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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서울을 걷다

권기봉 지음
알마

2014년 06월 11일 출간

종이책 : 2012년 10월 2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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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24.72MB)
ECN 0102-2018-900-002634235
쪽수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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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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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친 서울의 일상과 장소, 문화, 의미를 되새기다!
『다시, 서울을 걷다』는 우리가 잘 몰랐던 서울의 살아 있는 역사를 담은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의 저자 권기봉의 신작이다. 저자는 현재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산재한 문화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걸었다.

본문은 ‘서울지하철’을 시작으로 ‘성수대교’와 ‘세종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고민한다. 그리고 ‘마장동’, ‘어린이대공원’, ‘대학로’ 등 익숙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낯설기만 한 곳을 걸으며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 이야기한다. 그 밖에도 ‘일본대사관’, ‘경성방송국 옛터’ 등을 돌아보며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에 관해 토론하였다.
1부 일상을 걷다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
-역사를 안고 달리는 ‘서울지하철 1호선’

성수대교는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다
-부실공화국의 증거, ‘성수대교’를 찾아

누가 짜장면을 하찮다 하는가
-지금은 사라진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찾아

그곳에 ‘광장’은 없다
-대한민국 중심 거리 ‘세종로’를 거닐며

더이상 지역 차별의 공간이 아니다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우리에게는 사스보다 더 경계해야 할 증후군이 있다
-신림9동과 압구정동 사이

달동네가 사라진다고 도시빈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을 찾아

2부 장소를 걷다
누가 ‘말죽거리 신화’의 이면을 보았나
-부동산 투기의 현장, ‘강남’을 찾아

기어이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서울시청이 부숴버린 ‘서울시청’을 찾아

한국은 테일러 가족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행촌동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최초의 엑스포장 ‘경복궁’을 찾아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
-구로동맹파업의 현장 ‘가리봉 오거리’를 찾아

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히 지으라
-한국 최고最古의 시민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를 찾아

3부 의미를 걷다
독재,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
-‘박정희대통령기념 도서관’과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찾아

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일본군 ‘위안부’, 국가나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수요시위의 현장 ‘일본대사관’ 앞을 찾아

네거티브 문화유산의 존재 이유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을 찾아

한국 방송의 역사는 그대로 이어진다
-정동 ‘경성방송국’ 터를 찾아

전시되지 않은 역사를 생각한다
-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을 찾아

4부 문화를 걷다
눈썰미를 지닌 이들이 그리운 이유
-사라져가는 ‘피마길’을 걸으며

워낭소리를 대신하는 한숨소리
-사라져가는 땅의 이야기, ‘뚝섬’과 ‘마장동’을 찾아

독재자는 왜 어린이를 사랑했을까
-새로운 변신을 앞둔 ‘어린이대공원’을 찾아

민주화운동의 ‘소도’는 어디를 향하는가
-약자들의 안식처 ‘명동성당’을 찾아

그 자체로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동반자였다
-리모델링 중인 ‘장충체육관’을 찾아

우생학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의 흔적을 찾아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역사를 안고 달리는 ‘서울지하철 1호선’
노면전차의 빈자리를 메우고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를 보완하기 위해 떠오른 대안은 바로 ‘지하철’이었다. 자동차가 나날이 늘어났기 때문에 불붙은 데 기름 붓는 격이 아니고서야 버스를 더 늘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이 상황을 딱 한마디로 정리했다.
“지하철 건설하면 나라 망합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고작 255달러에 불과했다. 필리핀보다는 60달러 정도 많았지만, 당시 잘나가던 아르헨티나에 비하면 4분의 1 수준이었다. 부총리의 반대가 완강했지만, 문제는 차량 못지않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서울 인구였다. 1955년만 해도 157만 명이던 서울 인구가 1970년에는 3.4배에 가까운 543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바로 그때 대중교통 수요만이 아니라 교통난까지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인 지하철 건설이 결정되었다._18~19쪽

