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사람과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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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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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문단 내 성폭력의 피해자로서 용기 내어 쓴 《추앙》,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하나 결국 거액의 병원비까지 떠안게 된 유림. 건강보험 혜택이 절실해진 유림은 정신병력 진단서를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와 급박하고도 끈질긴 사투를 벌이는 《병원》 등 일상에서 한 번씩은 마주했을 어떤 무례함과 부당함을 생생히 기억해내게 하는 여덟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병원 _039
다시 하자고 _057
추앙 _083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_099
신체 적출물 _121
선샤인 샬레 _145
눈과 사람과 눈사람 _171
발문|윤이형(소설가)
모래로 만든 눈사람 _201
작가의 말 _221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물컹한 생선처럼 ‘잘못’이라는 말의 의미가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도와주겠다고 했고, 맹세한다고 했고, 영후도 맹세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계속 고개를 끄덕이기에 나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내 몸을 놓아주고 열려 있는 창문을 닫을 때에야 미끄러졌던 의미들이 바닥에서 퍼덕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_「줄 게 있어」
내가 열쇠를 갖고 있을 때에는 집에 먼저 도착한 지은이 방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려야 했다. 지은이 열쇠를 갖고 있을 때에는 먼저 도착한 지은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방문을 잠가버렸다. 지은이 방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마다 열쇠를 복사해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열쇠를 복사하면 싸워도 서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각자 들어오고 싶은 시간에 방에 들어올 수 있었고 나가고 싶은 시간에 방에서 나갈 수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열쇠를 복사하지 않았다. _「다시 하자고」
B강사와의 일 이후로 정원은 ‘시적 허용’이라는 말을 곱씹는 습관이 생겼다. 전날까지만 해도 정원이 좋아한 말이었다. 가슴이 무너진 모든 기억을 시는 허용해줬으니까. 그러나 이제 ‘시적 허용’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말이 어떤 부당함을 시적 특권으로 포장하는 듯했다. 그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그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표현하고는 했지만, 그들의 디오니소스적인 면모는 타자, 그중에서도 유독 약자 앞에서만 강하게 분출되는 특징이 있었다. _「추앙」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거부하지 않은 건 언니밖에 없었어. 언니가 정상이라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필요할 거라는 걸 알아. 나의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면들이 정상적이고 싶어하는 언니의 욕망을 채워준다는 것도 알아. 언니의 다정함이 선의라는 건 물론 잘 알아. 하지만 고맙지는 않아. 너무나 오래 위장해왔기 때문에 무엇을 위장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는 것을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다 함께 공평하게 곪아가고 있었으니까. 나는 언니에게 이 말을 왜 하는 걸까. 이 말을 하는 것이 나의 선의라는 걸 언니는 이해해줄까. _「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사용할 수 없는 신체에는 얼마의 가격을 책정해야 할까. 한 마디가 절단된 둘째 발가락의 가격과 멀쩡하게 붙어 있는 발가락의 가격을 예측해보았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발가락이 있었더라면 언니는 되찾으러 갔을까. 아마 버리고 갔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은하의 심장이 있었더라면 언니는 되찾으러 갔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심장이 있었더라면 은하는 되찾으러 갔을까. 사백만원은 은하가 하루 여덟 시간 삼 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야 얻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은하가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 없는 액수였다. 그래도 은하는 언니의 심장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리병 안에 언니의 발가락이 있었더라면 은하는 어떻게 했을까. 금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심장과 발가락은 어떻게 다른 걸까. _「신체 적출물」
