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인

안정옥 지음

지혜 2013년 03월 28일 출간 종이책 : 2011년 07월 25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모든 사라지는 것의 이름을 대변하다!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안정옥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헤로인』. 감수성이 짙은 서정성의 언어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저자의 이번 시집은 흘러서 사라져버린 것들을 암시하는 ‘사라짐의 시학’을 보여준다. 본격적인 삶의 자세를 떠올리기 전에 오히려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면 제대로 소멸할 것을 주제로 삼아 기존의 소멸론을 이어받지 않은, 자신만의 논법을 이 시집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집을 나서고 들어설 때, 방안을 돌아볼 때, 앉고 설 때 죽음을 떠올리며, 죽음이 일상적인 도사림이며 자연스럽게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꽃에 대하여’, ‘그대는 나를 모릅니다’, ‘상자들’ 등 암시적으로 소멸에 대한 고찰을 담아낸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어제 내린 소나기로 차를 끓인다
수학자
헤로인
미끼論
얼굴
두루치기
잠
상자들
흑흑
변검
양말 한 짝은
사막 산책
옛말

2부
페루라는 이별
꽃에 대하여
세상의 호박
부옇 부옇
와상渦狀 무늬
하루살이
밤나무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
신발 한 짝
까치
그대는 나를 모릅니다
버드나무 농법
살구나무 아래 비스듬히

3부
단추
그림자 밟기
비단
대포
내 책상 위 누군가에게
글지이
팔을 붙잡는다는 말은
마지막 남자
대신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얼마나
여보세요
철조망

4부
2011년 1월 12일 맑음
세월이라는 말은
어스름새
아무래도
치매에 의한
삼십육계
커피 사용 설명서
차례
영원하다
분꽃 다발
안도 다다오

해설 '그림자 유령'의 심혼주의 - 나민애
산문 강하약국, 혹은

출판사 서평

안정옥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붉은 구두를 신고 어디로 갈까요}, {나는 독을 가졌네}, {웃는 산}, {나는 걸어다니는 그림자인가}, {아마도} 등이 있으며, {헤로인]은 그의 여섯 번째 시집이 된다. {헤로인}의 언어는 영원불멸의 언어인데, 왜냐하면 그의 언어가 감수성이 짙은 서정성의 언어로 만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술값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셨던 아편, 작가나 시인들, 아픈 아기와 여자들에게마저도 흔히 권했던” 아편의 몽환적 세계가 이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 주고, 그 아름답고 슬픈 삶을 살아가고 있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고통의 소산인 시와 너무나도 아름답고 붉디 붉은 양귀비꽃----. 시는 마약이며, 시인은 마약의 생산자인지도 모른다.

아편은 붉은 양귀비꽃의 상처였다 덜 익은 열매에 흠欠을 낸 즙액이다 독이 독을 다독인다 열매의 이지러짐에서 모르핀을 모르핀의 이지러짐에서 헤로인을 뽑아냈다 누군가 말한 치유의 힘센 이는 헤로인, 힘센 상처는 강렬하다 술값이 비싸서 가난한 사람들이 마셨던 아편, 작가나 시인들 아픈 아기와 여자들에게 흔히 권했던 시절, 얼마 전까진 그랬다 이천 개가 넘는 영국의 커피하우스에 여자들은 들어가질 못했다 얼마 전까진 우리 몸은 얼마 전 까지를 자장 잘 받아들이는 물질이다 그런 물질들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은 상처들이 포효했기 때문인가 취한 이들의 시간은 거나하다 홀린 듯 산마루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나를 잊음이 거나하다 마음을 들어 올려준다 제 몸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젠 마지막이라 말했다 내 성하지 않음을 중얼거려본다 홀랑 들이키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붉은 양귀비꽃의 흠欠이 당신에게서 안착한다 성하지 못한 당신 마음에 양귀비꽃의 그런 마음이 당겨졌다

호주머니 그해엔 다녔다 헤로인을 자주 겉옷의 넣고 깊숙이 그해엔 넣고 호주머니 자주 깊숙이 헤로인을 다녔다 겉옷의
- [헤로인] 전문

눈을 뜰 때부터 수와 관계 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관계 있다 28일의 주기도 수학적 약속이었다 내 바코드로 찍히는 무수한 잎들 수로 소통할 수도 있었다 난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근본처럼 단순해 우주 어디에서나 소통되는 말이다 질문을 하면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기다려라 살면서 풀어내야 한다는 것은 함수였다 아직도 풀지 못한 피타고라스 정리는 내겐 음유시다 지금도 엎드려 문제를 풀고 있을 페렐 만* 뒤늦은 나의 神이다 엎드린다는 것은 神을 위한 자세다 눈물 뿐인 실연은 답이 없는 게 정답인 수학의 불가능한 문제였다 큰 번개 줄기에서 작은 번개줄기들이 가지 쳐 나오듯 머리 속에는 수많은 주름들이 묻어 있다 안에는 더 많은 집합체들로 촘촘하다 좁은 공간에 마음을 심어주려 따뜻한 손을 깊숙이 넣어 휘저었을 이는 그였다 죽어서까지 꽃으로 답례하려는 사람들에게 온기를 넣어준 그, 길 잃은 고양이와 몸을 구부리는 연두벌레, 절로 피는 제비꽃도 나와 등가等價였다니
아직도 미해결 문제들이 존재하는 소수素數를 엎드려 풀다보면 그 수학자와 만나진 않을까 아마도
*페렐 만: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러시아의 은둔의 수학 천재. 테이블과 등받이 없는 의자, 옛 주인이 남긴 매트리스 밖에 없어 아직도 엎드려 문제를 풀고 있다고 함.
- [수학자] 전문

지금, ‘입 없는 말’들이 안정옥 시인의 입 안에 머물러 있다. 이 말은, 안정옥 시인의 이번 시집이 흘러서 사라져버린 것들을 암시하는 ‘사라짐의 시학’에 바쳐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상제나비처럼 분명 허공을 갈랐으나 사라지고 만 형상, 또는 사라지기 위해 새겨진 무늬, 이것들을 일러 우리는 ‘소멸’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숨결’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무릇 사라지는 것들의 언어는 물리적 입을 통해 발설될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의 주인은 성대聲帶가 아니라 심혼心魂이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안정옥 시인의 작품세계는 ‘심혼주의心魂主義’의 범주에 깃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심혼을 풀어 삶의 배면을 듣는 자, 그 배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멸의 어둠에 감읍하는 자이다. 이것이 안정옥 시의 출발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시집을 통해, ‘입 없는 말’들이 횡단하는 한 시절과 한 숨결과 한 거리를 목도할 수 있다. 그 거리에서 소멸의 응집체로서의 ‘그림자 유령’이 모든 사라지는 것의 이름을 대변하듯 쓸쓸하게 출몰했다가 사라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 나민애 문학평론가 서울대 강사

작가정보

저자(글) 안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