성수대교는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가 아니다-부실공화국의 증거, ‘성수대교’를 찾아
이후 성수대교 건설에는 교각 사이를 종전에 비해 두 배 이상 넓게 할 수 있는 ‘거버 트러스Gerber Truss’ 공법이 도입되었다. 교각을 세운 뒤 그 사이를 삼각형으로 짠 강철구조물 상판으로 잇는 방식이었는데, 상판들끼리는 지름 19센티미터짜리 핀을 이용해 연결했다. 이는 거꾸로 말해 핀만 제거하면 교각 사이의 상판이 쉽게 주저앉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성수대교가 ‘안보 개념이 가장 잘 도입된 다리’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이유다. 건설부 장관이 박정희의 심복 김재규였고, 서울시장도 5.16군사정변 당시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데 공을 세운 ‘혁명 동지’ 구자춘이었기에 그런 추측이 힘을 얻었다. … 아이러니컬하게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기업이나 관계 당국 모두 내실을 다지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이문을 많이 남기고 뻔지르르한 겉모습을 갖추는 데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계는 타당성 조사도 없이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감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공을 맡은 동아건설이 다방면에서 부실 시공을 한 정황이 역력했고 안전검사를 위한 접근 통로조차 없었음에도, 서울시나 건설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_32~34쪽

누가 짜장면을 하찮다 하는가-지금은 사라진 ‘소공동 차이나타운’을 찾아
화교들의 지역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진 것은 1966년 들어서였다. 박정희 정권이 251명의 간호사를 처음 서독으로 파견한 그해 말에 제36대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이 방한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용병 격으로 베트남에 1개 군단 규모의 군대를 파병해놓은 상태였으니, ‘보스’의 방한을 허투루 준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 인구가 379만 명 정도이던 그때, 일반 시민 155만 명에 학생 100만 명 그리고 공무원 20만 명 등 모두 275만 명을 동원해 김포공항에서부터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광장까지 24킬로미터에 달하는 연도 주변에 빈틈없이 도열시켰다. 존슨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팻말과 꽃다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게 하고 마치 북한에서 하는 듯한 ‘열렬한 환대’를 베푼 것인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막상 환영식이 열리는 서울시청 주변의 낙후한 환경을 미리 손보지 않아 쇠락할 대로 쇠락한 소공동 차이나타운의 모습이 그만 미국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고 만 것이다._43~44쪽

그곳에 ‘광장’은 없다-대한민국 중심 거리 ‘세종로’를 거닐며
당초 육조대로는 지금의 일민미술관 앞에서 끊겼기 때문에 숭례문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돌아 보신각에서 우회전을 해야 했다. 즉 당시 육조대로는 북쪽과 남쪽이 막힌 광장 형태였다. 그런데 일제는 1912년 육조대로의 남쪽, 그러니까 동아일보사와 동화면세점, 코리아나호텔 사이에 있던 황토현이라는 언덕을 밀어버리고 경성부청사(현 서울시청사)와 숭례문을 거쳐 경성역(현 서울역)과 용산까지 이어지는 도로 연장 공사를 강행했다. 경성 통치의 중심인 경성부청, 교통의 핵심인 경성역, 제국주의적 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직선으로 잇기 위한 조치였다. 1926년이 되어서는 남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있던 조선총독부까지 옮겨오면서 화룡정점을 찍었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은 근대화를 위한 길이라 했지만, 수많은 조선인들에게는 침략과 수탈의 길에 불과했다. 그렇게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는 일제의 조선 지배를 위한 ‘지리적 출발점’이 되었다._55쪽

더이상 지역 차별의 공간이 아니다-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공사를 시작한 지 채 다섯 달도 되지 않아 완공된 건물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지금의 여의도환승센터마냥 기둥에 지붕만 올린 가건물 형태의 승하차장 세 개와 공동 정비고뿐이었다. 이렇게 사무실 하나 없이 빈약한 시설을 터미널로 삼기에는 고속버스 회사들이 보기에도 만족스럽지 못했던 모양이다. 고속버스 회사들은 도심에 있던 각자의 터미널을 출발한 뒤 ‘예의상’ 이곳을 거쳐 목적지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서울 인구의 대부분이 강북에 몰려 있었기에 굳이 반포동까지 와서 버스를 타려는 사람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속버스 회사 입장에서든 승객 입장에서든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여러모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결국 반포동의 새 터미널은 시내 곳곳에 난립해 있던 터미널들을 한곳으로 모으려던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단지 한밤중에 버스를 세워두는 곳으로만 이용될 뿐이었다._70쪽