거짓말로 빼곡하게 적어나갔던 자기소개서들이 생각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린다는 점이 그 시절 나의 고난이었으나, 어떤 자기소개서에도 그런 고난을 적을 수는 없었다. 거짓 고난과 거짓 깨달음과 거짓 열정을 지어냈다. 사람을 만날 때에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거짓 아픔을 좋아해줬다. 몇몇 사람에게 그러나 내 거짓말은 간파당했다. 그들과 다시 만나야 할 때마다 나는 눈치를 살폈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그들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나를 가짜라고 말하고 있었다. 실은 그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는 것을 누구도 반가워해주지 않았다. 나는 거짓으로 아팠지만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_「선샤인 샬레」
우리가 가장 적나라하게 이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내놓았을 때 가장 기뻐할 사람은 아마도 가해자들일 것이다. 가해자들은 우리의 글을 자신들을 고발한 피해자들의 용기를 짓밟는 일에 사용할 것이다. 피해자도 때론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를 해명하려 들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사람도 극히 드물었다. 우리는 아무 해명도 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하고 있다는 비난을 덤으로 받았다. _「눈과 사람과 눈사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신동엽문학상 수상 작가
자신이 모래였음을 알지만, 모래가 아닌 다른 것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임솔아의 인물들을 좋아한다. (…) 혼자인 채 수두룩하던 모래들이 눈으로 변해 단단하고 정겹게 뭉쳐지고, 나누는 일이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을 어느새 엄연히 나눠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의 첫 소설집은 보여준다. 혼자 쓰지만 결코 혼자 쓰는 것만은 아닌 글을, 그는 언제나 부지런히 쓰고 있을 것 같다. _윤이형(소설가), 발문 「모래로 만든 눈사람」에서
임솔아 첫 소설집
열여덟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당신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당신과 지극히 가까운 이야기
삶을 직시하고 온몸으로 경험하는 작가 임솔아의 첫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이 출간되었다.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첫 장편소설 『최선의 삶』으로 2015년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증명하고, 첫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로 2017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와 소설 모두에서 눈에 띄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 젊은 작가다. 시적인 문장 안에 진중한 사유를 함축하여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하는 임솔아의 작품세계를 단편집으로는 처음 음미해볼 수 있는 기회다. 임솔아가 고르고 골라 배치해둔 단어들은 시어와 같은 무게를 지니고 문장과 문장 사이를 말해지지 않은 의미로 고요히 채워가며 자신만의 독특한 울림을 발산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은 인물의 나이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다음 작품으로 이행할수록 나이를 먹어가는 임솔아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변화는 인상 깊다. 스스로를 비정상으로 여기게 만드는 세상에 반발하며 서걱거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존재들이 소설집의 끝에서는 물기를 품은 눈송이로 변해 서로 뭉친다. 임솔아가 ‘작가의 말’에서 “이 인물들은 여태 내가 겪어온 것들을 함께 겪은 동지들”이라고 밝힌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삶을 지속하며 이뤄내는 변화는 작가 임솔아가 겪은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첫 작품 「줄 게 있어」의 주인공 ‘영후’는 친구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강요되는 애도와 물밀듯이 쏟아지는 주변의 부담스러운 배려와 온기를 참지 못한다. 영후는 자신과 다른 세상에 편입되지 못하고, 세상은 그런 영후를 ‘병들었다’고 판정한다. 영후처럼 비정상이라고 판단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정상임을 공인받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사회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주인공 ‘유림’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시도하나 결국 거액의 병원비까지 떠안게 된다. 건강보험 혜택이 절실해진 유림은 정신병력 진단서를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와 급박하고도 끈질긴 사투를 벌인다. 「다시 하자고」에서 비좁은 원룸에서 동거하는 ‘수희’와 ‘지은’은 세상이 그들을 신용하기 위해 요구하는 신분을 마련할 수 없다. 그들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소속과 자격과 정체성을 바꿔야 한다. 두 사람은 오직 함께 살기 위해 그 불안정한 삶을 감내한다.
이처럼 아주 가까이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임솔아는 자신의 몸을 한껏 밀착한다. 그리하여 작가 스스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써낼 수 없는 약자와 소수자로서의 삶의 세부를 소설 속에 배치해놓는다. 이렇게 쓰였기 때문에, 임솔아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일상에서 한 번씩은 마주했을 어떤 무례함과 부당함을 생생히 기억해내게 된다.
