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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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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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모양이 안됐다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가엾다”
-새로운 ‘-되기’를 실험하는 낯선 주체들의 탈주
1부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귀신 하기/ 지수/ 머리가 셋 달린 개/ 신의 술/ 사랑하는 신/ sober companion-숨은 낭독자/ 왼손이 하는 오른손의 일/ 엽서를 봉투에 담는 사람의 마음/ 취한 배/ 세라핀의 꽃, 꽃의 세라핀/ 인조 노동자/ 희망의 집에는 샤워볼이 있다/ 종모법/ 완두콩 공주/ 더 둥글고 더 예뻤다-J에게/ 여행하는 눈
2부 우리는 밤에 싸우는지 밤과 싸우는지
천 원이기/ 국화와 가을/ 여름을 보호하기/ 관광버스 멈추기/ 맞닿은 몸/ 내 친구의 손가락/ 좋은 말 좋은 꿈/ 보면/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도나우강_증기선_회사_선장의_미망인/ 새 소식/ 당신이 원하는 사람/ 꽃과 나무, 할머니의 노래/ 집회/ 데츠로와 나/ 세라핀의 흰 물감-해변에서 잠들기
3부 서성이며 일렁이며 만지는 마음
끝까지 읽을 사람/ 귤 까기/ 상을 엎기/ 받침/ 당신은 사랑을 하는군요/ 구름이 바라본 나와 내 친구들의 집/ 아름다운 베개/ Namenlose ring/ 공-독(void)/ 따뜻한 튀김/ 신의 잠/ 소감문 쓰기/ 산더미만큼 쌓인 사과/ 섬집 아기들/ 핏기/ 두 명/ 불/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 종 삼키기/ 피고용인 잭이 마침표로 읽을 문장은……/ 검은 비둘기
해설| 낯선 주체들의 탈주
| 김영임(문학평론가)
새 인간을 사오면서 맹세했다. 나는 새 인간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만들지 않을 것이고 새 인간의 의사를 존중하며 새 인간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건 오직 공기 같은 것 바람 같은 것 체온 같은 것 필수 조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
(…)
알을 들어 변기 가장자리에 내리쳤다 깨질 것이다 깨질 것이 분명하다 손이 더러워질 거다 낯설고 무서운 손은 휴지로 두껍게 싸서 버리면 된다 거리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껍데기가 사기 컵처럼 박살났고 손에는 상처도 남지 않았고 새 인간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최선을 다하자 방이 조금 더 넓어졌다
-「새 소식」 부분
운명이 있다면
운명을 누리는 사람처럼은 아니고
운명을 따르는 사람처럼
나는 내 친구들이 죽으면
내 마음대로 장례를 치르고
다른 친구를 남기지 않고 죽겠지
가족을 갖는 사람들은 가족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기 힘든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 되었지
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꺼이 받겠다 그랬어
나는 여기서 끝내겠다고 말했지
내가 친구들을 울게 했어
_「구름이 바라본 나와 내 친구들의 집」 부분
천 원을 가졌다 천 원이 필요했기에 천 원을 가졌다 천 원으로 배를 채울 것도 영혼을 고양시킬 것도 아니다 지성을 갈고닦을 생각도 없다 다만 지금 천 원이라는 실감 누구나 하는 약속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천 원을 가진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한다, 받아들인다 우리는 밤에 싸우는지 밤과 싸우는지 천 원을 가지는지 천 원으로 할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가지는지 생각한다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랑하든지
천 원을 가지든지
천 원을 써버리든지
_「천 원이기」 부분
검정색은 그다지도 왜곡되어 고통받고 있는 걸까
