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2015년 10월 07일 출간
국내도서 : 2015년 09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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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14.38MB)
- ISBN 978896051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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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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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의 핵 게놈 해독은 왓슨의 DNA 이중 나선 구조 규명에 비견되는 과학계의 이정표다. 이 책은 이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촘촘하게 그려 낸다. 실험실의 내밀한 풍경, 시료를 찾아 나서는 모습, 과학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 연구 기금 확보, 협업과 경쟁, 공동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연구팀의 모습, 학술지 논문 출판 과정 등 과학계 외부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구체적인 상황들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또 과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개인적인 일화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어 한 권의 소설처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 이집트 미라 DNA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알아내기까지
1 기계장치에서 나온 네안데르탈인
2 미라와 분자
3 과거를 증폭하다
4 실험실의공룡
5 좌절
2부 “나는 인류의 역사를 밝히고 싶다”
― 새로운 연구소 마련과 네안데르탈인 게놈 프로젝트 추진까지
6 크로아티아와 인연을 맺다
7 새로운 보금자리
8 다지역 기원설에 대한 논란
9 핵 DNA를 얻을 수 있을까?
10 핵 DNA를 얻을 수 있다!
11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3부 무모한 도전에 나서다
― 프로젝트에 쓸 뼈확보에서염기 서열 해독, 매핑까지
12 무정한 뼈
13 세부적 문제들에 시달리다
14 게놈을 매핑하다
15 뼈에서 게놈으로
4부 네안데르탈인은 우리 몸 안에 살아 있다
― 유전자 이동과 이종교배 이야기
16 유전자가 흘러갔을까?
17 머리를 맞대다
18 유전자가 흘러갔다!
19 대체 집단
5부 프로젝트의 완성과 또 다른 인류의 발견
― 게놈 서열 발표와 그 반향, 데니소바인의 DNA 발견까지
20 인간의 본질?
21 게놈 서열을 발표하다
22 매우 특별한 손가락
23 네안데르탈인의 친척
후기 | 주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죽은 지 몇 시간, 때로는 며칠 내에 몸 안의 DNA 가닥들이 점점 더 작은 조각들로 끊어지는 한편, 다양한 형태의 다른 손상들이 축적된다. 이와 동시에 평상시에 박테리아를 억제하던 장벽들이 무너지면서 장과 폐에 사는 박테리아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기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들이 힘을 합쳐 우리의 DNA 안에 저장되어 있는 유전정보 ㅡ한때 우리 몸을 형성하고 유지하고 기능하게 만들었던 정보 ㅡ를 없앤다. 그 과정이 완료되면 유일무이한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물리적 죽음은 이때 비로소 완료되는 것이다. (22쪽)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 연구실에서 일하는 과학자들과 함께 나누는 집중적인 토론이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동안의 성공에는 그러한 토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연구에만 몰입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이 그러한 토론에서 나오곤 한다. 나아가 프로젝트의 결과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은 과학자들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그들은 애정을 쏟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미래가 걸려 있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흔히 사로잡히는 희망적 사고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론에서 내 역할은 사회를 보면서 고려해 볼 만한 생각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37쪽)
작은 미라 조각을 예란에게 보내고 나서 결과를 기다렸다. 과학을 할 때 가장 괴로운 순간들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싶다. 내 연구의 성패가 다른 누군가가 하는 일에 달려 있는데 그것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결코 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고 나서 마침내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좋은 소식이었다. 그 미라는 2400년 된 것이었다. 대략 알렉산더 대제가 이집트를 정복한 시기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선 밖으로 나가서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하나 사서 예란에게 보냈다. 그런 다음 내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59쪽)
