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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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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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펴내는 백민석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1990년대 한국 문학의 뉴웨이브 이끌며 새 문을 열었던 백민석의 소설을 지난 소설이 아닌 지금의 소설로 다시 만난다. 절필을 선언했다 복귀한 지 두 해가 된 지금 다시 펴내는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을 통해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어떤 ‘전조’를 읽어내게 된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이 친구를 보라
구름들의 정류장
아주 작은 한 구멍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인형의 조건
진창 늪의 극장
해설 | 백민석과 백민석들 _황현경(문학평론가)
개정판 작가 후기
나는 옛 애인의 아파트로 가 그녀와 함께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새벽까지 누군가와 함께 깨어 있어본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른다. 그래? 며칠 전에도 우리 집에 와서 놀다 갔잖아. 그녀와 나는 다섯 시쯤에 눈을 붙였다. 잠들기 직전, 나는 그녀에게 il의 그 초원 얘기를 했다. 그녀는 그렇게 안 봤는데 참 멋있는 사람이네, 하고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우리 모두가 정상이야, 아무도 잘못되지 않았어, 아주 행복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바지를 입는데 청바지 엉덩이에 얼룩이 하나 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시커멓지만 아주 시커멓지는 않은, 쉽게 분간되지 않는 다른 어떤 색깔이 극소하게 섞여 있는, 그런 시커먼 색의 얼룩이었다. (36쪽)
_〈검은 초원의 한편〉 중에서
가르쳐주고 싶다, 심부름꾼 아이 너에게는 나만 한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읽어도 나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할 순 없다는 것을. 너는 영혼이 텅 빈 아이라는 것을. (84~85쪽)
_〈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중에서
“대학 졸업하고는 뭘 했니?” “책 만드는 일을 했어요.” “아, 인쇄소에 다녔니?” 어렸을 적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보게 되는 반응이다. 책을 만든다고 하면 인쇄소 직공인 줄 알고,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외판원인 줄 알고, 공장에 다닌다고 하면 기계공인 줄 안다. 대학을 나왔다고 하면 전문대학? 하고 되묻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반응이다. 실은 나도 내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권투 도장 아이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도 그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별은 안 달았어? (103~104쪽)
_〈이 친구를 보라〉 중에서
내가 어렸을 때 아동용 소설책과 교과서에서 읽었던 거위는 둘 다, 고요한 거위였다. 한 마리는 발가벗겨진 채 잘 구워져서 식탁에 놓여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마리, 폴크스바겐의 뒷좌석에 있던 거위는 일부러 짖지 않는 거위였다.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소설 중에 딱 한 번 짖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사납게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들에 둘러싸였을 때였다. 거위는 그 순간, 그 어떤 경적보다도 더 크고 사납게 짖어댄다. 자신의 꽥꽥 소리로, 그 모든 소음들을 침묵시켜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123쪽)
_〈이 친구를 보라〉 중에서
시체는 우리 이마 위에 무엇이 떠 있는지 보라고 했다. 시체의 숨에선 생선 썩은 내가 났다. 우리 이마 위엔 구름이 떠 있었다. 시체는 또, 우리 이마 위에 어떤 구름이 떠 있는지 아느냐고 했다. 우리는 흥분해서 왁왁 소리를 질러댔다. 저건 양털 구름이야. 새털구름이야. 스테고사우루스의 꼬리를 닮지 않았어? 시체는 자기가 무슨 목회자라도 되는 양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우리를 진정시켰다. 셔츠 겨드랑이 양쪽의 솔기가 길쭉하게 터져 있었고 꼬불꼬불한 터럭들이 창피하게도 훤히 드러나 있었다. 시체는 말했다, 항상 살펴야 한다고. 우리 이마 위에 어떤 구름이 떠 있는지를. 우리 이마 위로 어떤 구름이 지나가는지를. (128쪽)
_〈구름들의 정류장〉 중에서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어떤 ‘전조’
백민석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개정판 출간
작가들이 기다린 작가가 있다. 10년 만에 문단에 다시 돌아와 그저 무덤덤하다고 말한 작가가 있다. 단 한 개의 문학상도 받지 못했지만 그 어떤 문학상 수상 작가보다 더 독보적인 글을 쓴 작가가 있다. 해설을 쓴 평론가 황현경은 그를 두고 “한국 문학이 잃어버린 어떤 ‘전조’”라고 말했다. 바로, 소설가 백민석이다. 물론, ‘백민석이 돌아왔다’는 건 더 이상 기사거리가 아니다. 소설 좀 본다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백민석이 돌아오고 나서도 헌책방을 기웃거리며 계속해서 ‘백민석들’을 기다려야 했다. 백민석들 즉, 그의 절판된 책들이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1990년대 한국 문학의 뉴웨이브를 이끌며 새 문을 열었던 백민석은 지난 소설이 아닌 지금의 소설로 다시 독자들에게 다가서려 한다. 해설을 쓴 황현경 평론가는 “《헤이, 우리 소풍 간다》(문학과지성사, 1995)에서 《목화밭 엽기전》(문학동네, 2000)에 이르는 작품들에 대한 해석은 일찌감치 기각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돌아와 쓴 첫 소설에서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혀끝의 남자〉)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 그의 모든 소설은 독자들에 의해서 다시 읽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다시 펴내는 그의 두 번째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그 첫 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다. 한겨레출판에서는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이후에도 《목화밭 엽기전》, 《내가 사랑한 캔디》, 《불쌍한 꼬마 한스》의 개정판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내 가난은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의 가난이 아니다.
