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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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17.63MB)
- ISBN 978895464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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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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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간발의 차이 혹은 필연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용을 그리는 《세한도》, 언뜻 익숙한 내용일지 모르나, 인물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름이나 구체적인 정보가 배제된 설정만으로 유사한 모티프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낯섦을 마주하게 되는《여름은 지나간다》, 이상(李箱)의 첫 장편과 제목이 같고, 곳곳에서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12월 12일-이상에게》, 저자가 왼손으로 쓴 작품 《봄 나무의 말》 등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통된 선입견을 여지없이 부수는 저자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엿볼 수 있다.
세한도
12월 12일─이상에게
아닌 여름
여름은 지나간다
바다, 夏日
하이눈, August
아닌 봄
파인 힐 에이프릴
봄 나무의 말
아닌 가을
Fall to the sky
붙임
충분의 조건─미완과 오류
(구효서&안경수)
두려움이라는 것의 생리나 생태를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두려움이라는 것에도 생리나 생태 같은 게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을 기피하고픈 예감과 함께 왔고, 예감 이후엔 피할 수 없었고, 닥치고 나면 예감만큼 두렵지 않았으며, 내가 살아 있다는 슬픈 확신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생리가 두려움의 전부일 리는 없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_「세한도」(15쪽)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각막을 에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_「세한도」(38쪽)
전날의 폭우는 거짓말 같았다. 폭염은 폭우의 흔적을 지우고 폭우는 폭염의 흔적을 지웠다. 하나의 세계에 비가 내리고 개는 것이 아니었다. 비 오는 세계와 비 없는 세계가 감쪽같이, 불연속적으로 번갈아 들었다. 겹친 여러 세계가 차례로 제 몸을 나타내는 원리를 미음이 알 리 없었다.
_「바다, 夏日」에서(126쪽)
여자는 그 지점에 닿고 싶었다. 그 지점을 지나기 위해, 그 지점에 다다르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 지점을 지난 자리에서 그 지점을 바라보기 위해서거나.
_「하이눈, August」(158~159쪽)
여자가 말했고 남자는 폴리스 라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바라보았다. 어둡고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의 생살 같던 절단면의 인상만큼은 기억에 선했다. 어디선가 뚝 떨어져나온 선연한 흔적. 수억 년에 걸쳐 조금씩 번지던 균열이 어느 날 몇시 몇분 몇초에 마침내 그 끝에 다다르는 광경을 남자는 숨가쁘게 상상했다. 그 커다란 바위를 밀어낸 마지막 힘은 하루치 식물 뿌리 세포의 생장이거나 한 방울의 빗물이거나 이슬방울이거나 한줌의 바람이거나 아니면 어둠이거나 적막이거나 꽃잎 벌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고 여자는 몸을 뒤틀었다.
_「파인 힐 에이프릴」(209쪽)
2017 제41회 이상문학상 수상!
문학 인생 30년, 작가가 새로이 바라본 소설의 내적인 무늬
“쓰지 못하면 그 순간부터 즉각 존재를 환수당하는”, “쓰되, 다른 것이 아닌 소설을 써야 하는” 것이 소설가의 운명이라 말하는 작가 구효서. 올 초 제41회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쓴 수상소감에서였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로 등단,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는 작가에게 더욱 특별한 소식이었으리라. 그의 아홉번째 소설집을 묶는다. 제45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별명의 달인』 이후 4년 만이다.
『아닌 계절』은 삶의 그늘진 구석과 군중 속 개인이 느끼는 고독, 타인에 대한 이해불가능성 등을 그린 전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인물의 이름도 국적도 모호하고 시공간적 배경 역시 불분명하다. 소설의 기본 전제라 여겨지는 현실의 반영과 모방을 버리고 현실 자체를 의심하고 불신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닌 겨울’과 ‘아닌 여름’, ‘아닌 봄’ ‘아닌 가을’로 이어지는 작품의 배치와 이를 아우르는 ‘아닌 계절’이라는 제목, 방점은 ‘아닌’에 찍힌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내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 과연 확신할 만한 것인가
첫번째 단편 「세한도」는 “어떤 간발의 차이 혹은 필연의 연쇄”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용을 그린다. “얼어붙은 허공과 낙서의 허물이 전부인 세상”을 배경으로. 화자인 여자의 두 발에 신겨 있던 “희지도 안 희지도 않”은 슬리퍼처럼,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등장인물들의 소통은 원활하지 못하고 언어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희미해지면서, 벽마다 낙서가 늘어만 가는 마을의 이미지가 도드라진다. 무언가 곧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느낌, 이미 많은 것이 삼켜진 것 같은 느낌, 그러나 “여자가 아는 것은 겨울도 한겨울이라는 것, 그래서 몹시 춥다는 것,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라는 것이었다.”