나는 고대 DNA 분야가 분자생물학이나 생화학에 대한 탄탄한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던 터였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고대 DNA에 대한 연구 결과에 동반되는 언론의 관심에 현혹되어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된 오래된 표본들에 무작정 PCR를 적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리 연구실 사람들이 사석에서 쓰는 표현을 빌리면 그들이 하는 것은 “면허 없는 분자생물학”이었다. (39쪽)
멸균 시설 내에서 일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멸균복으로 갈아입는 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뼈 시료를 가루로 가는 일 같은 ‘더러운’ 일을 하는 준비실로 들어간다. 거기서 다시 DNA를 추출하고 추출된 DNA를 조작하는 일을 하는 내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 방에서도 귀중한 DNA 추출물은 특수 냉동고에 저장된다. 이곳에서 하는 모든 일은 공기가 여과되는 후드 밑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그림 7.1을 보라.) 그뿐 아니라 멸균 시설 전체의 공기가 순환되고 여과된다. 바닥의 격자망을 통해 빨려 나간 공기는 1/200밀리미터보다 큰 모든 미립자의 99.995퍼센트가 제거되어 그 방으로 되돌아온다. (147쪽)
한편 헨드릭의 논문은 과학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를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했다. 완전한 이야기를 하는 데 필요한 분석과 실험을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이 비록 덜 완전하지만 결국 전달하려는 내용은 같은 이야기를 먼저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더 나은 논문을 발표해도 누군가가 진정한 돌파구를 만든 다음에 세부적인 부분을 완성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만다. 헨드릭의 논문이 발표되고 나서 우리 연구팀은 이 문제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벌였다. 몇몇은 우리가 더 일찍 발표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4쪽)
과학적 협력을 끝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협력자가 사적인 친구가 되었을 때는 더더욱 어렵다. 나는 에디의 가족과 함께 버클리에 머문 적이 있었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언덕 위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 다녔으며 콜드스프링하버 회의가 열리는 동안 뉴욕의 극장에도 함께 갔다. 나는 그와 어울리는 것이 항상 즐거웠다. 그래서 에디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뭐라고 써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고 쓰고 고치기를 반복했다. (215쪽)
반면에 네안데르탈인이 도축당했다면 뼈들이 부서지고 긁히고 살점과 골수를 다 잃은 다음에 내던져졌을 것이고 그중 몇몇 뼛조각들은 금방 건조되어서 박테리아가 증식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빈디자의 몇몇 표본에서 DNA를 회수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네안데르탈인의 식인 풍습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224쪽)
[출판사 리뷰]
1996년 어느 날 이 책의 저자 스반테 페보는 독일 본에 있는 라인 주립 박물관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박물관에서 얻고 싶은 것은 바로 네안데르탈인의 뼈였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DNA 연구를 한답시고 뼈를 내 달라고 하면 들어줄 리 만무했다. 150여 년 전 네안더 계곡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은 독일의 비공식 국가 보물이었다.
페보는 그 뼈를 꼭 얻고 싶었다. 네안데르탈인이 누구인가? 그들은 진화적으로 우리 현대인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이들이 유전적으로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알아낼 수 있다면 우리 조상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누구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박물관의 담당 큐레이터가 고맙게도 페보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년 전에 자기와 나눈 대화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 큐레이터는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얻을 가능성이 얼마쯤인지 물은 적이 있었고 페보는 5퍼센트쯤 된다고 솔직히 답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후인 지금 그 큐레이터가 다시 전화를 걸어 와 정말로 그 귀한 뼈를 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여러 연구팀이 박물관에 연락해서 DNA를 확실히 얻을 수 있다며 시료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박물관 측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다른 연구실에 의견을 구하기로 했는데 페보의 솔직한 대답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그 큐레이터가 옛일을 잊지 않고 페보에게 연락한 것이다.
