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펜하겐 삼부작 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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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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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의 첫 책인 『어린 시절』은 유년기의 애수를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면에서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킨다. 특히 몽상에 자주 잠겼던 어린 시절을 그리는 디틀레우센의 묘사는 시인을 꿈꾸는 아이의 마음을 따라 길고 아름답게 이어진다. 그러나 디틀레우센은 그와 상반되는 방식도 곧잘 사용한다. 어떤 상황을 덩어리처럼 압축해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때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고, 때로는 완전히 지친 것처럼 무겁고 무감각하다. 이렇게 작품 속의 시간 감각은 작가의 내적 체험과 비슷하게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사건들 사이에 독특한 리듬감이 발생한다. 시인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디틀레우센의 개성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와 아름다운 문장, 독특한 리듬감을 지닌 『어린 시절』은 ‘코펜하겐 3부작’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 아련한 드라마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독자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아련하고 단정한 슬픔 속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자라난 어둠이 만개하는 모습까지 지켜볼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어린 시절』은 기억에 남을 만한 작은 상처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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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컵들을 부엌으로 내갔고, 내 안에서는 보호막 같은 길고 신비로운 말들이 서서히 마음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마치 노래나 시 같았던 그 말들은 위로가 되고 리드미컬한 데다 굉장히 깊은 생각을 담고 있으면서도 절대 고통스럽거나 슬프지는 않았는데, 그건 내가 이미 오늘의 나머지 시간들이 고통스럽고 슬플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였다.
-12쪽
어린 시절은 관棺처럼 좁고 길어서,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거기서 나갈 수 없다. 그것은 늘 그 자리에 있고, 모두가 그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46쪽
나는 어느 잡지에서 이런 구절을 읽는다. ‘자리에 앉아 우리 주님께서 너무도 훌륭할 만큼 능력 있게 만들어 주신 두 주먹을 노려본다.’ 이것은 실업자들에 관한 시의 한 구절이고, 우리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58쪽
높은 실업률이 스타우닝의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우리 어머니만은 아니다. 하지만 스타우닝은 그게 아니라고, 실업 문제는 순전히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때문이라고 말하고, 나는 ‘침체’가 재미있고 매력적인 표현이라고 느낀다. 나는 상상한다. 별 하나 없는, 위로할 길 없는 회색빛 하늘에서 빗줄기가 쏟아지는 동안 모두가 자기 집 차양을 내린 채 불을 끄는 장면을. 그 깊고 깊은 슬픔에 잠긴 세계를.
-106쪽
내게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이제 나는 어떤 진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듯하고,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흉내 냄으로써 내게도 감정이 있는 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내게 간접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에만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집에서 쫓겨난 불운한 가족의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눈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현실에서 그것과 똑같은 흔한 광경을 볼 때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시와 서정적인 산문에는 감동하지만, 그 글 속에 묘사된 사물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냉정한 마음이 된다. 현실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내게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160쪽
나는 창턱에 있던 제라늄 화분들을 옮겨 놓고는 아기별이 초승달 요람 위에서 빛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초승달 요람은 흘러가는 구름 사이에서 부드럽고 조용하게 흔들린다. 나는 너무 자주 읽어서 긴 단락들을 통째로 외운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의 「빙하」에 나오는 몇몇 구절을 혼자 거듭 읊어 본다. ‘그리고 이제 저녁 별처럼, 그러고는 아침 별처럼, 어머니의 가슴에서 살해당한 소녀가 빛을 낸다. 끝없는 길 위를 홀로 헤매며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의 영혼처럼, 하얗게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
-167~168쪽
출간 후 50여 년이 지나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10선에 선정된 회고록
비극적인 여성 작가의 삶. 최근 들어 집중적으로 조명받는 이 주제를 다룬 책은 그만큼 치열한 경쟁과 마주해야 한다. 이때는 실비아 플라스나 버지니아 울프처럼 유명한 작가의 삶을 그리거나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는 내용을 담고 있을수록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공식에 거의 부합하지 않는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 ‘코펜하겐 3부작’은 조용히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태풍처럼 그 틀을 부수었다. 덴마크 바깥에는 반세기 가까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가 무려 50여 년 전에 쓴 회고록이 독자와 비평가의 압도적인 찬사를 얻은 것이다.
정의正義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의定義에서 탈출하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작가의 유년기부터 서른 남짓까지를 회고하는 이 3부작은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키는 설정과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끝은 노스탤지어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흔히 애수와 소회로 채워지는 회고록을 특별한 작품으로 승화시킨 비결은 바로 냉정함이다. 그는 어느 타인보다 더 냉정하게, 마치 환부를 관찰하는 의사처럼 스스로의 결점들을 관찰했고, 그 관찰 결과에 아무런 판단도 덧붙이지 않았다. 합리화도, 자책도, 원망도 없다. 심지어 디틀레우센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자문하지 않는다. 회고를 통한 감정적인 결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작가의 고백이 독자의 공감이나 연민으로 이어지는 회고록 장르의 심리적 전통을 파괴해 버렸다. 실로 전위적인 결과였다.
