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길
2016년 12월 14일 출간
종이책 : 2014년 06월 16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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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6319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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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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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는 책을 들고 냄새를 맡았다. 먹 냄새, 닥나무 냄새, 노란 책표지에서 나는 치자 냄새. 선비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이런 것이었는지. 아직 어느 곳에서도 이렇게 많은 책을 본 적이 없었다. 책 냄새가 좋아서 가슴에 안았다. 벽에 글씨가 담긴 족자가 걸려 있고, 창 쪽으로 책이 가지런히 꽂힌 낮은 책장과 책상 말고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정갈한 방이었다. 양반을 욕심덩어리로 본 것이 잘못된 생각일까. 책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런 방에 욕심이 자랄 건더기가 어디 있는가. 혹시 이 방만 그럴듯하게 꾸며 놓고 안채에는 가난한 백성에게서 착취한 금은보화가 잔뜩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52~53쪽
“미끄러져서 발목이 부러질 뻔했습니다.”
“부러지지 않았으니 천만다행 아니냐.”
“여름 내내 누에 먹여 살린다고 힘들어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있는 게야. 뽕잎을 더 딸 곳이 없으니 잠시 쉬라고.”
“미워서 뒷간에 처넣고 싶었는데 이젠 고것들이 그립습니다.”
“집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서 밭뽕과 산뽕을 섞어 먹이면 멀리 가지 않고도 누에를 충분히 먹일 수 있단다.”
167쪽
“어째서 비겁하다고 하십니까. 갈대가 바람에 몸을 눕히는 건 비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함이 아닙니까.”(…)
“수리야, 쌀이나 보리 한 톨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더냐. 한 톨의 보리가 땅에 떨어져 썩는 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란다. 오늘 내가 죽는 이유는 먼 훗날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내가 죽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열매가 맺히는지 알게 될 테니.” 266~267쪽
선암이 수리의 영혼을 키워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면, 쌀독에 거미줄을 칠 것 같은 살림살이는 그를 훌륭한 들개로 만들어 주었다. 갈옷을 입은 수리의 모습은 한 조각 노을 같고 그늘 같아서 흡사 산의 일부분 같기도 했다. 289쪽
수리는 곱게 싸서 가져온 비단을 내놓았다. 황사영이 비단을 받아서 조심스레 펼쳤다. 천잠사로 짠 비단이 등잔 불빛에 서늘하게 빛났다. 비단을 살피던 황사영이 곱다며 탄식을 거듭했다. … 야생 산누에의 실 천잠사로 짠 비단이라니까 황사영이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번의 잠을 자고 네 번의 허물을 벗은 뒤 고치를 짓고 뱉어 낸 실. 천잠사는 천하의 명검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실이었다. 292~293쪽
지금까지 수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배가 고픈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선암이 순교를 하고 나서야 배고픈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외로움인 것을 알았다. 높은 산에 혼자 사는 독수리가 된 기분이었다. 독수리는 세상을 내려다보며 가없는 하늘을 맴돈다. 하늘을 맴돌다 지치면 다시 산등성이 높은 바위에 내려앉아 고독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누구보다 강하고 날카로운 부리를 가졌지만 독수리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동물이었다. 331쪽
“소인은 진짜 죄인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당한 사람이 죄인인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 이들이 죄인인지.”
-본문 188쪽
속량된 노비의 후예인 누에치는 소년 ‘수리’에겐 한 가지 꿈이 있다. 배부른 머슴이 되느니 쌀독에 거미줄을 치더라도 자유로운 봇짐장수가 되는 것. 그런 수리에게 비단길로 장사를 떠난 아버지는 가장 큰 자랑거리이다. 어느 날 수리네 옆집에 조선 땅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 사람인 ‘선암 정약종’이 이사를 온다. 선암은 수리에게 반상의 구별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며 자제들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부르라 하는가 하면 글을 배우려면 세 살배기에게도 부탁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글공부를 부추긴다. 여느 양반들과는 달라도 한참 달라 뵈는 그에게 수리는 점점 이끌린다. 그러던 어느 날 소식이 깜깜하던 아버지가 ‘천주쟁이’로 잡혀 들어가 생사불명이라는 무참한 얘기가 들려오고, 대궐 주인이 바뀐 조선 땅에 피바람이 불어치는데…….
