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2017년 06월 29일 출간
국내도서 : 2010년 08월 06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28.09MB)
- ISBN 9788983718464
- 쪽수 1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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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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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
1부
1장 그는 모든 새로운 생각을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 2장 자신만의 감옥 / 3장 사실은 별로 재미가 없다 / 4장 이곳의 일은, 정말 고맙게도, 어렵지만 재미있다 / 5장 내가 오펜하이머입니다 / 6장 오피 / 7장 님 님 소년들
2부
8장 1936년에 내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다 / 9장 프랭크가 그것을 잘라서 보냈다 / 10장 점점 더 확실하게 / 11장 스티브, 나는 당신의 친구와 결혼할 겁니다 / 12장 우리는 뉴딜을 왼쪽으로 견인하고 있었다 / 13장 고속 분열 코디네이터 / 14장 슈발리에 사건
3부
15장 그는 대단한 애국자가 되었다 / 16장 너무 많은 비밀 / 17장 오펜하이머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 18장 동기가 불분명한 자살 / 19장 그녀를 입양할 생각이 있습니까? / 20장 보어가 신이라면 오피는 그의 예언자였다 / 21장 장치가 문명에 미치는 영향 / 22장 이제 우리는 모두 개새끼들이다
4부
23장 불쌍한 사람들 / 24장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는 것 같다 / 25장 누군가 뉴욕을 파괴할 수도 있다 / 26장 오피는 뾰루지가 났었지만 이제는 면역이 생겼다 / 27장 지식인을 위한 호텔 / 28장 그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29장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물건들을 내던진 이유 / 30장 그는 자신의 의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 31장 오피에 대한 어두운 말들 / 32장 과학자 X / 33장 정글 속의 야수
5부
34장 상황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요? / 35장 나는 이 모든 일이 멍청한 짓이 아닐까 두렵다 / 36장 히스테리의 징후 / 37장 이 나라의 오명 / 38장 나는 아직도 손에 묻은 뜨거운 피를 느낄 수 있다 / 39장 그곳은 정말 이상향 같았습니다 / 40장 그것은 트리니티 바로 다음 날 했어야 했다
에필로그 / 감사의 글 / 원문 출처 / 참고 문헌 / 옮긴이의 글 / 찾아보기 / 사진 출처
2005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 2006 퓰리처 상 수상작!
원자 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일대기
핵 위기 시대에 다시 읽는 오펜하이머
국제 과학, 문화, 상업의 주류에서 고립되어 있고, 심지어 자국민을 먹여 살리는 데조차 실패한 국가가 핵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이는 핵무기의 전 세계적 확산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카이 버드, 마틴 셔윈,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난 7월 24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아세안 지역 안보 포럼(ARF) 각료 회의에서 발표된 성명에서는 북핵 6자 회담의 재개가 요구되었다. 앞서 2005년 이루어진 6자 회담에서 나온 비핵화 의무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농축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실험을 강행했으며 지난 5월엔 핵융합 반응에 성공했다고 공개했다. 그리고 각종 도발에 대한 금융 제재 수단에 맞서는 용도로 핵시설을 포기하지 않은 채 국제 사회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핵무기가 처음 만들어진 지난 세기에 이미 예측된 바 있다. 그리고 그 첨예한 대립이 현재 진행형인 우리나라에서 주목해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로버트 오펜하이머다.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를 향한 경쟁 속에서 태어난 핵무기는 이미 탄생 직후 엄청난 파괴력과 남용 가능성으로 인해 말 그대로 ‘폭탄’이 되어 왔다. 그리고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이자 ‘원자 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의 일생에 있어서도 극적인 순간들을 안겨 주었다. 이번에 (주)사이언스북스에서 펴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American Prometheus: The Triumph and Tragedy of J. Robert Oppenheimer)』은 저널리스트인 카이 버드와 영문학과 미국 역사학 교수인 마틴 셔윈 두 사람의 저자가 25년 동안 답사와 인터뷰, FBI 문서 열람 등 자료 수집을 거쳐 쓴 오펜하이머 일대기의 결정판이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2005년 출간되자마자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 전기 부문(The National Book Critics Circle(NBCC) Award for Biography)을 수상하고 2006년에는 퓰리처 상 전기?자서전 부문(Pulitzer Prize for Biography or Autobiography)을 수상한 바 있다.
