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서판
2017년 03월 24일 출간
국내도서 : 2004년 02월 16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9.45MB)
- ISBN 9788983718297
- 쪽수 9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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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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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
1장 | 공식 이론
2장 | 실리퍼티
3장 | 최후의 성벽
4장 | 문화의 탐욕
5장 | 서판의 마지막 항전
2부 두려움과 혐오
6장 | 정치 과학자
7장 | 성삼위 일체
3부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 본성
8장 |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9장 | 불완전함에 대한 두려움
10장 | 결정론에 대한 두려움
11장 | 허무주의에 대한 두려움
4부 너 자신을 알라
12장 | 현실과의 조우
13장 | 수렁 밖으로
14장 | 고통의 여러 뿌리들
15장 | 신성한 체하는 동물
5부 주요 쟁점들
16장 | 정치
17장 | 폭력
18장 | 젠더
19장 | 어린이
20장 | 예술과 인문학
6부 인류의 목소리
2016년판 발문 | 인간 본성은 문제이기도 하고 답이기도 하다
부록 | 도널드 E. 브라운의 인간 보편성 목록
주(註)
참고 문헌
옮기고 나서
찾아보기
도판 저작권
『빈 서판』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
『이타적 유전자』와 『게놈』의 저자인 매트 리들리(Matt Ridley)는 이 책 『빈 서판』을 “인간 본성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했다. 뿐만 아니라 2002년과 2003년에 이 책은 수많은 언론과 학술 기관 및 지식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2003년 퓰리처상 일반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작
미국 심리학회 발달심리학 분과 선정 엘리너 매코비 도서상
미국 심리학회 일반심리학 분과 선정 윌리엄 제임스 도서상 수상
애번티스(Aventis) 과학 도서상 수상
《요크셔 포스트》 올해의 책
2002년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
아마존닷컴 에디터 선정 최고의 과학책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인디펜던트》, 《텔레그래프》, 《퍼블리셔스 위클리》,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 《글로브 앤드 메일》, 《뉴 스테이트스먼》, 《보더스》,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 《스펙테이터》, 《이브닝 스탠더드》 선정 최고의 책
인간은 과연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가
‘빈 서판(blank slate)’은 ‘깨끗이 닦아낸 서판(scraped tablet)’이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타불라 라사(tabula rasa)’를 의역한 말이다. 이 말은 철학자 존 로크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이 말을 이용해 인간이 수학적 이상, 영원한 진리, 신의 관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본유 관념 이론을 공격하고 자신의 경험론을 옹호했다. 그래서 로크의 빈 서판 개념은 세습 왕권과 귀족 신분의 정당성을 뒤흔들었다. 모든 사람이 백지 상태로 출발한다면 어느 누구도 타고난 지혜나 미덕을 가질 수 없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 ‘빈 서판’은 오랫동안 정치적·윤리적 신념을 위한 신성한 경전으로서의 기능을 해 오며 보편성을 획득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종, 인종 집단, 성, 개인들 간의 어떤 차이도 선천적 체질 차이가 아니라 경험상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육아, 교육, 대중 매체, 사회적 보상을 개혁함으로써 개인의 경험을 바꾸면, 그 개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학업 부진, 가난, 반사회적 행동은 개선될 수 있으며, 사실 개선되지 않는 것에는 책임이 없다. 그리고 성이나 인종 집단 등 이른바 선천적 특성들을 근거로 삼아 차별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빈 서판은 현대 생물학의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이른바 ‘유전자 결정론’ 또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인간 본성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규명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극단론자들은 진화의 산물인 특정 유전자를 지닌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심지어 동성애 유전자, 범죄 유전자 같은 개념들까지 내세우며 인간을 결정론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다양성과 가능성을 무시하고 차별과 소외를 정당화하여 필연적으로 우생학 등을 주장하는 극우주의자들의 무기가 되었다. 그래서 사회 과학과 인문학으로부터 강력한 비난을 받아 왔고, 생물학계 내부에서도 중용을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극우 환원주의자들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유전자 결정론을 강화해 가고 있다.
