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23.06MB)
- ISBN 9788954658805
- 쪽수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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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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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은 사물과 존재들의 율동일 것이다. 혁명이었다가, 모래였다가, 아픔이었다가, 신생인 그것은 아득하고 가까운 감정들의 총체이다. 황규관의 두 세계, 혁명의 세계와 자연적 기원의 세계가 이렇게 있다. 절망했으나 모래처럼 작아진 몸으로 노동의 이성을 되살려 신생하기를 꿈꾸는 황규관과 바람의 노래를 기억하면서 강과 들판과 들길의 소년을 기억하여 다른 몸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황규관이 그 세계의 주인공이다.
_박수연 해설 「세계의 기원」 중에서
1부 인간은 모두 호미의 자식들이다
총파업 / 호미 / 모래의 시간 / 불의 시대 / 슈퍼 문 / 큰 싸움 / 토끼와 어머니 / 어린 은행나무 / 길 / 폐지 줍는 노인 / 가장 큰 언어 /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ㄱ자의 각도 /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 불에 대하여
2부 시는 당신을 아프게 하려고 온다
바깥으로부터 / 바람의 길 / 나쁜 시 / 고요에 대하여 / 첫눈 / 아름다움이라는 느린 화살 / 블랙홀 / 성 / 죽음의 공간 / 저녁노을 / 어지러운 길 / 아무것도 오지 말아라 / 몸이 꿈을 만든다
3부 과거가 납빛 같은 회벽일 리 없다
소년을 위하여 / 강물 / 가뭄 / 국수 한 그릇 / 때 / 위대한 유산 / 옛집 / 눈 / 5백 원짜리 동전 / 쌀 세 포대 / 떠나지 않은 시간 / 섬 / 작골
4부 우리는 노란 참외 꽃을 가꿔야 한다
자본론 / 끼워 죽이다 / 한 시간 / 돌아가지 말자 / 그들이 온다 / 묵상 / 그해 봄 / 노동자 / 자유는 무성하지만 / 블랙리스트 / 민주주의는? / 좁쌀만한 /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는 / 우리가 혁명이 됩시다! / 헌시 / 4월
해설|세계의 기원
|박수연(문학평론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풀을 매고 흙덩이를 부수고 뿌리에
바람의 길을 내주는 호미다
어머니의 무릎이 점점 닳아갈수록
뾰족한 삼각형은 동그라미가 되어가지만
호미는 곳간에 쌓아둘 무거운 가마니들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한끼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몸을 부린다
인간은 모두 호미의 자식들이다
호미는 무기도 못 되고 핏대를 세우는
고함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을 가꾼다
들깨며 상추며 얼갈이배추 같은 것
또는 긴 겨울밤을 설레게 하는
감자며 고구마며 옥수수 같은 것들을 위해
호미는 흙을 모으고
덮고 골라내며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돼 밭고랑에서 뒹굴기도 한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호미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이성을 증명하지만,
산 귀퉁이 하나 허물지 않은 그 호미가
낡아가는 흙벽에
말없이 걸려 있다
─「호미」 전문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웃음이 너무 많다 노래는
없고 이파리 한 장 내밀지 못하는
언어가 객차 안에 가득하다
이번 차는 등을 돌리자
모험은 건조한 형식이 아닌데
내 몸이 당신의 맥박을 차갑게 하는
이번 차는 내 것이 아니다
행선지가 너무 명확하다
진리여 법이여
폐허의 입을 틀어막는 환희여
이번 차는 모른 척 보내고
우두커니 혼자가 되자
혼자가 되어
멀리서 내리는 빗소리를 듣자
다음 차도 보내고
다음다음 차도 보내고
저물녘에 우는 늙은 새울음도 보내고
슬픔에 사로잡힌 영혼도 보내고……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전문
가난이란 때때로 입이 큰 바구니 같아서
흙 묻은 나물도 담기고
봄볕이 쓴 편지가 걸어들어오기도 한다
떨리던 눈빛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책을 읽거나 수줍게 미소를 남기거나
잠깐 시를 쓰게 하는 일도
주머니에서 5백 원짜리 동전이
달랑거리며 영혼의 종을 칠 때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배웠고
시간의 깊이가 한 계단 내려갔다
입이 큰 바구니는 또 바람과 같아서
채워도 채워도 자꾸 노래만 남는다
─「5백원짜리 동전」 부분
좁쌀만한,
좁쌀만한 것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 한 알에 우주도 있고
폭풍우도 있으니 좁쌀만한,
전진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만한 자유, 좁쌀만한 평화, 좁쌀만한
민주주의, 좁쌀만한 웃음, 좁쌀만한 좁쌀
(언제부터인가 우리집은
밥에 좁쌀을 넣지 않는다.
물로 씻을 때마다 체를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 정부를 믿으면 된다고 한다
좁쌀만한 믿음만 있으면
사랑은 봉우리만 밟고 걷는 거인처럼
우리에게 올 거라고 한다
좁쌀만한, 좁쌀만한 것만 있으면
모든 게 순조롭고, 무사하고, 태평하고
결국 나태하고, 퇴보하고, 추락하고
아…… 끔찍한 역사를 되풀이한다
좁쌀만한 치부를 하는 동안 강물이 썩고
산이 두 동강 나고 어린아이가 죽고
휠체어는 내던져졌다
여성의 구두가 벗겨졌다 공장 굴뚝에
연기 대신 사람이 펄럭였다
그놈의 좁쌀만한 비겁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한 일상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한 안위 때문에
그놈의 좁쌀만한,
좁쌀만한,
좁쌀 같은,
아니 좁쌀만도 못한……
(좁쌀에는 고혈압을 예방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
─「좁쌀만한」 전문
작가정보
작가의 말
출근길에 아이들 놀이터 주위에 심어진 나무의 가지를 모두 잘라내는 것을 보고 격분해 시청에 따졌다. 그 이상은 자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퇴근길에 보니 이미 가지를 잃은 나무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나무와 풀과 냇물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현대인의 정신이 사막이 되어가는 것을 자주 느낀다. 나를 소박한 자연주의자로 불러도 상관없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이 지어준 가건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독자적으로 진화해온 것처럼 우기고 있다. 맘대로 하라지. 나는 오늘도 흐르는 냇물을 보며 내 영혼의 모습을 가만히 상상해본다.
2019년 가을에
황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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