지식은 그 자체로 문명의 기반이다. 하지만 지식의 폭을 넓히는 것은, 인간 생활의 조건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개인과 국가에게 보다 많은 책임감을 지운다.―닐스 보어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의 삶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신의 불을 훔쳐내 인간에게 가져다 준 대가로 매일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받게 된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 이후 《사이언티픽 먼슬리》에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들은 다시 한번 올림푸스 산으로 돌격해 인간을 위해 제우스의 벼락을 가지고 돌아왔다.”라고 썼듯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연일 언론의 찬사와 더불어 대중의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의 총지휘자였던 오펜하이머는 점차 인류를 향한 경고의 목소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냉전의 시대 몰아친 매카시 광풍에 휩쓸려 일종의 본보기로서 추락하고 만다.
겉보기에는 단 한 명의 과학자가 파문당한 사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모든 과학자들은 앞으로 국가 정책에 도전하면 어떤 심각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리라는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몇 년 동안, 과학자들은 새로운 부류의 지식인들로 떠올랐다. 그들은 과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대중 철학자로서의 정당성을 가지고 정책 수립에 전문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끌어내려지자 과학자들은 앞으로는 좁은 과학 문제의 전문가로서만 국가에 봉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회학자 대니얼 벨이 나중에 언급했듯이, 오펜하이머의 시련은 전후 시기 “과학자들의 구세주로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본문에서
이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1부에서는 오펜하이머의 가족사와 어린 시절, 물리학자로 성장하는 단계를 보여 주고 있으며 2부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오랜 연인과 아내를 비롯해 그의 인생을 바꾼 만남들을 살피고 있다. 3부에서는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지휘자로서 활약하는 과정과 트리니티 원폭 실험 성공의 순간이 등장하며 4부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계기로 달라진 그의 심경과 입장이 집중 조명된다. 5부에서는 매카시즘에 맞물린 보안 청문회 현장에서 수모를 겪고 물러난 오펜하이머의 말년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터널을 통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터널 반대편이 계속 위쪽으로 이어져 있는지, 아니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다.―오펜하이머
성마른 모범 소년이 세상으로 나서다
오펜하이머의 이상주의가 그를 곤경에 빠지게 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가 받은 훌륭한 윤리학 교육의 논리적인 귀결이라고 느꼈다. 펠릭스 애들러와 존 러브조이 엘리엇의 학생이라면 아무리 현명하지 못한 선택일지라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것이었다.―데이지 뉴먼(에티컬 컬처 스쿨 동급생)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어린 시절은 세심한 보호와 천재성에 대한 아낌없는 독려로 이루어져 있었다. 독일 출신의 이민자 1, 2세대인 양친을 두고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한 오펜하이머가 다녔던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은 창립자 애들러의 가르침대로 세상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게 하는 학교였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내성적인 천재 소년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곳에서 평생 스승인 교사 허버트 스미스와 더불어 점차 더 넓은 세계와 만나게 된다. 또한 그가 평생 사랑한 뉴멕시코 주로 처음 여행을 떠난 시기이이도 하다. 오펜하이머 가족이 자주 머물던 페로 칼리엔테 목장은 평생 그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1922년에 처음 방문한 인근 로스앨러모스 목장 학교 부지는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방황하는 젊은이와 독사과 사건
오펜하이머는 우수한 성적으로 에티컬 컬처 스쿨을 졸업한 후 전혀 다른 세계인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스피노자나 프로이트를 탐독하며 시를 쓰는 등 다양한 관심 분야에서 왕성한 지식을 과시했다. 3년 만에 화학 학사 학위를 받고 최우등(summa cum laude)으로 졸업했으나 물리학에 더 관심을 두고 있던 그는 물리학계에서 “중심에 더 가까운” 영국 케임브리지를 선택하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1906년)인 J. J. 톰슨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의 신경과민이 점점 심해지는데 특히 실험 물리학자인 지도 교수 블래킷의 인정을 받지 못한 좌절감과 질투심으로 인해 ‘독’을 바른 사과를 블래킷의 책상에 올려놓는 (또는 그랬다고 주장하는) 돌발 행동을 하게 되고, 정신과 상담을 조건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가 즐겨 읽던 프루스트 등의 문학 작품은 그의 정신을 안정시켰다.