한마디로 지난 세기에, 특히 후반에 ‘본성 대 양육(nature vs. nurture)’ 논쟁은 뜨거운 감자였다. 여기서 ‘본성’은 단순히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타고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며, ‘인간 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본성을 타고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개념상의 복잡함 때문에 ‘본성 대 양육’은 ‘유전 대 환경’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무튼 거듭되는 혼란 속에 사람들은 환경 결정론을 기반으로 하여 필요한 만큼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고서의 귀퉁이처럼 닳고 닳은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왔다.
인간 본성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
인간은 언어와 사고와 환경을 통해 고대부터 줄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은 자기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인류사에서 가장 큰 이슈라 할 수 있다.
즉, 인간 본성에 관한 개념은 육아에서부터 정치적 활동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과학이 우리를 인간 본성 이해의 황금기로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통한 인간 본성 이해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들은 사고와 감성의 타고난 패턴에 대한 발견이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사회적 변화를 전도(顚倒)시키고 개인의 책임감을 와해시키고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케 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버드 대학교의 저명한 언어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마지막 쪽의 저자 약력 참조)는 이 책 『빈 서판(The Blank Slate)』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아이디어와 그것의 도덕적, 감정적, 정치적 특성들을 탐구한다. 그는 많은 지식인들이 ‘빈 서판’(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 ‘고상한 야만인’(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 ‘기계 속의 유령’(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한과 상관없는 선택을 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세 가지 연결된 도그마를 옹호함으로써 어떻게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정했는지 보여 준다. 각 도그마는 도덕적 부담을 수반하여, 그 옹호자들은 자신들에게 도전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폄하하기 위해 필사적인 전략을 구사해 왔다.
스티븐 핑커는 20세기에 오랫동안 ‘빈 서판’ 이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명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건 득보다 실이 많았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인 인간성과 개인적 취향을 부정하고, 사회 문제들에 대한 분석을 사탕발림의 슬로건으로 대체하고, 정치ㆍ범죄ㆍ양육ㆍ예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킨다. 스티븐 핑커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과 상식에 기반한 인식은 전혀 위험하지 않을뿐더러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이 21세기에 만들어 갈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핑커의 이 모든 논의는 많은 상을 받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전작들에서 축적된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된다. 위트가 넘치고 명료하며 크고 작은 주제들에 대한 통찰이 돋보인다. 특히 이 책에 도입된 재미있는 카툰은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는데, 몇 편의 글보다도 더 쉽게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 또한 보편적인 세계 명작류의 소설과 시 그리고 「매트릭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영화를 적확하게 이용해 설명하는 데서는 일반 대중의 이해를 도우려는 저자의 배려가 돋보인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지극히 어려운 주제를 상식 수준에서 너무나도 쉽게 풀어서 들려준다는 것이다.
1998년에 스티븐 핑커의 전작인 『언어 본능』을 번역한 역자 김한영은 스티븐 핑커의 이 탁월한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빈 서판』은 생물학과 인문학은 물론이고 역사와 철학적 방법론까지 포괄하는 거의 모든 지식 영역에서 다윈주의의 사회적, 역사적, 철학적 의미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는 고된 ‘건축’에 해당한다. 그리고 탐험이 끝나갈수록 그가 제시하는 패러다임은 아름다운 건축물로 완성되어 빛을 발한다. 그것은 분명 21세기의 유력한 패러다임이다. (중략)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어 온 본성 대 양육(유전 대 환경) 논쟁은 인간 행동에 대한 많은 의혹을 푸는 열쇠를 제공했지만 그럼에도 그 열쇠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인간 행동의 열쇠가 ‘유전자’에 있다면 그것은 개인, 남녀, 인종, 연령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고 심지어 유전적 결정론을 끌어들여 사회·정치적 불평등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된다(그래서 우익 보수주의와 쉽게 연결된다.). 반면에 양육과 환경을 열쇠로 보는 입장에서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면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풍부한 다양성 위에 획일적인 유토피아(사실은 디스토피아)의 장막을 씌워 버릴 수 있다.
