끝난 뒤에도 계속 만남을 갖자며, 술 취해 헛것이 보이는 섬망 증세를 뜻하는 ‘분홍 코끼리’라는 이름의 단톡방을 만들었듯이.
허세와 지식 자랑, 센스 있는 척까지 골고루 겸비한 해파리, 무기력해 보여도 양양 맥주를 만들겠다는 의지만은 확고한 돌고래, 검정 롱패딩 붐만 믿고 옷 장사를 했다가 망한 우뭇가사리, 까칠하지만 솔직한 ‘여자 어른’인 상어, 거기에 출퇴근길 지하철 2호선의 대환장 구간을 탈출해 여기 양양으로 달려온 직장인 ‘나’까지. “안쓰럽고도 가련한 일상의 투쟁들을 잠시 멈춤”한 그들만의 서핑 바이브가 펼쳐진다.
‘이게 사는 건가? 이게 사는 거지!’
서핑을 하든 안 하든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파도를 탄 서퍼다
『서핑하는 정신』은 본격적으로 서핑을 하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서핑을 시작하기까지와 서핑을 하고 난 후에 방점이 찍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서핑이란 “서핑을 하기 전, 하는 중, 하고 난 이후의 삶”까지를 아우르는 것이기에. 그렇게 작가는 ‘서핑’이라는 개념을 다양하고도 입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크고 작은 화두들을 무겁지 않게 건드리며 예리한 통찰들을 곳곳에 심어놓는다. ‘이제이’라는 인물이 들려주는 부모의 죽음, 유산 상속, 직장생활, 번아웃에 관한 이야기들은 언택트, 인스타그램, 공유오피스, 한달살기, 워케이션, 플로깅 등 최근의 트렌드와 어우러지면서 시대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소설 속 한 정의에 따르면 서핑하는 정신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정신”이기도 하지만, ‘서핑하는 정신은 ____이다’로 표현하는 게 더 맞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찾아내는 ‘서핑’에 관한 진짜 의미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므로. 이제 다시, 서핑을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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