현대 물리학 혁명의 현장 괴팅겐으로
나는 오펜하이머를 만나자마자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막스 보른
케임브리지에서 힘겨운 1년을 보내고 난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괴팅겐 대학교 이론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막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최근의 논문에서 제기한 이론적 문제를 두고 고심하는 오펜하이머에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보른의 초청을 받고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제임스 프랭크, 오토 한, 조지 웰렌베크, 폴 디랙, 요한 폰 노이만 등과 교류했다. 1954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보른은 1924년에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이라는 말을 만들었고 양자의 세계에서 상호 작용의 결과는 확률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평화주의자이자 유태인이었던 보른은 오펜하이머와 같은 민감한 젊은 학생에게 이상적인 스승이었다.
23세의 대학원생 오펜하이머는 괴팅겐에 머무는 동안 무려 17개의 논문을 출판했다. 괴팅겐은 막스 플랑크의 양자 발견, 아인슈타인의 위대한 업적인 특수 상대성 이론, 보어의 수소 원자의 거동에 대한 이론적 해명,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 그리고 슈뢰딩거의 파동 역학 이론 등, 이론 물리학의 거대한 혁명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1926년에 하이젠베르크와 디랙은 24세, 파울리는 26세, 그리고 요르단은 23세였다. 볼프강 파울리는 양자 역학을 ‘소년의 물리학(Knabenphysik)’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년 전의 불안한 감정 상태는 자신감으로 바뀌었고 오펜하이머는 떠오르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물리학의 불모지를 성지로 만들다
괴팅겐에서 성공적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오펜하이머는 라이덴과 취리히 등에서 잠시 머물며 연구를 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에서 각각 한 학기씩 강의하기로 했다. 그가 버클리를 선택한 것은 이론 물리학 분야가 취약한 버클리야말로 “사막”이었고, 그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좋을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리학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집중함으로써 오펜하이머는 학생들에게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다는 들뜬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 분야를 전공하고 싶다면 버클리로 가야 한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는 추상적 아름다움 때문에 양자 역학을 사랑했지만, 그것은 곧 인류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이론이 될 것이었다.
양자 역학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한 방식으로 자연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실험 결과와는 잘 맞아 떨어지지요.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연은 원래 불합리한 것입니다.―리처드 파인만
나치스의 대두와 유태인 교수의 정치 편력
정치가 진실,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야?―로버트 오펜하이머
1920년대 후반부터 활발한 학문적 활동을 펼치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심미안을 추구하던 자유인 오펜하이머도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자 오펜하이머는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해 4월 독일에서는 유태계 독일인 교수들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1934년 봄, 오펜하이머는 독일인 물리학자들이 나치스 독일에서 이민해 나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한 광고 전단지를 보고 이후 2년 동안 연봉의 3퍼센트(1년에 약 100달러 정도)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오펜하이머는 1954년 심문관들에게 “1936년 무렵에 나의 관심사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나는 독일에서 유태인들이 겪는 일에 대해 지속적이고 사무치는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에 친척들이 있었고, 나는 그들이 미국으로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는 대공황이 나의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적절하지 못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아예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을 통해 나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들이 인간의 삶에 이토록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생의 사랑, 그러나 여러 번의 사랑
1936년은 오펜하이머가 진 태트록을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심리학도로서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되는 진은 오펜하이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오펜하이머를 이론에서 행동으로 움직이게 한 것은 진의 열정적인 성격이었다. 진의 활동가적 기질과 사회의식이 오펜하이머가 에티컬 컬처 스쿨 시절 토의했던 사회적 책무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공산당원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당보다도 대의였으며 1936년 가을 무렵 그녀를 사로잡은 가장 중요한 대의는 곤경에 빠진 스페인 공화국이었다.
결혼에 뜻이 없던 진과 헤어진 오펜하이머는 그의 아내가 되는 캐서린 ‘키티’ 퓨닝 해리슨을 만났다. 그녀의 전 남편 중 하나인 조 달레트는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의 제자이자 친구인 로버트 서버에 따르면 “그녀의 관심은 오펜하이머의 경력을 진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키티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두고 평생 서로를 보살폈다. 그러면서도 진과의 관계 역시 그녀가 의문의 자살을 감행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해 훗날 소련의 스파이로 몰리기도 한다.