그 큐레이터는 네안데르탈인의 위팔뼈에서 3.5그램을 잘라 내 페보에게 전달했다.(124쪽 그림) 페보와 연구팀은 이를 가지고 세계 최초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 서열을 해독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이 연구에 대해 런던 자연사 박물관의 인류학자 크리스 스트링거는 “우주탐사 역사의 달 착륙과 같은 사건”이라고 선언했고, 학계의 ‘다른 편’인 다지역 기원론의 주창자이며 고고학자인 밀포드 울포프조차도 “만일 누군가가 이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스반테 페보일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43쪽)
페보의 연구에 대한 칭찬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서른 살 무렵이었던 1985년 세계 최초로 고대 이집트 미라의 DNA를 추출해 해독했고, 그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하여 우리나라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미라 연구는 고인류학 또는 DNA 고고학이라는 신흥 학문이 출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연구 인생은 어쩌면 열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이집트에 갔을 때 이미 싹텄는지 모른다. 그곳에 다녀온 뒤 파라오, 피라미드, 미라 등 고대사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송아지 간을 사다가 몰래 시작한 미라 연구
1980년대 초 박사 과정으로 웁살라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던 페보는 문득 “이집트 미라를 대상으로 이러한 연구를 할 수는 없을까?”(49쪽)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파라오가 통치하던 시절의 이집트인들과 현대 이집트인과의 관계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사후 조직에 DNA가 얼마 동안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슈퍼마켓에서 송아지 간 한 덩이를 사다가 오븐에 넣고 가열하여 미라를 만들었고 거기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으로 대학 박물관에 있는 진짜 이집트 미라를 가지고 똑같이 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실패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당시 동독 베를린 국립 미술관에 머물면서 더 많은 미라 표본을 수집하여 그중 2400년 된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여 염기 서열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57쪽 그림)
논문을 작성해 『네이처』에 보내기 전에 페보는 지도 교수에게 먼저 갔다. 당시까지 그는 이 연구를 비밀리에 진행했다. 연구 기금과 귀중한 시간을 엉뚱한 곳에 썼다고 꾸중을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는 페보를 혼내기는커녕 놀라워하면서 원고를 읽어 보겠다고 했다. 또 페보가 지도 교수의 자격으로 논문의 공동 저자가 되고 싶은지 묻자, 자신이 잘 모르는 연구의 공동 저자는 될 수 없다고 했다!
원고를 학술지에 보내고 얼마 뒤 출판 승낙과 함께 교정쇄가 도착했을 때 페보는 그중 한 부를 아무런 메모도 없이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앨런 윌슨에게 보냈다. 향후 윌슨이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을 수 있는지 의사를 타진하고 싶었던 페보는 출판 전에 논문을 보내 주면 고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내 윌슨의 답장이 왔는데, 거기에는 예상치 못한 반응이 있었다. 윌슨이 페보를 ‘페보 교수(?)’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연구실에서 안식년을 보낼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닌가. 페보는 정식으로 편지를 써서 자기는 교수도 박사도 아니며 연구실도 없다고 설명해야 했다. 그러고는 실험실 동료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분자진화학자인 앨런 윌슨을 모셔다가 일 년 동안 나를 위해 배양 접시를 닦게 만들 뻔했다.”라고 농담했다.(65쪽)
이후 페보는 윌슨의 배려로 버클리에서 고대 DNA 연구를 위한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한번은 현재 살아 있는 캥거루쥐와 50여 년 전의 캥거루쥐의 DNA를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여 진화생물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다이아몬드는 “이 프로젝트가 성공한 이상, 앞으로 박물관 표본들의 과학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시야의 소유자들은 연구를 계속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77쪽)
실험실이 공룡의 DNA로 오염되었다고?
버클리에서 유대류인 태즈메이니아주머니늑대의 DNA를 연구하여 『네이처』에 발표할 무렵 스승 윌슨은 마지막 저자로 페보의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마지막 저자로 등재된다는 것은 연구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과학자라는 의미였다. 이러한 연구 공로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뮌헨 대학 정교수에 임용된 페보는 버클리를 떠나 독일에서 새로운 연구 인생을 시작했다.
1990년대 초 페보는 진짜 고대 DNA를 골라낼 수 있는 ‘진품 기준’을 마련하는 등 이 신흥 학문에 과학적 체계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고대 DNA를 증폭하는 중합 효소 연쇄 반응(PCR) 실험에서 오염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 사제의 DNA를 연구하려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큐레이터의 DNA를 연구할 수도 있었다.