그건 검정색이 선택한 문제니까 검정색이 책임져야 할 것이고 그 누구도 검정색을 보호하거나 위로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누구든 보호하거나 위로하고 싶거든 해버린다
_「완두콩 공주」 부분
비가 내리는 시절에는 비가 내리는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 나라는 하늘에서 곧장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세워지는 것
그리고 모이는 빗방울처럼 멸망하는 것
태어나거나 죽거나 하지 않는다
_「국화와 가을」 부분
먼 미래에도, 지금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원하게 된다면
겨우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
지금 금지된 것에 대한 갈망으로 지어진 짐승 우리라면
누가 누구를 구경거리 삼는 거지
호기심을 갈망이라고 착각하면서
모르는 것을 향해
깨어나는 것 말고는 할 것 없으면서
신에게 물었다
인간은 무엇이냐고
신이 답했다
네가 무슨 꿈을 꾸느냐고
_「세라핀의 흰 물감-해변에서 잠들기」 부분
많이 좋아하면 귀신이 돼
복숭아 귀신 곶감 귀신 그런 것이 한집에 둘이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게 귀신이 아니면 조금 어색하다
약봉지가 서랍 하나를 다 채울 정도로 많아지기에
자네, 이제 약 귀신이 되려나 인사했더니
좋아하는 것이 없어 약을 먹기 시작했네, 빙그레 웃었다
좋아는 하는데 귀신은 되지 않으려고 그러네,
몸이 힘들어 약을 먹어야 한다네, 모를 소리를 하고
그러고는 출근해버렸다
퇴근하면서 가끔
술이며 초콜릿을 가져다주기도 하니
소원이 있거나 겁이 많은 친구일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모양이 안됐다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가엾다
_「귀신 하기」 전문
시집의 첫 번째 자리에 놓은 시. 복숭아나 곶감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복숭아 귀신’ ‘곶감 귀신’이라고 부른다. “많이 좋아하면 귀신이”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의 화자는 ‘귀신’일 터인데, ‘자네’라 불리는 대상과의 관계가 묘하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자네’, 어쩌면 ‘자네’는 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지. “몸이 힘들어 약을 먹어”가며 출근하는 시인은 집에서 그를 관찰하는 귀신과 동거중인지 모른다. 그 귀신은 무엇을 많이 좋아해 귀신이 되었나. 만약 ‘읽고 쓰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인간을 너무 좋아’해서 귀신이 된 거라면, ‘자네’와 ‘귀신’은 같은 처지 아닌가.
“시 역시 이렇게 시작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동시성을 알지 못했을 두 가지 (이상의) 요소가 서로 교차하면서 시가 시작되고, 이때 우주의 한 조각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모습을 드러낸다”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말은, 보이지 않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김복희 시인의 섬세한 감각, 그것이 만들어내는 다종다양한 주체들을 새로이 음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 번째 시 「지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봄직하다. “옆집 사람들이 새를 기르는 것 같다 이사온 날 못 보았으니까 나는 영원히 옆집 사는 새를 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는 화자는, 옆집에서 들리는 “지수야 엄마 왔어” 소리를 듣고 새 이름이 지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수’가 여자아이건 남자아이건 새이건, 누군가에 의해 ‘길러지고’ 있다는 데서 매한가지인바, 집이라는 좁은 세계, 새장이라는 좁은 세계에 갇혀 있다는 데서 매한가지인바, “지수가 새장에 덮인 천 가운데서 새답게 얕게 자다가 문득 옆집에서 기르는 나를 나만큼 생각하면 좋겠다”며 화자는 묘한 동질감을 끌어안고 옆집에서 나는 소리에 귀기울인다.