오펜하이머에게 공산당원 딱지를 붙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오펜하이머는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여러 친척, 친구,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오펜하이머의 정치적 편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1930년대에 미국의 사회, 경제적 정의를 위해 헌신했다는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편에 서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항상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사상 초유의 계획, 맨해튼 프로젝트
스페인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세상에는 다른 더 급박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오펜하이머의 이름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극비 군사 연구소를 이끌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이에 앞서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인 1939년 9월 1일 아인슈타인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이때 설치된 우라늄 위원회는 2년 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새로운 무기에 대한 보고서를 받고 나서 활동에 박차가 가해지며 백악관 직속의 위원회가 새로 구성되었다.
과거 정치 활동과 공산주의자들과의 교류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과 38세 때 맨해튼 프로젝트의 지휘자로 선발되었다. 오펜하이머가 우라늄 관련 회의들에서 중요한 해결책들을 내놓음으로써 어느새 그가 없으면 관련 업무가 진행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이해력과 열정뿐만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기술도 갖추고 있었다. 15년 동안 쌓아 온 과학적 업적과 다양한 사회생활을 통해 오펜하이머는 미숙한 과학 영재에서 세련되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 탈바꿈했다.
사막에 피어난 이론 물리학의 꽃
이곳 로스앨러모스에서 나는 아테네의, 플라톤의, 이상적 공화국의 정신을 발견했다.―제임스 터크
뉴멕시코의 사막 고원 지대에 거대한 연구 기지가 세워질 참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종종 물리학과 뉴멕시코 사막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동시에 추구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해 왔는데 드디어 절묘한 기회가 왔다.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고속 중성자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이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공동 연구를 하도록 강조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퍼진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기관들의 연구 개발 활동을 통합하여 사용 가능한 핵무기를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로스앨러모스에 세워진 비밀 연구소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포함한 민간인 4000명과 군인 2000명이 거주하는 하나의 마을이었다.
오펜하이머의 청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자문을 해 준 이지도어 라비는 자신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라비가 이미 원자 폭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펜하이머에게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학 300년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 나에게 이것은 전쟁 중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야. 나치스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로버트 오펜하이머
열린 세계를 향하여
우리는 이미 인류의 미래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한 과학과 기술의 위대한 쾌거를 손에 넣은 것이 확실하다. 가까운 미래에 유례없는 무기가 만들어져 전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꿀 것이다. 우리가 빠른 시일 내에 이 새로운 물질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일시적인 이익보다 그것 때문에 인류가 받게 될 영구적인 생존의 위협이 훨씬 커질 것이다.―닐스 보어
보어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관련해 독일과 비국을 누비며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보어에게 과학 탐구의 공동체적 문화는 진보와 합리성을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평화도 일구어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후에 세계 각국은 어떤 잠재적 적성국이 핵무기를 비축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국제 감시단이 각국 군사 및 산업 시설에서 하는 일과 새로운 과학 발견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갖는 ‘열린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원자 폭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은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점차 큰 고민으로 다가왔다.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로젠은 ‘이 나라가 핵무기를 살아 있는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주제로 발언한 오펜하이머가 “우리 모두는 끝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도록 되어 있지만 폭탄은 또한 모든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이런 희망은 당시 모인 과학자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과학자들은 이 장치가 국가 주권의 개념을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신뢰했고 그가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연합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주권이 없는 지역이 존재할 것이고, 주권은 국제 연합에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방식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약속이다. 그것이 내가 이 프로젝트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로버트 윌슨
트리니티에서 히로시마로
첫 번째 섬광의 빛이 땅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눈꺼풀을 투과했다. 내가 처음으로 올려다보았을 때 나는 불덩어리를 보았고, 그 바로 직후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밝고 매우 자주색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쪽으로 흘러와 우리를 집어삼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프랭크 오펜하이머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도 조급해졌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을 했고, 그로부터 8일 후 독일은 항복했다. 세그레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우리가 너무 늦었군.”이었다.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나치스 굴복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세그레는 그의 회고록에 “이제 폭탄이 나치스에 사용될 수 없게 되자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라고 썼다.