그즈음 유타 소재 한 대학 연구팀이 8000만 년 전의 뼛조각에서 추출한 DNA의 서열을 『사이언스』에 발표하면서 그 뼈가 공룡에서 왔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페보는 이 연구가 사실인지 파헤쳐 보기로 했다. 유타 연구팀이 발표한 서열을 분석해 보니, 조류나 파충류보다는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와 유사해 보였다. 그는 그것이 핵 게놈에 끼어들어 돌연변이를 축적한 mtDNA일 거라고 추정하고 실험해 보았다. 그래서 정자의 머리를 분리한 다음 거기서 DNA를 정제하고 유타 연구팀이 했던 방식대로 PCR를 돌렸다. 그랬더니 정말로 유타 연구팀이 찾아낸 공룡의 서열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즉 유타 연구팀이 해독한 것은 공룡의 DNA가 아니라 핵 게놈으로 자리를 옮긴 인간의 mtDNA 조각이었던 것이다.
『사이언스』에 ‘전문가 논평’을 쓰면서 장난기가 발동한 페보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추출한 DNA로 유타 연구팀이 발견한 것과 비슷한 서열을 얻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 우리 실험실이 공룡의 DNA로 오염되었다. 2) 공룡이 멸종하기 전에 포유류와 이종교배를 했다. 3) 유타 연구팀의 실험이 인간의 DNA에 오염되었다.(103쪽)
비독일 출신만으로 세워진 새로운 인류학 연구소
1997년 뮌헨 대학에 있으면서 세계 최초로 네안데르탈인의 mtDNA 서열을 발표할 무렵 페보는 독일의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막스플랑크협회와 새롭게 설립할 인류학 연구소의 장소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협회의 입장은 분명했다. 발트해 연안의 작은 항구도시 로스토크였다. 이 도시가 있는 주는 협회의 연구소가 하나도 없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요구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페보는 단호히 반대했다. 그냥 뮌헨 대학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통보했다. 그 작은 도시로는 인재를 유치하기 어려울 터였다.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협회 측에서도 페보의 분명한 의사를 깨닫고는 결국 방향을 선회하여 라이프니츠로 결정했다.(143쪽)
당시 페보가 구상한 새로운 연구소는 학제 구분에 따라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에 초점을 맞춘 곳이었다.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고생물학자, 언어학자, 영장류 학자, 심리학자, 유전학자들이 이 질문을 함께 연구하는 다학제 간 연구소가 되어야 했고, 이때 사용해야 하는 개념적 틀은 진화였다. 진화인류학연구소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새로운 연구소에 발달심리학자 마이크 토마셀로, 영장류 학자 크리스토프 보쉬, 비교언어학자 버나드 캄리가 합류해 각 분과를 맡았다. 페보를 포함해 모두가 해외 학자였다. “장차 400명이 넘는 인원을 고용하게 될 거대한 연구소를 나라 밖에서 온 사람들에게 전적으로 맡길 정도로 국수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나라는 별로 없을 것이다.”(141쪽)
이후 이 연구소는 성공적인 기관으로 성장했는데 페보는 그 비결로 세 가지를 말한다. 1) 각 분과장들이 모두 독일인이 아니었기에 시작할 때부터 서로 잘 해보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2) 서로 비슷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데도 전문 분야가 겹치지 않아서 직접적인 경쟁이나 라이벌 의식이 없었다. 3) 막스플랑크협회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 게놈 프로젝트: ‘마법의 뼈’를 찾아서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에 자리를 잡은 후 네안데르탈인 핵 게놈 연구에 몰두하던 2006년 5월 어느 날 페보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네안데르탈인의 뼛조각을 얻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방문하기 며칠 전 시료 채취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누군가 압력을 넣지 않고서야 상황이 이렇게 급변할 수 없었다.
지난 1997년 페보는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 서열을 발표하면서 현생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이종교배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계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도 한계가 있었기에 핵 게놈을 연구해 봐야만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위해 네안데르탈인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는데,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크로아티아 빈디자 동굴에서 발견된 양질의 뼈가 반드시 필요했다.