우리에게는 사스보다 더 경계해야 할 증후군이 있다-신림9동과 압구정동 사이
압구정은 헐려 사라졌음에도 그 이름만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전하다는 것이다. 근처에 있던 옥골이나 장자말, 뒤주니, 먼오금 같은 자연부락 이름이 온데간데없어진 것과는 천양지차다. 과연 무엇이 그런 지속성을 부여한 걸까.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한 권력의 상징이 무한 재력의 현장으로 바뀌어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단적인 증거가 겉보기에는 낙후되어 보이지만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인기인 요즘에도 여전히 무시하기 힘든 시세를 유지하고 있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다. … 실제로 1989년 5월 11일 소설가 안혜성이 〈국민일보〉를 통해 털어놓은 경험담은 부동산 투기와 그로 인한 일부 계층의 불로소득이 사회적 갈등과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방 두 개짜리 지하실 전셋집에서 아내와 두 아이와 살고 있다’는 택시기사는 “가만히 앉아서 부동산 투기로 하루에 수백만 원씩, 아니 수억 원씩 벌어서 챙겨먹는 주부들과 부동산 투기자들이 망해서 죽어가는 꼴을 보고 난 뒤에야 내가 발 뻗고 죽을 겁니다”라고 분개하면서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라며 어디에 하소연할 수 없는 절망감을 애꿎은 승객 안혜성에게 쏟아냈다._78~80쪽

달동네가 사라진다고 도시빈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을 찾아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쫓겨난 80여 세대의 상계동 철거민들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명동성당이었다. “살다 보니 한 평에 1억 원짜리 땅에서 살아본다”며 “집이 없으니 철거될 불안도 없어 오히려 속이 편하다”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했지만, 그러나 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이 터지는 명동은 아이들과 함께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그래서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의 경인고속도로변 허허벌판을 구입해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 옆이라 시끄러운데다 상하수도나 전기 같은 기반시설도 없었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이라고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올림픽 성화가 경인고속도로를 지나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화가 철거민들의 판자촌 옆을 통과하는 시간은 고작 1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정의사회구현’을 내건 전두환 정권에게 그 1분은 사회적 약자들을 도시 밖으로 내몰기에 충분한 구실이 되었다. 성화 봉송로 주변을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청소’해버린 것이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당국은 성화 봉송로 주변의 빈민가를 철거하거나 담장을 높게 쳐서 그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을 막았다. 서구는 물론 한국 언론들도 중국의 그러한 행태를 두고 비아냥댔다. 하지만 그런 조치는 20년 전 한국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보다도 20여 년 앞선 1960년대부터 이미 도시빈민들의 주거지를 강제로 철거해온 ‘원조’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_87~88쪽

누가 ‘말죽거리 신화’의 이면을 보았나-부동산 투기의 현장, ‘강남’을 찾아
어떻게든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생각에 너나 할 것 없이 부나방처럼 투기에 뛰어들던 ‘물신숭배의 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모두가 단맛을 본 것은 아니었다. 1971년 대선 직후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은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모순이 얼마나 큰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앞서 1968년부터 서울시와 정부는 도시 미관을 개선하고 인구 집중을 해소한다며 청계천과 용산을 비롯해 서울 곳곳에 남아 있는 판자촌을 강제로 철거했다. 그리고 그곳에 살던 빈민 14만 5,000여 명을 ‘광주대단지’라는 텅 빈 황무지에 강제로 이주시켰는데, 바로 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일대다. 문제는 그곳에 일자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도시빈민 대부분은 먹고살 길을 찾아 상경해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농민들이었는데, 새로 이주한 곳에 일자리가 없다 보니 밥을 굶는 가정이 속출했다. 생활 기반이 전혀 없는 휑한 들판에 마치 쓰레기 버려지듯 떨궈진 결과였다._112~113쪽

기어이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서울시청이 부숴버린 ‘서울시청’을 찾아
서울시가 중장비를 동원해 시청 뒤쪽에 붙은 ‘태평홀’을 부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8월 26일 오전 10시쯤이었다. 출근 시간대가 지난 데다 높은 펜스까지 둘러쳐져 있었기에 철거를 눈치챈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중장비가 내는 굉음만은 숨길 수 없었다. 근처를 지나던 시민들이 현장을 목격하면서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결국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가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의 보존·관리·활용을 위한 자문 및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과 해제 등을 심의하는 기구로, 문화유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 일컬어진다.
시청사의 뒷부분에 자리한 태평홀은 1926년 완공 당시 지금의 서울시 의회 격인 경성부회 회의장으로 쓰였던 공간이다. 해방 뒤에도 서울시 의회로 사용되었고, 2003년에는 ‘등록문화재 제52호’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런데 민간 기업이나 개인들에게 ‘제발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해달라’고 호소해도 시원찮을 판에 정작 서울시가 나서서 문화재를 부수고 있으니, 문화재위원회로서는 격앙될 수밖에 없었다. 평소 민감한 사안이 많아 서너 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던 회의가 단 30분 만에 의견을 모으고 끝난 이유다._119~120쪽