둘 사이에 화해와 결합이 가능할까? 본성과 양육이 한 쌍의 무용수와 같다면 과연 두 무용수는 어떤 자세로 어떤 스탭을 밟으며 탱고를 추는 것일까? 스티븐 핑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눈으로 두 무용수의 동작을 아주 자세히 포착하는 동시에 철학적 방법론의 관점에서 그 전체적 아름다움을 그려 내는 탁월한 지성을 과시한다. 우리는 둘 사이에서 울리는 멋지고 조화로운 공명을 듣는다. (후략)
균형 잡힌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간
스티븐 핑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기존의 많은 책들처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극단적인 ‘본성’ 입장에 서서 극단적인 ‘양육’ 입장을 공격하지 않는다. 진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환경적 설명이 옳은 경우도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분명한 예이고, 다양한 민족과 인종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점의 경우에도 실험 결과 환경적 설명 쪽에 높은 점수가 나왔다. 반면 유전적인 신경 장애 같은 경우에는 극단적인 유전적 설명이 옳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유전과 환경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보는 것이 옳은 설명일 것이다.
문화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맨 처음 문화를 창조하고 학습하게 만드는 정신적 설비가 없다면 문화도 존재할 수 없다. 핑커는 이 책에서 유전이 전부이고 문화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왜 극단적인 입장이 종종 온건해 보였고, 온건한 입장이 오히려 극단적으로 몰렸는가를 탐구한다.
그는 과학은 논쟁을 용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절충을 확인하는 도구라는 믿는다. 그래서 많은 절충들이 인간 본성의 특질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 주고, 그 자질들을 명확히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집단적 선택이 보다 현명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인간의 삶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에서 무시되거나 억압되어 왔던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들을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 스티븐 핑커는 ‘본성 대 양육’, 곧 ‘자연 과학 대 인문 과학’의 어느 한편에 서지 않는다. 그는 궁극적으로 본성과 양육이라는 두 관점을 균형 있게 다룰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표이다. 그러기 위해 핑커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이라는 두 문화의 융화까지 모색한다. 비록 ‘빈 서판’을 공격하지만 그것이 인문 과학 자체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방대한 이 책 전체에 걸쳐 그는 인지 과학, 언어학, 심리학철학, 종교학, 사회학, 정치학, 교육학, 인류학, 예술, 문화, 역사, 도덕 등의 인문 과학과 더불어 진화심리학, 생물학, 해부학, 신경생리학, 유전학, 행동학 등의 자연 과학을 골고루 엮어 펼친다. 누구나 이 폭넓은 지식의 스펙트럼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것은 지적 현학이나 과시가 아니라 현 시점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핑커는 20년간의 연구 성과를 진수성찬으로 차려 한 권의 책으로 우리에게 건네고 있다. 이 책은 본성과 양육 또는 자연 과학과 인문 과학 중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에게 균형 감각을 심어줌과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갈 인간관과 세계관의 미래상에 밑거름이 된다.