내가 겪은 가난은 누구는 가난했고 누구는 가난하지 않던, 그런 시절의 가난이다.”
옛 소설을 가져와 옛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과거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라거나 “우리의 과거는 과거도 아니다”(〈아주 작은 한 구멍〉)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십구 년 만에 장원을 다시 찾은 ‘나’가 그렇듯이 다시 찾아야 할 곳이기에 찾았고, 다시 읽어야 할 소설이기에 다시 나왔을 뿐이다.
백민석은 우리의 ‘구멍’이었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한국 문학에 있어서 “아주 커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구멍”(〈아주 작은 한 구멍〉)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구멍이 없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백민석이 없는 한국 문학은 한국 문학이 아니었는지도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없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평론가 황현경은 해설에서 ‘구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가령 도넛의 뚫린 한가운데처럼, 존재 그 자체의 숙명인 결여, 곧 구멍. 일찍이 하루키가 제기한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존재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양을 쫓는 모험(羊をめぐる冒險)》, 1982)를 떠올리며 답해보자면, 구멍이 없는 도넛은 도넛이 아니듯 결여가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구멍을 가지고 살아가듯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의 인물들 또한 모두 구멍을 가진 채 살아간다. 자신의 스무 평짜리 아파트에 초원을 키우며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거나(〈검은 초원의 한편〉), 다른 사람의 걸음걸이를 베끼고 표정을 베끼고 문장을 베끼거나(〈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스스로가 스스로를 도와야 했기에 겁에 질린 채 사고 한 번 치지 않고 자라거나(〈이 친구를 보라〉), 저도 모르는 사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잠들고(〈구름들의 정류장〉), 인형 뽑기 기계에 정신없이 동전을 쏟아 넣고 버튼을 눌러대거나(〈인형의 조건〉), 홀로 남겨진 빈 사무실에서 홀로 해바라기가 그려진 실크 넥타이에 스스로를 목매달거나(〈아주 작은 한 구멍〉), 발목이 잘린 채 밋밋하고 물렁물렁하고 고분고분한 무엇이 되거나(〈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 길을 걷다가 과거의 거리로 가게 되거나(〈진창 늪의 극장〉), 모두 저마다의 엉덩이에 시커먼 얼룩이라는 구멍 하나씩을 묻힌 채 살아간다. 구멍은 “나 자신”이기도 “내 생활”(〈아주 작은 한 구멍〉)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늘 나 자신을 택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내 생활을 택한다. 우리는 구멍을 채우는 대신 목구멍을 채우고 만다. 서로의 구멍을 바라보는 대신 서로의 목구멍을 바라보고 만다. 백민석이 없는 10여 년을 그랬듯이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절판된 몇 년여를 그랬듯이. 우리가 어떤 ‘전조’를 잃어버려야만 했다면 아마 이게 이유가 아닐까.
여전히 문제이고, 계속해서 문제일 소설
백민석이 돌아왔고,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 돌아왔다. 우리는 비로소 한국 문학이 잃어버렸던 어떤 ‘전
작가정보
작가의 말
개정판의 작가 후기를 쓰려고 예전에 썼던 작가 후기 파일을 찾아보니, 이렇게 자진 삭제한 문장이 원본에 남아 있었다. “나는 문학이 이 사회의 진화에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지간해선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사회에 해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내가 왜 이런 문장을 삭제하고 ‘정제’된 작가 후기를 실었는지는 모르겠다. 과민하고 소심한 탓이라고 하자. 어쨌든, 내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근 십오 년 만에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의 개정판을 낸다. 내 책도 나와 운명을 같이하는 것인지, 내가 돌아오니 내 책도 돌아온다. 극소수의 책들만이 작가의 운명을 벗어나 긴 세월 동안 생명을 이어나간다. 나도 내 운명을 벗어난 책을 한번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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