한국은 테일러 가족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행촌동 ‘딜쿠샤의 비밀’을 찾아
브루스 테일러 씨가 방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붉은 벽돌 건물의 정체는 오리무중이었다. 애당초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이 공동으로 창간한 〈대한매일신보〉 사옥으로 알려져 오다가 1995년 즈음 신문박물관을 세우려던 찰나 진위 논란이 일었다. 건물 벽면에 새겨져 있는 “DILKUSHA 1923”과 “P. S. ALM CXXVII-I”이라는 글씨가 궁금증을 증폭시킨 탓이다. 딜쿠샤의 의미만이 아니라 ‘여호와가 집을 세우지 않으면 세우려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 여호와가 집을 지키지 않으면 파수꾼이 보초를 서도 헛일’이라는 내용의 ‘구약성서 시편 127장 1절(P. S. ALM CXXVII-I)’이 새겨져 있는 이유를 말해줄 사람이나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_135~136쪽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최초의 엑스포장 ‘경복궁’을 찾아
190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의 건물 수는 모두 509동에 달했다. 그런데 각종 엑스포가 열리면서 전각의 90퍼센트 이상이 헐리고 말았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등 십여 채의 전각들은 화재로 망가진 창덕궁 전각을 복원한다며 1918년에 이전되었고, 신하들의 일터였던 수많은 궐내각사闕內各司들도 헐려나갔다. 을미사변의 현장인 건청궁乾淸宮도 버텨낼 재간이 없었으며, 동쪽 건춘문建春文과 서쪽 영추문迎秋門 사이에는 횡단 도로가 뚫리기까지 했다. 전차 선로를 놓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서십자각西十字閣이 전면 철거되었고, 동십자각東十字閣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지금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나앉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해방 뒤 남은 건물은 고작 40동뿐이었다. 한때 “다섯 걸음에 누각 한 채, 열 걸음에 전각 한 동”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건물들이 빽빽했다는 경복궁을 이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_146쪽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구로동맹파업의 현장 ‘가리봉 오거리’를 찾아
바뀐 것은 외양이나 이름만이 아니다. 3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구로동맹파업의 주요 현장들도 상당 부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구로동맹파업의 시발점이 된 대우어패럴 자리에는 현재 ‘하이힐 아울렛’ 건설 공사가 한창이고, 효성물산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2001년에 ‘마리오 아울렛’이 들어섰다. 그 뒤에 있던 세진전자 역시 아울렛 매장으로 바뀌어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안양천변의 갑을전자 자리에는 아파트형 공장인 ‘대륭테크노타운 8차’ 건물이 서 있다. 상전벽해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구로동맹파업의 길목과도 같았던 가리봉 오거리 근처의 벌집들은 세입자만 구로공단 여공에서 중국 동포들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그대로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공공정책이 수십 년째 부재하다는 증거다. 노동자들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도 매한가지다. IMF 이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딱지까지 덧붙었다._163쪽

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히 지으라-한국 최고最古의 시민아파트, ‘회현 제2시범아파트’를 찾아
한창 공사 중이던 회현 제2‘시민’아파트의 이름이 갑자기 회현 제2‘시범’아파트로 바뀐 것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김현옥 시장이 “앞으로 아파트는 이곳을 시범 삼아 튼튼히 지으라”며 이름을 시민아파트에서 시범아파트로 바꿔 부르게 한 것이다. 비단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애초 계획보다 축대를 더 견고하게 쌓았고 소파길과의 사이에 있는 옹벽도 지지대를 박아가며 두텁게 보완했다. 다른 시민아파트와 달리 경인고속도로를 놓기도 했던 도급순위 7위의 ‘삼안산업’이 건설을 맡았던 터라 상대적으로 튼튼하게 지어진 점도, 회현 제2시범아파트가 ‘시범적으로’ 지어진 이유다. … 아파트 관리소장이기도 한 주민 김성준 씨는 “다른 건 몰라도 튼튼한 것 하나만은 알아줘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방을 트고 벽체를 허무는 일도 쉽지 않았을뿐더러 “좌변기를 양변기로 바꿀 때나 화장실 안에 있던 욕조를 없앨 때도 무진 힘이 들었다”고 회상했다._175쪽