1985년에 『어린 시절』과 『청춘』을 통해 처음으로 디틀레우센을 접한 미국 여성주의 문학계는 두 작품의 이러한 특징을 격찬했다. 디틀레우센이 ‘불의를 깨닫고 정의를 추구(해야)하는 여성’이라는 정치적 프레임마저 벗어던지고 오류와 불안에 기꺼이 노출된 여성-인간을 출현시켰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정의와 윤리로부터 스스로의 욕망을 따라 이탈하는 것, 이는 파멸을 부르는 불의이면서 더 높은 단계의 해방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여성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틸리 올슨은 디틀레우센의 회고록에 실린 이런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그를 당대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식은 그로부터 3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숙제처럼 다가온다.
또한 이 냉정함과 초연함은 특별한 종류의 온기도 가져다준다. 자기 연민이 없는 디틀레우센은 자신의 불행을 외부에 투사하지 않고, 따라서 적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조국을 점령한 독일군 병사들조차 미워하지 않는다. 시대와 운명이 그들을 거기로 이끌었을 뿐이고,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불공평한 의무와 욕망을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깨달았던 디틀레우센은 타인의 과오와 오류를 자신의 그것처럼 조용히 바라본다. 손쉽게 내 편과 상대편을 가르지 않고 온 인간이 근본적으로 같은 결핍을 지닌 동족임을 이해한 것이다. 회고록 사상 가장 냉철한 관찰자의 내면에 담긴 이 역설적인 따뜻함은 오래도록 잊기 어려운 감흥을 선사할 것이다.
시인이 산문을 쓸 때의 두 가지 능력
아름답게 늘이기, 그리고 압축하기
3부작의 첫 책인 『어린 시절』은 앞서 언급했듯 유년기의 애수를 아름답게 묘사한다는 면에서 엘레나 페란테를 연상시킨다. 특히 몽상에 자주 잠겼던 어린 시절을 그리는 디틀레우센의 묘사는 시인을 꿈꾸는 아이의 마음을 따라 길고 아름답게 이어진다. 그러나 디틀레우센은 그와 상반되는 방식도 곧잘 사용한다. 어떤 상황을 덩어리처럼 압축해 간결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때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고, 때로는 완전히 지친 것처럼 무겁고 무감각하다. 이렇게 작품 속의 시간 감각은 작가의 내적 체험과 비슷하게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하며, 그 과정에서 사건들 사이에 독특한 리듬감이 발생한다. 시인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디틀레우센의 개성이 잘 드러난 부분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와 아름다운 문장, 독특한 리듬감을 지닌 『어린 시절』은 ‘코펜하겐 3부작’ 가운데 가장 많은 독자의 지지를 얻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 아련한 드라마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독자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아련하고 단정한 슬픔 속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거기서 자라난 어둠이 만개하는 모습까지 지켜볼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건 『어린 시절』은 기억에 남을 만한 작은 상처를 제공할 것이다.
작가정보
Tove Ditlevsen, 1917~1976
20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 1917년에 코펜하겐에서 1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으며 어머니는 전업 주부였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언어 구사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고등 교육을 포기해야 했다.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그는 노동자 지역에서 함께 자란 또래 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고,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 결핍은 훗날 디틀레우센의 삶에 많은 시련을 안겨 주지만,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작가적 영감을 안겨 주는 원천이 되기도 했다.
10대 후반에 가정부, 사무 비서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디틀레우센은 작가이자 비평가인 비고 F. 묄레르와 만나면서 그간 염원하던 문학계로 진출했다. 1939년 첫 번째 시집인 『소녀의 마음』을 출간한 뒤로 시집과 소설을 꾸준히 내놓았으며, 1950년대에는 동화를, 1960년대부터는 에세이를 여러 권 발표했다.
디틀레우센의 작품들은 생전에 덴마크 내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그를 해외에 알린 작품은 사후인 1985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두 권의 회고록 『어린 시절』(1967)과 『청춘』(1967)이었다(그 뒤의 이야기를 담은 『의존』(1971)은 2019년에야 영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미국의 여성주의 작가이자 활동가로 명망이 높았던 틸리 올슨은 이 회고록을 접한 뒤 디틀레우센을 해당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당시만 해도 구세대적인 작가로 여겨지던 디틀레우센은 이후 본격적인 재평가를 받았고, 인간 내면의 불안을 관찰하는 데 있어 독보적인 능력을 가진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기자, 편집자, 작가 등 글을 다루는 다양한 일을 하다가 번역을 시작했다. 거대하고 유기체적인 악기를 조율하는 일을 닮은 번역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노마드랜드』, 『아파트먼트』,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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