페보는 일단 현지에 가 보기로 했다. 담당자는 페보에게 시료 채취는 고사하고 표본도 보지 못하게 했고, 현지에서 영향력이 있는 고고학자를 찾아갔지만 역시 시료 채취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못 먹게 된 어린아이처럼 발버둥 치고 싶었지만”(225쪽) 페보는 순리대로 풀기로 했다. 자그레브 대학에서 고대 DNA 연구에 대한 강연을 한 다음 그 대학 인류학 교수인 파바오 루단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중요한 조언을 얻었다. 게놈 프로젝트를 단지 페보의 연구진과 빈디자 수집물을 소장하고 있는 연구소 사이의 협업으로 추진할 게 아니라 그보다 큰 단체 사이의 협업으로 추진하라는 조언이었다.
루단의 조언대로 새로운 협업 계획을 세웠고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자그레브에 있는 모든 관계자를 이 프로젝트에 끌어들이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시도했다. 다행히 루단의 노력이 빛을 발하면서 현지 여론도 서서히 협업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페보는 빈디자 동굴에서 나온 여덟 점의 뼈를 멸균 봉지에 넣어 가져올 수 있었다.(223쪽 그림)
저자는 이 뼈를 이용해 2010년 마침내 게놈 서열을 발표했고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이동과 현생인류와의 이종교배를 증명해 보였다. 이 연구에 대해 울포프의 제자로 고생물학자인 존 호크스는 “이 과학자들은 인류에게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 그들은 인류학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라고 격찬했다. 이때 발표한 논문으로 페보는 한 해 동안 『사이언스』에 발표된 것 중 최고의 논문에 수여하는 상인 미국 과학진흥협회(AAAS)의 뉴컴 클리블랜드 상을 공동수상했다.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서 기원하여 어떻게 뻗어 나갔는가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이 밝혀지면서 우리 현생인류가 언제 어느 경로로 이동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얻었다. 페보는 네안데르탈인의 핵 게놈 분석을 통해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이종교배를 했고 비아프리카인들에게 DNA의 2퍼센트 정도를 전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인에게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페보의 스승 윌슨이 주창했던 엄격한 아프리카 기원설과도 달랐고 페보가 1997년 발표한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 결과와도 달랐다.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멸종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DNA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페보의 발견은 또한 다지역 기원론과도 달랐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적 기여가 유럽뿐 아니라 중국과 파푸아뉴기니에도 비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여기서 페보는 중동설을 주장한다. 아프리카에서 나왔던 현생인류가 중동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만일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중동에서 처음 만나서 이종교배를 하고 그다음에 오늘날 아프리카 밖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면, 아프리카 밖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같은 양의 네안데르탈인 DNA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5만~10만 년 전 중동 지역에서 이종교배를 했을 당시는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는 비교적 동등했다. 그러던 것이 5만 년 전 직후에 급변했다. 그때부터 현생인류는 세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도달했으며 그들이 세력을 넓혀 나갈 때마다 네안데르탈인 등 고생인류는 빠르게 사라졌다. 페보는 이렇게 5만 년 전 직후에 나타난 인류 집단을 그 전의 현생인류와 구별하기 위해 대체 집단(replacement crowd)이라고 부른다. 대체 집단은 고고학자들이 최초의 발사 무기로 여기는 뼈로 만든 창촉과 화살을 사용했는데, 이를 통해 효과적으로 네안데르탈인 및 고생인류를 물리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페보는 이 대체 집단이 중동의 어딘가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만나 짝짓기를 했고 거기서 태어난 자식들을 길렀다고 본다. 반은 현생인류이고 반은 네안데르탈인인 그 아이들이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일종의 내적 화석으로 품은 채 대체 집단으로 편입되었고, 그러한 네안데르탈인의 내적 화석은 오늘날 남아메리카 남단의 티에라 델 푸에고를 비롯하여 태평양 한복판인 이스터 섬까지 퍼지게 됐다는 것이다.(320-324쪽)