갓난아이가 군포세를 물고, 까막눈 봇짐장수가 누명을 쓴 채 매질을 당하고, 남을 밀고해야 내가 살 수 있는 세상. 그런 비정한 시대에 아비를 빼앗긴 열다섯 살 소년과 시대를 앞질러 사랑의 가치를 질문했던 선암 정약종의 가슴 시린 우정이 펼쳐진다.
19세기 첫해, 피바람 부는 조선 땅에서
가장 외롭고도 강인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속에 사회질서 회복이라는 명목으로 숙청의 피바람이 분 조선은 특히 이듬해인 1801년 신유년, 날로 교세가 확장되어 가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1827년까지 이어진 이 박해 사건은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싸움이기에 앞서 정권 교체 속에 펼쳐진 정치 투쟁이자, 동·서 문명 충돌이며, 전통 대 근대의 격렬한 대립이었습니다. 북멘토 청소년문학선 ‘바다로 간 달팽이’의 열 번째 작품, 장편소설 『비단길』은 “피로 물든 시간” 신유년으로부터 망자들을 불러내, 그들이 꿈꾸었던 평등한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1800년 가을 정조의 죽음으로부터, 1801년 가을 종교 박해의 현실을 알리려고 비단으로 밀서를 쓴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의 죽음까지 1년간을 무대로 합니다. 한 소년의 성장담이 씨줄이요, 정약종의 마지막 해를 그린 역사 이야기가 날줄을 이루는 이 작품 속에는 가상인물과 실존인물이 공존합니다. 그중 주된 실존인물은 바로 ‘선암 정약종’입니다.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인 순교자 124인을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福子)’로 추대하는 ‘시복식’을 한국에서 올리는데 그중 대표 복자가 바로 선암 정약종입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집안이 배출한 나주 정씨 사형제(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열의로, 또 한편 유교 질서 속에 억압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중 정약종은 가장 늦게 그러나 가장 깊게 천주교를 받아들였습니다. 평신도를 이끄는 명도회 초대 회장이 되어 천주교의 가르침을 가장 밑바닥 민중에게까지 전하려는 노력 속에 형제들의 만류를 뒤로하고 홀로 순교를 택했습니다. 최초의 한국어 교리서 『주교요지』는 날로 포위망을 좁혀 오는 죽음 앞에서 그가 평생을 바쳐 배운 문자를 뒤로하고, 글 모르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쓴 책입니다. 결국 이 책은 그를 한국 천주교사의 첫 번째 신학자로 기록되게 합니다.
가상인물인 수리는 속량된 노비의 후예입니다. “등골 빠지게 짐꾼 노릇을 할 바엔 말고삐 잡고 다니는 게 편하”다는 주변의 말에 “편한 거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게 좋다”(69쪽)고 맹랑하게 받아치지만 “신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세상을 살다 보니, 아예 천민이니 여기고”(50쪽) 사는 게 뱃속 편하다는 처세술 또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열다섯 수리가 가져 보는 생애 첫 스승 선암은 눈과 마음을 열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 앞에서 평등하단다. 태어날 때 알몸이었던 것처럼”이라며.(56쪽)
참된 어른이 되기를 꿈꾸는 우리 모두를 위한 성장소설
마음속의 긍지였던 가장이 ‘밀고자’라는 수치스런 이름을 가족에게 남기고 종적을 감춘 상황, 그 속에서 얼떨결에 가장이 되어 버린 소년 수리는 세상을 향한 분노와 아버지를 향한 원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아버지 선암 정약종을 만나 다시 새롭게 세상을 읽고 배우기 시작합니다. 사회 모순을 반성하는, 당대 가장 대립적이고도 가장 실천적인 이념을 자신의 신앙이자 철학으로 받아들였던 선암 정약종을 지켜보면서 수리는 사람다움이란, 또 어른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해 나갑니다.
이 시대에성인으로 거듭난 다산가의 사람들, 황사영, 강완숙, 주문모 신부 등 실존 인물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신유박해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역사소설인 동시, 참된 어른이 되길 꿈꾸는 우리들 모두에게 큰 울림을 남길 성장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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