독재, 흘러간 과거가 아니다-‘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과 신당동 ‘박정희 가옥’을 찾아
어디에서도 그의 생애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일본군 장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를 테면 교사로 일하던 스물세 살 시절, 만주국군관 선발시험의 응시자격 연령이 16~19세라 지원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자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써 보내는 등 ‘3수’를 하면서까지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혈서와 함께 보낸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하겠다는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쓴 편지 역시 이곳에는 전시되어 있지 않다._190~191쪽

이제 잊어도 되는 ‘추억’일까-‘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
시작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의 꽹과리가 선두로 빙빙 돌면서 사물놀이 대형을 유지하면 모두 한참을 신명나게 놀다가 어느새 치던 악기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맨몸으로 놀이를 이어간다. 한마디로 춤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를 따라 막춤으로 몸을 놀리는 분도 있고, 선수 뺨치게 실력 발휘를 하는 분도 있다. 그가 막춤을 추기 시작하자 젊었을 때 갈고닦은 춤 실력으로 주위의 환호와 박수를 한 몸에 받는다. 쿵짝 쿵짝,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노인대학 어르신들의 흥겨운 사물놀이 수업은 그가 그만 하자는 소리에 비로소 끝이 났다._180쪽

일본군 ‘위안부’, 국가나 민족 간의 문제만은 아니다-수요시위의 현장 ‘일본대사관’ 앞을 찾아
가해자인 일본은 악, 피해자인 한국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일본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왜, 해방 이후부터 1990년대 초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을까? 혹시라도 침묵을 강요당한 건 아닐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역사 문제, 특히 ‘민주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텍스트인 교과서만 봐도 한국 정부의 의심스러운 태도가 엿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3년부터 사용할 고등학교 교과서의 ‘지침’ 구실을 하는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해 ‘일제에 의한 강제 동원’이나 ‘일본에 빼앗긴 문화재’ 부분을 삭제하려 했다. 그런 움직임은 중학교 새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에서도 감지되었다. ‘이승만 독재’ ‘제주4?3항쟁’ ‘박정희의 5?16군사정변’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독재 및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주요 내용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내용을 대폭 삭제해버린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는 강조한 반면 인권이나 평화는 내던져버린 결과였다. 역사교과서의 퇴행과 왜곡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_215쪽

네거티브 문화유산의 존재 이유-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을 찾아
정동이 그려내는 ‘망국의 풍경’ 중에서도 압권은 주한미국대사관저와 정동극장 뒤쪽에 조용히 숨어 있는 ‘중명전’이다. 1896년 완공된 중명전의 이름은 ‘태양과 달이 하늘에 함께 있어 광명이 겹친다’는 의미로 이는 ‘임금과 신하가 각자의 자리에서 직분을 다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중명전에서 벌어졌던 일은 제 이름에 부합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비극이자 수치였다. 조선왕조가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사건, 바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과정으로 인해 을사조약이 아니라 ‘강제할 늑勒’자를 써서 을사늑약이라 부르는데, 을사늑약은 모두 5개조로 되어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장악하고,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중개 없이 절대로 국제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 골자다. 한마디로 대한제국의 주요한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선왕조가 멸망의 길로 확실히 접어들었음을 상징하는 내용이었다._224쪽