어떤 유전인자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네안데르탈인 게놈 해독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바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페보는 발달심리학자 마이크 토마셀로의 연구를 소개하면서 인간 아이들이 유인원의 새끼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한다. 우선, 무언가를 가리키는 데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램프나 꽃 등을 손으로 자주 가리키는데 이는 그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부모나 타인의 관심을 그곳으로 돌리기 위해서이다. 다른 하나는 유인원 새끼들에 비해 인간 아이들이 부모와 타인의 행동을 훨씬 잘 흉내 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과 관심을 공유하려고 하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배우려는 성향이야말로 결국 인간과 유인원을 가르는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에는 그 유전적 토대가 필수적이다. 유인원을 아무리 가르쳐도 인간처럼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전적 토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페보는 이를 알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과 현대인의 게놈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그가 게놈 해독에 매달려 고군분투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페보는 현대인의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의 조상들과 갈라진 뒤에 일어난 모든 유전적 변화를 찾아서 목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아미노산을 바꾸는 78개 뉴클레오티드 위치들을 확인했다. 모든 인간들은 이 위치들이 서로 비슷한 반면,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및 유인원 게놈은 그 부위가 달랐다. 그중에는 정자의 운동성과 관계있는 유전자도 있었다. 페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침팬지의 심한 문란함과 고릴라의 일부일처제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 같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즉 그들은 한 파트너에게 정절을 지킬 때 주어지는 정서적 보상과 성적 유혹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을 것이다.”(344쪽)
저자는 우리 인간과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DNA 서열상의 위치들이 약 10만 개쯤이라고 한다. 이 10만 개의 뉴클레오티드들을 조상형으로 되돌린다면 그 사람은 유전적으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의 공통 조상과 비슷해진다. 앞으로 이 목록을 연구하여 현생인류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는 유전적 변화들을 찾아내는 것이 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 목표 중 하나일 거라고 페보는 말한다.
페보의 고대 DNA 탐험은 계속된다
2010년 1월 모스크바 공항 환승장. 페보는 급박하게 메일을 쓰고 있었다. 『네이처』의 담당 편집자에게 논문 출판을 독촉하는 내용이었다. 경쟁이 붙은 상황이니 빨리 처리해 달라고 했다. 이는 그 전날 노보시비르스크 인근에 있는 러시아 고고학자를 찾아갔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뼈를 그의 최대 경쟁자인 미국 유전학자 에디 루빈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한시가 급했다. 루빈이 그 뼈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페보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서둘러 논문을 마무리하여 『네이처』에 보냈다. 논문은 시베리아 남부 데비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아주 작은 손가락뼈에서 추출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것으로 멸종한 인류의 새로운 형태를 골격 유해 없이 DNA 서열만으로 보고하는 최초의 사례였다. 이후 그 작은 손가락뼈를 가지고 핵 게놈을 해독하는 작업을 했다. 놀랍게도 그 뼈는 오염 수준이 낮아 작업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핵 게놈을 분석해 보니, 이 개체는 네안데르탈인의 게놈과 더 가까웠고 놀랍게도 파푸아뉴기니인의 조상들과 이종교배를 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페보와 연구팀은 이 사실을 종합하여 2010년 12월 논문을 발표했다.
