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랄프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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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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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지 9년째가 되던 해, 종수는 대학원 지도교수에게서 빙빙 돌려 말했지만 대학원에서 나가달라는 의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28년 인생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 종수는 집으로 돌아와 술을 퍼마시며 방안을 헤집던 도중,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발견하게 된다. 망치를 내리쳐 서랍을 열자, 뜻밖에도 그 안에는 청첩장이 담겨 있었다. 받았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청첩장은 바로 수영이 보내온 것이었다. 18살 여름, 난데없이 찾아와 편지를 번역해달라던 바로 그 수영 말이다.
수영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영어로 편지를 한 통 써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넌 그냥 번역만 해주면 돼. 난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써야만 해.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말이야.” 니트, 헤어슈슈, 향수 등 온갖 것을 만든 랄프 로렌은 어쩐 일인지 시계만은 만들지 않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치고 싶은’ 그녀는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낼 작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수는 왠지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그런 마음도 사랑일 수 있을까. 수영의 청첩장을 매개로 역동적인 기억의 활동이 펼쳐진다. 종수는 미국에 머무는 일 년 동안,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찾아나서게 되는데….
아이스링크장에서 피겨스케이팅중 _016
노크 _043
절대, 찢지 마시오. 절대로, 절대로 _082
나의 말이 나의 기억을 불러온다 _119
멈춤 _149
무인지대 _186
거짓말들 _223
고양이 도둑 _248
세뇨리타,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 _275
죽은 사람들 _309
디어 랄프 로렌-에필로그를 대신하며 _343
작가의 말 _353
그 일은 여전히 내게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일 뿐이다.”(27쪽)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생각만큼 어렵거나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었다.(30쪽)
밤 열시의 강남역, 밤 열시의 맥도날드, 밤 열시의 나는 거기에서 그전까지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여자애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하는 그녀의 마음이 굉장히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수영을 도와야만 한다고,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섀넌 헤이스라면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 게 사랑이죠. 안 그래요?”(73~74쪽)
“모든 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단다. 그냥 사라지는 건 없어.”(93쪽)
“언니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는 건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언니가 결혼하기 전날, 엄마는 언니에게 그냥 기다리라고 말했어요. 역시 나중에야 난 그게 아주 끔찍한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물론 그후로 언니는 잘살았어요. (…) 죽을 때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얘, 로라, 인생은 참 길구나.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267~268쪽)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에게 암흑과? 같은 시간을? 주게 되는? 거겠지. 그건? 때로는? 선물?이야. 안 그런가?”(289쪽)
살아 있는 사람들은 부고를 통해 죽은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간결하고 우아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공식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 그래야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죽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311쪽)
젊은작가상 대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가
손보미 첫 장편소설
손보미의 첫 장편을 기다린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예상대로 근사하고 예상보다 다정하다. _정이현(소설가)
단 한 권의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로 “지나치게 능숙해서 가끔 의심스럽다는 비평가의 불평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문학평론가 신형철)라는 평과 함께 문단과 독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온 젊은 작가의 기수 손보미의 첫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이 출간되었다. 「폭우」(제3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산책」(제46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등의 작품을 통해 ‘말로 규정하지 않고 침묵으로 환기하는’ 절묘한 스타일과 플롯에 대한 정교한 감각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빠르게 자신만의 소설문법을 구축한 손보미이기에, 그가 쌓아올릴 장편의 세계에 대한 기대가 모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15년 여름부터 2016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 연재된 『디어 랄프 로렌』은 인생에서 크게 실패한 젊은 물리학도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청첩장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십 년 전 고등학생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기억의 활동을 통해, 어떤 기억은 오랜 시간 잠복해 있다 정확한 순간에 찾아와 우리를 비참 속에서 건져올리기도 한다는 것을 이 벅찬 기억의 서사는 증명해 보인다.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하는
여자아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
그런 것도 사랑일 수 있을까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지 구 년째가 되던 해, ‘종수’는 대학원 지도교수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자네 실력이 나쁘다는 게 아니야. 자네는 잘했어. 단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야.” 빙빙 돌려 말했지만, 종수는 그 말이 대학원에서 나가달라는 의미라는 걸 안다. 탄탄대로를 걸어오던 이십팔 년 인생 최악의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술을 퍼마시며 방안을 헤집던 도중, 종수는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발견하게 된다. 망치를 내리쳐 서랍을 열자, 뜻밖에도 그 안에는 청첩장이 담겨 있었다.