영원히 비가 오지 않는 곳이 있다
크게 짖어도 돌아오는 소리가 없고
열지 못하는 문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지키는 문 내가 주인은 아닌 문
몸
지옥의 내부
지옥이 무너지고 난 후
지옥에 깃들었던 문틈을 본다
누군가 꿈같이 종이를 밀어내어
문밖으로 종이를 조금, 밀어내놓은 것이다
개 주인이 보고
가장 먼저 본 머리가 먹어, 그런다
그걸 시라고 피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_「머리가 셋 달린 개」 부분
‘귀신-자네’ ‘지수-나’처럼 가깝고도 먼 관계에 이어 세 번째로 놓인 시 「머리가 셋 달린 개」에 이르러서는 한 몸에 달린 머리 셋이 등장, “지옥에 깃들었던 문틈”으로 내민 종이, 그것을 “가장 먼저 본 머리가 먹”게 되는데, “그걸 시라고 피부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시는 메타시로까지 확장해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시집의 맨 앞 세 편의 시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 낯선 모습의 주체들이 맺는 생경하고 기묘한 관계들이 김복희 시인 특유의 방식으로 직조돼 있다. 전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이며, 여전히 아름답고 서늘한 언어들로. 일상을 비일상으로, 안정을 불안정으로, 가지런함을 불규칙함으로, 그 모든 것을 또 반대로 배치하고 또 재배치하며 익숙한 관계의 사이를 잘라내고 그 틈에 새로운 궤적이 그려지는 것을 따라가보는 일이 김복희 시세계의 여행법이리라.
‘새 인간’ ‘기계 인간’ ‘인조 노동자’ ‘귀신’과 같은 분열적 형태로 나타나는 김복희의 시적 주체들과 대상들은 그것들의 발명 자체로도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열증적 주체는 ‘-되기’를 통해 욕망의 탈영토화를 실현하기 위해 탈주한다. 변화한 주체들은 분열을 넘어서서 타성에 젖은 습관적인 관계 맺음을 거부한다. 결벽증처럼 읽히기도 하는 그들의 속성은 가장 순수한 ‘사이’를 꿈꾸는 궤도에 오르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 있다. 우리는 오염된 관계의 속성을 알면서도 오랜 시간 그 흠결을 이데올로기로 포장해왔는지도 모른다. 김복희는 그 장막을 걷고 탈주선을 찾기 위해 새로운 ‘-되기’를 계속해서 실험중이다.
-김영임, 해설 「낯선 주체들의 탈주」에서
시란 ‘무엇에 관해’ 쓰는 것만은 아닐 터, ‘무엇을 향해’ 쓰이느냐에 방점을 찍고 이어지는 시편들을 감상하길 권한다. 그러다 「희망의 집에는 샤워볼이 있다」에서 시집의 제목이 된 시구 “희망은 사랑을 한다”를 마주한다면 잠시 머무르며 ‘희망’의 집을 들여다봐주길 바란다.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면” “놓고 간 물건”을 보여주는 ‘희망’의 이야기를 말이다.
희망은 사랑을 한다
희망은 아주 약한 사람처럼
더 많이 사랑을 하고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면 네가 놓고 간 물건을 보여준다
나는 희망의 집에서 몸을 씻는다
누군가 희망의 집에 놓고 간 회색 샤워볼
땀에 젖은 운동 셔츠처럼
처박혀 있던 것
아무는 듯 물에 적시자 어두워졌다
바보가 되는 걸 두려워하면 바보가 된다
그러면 말이다 희망아,
희망이 되는 걸 두려워하면 희망이 될까
나는 겁이 없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
그 누구도 나보다 강할 수는 없다
_「희망의 집에는 샤워볼이 있다」 부분
‘나의 사랑하는 새 인간’에서 시작한 김복희의 사랑은 ‘희망은 사랑을 한다’에서 이렇듯 ‘희망’과 ‘운명’ ‘(귀)신’으로 확장된다. 김복희식 ‘-되기’의 영역에서 사랑은 어떤 감정 혹은 상태 혹은 차원의 일인가. 사랑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여줄까. 너무 좋아해서 귀신이 될 것 같은 것을 보여줄까. 그 대답을 품어보며 같은 시집을 저마다 다르게 읽게 될 당신들게 이제 이 시집을 보낸다.
작가의 말
나는 아주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싶다.
2020년 여름
김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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