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헐다

조영심 지음

지혜 2013년 03월 28일 출간 종이책 : 2011년 05월 01일 출간

작품소개

책소개

엄격함 속에서 얻어지는 정신의 우아한 향기

조영심 시인의 시집 『담을 헐다』. 자기연민에서 삶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행위가 아닌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생 자체에 대한 긍정이 담긴 시편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상상과 구체, 이념과 현실사이를 오가며 신명난 유희에 고요한 관조로써 자신의 시에 무게를 부여한다. ‘목련’, ‘당골래’, ‘허리춤’ 등 묵향이 가득 담긴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 이 책에 담긴 시 한 편!

암시랑 않은 새

날갯죽지 헐렁한 어미 새
낡은 횃대에 앉아
간닥간닥 졸고 있네
몸을 덜어 기운을 삭이는 중이네

제 살 궁리에만 골몰한
새 살림 차려 나간 자식들
가끔씩 소리 안부로 인사치레하고
가뭄에 콩 나듯 옛집에 날아드네

털고 닦고 여기저기 돌아보고
물 때 닦아 물통 곧추 채우고
줄지 않는 모이통 잔소리에
몸이 늙으면 맛도 늙는다 하네
낡은 새장에 새 기운이 도네

눈 맞출 새도 없이
입 맞출 새도 없이

날개 세워 가는 자식 뒤통수에
입술 마른 새 소리

“나는 암~시랑 안 혀”

목차

시인의 말

1부 담을 헐다
목련
담을 헐다
탈
쟁기질
그녀, 낯꽃이 피었다
말
마른 비 오다
사막사막
헤어핀 레슨
보름달
아라크네
허리춤
끼니는 돌아온다
풀무

2부 차돌맹이
간장 종지
향일암
훈짐
솟대 올리다
가장자리
함구미에서
카나리아
OTL
당골래
넘어야 고개
흥정
차돌멩이
겉 울음
암시랑 않은 새
늙은 웃음

3부 강가
저 개가 나를 보고
강가
네팔인 니르
사랑콧
뚜벅뚜벅 산이 걷네
호주머니
절이다
눈총
말해봐
것고지
반달곰
못된 시주
오래된 찻잔
반상기 그 여자

4부 쟁이
꽃제비
쇼셜네트웍
꽃 그림
뉘 고르기
둥지
경비 아저씨
쟁이
초저녁 단상
가마우지
웃음꽃 천사

해설 ㆍ묵향을 품은 그릇, 詩 ㆍ신진숙

책 속으로

텅 빈 밤하늘에 꽉 찬 달덩어리 하나
저것은,
나의 오래된 요강이다

잠 덜 깬 눈길 따라 지린 내음 밀어내며 꿀단지 넘칠세라 잰걸음으로 비우러 나왔다가 담 너머 또래 머스마 기척소리에 엎지르듯 팽개치고 들어와 버린 내 오줌단 지

얼굴 가리고
숨
고르는 시간

이 밤, 저 허공의 단지 위에 치맛자락 걷어잡고 널퍽지게 주저앉아 탱탱한 강물줄기 개운하게 비우고 싶다
-'보름달' 전문

담을 헐기 시작했다
담들이 낮아지고 있다
내 것임을 완고하게 주장해왔던 담
온몸에 철조망을 두르고
정수리에 유리조각까지 박았던 담장
물고 물린 땅 때문에
먼 핏줄보다 낫다던 이웃과
쌓고 살았던 담벼락
도시의 담을 없애자
간격들이 허물어지자
사방이 팔방이다

이참에 나도 담을 헐었다
담은 넘어
나를 위협할 그 무엇에게
쓴맛을 보여줄 요량으로
담아두었던 쓰디쓴 주머니
제 속 버리는 일인 줄 모르고
남의 허물 덮어 줄 줄 모르더니
결국, 내 배에 구멍을 내어
담을 헐고 쓴맛을 보았다

담이 사라져
문턱이 낮아져
와신상담臥薪嘗膽할 일 없고
쓸데없는 담력 보일 일도 없고
오래 전, 서로의 담을 허물지 못한
네가 떠났고
이제는 담도 사라져
넘볼 일도 없겠다

-'담을 헐다' 전문

출판사 서평

조영심 시인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고, 전주대학교 영어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2007년, 계간시전문지 {애지}로 등단했으며, 현재 여수정보과학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그는 언어를 자유 자재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언어로써 시적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하얀 목련꽃에서 한 상의 훌륭한 진수성찬을 상상해 내고, 또한 [담을 헐다]에서처럼 모든 인간들과의 화해로운 소통을 꿈꾼다. 이 이타적인 그의 언어와 그 행위에는 만인평등과 세계평화라는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꿈이 각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어가 맑은 기운을 얻을 때까지, 조영심 시인은 상상과 구체, 이념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시인에게 글은 관념적인 “마음”의 내부이면서 하나의 생명을 일구고 담아내는 구체적인 그릇, “밭”이다. 신명과 관조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영심 시인이 추구하는 글쓰기의 의미는, “먹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볍게 붓끝 거슬러 중봉으로/ 힘을 나누되 머무르지 않고/ 가벼우나 게을러 보이지 않게/ 획의 마디마디를 꺾임으로 눌러 주([쟁기질])”는 몸짓에 있다. 이는 시에 대한 사뭇 엄정하고 엄격한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시가 지닌 향기, ‘묵향’은 바로 이 엄격함 속에서 얻어지는 정신의 고아한 향기이리라. 우리는 앞으로 조영심 시인과 함께, 말이 향기가 되는 시간을 더 가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시가 묵향을 품은 그릇이었다면, 우리는 그녀의 시를 품어 어떤 향기가 될 것인가.
----신진숙 문학평론가, 경희대 강사

작가정보

저자(글) 조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