“디어 종수, 나는 아주 잘 지내. 곧 결혼식을 올릴 거야. 나는 무척 행복해.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받았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청첩장은 바로 ‘수영’이 보내온 것이었다. 열여덟 살 여름, 난데없이 찾아와 편지를 번역해달라던 바로 그 수영 말이다. 수영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영어로 편지를 한 통 써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넌 그냥 번역만 해주면 돼. 난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써야만 해. 시계를 만들어달라고 말이야.” 니트, 헤어슈슈, 향수 등 온갖 것을 만든 랄프 로렌은 어쩐 일인지 시계만은 만들지 않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치고 싶은’ 그녀는 랄프 로렌에게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편지를 보낼 작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종수는 왠지 편지를 쓰고 싶어하는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그런 마음도 사랑일 수 있을까.
“디어, 는 다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아주 친밀하고 따뜻해.”
그리고, 수영의 청첩장을 매개로 역동적인 기억의 활동이 펼쳐진다. 종수는 미국에 머무는 일 년 동안, 랄프 로렌이 시계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찾아나서게 된다. 랄프 로렌과 관련한 자료를 끊임없이 찾아 읽고, 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구두닦이 소년이었던 랄프 로렌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아들처럼 키웠던 조셉 프랭클, 조셉 프랭클의 오랜 이웃이었던 백네 살의 할머니 레이철 잭슨, 레이철 잭슨을 돌보는 입주 간호사 섀넌 헤이스 등 랄프 로렌에서 쏘아올려진 기억의 활동은 여러 사람을 통과하며 생동하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단지 “랄프 로렌과의 연결고리로만 여기고 있었던” 조셉 프랭클, 레이철 잭슨, 섀넌 헤이스 각각은 그렇게 어느 순간 그 자신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넨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비밀을 해결할 결정적인 열쇠가 되어주지 않는다. 인형 안에서 또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문을 열어젖혀야 하는 것이다. 텅 빈 그 인형 속처럼 이 모든 일은 그저 “거대한 시간 낭비”일 뿐일까. 하지만 ‘시간 낭비’처럼 여겨지는 그 활동은 『디어 랄프 로렌』이 품고 있는 어떤 비밀을 우리에게 언뜻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랄프 로렌의 여동생이 남긴 인터뷰, 그의 성취를 기록한 자서전, 지인들이 말하는 그의 모습을 모두 더한 것이 곧 랄프 로렌을 대변하는 게 아니듯이, 우리가 어떤 진실을 알려고 할 때, 그것과 관련한 모든 사실들의 총합 그 자체를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진실은 사실들의 총합을 초과하여, 그것들 사이로 미끄러진다는 것을 말이다. 수영과 함께 편지를 썼던 그해 여름으로부터 십 년이 지난 뒤에야, 그녀가 말한 ‘디어’라는 단어의 의미를 간신히 알아차리게 된 종수처럼.
그리고 『디어 랄프 로렌』이 품고 있는 또하나의 비밀.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열고 닫는 두 편의 작품 「담요」와 「애드벌룬」이 서로 다른 우주를 살아가는 동일인물의 이야기인 것처럼, 『디어 랄프 로렌』에도 ‘손보미식 평행우주론’이 등장한다. 이 소설 안에서 랄프 로렌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실용적인 패션, 기성복의 시대를 연’ 미국의 입지전적인 디자이너임과 동시에,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열한 살에 야반도주를 하고 뉴욕으로 건너와 구두를 닦던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이기도 하다. 랄프 로렌뿐만 아니라, 『디어 랄프 로렌』에 나오는 어떤 내용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것과 일치하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일치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실제 인물이나 사건에 국한하지 않는다. 굉장히 좋은 망원경을 든 채, “저멀리 낯선 행성의 작은 불빛을 응시하고 마침내 그 속에서 그(혹은 그녀)의 얼굴-표정을 발견하는” 우주인처럼, 이 두 개의 세계를 번갈아보며 끊임없이 그 안의 인물들을 살피는 손보미 덕분에, 우리는 『디어 랄프 로렌』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오면서 만난 인물들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서로 다른 우주를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우연에 의해 잠깐 포개지기도 하는 것. 그건 손보미식 평행우주가 지닌 어떤 다정함이기도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이 우주에, 내가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깜깜한 방안에서,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시작된다. 모든 게 부서졌다는 절망에 휩싸였을 때 들려오는 노크 소리. 예상치 못한 순간 손보미가 마련해둔 다정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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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작가의 말
나는 소설가가 굉장히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우주인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고 종종 생각한다. 저멀리 낯선 행성의 작은 불빛을 응시하고 마침내 그 속에서 그(혹은 그녀)의 얼굴-표정을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혹은 그녀)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때때로 화를 내기도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 그저 나는 소박한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내가 ‘매우’ ‘멀리’ 존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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