한국 방송의 역사는 그대로 이어진다-정동 ‘경성방송국’ 터를 찾아
한국 최대의 공영방송인 KBS의 경우,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KBS는 1927년 경성방송국으로 라디오방송을 송출하기 시작
해 해방 후 1947년 국영 서울중앙방송으로 재출범하였고, 1961년 TV방송을 시작했으며 1973년 한국방송공사로 공영방송 체제를 갖춰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자신들의 효시를 일제 식민통치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경성방송국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조선어)로 방송을 시작한 것은 경성방송국부터가 맞지만, 한국어라는 ‘수단’과는 별개로 그 ‘의도’나 ‘내용’ 면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다분한데도 말이다. … KBS의 기준대로 ‘방송 60주년’이던 지난 1987년, 경성방송국이 있던 자리에 “첫 방송터”라 쓴 비가 한 기 세워졌다. 그런데 비의 모양이나 내용을 보면 방송에 대한 자부심과 오랜 역사에 대한 애정만 느껴질 뿐, 아무리 살펴봐도 방송 내용에 대한 자성이나 비판은 보이지 않는다.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했던 일제강점기의 경성방송국과 확실히 단절하지 못한 채, 한국 방송의 역사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_243~245쪽

전시되지 않은 역사를 생각한다-전쟁을 기념하는 ‘전쟁기념관’을 찾아
전쟁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시대적 조류에 맞지 않는다’거나 ‘불요불급한 일에 6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쏟아붓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조차 “전쟁기념관을 세울 수 있는 돈으로 전국에 적어도 열 개의 어린이과학관을 만들 수도 있다”거나 “대외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한 나라도 자국의 모든 전쟁을 망라한 호전적 종합기념관을 세우지 않는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러나 ‘군부독재 타도’를 내건 1987년 6월민주항쟁을 미완의 혁명으로 끝냈기 때문일까. 전쟁기념관은 김영삼 정권 시절이던 1994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주둔했던 옛 육군본부 터에서 문을 열었지만, 실질적으로 건립 사업이 추진된 것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잇는 또 다른 군사정권, 아니 ‘보통사람’으로 위장한 노태우 정권 때였다. … 전쟁기념관이 관람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사실 한국전쟁이라는 ‘과거의 기억’을 끌어다 반공반북이라는 ‘미래의 다짐’을 얻는 데 있다. 실제로 거북선이나 신기전 등 근대 이전의 무기들도 전시하고 있지만, 전시장과 예산의 대부분을 한국전쟁과 관련된 내용에 할애하고 있다. 야외 전시장만 하더라도 광개토
대왕릉비 복제품만 제외하면 전부 한국전쟁 관련 무기들로 가득하다._250~254쪽

눈썰미를 지닌 이들이 그리운 이유-사라져가는 ‘피마길’을 걸으며
피마길을 재개발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심 한복판이라는 점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지분 탓에 재개발이 여의치 않았지만, 이윽고 2003년 피마길의 초입이라고 할 수 있는 청진동 일대에 대한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었다. 너무 좁고 낡았으며 불결하다는 게 이유였다.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 지 35년 만에 찾아온 재산 증식의 기회였기 때문일까. 재개발사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시대 상설 점포인 시전행랑市廛行廊이 있던 곳이니만큼 구들장과 고랫등을 포함한 어물전魚物廛 유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공사는 속개되었다. 조선시대 상업 활동의 중심지로서 당시 사람들이 먹고사는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러한 주장 역시 묵살되었다. 개발로 인해 땅값이 3.3제곱미터당 1억 원을 넘어 2억 원을 호가하는 현실에서 그런 이야기에 귀 귀울인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_266~267쪽

워낭소리를 대신하는 한숨소리-사라져가는 땅의 이야기, ‘뚝섬’과 ‘마장동’을 찾아
조선시대 서울의 말 목장은 지금의 용산구 청파동이나 여의도 그리고 뚝섬에 있었는데, 그중 제일은 뚝섬 일대였다. 규모도 엄청나서 뚝섬만이 아니라 마장동을 비롯해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뚝섬을 섬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임금이 행차할 때 앞에 꽂는 깃발인 ‘둑纛’을 된소리로 발음하다 자리 잡은 명칭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왕의 사냥터이자 기마병들의 훈련장이었기에 깃발을 꽂을 일이 많았고, 이후 자연스럽게 둑섬(뚝섬)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그런 뚝섬에는 현재 수많은 아파트 단지와 빌딩, 공장이 들어서 있어 당시의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지만, 연산군 때부터 불과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넓디넓은 이 들판에는 대규모 말 목장이 있었다._274~275쪽