“나는 과학자로 살면서 좀처럼 갖기 힘든 만족감을 느꼈다. 30년 전에 고국 스웨덴에서 대학원생의 비밀스러운 취미 정도로 시작했던 일이 4년 전 한 프로젝트를 낳았고, 착수할 당시만 해도 공상과학소설처럼 보였던 그 프로젝트를 지금 성공적으로 끝마쳤기 때문이다.”(402쪽)
이처럼 이 책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는 1980년대 초 이집트 미라부터 2010년 네안데르탈인 및 데니소바인까지 저자의 고대 DNA 연구 인생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래서 미국의 유명한 과학 저술가 칼 짐머는 “비밀스러운 취미에서 출발하여 과학사의 중대한 이정표로 발전하기까지 30여 년간의 이야기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 이 책은 과학의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밝힌다.”라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2014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전 세계 14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해 아마존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에 뽑히기도 하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책은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오염에 대비한 멸균실 설치(26쪽), 학술지 선정(39쪽), 연구 기금 확보(203쪽), 협업과 경쟁 과정(208, 216쪽), 연구팀의 회의 모습(246쪽) 등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또한 한 과학자의 열정적인 삶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이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던 유명 과학자 수네 베리스트룀의 혼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고(302쪽), 어쩌면 과학자로서 인생이 끝날 수도 있는 위험한 프로젝트에 자신이 과감하게 도전했음을 토로하는(197쪽) 등 진솔한 서술로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책속으로 추가]
나는 몇 주 동안 팀원들에게 연구실에서 그들이 하는 모든 단계에 대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는 전략은 젊은 시절 스웨덴에서 군사 훈련을 받을 때 전쟁 포로 심문관으로서 교육받으면서 익힌 것이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시퀀싱 도서관을 준비할 때 정제를 심하게 하도록 권하는 454의 지침이 지나친 DNA 손실을 초래한다는 의심이 강해졌다. 나는 우리가 하는 실험의 모든 단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242쪽)
금요일 회의에서 내가 이 아이디어를 말했을 때 팀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깔끔한 방법이라서라고 내 멋대로 짐작했지만, 그들이 침묵했던 것은 내가 우리 팀의 중요한 운영 방침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 방침이 우리 팀의 가장 큰 장점임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었지만 가끔은 약점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모든 의견이 나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즉 회의를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말하고 마지막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해 내는 방식을 유도했다. (242쪽)
우리는 금요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듭해서 논의했다. 내게는 이 모임이 지적 체험의 장일 뿐 아니라 사회적 체험의 장이기도 했다. 대학원생들과 박사후 연구생들은 자신들의 경력이 실험 결과와 논문에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어서 중요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반면, 팀의 목적에는 이익이 되지만 중요한 출판물의 주요 저자가 될 가망이 없는 일은 피하려 한다. 나는 신예 과학자들이 주로 이기심에 따라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내 역할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해서 그 사람의 경력에 도움이 되면서도 프로젝트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것이라고 여겼다. (246쪽)
일반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은 중국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는 고생물학의 통념에 의문을 제기할 준비가 늘 되어 있었다. 내가 ‘마르코 폴로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중국에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2007년에 요하네스가 고생물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이 살았다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동쪽으로 약 2000킬로미터쯤 더 떨어진 곳인 시베리아 남쪽에 네안데르탈인들 ㅡ혹은 네안데르탈인의 mtDNA를 지닌 사람들 ㅡ이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혹시 그들 중 일부가 중국으로 가지 않았을까. (300쪽)
나는 두 통의 이메일을 한 번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읽었다. 두 번째 읽을 때는 분석상의 결함이 없는지 아주 꼼꼼하게 읽었다. 결함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사무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지난 몇 년 동안의 논문과 노트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어수선한 책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데이비드와 닉의 결과가 컴퓨터 스크린에 떠 있었다. 그것은 어떤 기술적 오류가 아니었다. 현대인에게 정말로 네안데르탈인의 피가 섞여 있다. 이럴 수가! 지난 25년 동안 꿈꾸어 왔던 순간이었다. 우리는 인류의 기원과 관련해 수십 년 동안 도마 위에 올랐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손에 쥐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현대인들의 유전정보가 모두 아프리카에서 나온 최근의 조상들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내 멘토인 앨런 윌슨이 앞장서 주창했던 엄격한 아프리카 기원설과 달랐다. 그것은 내 자신이 믿고 있던 사실과도 달랐다.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멸종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DNA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계속 남아 있다. (308쪽)