정상이라는 권력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정상을 비정상으로 전복시켜 보이는 강인한 목소리
정상이라고 명명된 권력에 의해 비정상으로 분류된다 해도, 임솔아의 인물들은 그렇게밖에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비정상이어서 아픈 게 아니라 나를 거부하면서까지 정상이 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아팠어”(「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라고 그들은 고백한다. 그들은 세상에 편입되는 대신 아웃사이더가 되어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기로 한다. 그리고 이 세상 또한 정상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나아가 세상이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간다. 이제 그들은 정상으로 간주되기 위해 용인되곤 하는 온갖 ‘윤리적인 거짓’과 ‘선한 폭력’에서부터 문단 내 성폭력 사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옳지 않은 면들을 들춰 보이며 ‘이것은 옳지 않다’고 똑똑히 말하기 시작한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을 유지하는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의 ‘언니’와 여행중 불의의 사고로 절단된 동생의 발가락을 이성적인 판단하에 해외에 남겨두고 귀국할 수 있는 「신체 적출물」의 ‘은봐贅? 언니의 보살핌을 받는 ‘기정’과 신체의 일부를 영영 잃게 된 ‘은하’의 입장에서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임솔아 소설은 정상으로 여겨지던 것들을 비정상으로 뒤집어 보게 함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정상이라는 이름을 차지하고 있는 권력을 허문다. 이러한 전복은 「추앙」에서 가장 강렬하게 이루어진다. 「추앙」은 임솔아가 문단 내 성폭력의 피해자로서 용기 내어 쓴 작품이다. “강직하거나 점잖다고 정평이 나 있는 수많은 교수와 시인” 중에는 권력을 이용해 자신을 존경하던 습작생들을 추행하고 폭행한 가해자가 분명히 있다고, 이 소설은 증언한다. “시적 자유와 낭만성으로 포장되는 모든 폭력”을 합리화하는 맹목적인 추종을 끝내고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임솔아의 강인한 음성에는 결코 흔들림이 없다.
이질적인 세상을 눈송이처럼 부유하던 존재들이
자신의 형체를 잃지 않기 위해 모여들어 눈사람을 만들기까지
정상성이라는 허상에서 탈피하여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임솔아 소설의 인물들은 평화를 맞는다. 「선샤인 샬레」의 주인공 ‘민주’가 그렇다. 민주는 무엇으로도 명명될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 자유롭게 머물다 떠나는 비밀스러운 휴양지 ‘히든 롬 빌라’의 직원이다. 여행객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이곳에서, 민주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외부로부터 억지로 부여받은 자신의 정체를 잊고 있는 한, 민주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세계와 동화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눈과 사람과 눈사람」에서 임솔아의 인물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에게 연대의 손길을 내민다. 마치 눈송이가 세상에 녹아들지 않고 모여들어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듯이. 이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기 위해 모였지만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아 다른 연대자들로부터 질타받게 된다. 그들은 해명을 준비하지만, 길고 긴 회의 끝에 그들의 고백이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피해자를 공격하고 연대자들을 와해시킬 좋은 무기가 되리라는 결론을 낸다. 더 큰 연대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로 결정한 이 인물들의 연대의식은 끝내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남겨져 응결될수록 더욱 단단해져갈 것이다.
이 소설집의 첫 작품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찬찬히 읽어낸 뒤에는 타인을 바라보는 임솔아의 시선이 달라져온 궤적을 느낄 수 있다. 남들만큼 따스하지 않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임솔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보고 있다. 자신만의 온도로, 당신과 나 사이에 눈 결정처럼 투명한 징검다리를 놓으면서.
※
이 소설집에는 열여덟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의 인물이 존재한다. 이 인물들은 여태 내가 겪어온 것들을 함께 겪은 동지들이다. 당연한 이야기 같겠지만 나는 이 당연함이 내 손끝에서 구현되는 것 때문에 겨우 살아왔다. 나는 이 인물들의 경험으로부터 출발된 인간이다. 삶을 이어갈 나와 내 소설 속 인물이 앞으로도 닮은 모습일 수 있을까. 막연히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아침에 일어나 딸기를 연유에 찍어 먹고 오후에는 벚꽃이 지는 것을 열심히 구경하고. 오늘 내가 겪은 하루처럼 이런 이야기만 적게 되더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쓴 소설 곁에 내가 있고 싶다. _‘작가의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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