독재자는 왜 어린이를 사랑했을까-새로운 변신을 앞둔 ‘어린이대공원’을 찾아
이곳이 다시 골프장으로 사용된 것은 해방 뒤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다. 주한미군 장병들이 휴가 때 골프를 치러 일본까지 간다는 말을 들은 이 대통령이 골프장 재건을 명한 것이다. 그러나 재개장 한 달 만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골프장은 쑥대밭이 되었고, 결국 4년이 지난 1954년이 되어서야 ‘서울컨트리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 분위기가 바뀐 것은 박정희 정권 들어서였다. 친히 ‘박정희대통령배쟁탈 정부여당 친선골프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던 박정희였지만, 제7대 대통령선거를 넉 달여 앞둔 1970년 12월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골프장을 한적한 교외로 옮기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 새마을운동으로 ‘근면, 자조, 협동’해야만 했던 국민들 입장에서는 대통령이나 고위 인사들이 골프나 치며 소일하는 모습이 영 마뜩치 않아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골프장을 국민들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면이 서는 일이기도 했다._290쪽

민주화운동의 ‘소도’는 어디를 향하는가-약자들의 안식처 ‘명동성당’을 찾아
1978년 ‘알몸’과 ‘인분’으로 처절하게 저항한 ‘동일방직 노동자투쟁’ 같은 노동운동에도 ‘명동성당’이라는 이름이 함께했다. 그뿐 아니라 이듬해 벌어진 ‘오원춘 사건’과 같은 농민운동과 인권운동에도 늘 동행했다. 이 사건은 군청과 농협에서 추천한 씨감자를 심었지만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친 농민 오원춘이 당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했다가 백주대낮에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감금과 테러를 당한 사건이었다. 당시 오 씨는 희생을 각오하고 그 일을 폭로했는데,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가 그랬던 것처럼 명동성당은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 싸우는 운동가들이나 힘없이 당하고만 있던 사회적 약자들의 피신처, 곧 소도였다._306~307쪽

그 자체로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동반자였다-리모델링 중인 ‘장충체육관’을 찾아
새로운 스포츠 영웅의 탄생에 환호하고 짜릿한 승리의 쾌감을 만끽했던 장충체육관에서는, 그러나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건도 왕왕 일어났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가운데 단 두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찬성표를 던져 단독 입후보한 박정희를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곳도 바로 장충체육관이었다. 그 두 명이 던진 표도 반대표가 아니라 기권표였다. 초등학교 시절 ‘북한은 김일성 수령과 공산당을 위해 전원이 찬성표를 던지는 이상한 나라’라고 배웠는데, 그와 비슷한 일이 이 땅에서도 벌어졌던 것이다. 요즘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언론과 국민의 입을 틀어막은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은 종신 권력을 꿈꾸며 일명 ‘체육관 선거’를 거듭해갔다. 그렇게 제11대 대통령선거 때까지 8년 동안 치러진 네 번의 대통령선거가 모두 장충체육관에서 치러졌다. 아무래도 ‘자기들만의 선거’를 은밀하고 집중력 있게 진행하는 데에는 지붕이 있는 실내 체육관이 제격이었을 것이다._319~320쪽

우생학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경성제국대학’의 흔적을 찾아
경성제대의 성격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는 사건은 1941년에 일어났다. 개교 17년 만에 ‘이공학부’를 추가로 설치한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다가오는 확전을 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초대 이공학부장으로 당시 해군 화약창장이던 야마가 신지山家信次 해군 준장을 앉힌 것이나 건물을 세운 곳이 도심에서 10킬로미터나 떨어진 한적한 교외였다는 점, 특히 근처에 경춘선 철도가 지나간다는 데에서 이공학부를 설치한 목적을 짐작할 수 있다. … 1943년 이공학부에 입학했던 장세헌 서울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배운 게 거의 없는 학부생 시절이었음에도 과산화수소 분해 연구팀에 배속되었다”며 “로켓 연료를 개발하는 기초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경성제대 이공학부는 이처럼 무기 개발과 제조를 위한 기초 연구 기구로 기능했다._328~330쪽

“여기에 그런 뜻이 담겨 있었어요?”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수많은 ‘우리들’이 바라본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무심코 지나친 서울의 일상과 장소, 문화, 의미를 다시 떠올린다

기획의도

우리는 고도古都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처럼 역사가 깊은 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이 본격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600여 년 전부터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이 지역을 놓고 패권을 다퉜을 만큼 서울은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서울은 다사다난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법궁인 경복궁을 비롯한 중요한 건축유산들이 불에 타거나 훼손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민족 고유의 건축 양식인 한옥들이 제국주의 양식의 서양식 건축물들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서울의 고유한 지명들 역시 일제의 편의상 사라지거나 변경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한국전쟁 동안에 수많은 폭격으로 서울은 거의 황폐화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철학도 명분도 없이 두더지처럼 혹은 불도저처럼 서울이라는 공간을 삭막한 콘크리트로 뒤덮어버렸다.