이 책은 1부 「빈 서판, 고상한 야만인, 기계 속의 유령」에 포함된 다섯 장에서 현대 지식 세계를 지배하는 빈 서판의 위력과, 그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인간 본성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다룬다. 2부 「두려움과 혐오」에서는 이 도전으로 야기된 불안을 관찰하고, 3부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 본성」에서는 그 불안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지를 본다. 그런 다음 4부 「너 자신을 알라」에서는 보다 풍부한 인간 본성의 개념이 언어, 사고, 사회 생활, 도덕성에 어떤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를, 5부 「주요 쟁점들」에서는 그것이 정치, 폭력, 성, 육아, 예술에 관한 많은 논쟁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6부 「인류의 목소리」에서는 빈 서판의 소멸이 최초의 우려만큼 불안하지 않고 어떤 측면에서는 혁명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빈 서판을 넘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19장 「어린이」를 시작하는 페이지에서 스티븐 핑커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한 사회의 주류에 속한 사람들을 각기 다르게-똑똑하거나 우둔하게, 착하거나 비열하게, 용감하거나 소심하게-만드는가의 문제와 관련해서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본성-양육 논쟁은 사실상 끝이 났거나 끝이 나야 한다.” 그래서 핑커는 이 논쟁을 끝내기 위해 태산 같은 ‘빈 서판’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는 6부 「인류의 목소리」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빈 서판은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그것은 인종 차별, 성 차별, 계급적 편견을 사실상 무용지물로 만들 것을 약속했다. 그것은 인종 대학살을 부추기는 사고 방식을 가로막는 견고한 보루처럼 보였다. 그것은 예방할 수 있는 사회적 병폐에 대해 성급한 운명론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게 했다. 그것은 어린이, 토착 부족, 하류 계층의 처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웠다. 이렇게 해서 빈 서판은 세속 신앙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시대에 일반적인 품위를 구성하는 요소로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빈 서판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다. 빈 서판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공백이 생겼고, 전체주의적 체제가 그 공백을 열심히 채웠지만 그것은 전체주의의 대학살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교육, 양육, 예술을 사회 개조를 위한 형식으로 악용하고 있다. 그것은 집 밖에서 일하는 어머니들과 자식을 원하는 대로 키우지 못한 부모들에게 고통을 안긴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덜 수 있는 생명·의학 연구를 불법화하려 하고 있다. 그것의 필연적 결과인 고상한 야만인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사람이 아닌 법의 통치”에 대한 경멸을 부추긴다. 그것은 우리의 인지적·도덕적 결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정책의 문제에서는 감상적인 독단을 내세워 효과적인 해결책을 가로막는다.
빈 서판은 우리가 진실이기를 희망하고 기원해야 할 어떤 이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 우리의 선천적 관심사, 우리의 개인적 선호를 부인하는 비인간적 이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잠재력을 찬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우리의 잠재력은 텅 빈 서판의 수동적인 공백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복잡한 정신적 기능들의 조합적 상호 작용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좋고 나쁜 영향에 상관없이 빈 서판은 뇌 기능을 설명하는 경험적 가설이고 따라서 진위의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마음, 뇌, 유전자, 진화를 연구하는 현대 과학은 빈 서판이 그릇된 이론임을 갈수록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는 과학과 지식 세계의 품위를 떨어뜨려서라도 빈 서판을 구조하려는 보수적인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객관성과 진리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쟁점을 이분화하고, 사실과 논리를 정치적 입장으로 대체하고 있다.
빈 서판이 지식 세계에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린 결과 그것을 무시하고 어떤 일을 한다는 생각은 깊은 불안을 자아낼 수 있게 되었다. 양육에서 성에 이르는 그리고 천연 식품에서 폭력에 이르는 온갖 주제에서, 부도덕하다고 간주되는 개념들은 질문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십중팔구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심지어 이데올로기의 칼을 갈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터부가 깨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심리적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오 그런 사람들이 사는 멋진 신세계여!” 과학이 정말로 편견이 난무하는 세계, 아이들이 방치되는 세계, 마키아벨리즘이 용인되는 세계, 불평등과 폭력이 체념을 강요하는 세계, 인간이 기계처럼 취급되는 세계로 향하고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빈사 상태에 빠진 도그마로부터 인류 보편의 가치를 해방시키면 그 가치의 존재 근거는 더욱 명확해질 뿐이다. 우리가 편견과 아동 학대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이유를 이해하면 우리의 고귀한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비과학적 오류의 파도로부터 그 목표를 보호할 수 있다.