그러고 나서 마침내 7월 14일, 트리니티 핵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연구가 성공한 데 대한 환희, 다음 연구를 향한 순수한 매진. 리처드 파인만을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은 역사적 현장에 서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핵 실험이 끝나자 로스앨러모스를 휘감은 성취감과는 별도로 오펜하이머는 책임감에 대한 더 큰 고민에 빠졌다. 오펜하이머의 지도 아래 만들어진 원자 폭탄이 이제 곧 사용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소련과의 군비 경쟁을 촉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슈퍼 폭탄에 맞서는 한 사람
이제 나는 죽음이, 세계의 파괴자가 된다.―바가바드기타 중에서
전쟁 직후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의 존재가 미국에, 나아가 전 세계에 위협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핵 독점은 유지될 수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다른 과학자들과 같이, 그는 소련이 3~5년 안에 미국의 핵 독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핵을 보유함으로써 미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환상은 위험한 것이었다.
냉전 군사 체제에 맞서 싸우게 된 오펜하이머는 1949년이 되자 핵 군축과 관련된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정부와 일반 대중이 원자력에 가지고 있는 환상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그는 또한 민간 핵발전소에 내재된 잠재적 위험 요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와 같은 발언들은 핵 기반 기술의 개발을 선호하던 국방부나 전력 산업 관계자들로부터 미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는 여전히 보어의 비전인 전 세계적 개방만이 핵 시대를 사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냉전 초기에 유엔에서 진행된 핵무기 통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전 세계적인 개방, 정보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는 비밀주의와 두려움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만 정보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오펜하이머는 유일한 구제책은 “솔직함”뿐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상을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것을 만듦으로써 우리는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로버트 오펜하이머
현대판 갈릴레오, 열린 마음의 주인
1950년대의 암흑기에 논쟁의 중심에 있다는 이유로 그가 괴로움을 겪을 때, 나는 그에게 마음만 먹으면 외국의 대학에서 그를 환영할 테니 외국에 나가서 살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제길,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단 말야.”―조지 프로스트 케넌
오펜하이머는 매카시 반공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가장 눈에 띄는 희생자가 되었다. 그는 원자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노력에 앞장섰지만, 그가 동포들에게 위험성을 경고하려고 했을 때, 즉 미국이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그를 재판정에 세우고 말았다. 프리먼 다이슨이 언급한 ‘파우스트의 거래’에서와 같이 오펜하이머는 거래의 조건을 재협상하려고 시도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잘려져 나가야만 했다. 역사가 바튼 번스타인은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매카시 없는 매카시즘의 승리였다.”라고 썼다.
1954년 보안 청문회 이후, 공인으로서의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고, 인용했으며, 사진을 찍고, 조언을 구했으며, 찬사를 퍼부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영웅의 원형(源型)으로, 과학과 지성의 영웅으로, 새로운 원자력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살아 있는 상징으로 신격화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영광은 사라졌고 그 역시 사라져 버렸다.―로버트 코플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이사회 의장인 루이스 스트라우스의 주도 하에 다분히 악의적인 고발과 불법 도청으로 그의 개인적인 연애사까지 들먹이며 수모를 안겨 준 보안 청문회가 끝났다. 스트라우스는 개인적 복수심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소장직에서 유임시키는 투표를 몇 달 미뤘다. 그동안 고등 연구소의 교수들은 오펜하이머를 지지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해 서명을 받을 시간을 벌었으며 연구소의 종신 교수들은 모두 서명했다. 오펜하이머는 중절모와 더불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버린 애연 습관으로 얻은 후두암으로 1967년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냉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핵 대결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현실로 남아 있다. 오펜하이머는 핵 확산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가 1946년에 제안했던 핵무기 국제 통제 계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펜하이머의 삶과 고민은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카이 버드, 마틴 셔윈,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정보
저자(글) 카이 버드