그럼에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이처럼 서울은 런던이나 파리처럼 오랜 역사를 지녔음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압축적인 경제성장기를 거치면서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크게 후퇴했다. 그럼에도 서울이라는 도시가 여전히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100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새로운 문화와 기억 그리고 의미를 각각의 장소에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대와 근대 그리고 현대의 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서울은 때로 정리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그 역사가 오랜 만큼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을 가지고 있다.
권기봉은 이처럼 서울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르거나 숨겨져 있는, 또는 잊지 말아야 할 서울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 문화,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2008년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에 담았다. 우연찮게도 이 책이 발간될 즈음 숭례문 방화사건이 일어났고,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서울과 서울 속 문화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경복궁이나 서울성곽과 같은 곳을 답사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을 뿐 아니라 서울을 다루는 책들도 여럿 출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여가 흘러 숭례문 복원공사가 마무리되고 있는 지금 서울이라는 공간과 그 속에 산재한 문화재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과 태도에는 과연 변화가 있었을까?
이에 권기봉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보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현장을 찾아 다시 서울로 나섰다. 권력자의 시각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우리들’의 입장에서 다시 서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서울을 걸으며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서울의 모습을 발견하다

지은이 권기봉은 ‘서울지하철’을 시작으로 ‘성수대교’와 ‘세종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찾아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서울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고민했다. ‘피마길’과 ‘마장동’ ‘어린이대공원’ ‘장충체육관’ 그리고 ‘대학로’ 등 얼핏 익숙한 듯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낯설기만 한 곳을 걸으며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도 살펴보았다. 화교나 도시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 ‘옛 소공동 차이나타운’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을 찾았으며, 노동자들과 철거민의 삶이 오롯이 새겨져 있는 ‘가리봉 오거리’와 ‘회현 제2시범아파트’를 답사했고, 한국 사회의 오늘을 보여주는 ‘말죽거리’와 ‘압구정 로데오거리’를 걸었다. 그 많던 건물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는 말해주지 않은 채 복원사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경복궁’과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서울시청이 스스로 부숴버린 ‘옛 서울시청사’도 주요 목적지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지나간 옛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으나 슬그머니 역사적 반동을 꿈꾸는 세력의 망령을 고발하고자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과 신당동의 ‘박정희 가옥’ ‘남영동 대공분실’ ‘전쟁기념관’ 등을 샅샅이 살폈다. 제국주의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의 몰상식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일본대사관’과 ‘경성방송국 옛 터’ 그리고 ‘중명전’도 돌아보았다.
권기봉은 “다시 서울을 걸으며 깨친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모든 과거가 한결같이 ‘현재적’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역사는 과거에 멈춰 있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숭례문 복원 완료를 앞두고 있는 지금 《다시, 서울을 걷다》를 세상에 내놓는 이유”라고 이야기한다.

작가정보

저자(글) 권기봉

저자 권기봉은 월악산국립공원에서 자란 산골소년이다. 1998년 서울대학교 지구과학교육과에 입학하면서 올라오게 된 서울은 ‘원더랜드’ 그 자체였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발견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워낙 호기심이 많고, 여행 다니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알고 싶은 것도 많은 그는 대학시절부터 학보사 기자,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SBS 기자로 현장을 누볐다. ‘2002년 올해의 시민기자상’ ‘2005년 SBS 특종상’ ‘2008년 삼성언론상(기획취재 부문)’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연구원으로 고전연구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근현대 문화유산 답사를 다니고 있다. YTN 라디오 ‘권기봉의 걸으며 생각하며’와 MBC ‘도시탐험M’을 진행하고 있으며, <메트로>에 ‘권기봉의 도시산책’을 연재하고 있다.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려 지금까지 50여 개국을 여행한 그는 최근에는 러시아 사할린과 베트남, 중국 동북지방과 일본 등 한국근현대사와 관련이 있는 나라로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3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살자는 삶의 자세로 오늘도 호기심 천국, 세상 속을 분주하게 걷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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