어쨌든 빈 서판을 포기하는 것은 애초의 생각만큼 급진적인 일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현대 지식 세계의 여러 분야에서는 혁명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자기 이론의 덫에 걸린 소수의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결코 혁명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뒤바뀔 수 있다거나, 지능의 모든 차이가 환경에서 비롯된다거나, 부모가 자식의 성격을 시시콜콜 조종할 수 있다거나, 인간이 이기적 성향 없이 태어난다거나, 매력적인 소설, 선율, 얼굴이 임의적인 사회적 산물이라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20세기 평등주의의 상징인 마거릿 미드는 딸에게 그녀의 지적 재능은 그녀의 유전자 덕분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런 이중 인격 증상이 학자들 사이에 흔하다고 확신한다. 지능이 의미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학자들이 그들의 직업에서는 지능을 전혀 무의미하지 않게 취급한다. 성 차이가 역전 가능한 사회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딸에게 충고할 때나, 이성을 대할 때나, 편한 자리에서 농담과 해학을 즐기고 자신의 삶을 회고할 때에는 성 차이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 않는다.
인간 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개인적 세계관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그 자리에 추천할 만한 다른 것이 없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지식 세계가 이중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과학과 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과학의 도움을 받아 상식과 재결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 세계는 점점 더 인간 세계와 멀어질 것이고, 지식인들은 위선에 빠질 것이고, 그 밖의 모든 사람이 반지식인으로 돌아설 것이다.
과학자들과 지식인 대중만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심리학자이고, 어떤 사람은 자격증이 있든 없든 매우 뛰어난 심리학자이다. (후략)
이 책은 우리가 평등, 진보, 책임에 있어 안정감을 얻기 쉬운 빈 서판 이론에 깊이 물들어 미처 볼 수 없었던 과학과 상식의 긍정적인 측면들을 보여 주면서 빈 서판 이론이 남긴 장점에 현대 과학의 성과를 잘 결합시키고 있다. 스티븐 핑커는 명석한 사고와 상식 그리고 적합한 과학적ㆍ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현대인이 정치, 경제, 문학, 예술, 성, 육아 등 여러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과학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방식도 알려주고 있다.
원제에 딸린 부제가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부정(The Modern Denial of Human Nature)”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사실상 “빈 서판에 대한 현대적 부정(The Modern Denial of the Blank Slate)”이라고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 ‘본성’에 대한 부정은 이미 수도 없이 있어 왔고, 스티븐 핑커는 이 책 전체에서 ‘빈 서판’ 이론의 거대하고 오랜 구조를 논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티븐 핑커가 기본적으로 본능과 본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바탕으로 환경의 영향력을 역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 본능』을 비롯한 그의 전작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책은 균형과 융화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은 2002년 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터넷과 저널에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찬반의 글들이 쇄도했다. 이것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연장선 상에 있는 진부한 논쟁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폭넓은 동의와 조율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급변하는 현대 과학의 물결 속에서 인간 중심의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고 선택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의 존스턴 패밀리 교수로 인간 본성을 주제로 언어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을 강의 및 인지, 언어, 사회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과 언어, 본성과 관련한 심도 깊은 연구와 대중 저술 활동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이자 인지 과학자로 꼽히고 있다. 1954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태어났다. 맥길대학교에서 실험심리학을 전공했으며, 197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21년간 MIT에서 교수로 있다가, 2003년에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복귀했다. 주요 연구 주제인 시각 인지와 언어 심리학 연구로 미국 심리학 협회(1984, 1986년), 미국 국립 과학 학술원(1993년)과 영국 왕립 연구소(2004년), 인지 뇌 과학 협회(2010년), 국제 신경 정신병 학회(2013년) 등이 주는 상을 받았으며, ‘올해의 인문주의자’, 《프로스펙트 매거진》 ‘세계 100대 사상가’, 《타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포린폴리시》 ‘세계 100대 지식인’에 선정되었다.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 회원이며, 「아메리칸 헤리티지 영어 사전((伊)The American Heritage Dictionary(伊))」의 어법 패널 의장을 맡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언어 본능」,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빈 서판」, 「생각거리」,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지금 다시 계몽」 등이 있다.
1962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서울 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예술 대학교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했다. 그 후 오랫동안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며 문학과 예술의 곁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빈 서판》 《본성과 양육》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언어본능》 《갈리아 전쟁기》 《사랑을 위한 과학》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미를 욕보이다》 《무엇이 예술인가》 《아이작 뉴턴》 《진화심리학 핸드북》 《빈센트가 사랑한 책》 등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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