저자 카이 버드(Kai Bird)는 『의장: 존 J. 매클로이와 미국 지배 계급의 형성(The Chairman: John J. McCloy, The Making of the American Establishment)』(1992년)과 『진실의 색깔: 맥조지 번디와 윌리엄 번디 형제의 전우애(The Color of Truth: McGeorge Bundy and William Bundy, Brothers in Arms)』(1998년)를 썼고 로런스 리프슐츠(Lawrence Lifschultz)와 함께『히로시마의 그림자: 역사의 부정과 스미스소니언 논쟁에 관한 글 모음(Hiroshima’s Shadow: Writings on the Denial of History and the Smithsonian Controversy) 』(1998년)을 편집했다. 그는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 알리시아 패터슨 저널리즘 펠로십, 맥아더 재단, 록펠러 재단, 토머스 왓슨 재단, 독일 마셜 기금, 그리고 우드러 윌슨 국제 연구 센터 등의 지원을 받았다. 현재 《더 네이션(The Nation)》의 객원 편집자로 활동 중이며, 워싱턴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저자(글) 마틴 셔윈
저자 마틴 셔윈(Martin J. Sherwin)은 터프츠 대학교의 월터 S. 딕슨 석좌교수로 영문학과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같은 대학교의 원자력 시대 역사 및 인문학 센터를 설립했다. 저서에 『파괴된 세계: 히로시마와 그 유산들(A World Destroyed: Hiroshima and Its Legacies) 』(1975년, 1987년, 2003년)가 있다. 그는 미국 외교사학회의 버나스 상(Bernath Prize)과 국립 역사학회의 미국사 최우수 서적상을 수상했다. 그는 「트리니티 이후, 핵 전략의 역사(The Day after Trinity, A History of Nuclear Strategy)」와 PBS 13부작 「핵 시대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in the Nuclear Age)」 등 여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에 고문으로 참여했고 현재 소련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책임자였던 이고르 쿠르차토프(Igor Kurchatov)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공동 제작하고 있다. 맥아더 재단,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 미국 학술 아카데미, 국립 인문학 기금,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보스턴과 워싱턴에서 살고 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년 4월 22일~1967년 2월 18일) 는 ‘원자 폭탄의 아버지’. 직물 수입상으로 성공한 독일 출신 유태인 이민 1세대 아버지와 이민 2세대인 예술가 어머니를 두고 190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뉴욕 에티컬 컬처 스쿨(New York City's Ethical Culture School)를 나와 1925년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원자 구조를 연구했다. 1927년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와 스위스 취리히 과학 센터 방문 연구 후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분교의 물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1930년대에 버클리를 미국 양자 물리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서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 지휘했으며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원자력 위원회 일반 자문 회의(General Advisory Committee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의장을 지냈다. 공산당 동조 행위와 수소 폭탄 제조 반대 발언 등으로 인해 FBI와 반미 활동 조사 위원회,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1954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보안 청문회에 회부되어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당했다. 1963년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을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복권시켰다. 1947년부터 1966년까지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다 이듬해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케임브리지 시절 발표한 「진동―회전 밴드의 양성자 이론에 대해(On the Quantum Theory of Vibration―rotation Bands)」와 「이체(二體) 문제에 대한 양성자 이론에 대해(On the Quantum Theory of the Problem of the Two Bodies)」를 시작으로, 막스 보른과 공저인 「분자의 양자 이론에 대해(On the Quantum Theory of Molecules)」, 양전자의 존재를 예측한 「전자와 양자 이론에 대해(On the Theory of Electrons and Protons)」, 로버트 서버와 공동으로 중성자별을 연구한 「별 중성자 중핵의 안정성(The Stability of Stellar Neutron Cores)」 등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들은 현대 양자 역학과 천체 물리학 등 여러 분야의 근간을 이루는 논문들이기도 하다. 저서로 핵무기, 과학, 전후 문화의 관계에 대한 강연을 모은 『열린 마음(The Open Mind)』이 있다.
역자 최형섭은 서울 대학교 재료공학부에서 학사 과정을 마친 후, 미국 조지아 공과 대학과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과학기술사를 공부했다. 2007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과학사 연구 기관 케미컬 헤리티지 파운데이션(Chemical Heritage Foundation)의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2009~2010년에는 일본 학술 진흥회 외국인 특별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도쿄 대학교 총합 문화 연구과 과학사 및 과학 철학 연구실에서 일본의 반도체 기술 및 재료 과학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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