그래도 나는 우리의 결과를 세상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과학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확고부동한 진리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추구하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과학은 유력 인사들과 죽은 뒤에도 영향을 미치는 학자들의 제자들이 ‘통념’을 결정하는 사회적 활동이다. 이렇게 결정된 통념을 무너뜨리는 한 가지 방법은 데이비드와 닉이 한 것처럼 SNP의 대립인자들을 세는 것 외에 네안데르탈인의 게놈에 대한 추가 분석을 내놓는 것이었다. 추가된 독립적인 증거들도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현생인류로 흘러갔음을 가리킨다면 그때는 세상 사람들도 납득할 것이다. (311쪽)
‘오래된 지구’ 파의 대표적인 선교 집단이 휴 로스가 이끄는 ‘믿어야 할 이유Reasons to Believe’이다. 그는 현생인류가 약 5만 년 전에 특별히 창조되었으며 네안데르탈인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믿는다. 로스와 ‘오래된 지구’ 파의 여타 창조론자들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가 섞였다는 연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로스가 출현해서 우리 연구에 대해 논평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녹취록을 전해 주었다. 그는 “초기 인류가 매우 사악한 행동 습관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오기 때문에” 이종교배가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으며, 신이 이러한 이종교배를 멈추기 위해 “지표면 전체에 인류를 강제적으로 흩어 놓았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이종교배를 ‘수간’에 비유했다. (358쪽)
우리가 고생인류 집단과 현생인류 사이의 이종교배 사례를 이미 두 건이나 찾아낸 만큼 나는 이종교배가 인류의 진화사에서 흔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았다. 나아가 데니소바인들이 현생인류와 기꺼이 성관계를 했다면 다른 고생인류와도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현생인류의 확산에 대한 큰 그림은 대체 집단이 다른 집단을 멸종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지만, 나는 이것이 완전한 대체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는 일부 DNA가 생존 집단에게로 새어 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확신한 나는 이 과정을 기술하기 위해 쓰인 다른 지면에서 보았던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구멍 난 대체leaky replacement”다. 내 생각으로는 데니소바인들의 확산도 ‘구멍 난’ 사건이었을 것 같다. (399쪽)
작가정보
저자(글) 스반테 페보
저자 스반테 페보는 1955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이집트에 다녀온 후 고대사에 매료되어 웁살라 대학교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했다. 이후 분자생물학으로 방향을 바꿔 바이러스 관련 연구를 시작했는데, 대학원생이던 1981년부터 지도 교수 몰래 고대 이집트 미라 연구에 나서 미라의 DNA를 추출하고 염기 서열을 분석하여 1985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앨런 윌슨의 배려 아래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으면서 멸종한 얼룩말의 일종인 콰가얼룩말과 캥거루쥐 등의 DNA를 당시 신생 기술이던 중합 효소 연쇄 반응(PCR)을 통해 연구했다. 1990년에는 독일 뮌헨 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어 매머드, 동굴곰, 대형 땅늘보 등 멸종된 동물과 5000년 된 얼음 인간 외치의 DNA를 해독하면서 고대 게놈 연구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 본격적으로 고생인류의 DNA 연구에 뛰어들어 독일 네안더 계곡에서 발견된 뼈를 통해 세계 최초로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염기 서열을 해독하는 데 성공했고,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이후로는 네안데르탈인의 핵 게놈 해독에 몰두했다.
2006년 네안데르탈인 게놈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래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4년 만인 2010년 드디어 네안데르탈인의 핵 게놈 해독에 성공하여 이를 『사이언스』에 발표했고, 같은 해 시베리아 남부의 데니소바 동굴에서 발견된 뼈의 게놈을 해독하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고생인류임을 확인하고 이를 『네이처』에 발표했다.
고대 DNA 연구로 여러 과학상을 받았는데 특히 2011년에는 매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최고의 논문 저자들에게 주는 뉴컴 클리블랜드 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타임」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명’에 선정되었다. 현재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유전학 분과장으로 있다.
번역 김명주
역자 김명주는 성균관대 생물학과와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다윈 평전』,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생명 최초의 30억 년』, 『플라밍고의 미소』, 『1만 년의 폭발』, 『공룡 오디세이』, 『아인슈타인과 별빛 여행』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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