‘파’와 ‘하’는 누구인가. 「여름은 지나간다」의 두 중심인물의 기묘한 이름이다. 전쟁통에 헤어졌다가 육십여 년이 지나 재회한 노부부의 이름. 한쪽은 외로움과 배신감으로 가득하여 따져 묻고 싶은 말을 갖고 있고, 다른 한쪽은 변명의 말을 갖고 있으나, 틀어둔 티브이에서 흐르는 소리들과 노부부를 취재하러 온 촬영팀의 짜증스러운 투덜거림뿐, 노부부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가 없다. 언뜻 익숙한 내용일지 모르나, 인물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름이나 구체적인 정보가 배제된 설정만으로 유사한 모티프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낯섦을 마주하게 된다.
「바다, 夏日」의 ‘미음’은 학교 선생님이다. 방파제에 서 있던 아이가 물에 휩쓸려 사라져도, 양식장 주인이 ‘핑재’를 죽이는 광경을 목격해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정석이’ 어머니에게 받은 촌지를 ‘케로로’ 어머니에게 우편으로 부치는. 겉모습은 평범하지만 미음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한없이 이질적이다. 이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기 어려운 인물을 앞에 둔 독자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상(李箱)의 첫 장편과 제목이 같고, 곳곳에서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 「12월 12일-이상에게」 속 인물 ‘이응’에게는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한편 「봄 나무의 말」은 작가가 왼손으로 쓴 작품이다. 질서 정연하고 가지런한 문장과는 거리가 멀고 되다 만 문장과 비문도 있다. 학살과 강간으로 마을이 초토화된 내용과 쉼표가 부족한 문장들이 만나, 읽는 이로 하여금 의도된 혼란 속에 빠지게 만든다.
이렇듯 작가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통된 선입견을 여지없이 부순다. 소설의 서사와 주제, 개연성과 현실성, 인식 가능하고 추측 가능한 오감의 영역 안에서의 안락한 독서가 “공감과 소통의 매개일 수 있으나 동시에 지배와 억압의 수단일 수 있다”(283쪽)는 것이다.
“끝에 다다른다는 것은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선다는 뜻일 거다.”
작가는 몇 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나
제가 여자와 남자, 파와 하 같은, 선입견이 작동하지 않는 호칭을 등장시켰던 것도 양식화되어 이미 방향지어진 독자의 감각에 ‘오류를 발생’시키고 싶은 짓궂은 의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화자의 호칭뿐만 아니라 국가와 도시명을 적시하지 않고, 인물들의 과거를 지우거나, 지우지 않더라도 과거라는 것이 현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거나, 한 공간에 두 개의 시간을 흐르게 하거나, 동일한 존재가 다른 공간에 동시적으로 출몰하게 하고, 사태를 양식화된 감각과 사고로부터 이탈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기원이 반드시 과거에 있다는 직선적 시간관과 인과관에 대한, 시공간 구성 원리의 절대성에 대한, 그리고 의심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선험적 주체에 대한 동의를 철회하려는 저의 의도였겠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어떠한 양식화된 감각과 사고에도 기대지 않으려고 하니 소설의 모든 요소가 이른바 통일성이라든가 개연성 따위의 구성 원칙을 필연적으로 벗어나게 됩니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 등의 상호 관련성이 끊어져 흩어집니다. 원리를 벗어난 원리이므로, 도무지 헷갈리지만 일치된 독후감은 오히려 소설의 실패겠지요.
_화가 안경수와의 대화 「충분의 조건-미완과 오류」에서(284~285쪽)
‘무엇을 쓸 것인가’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로 선회하며 치열한 작가정신과 전위적 형식으로 또 한번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준 구효서 작가. 그는 폭넓은 주제와 새로운 문체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오가며 어느 한곳에 안주하지 않았다. 30년, 이제 좀 만만하게 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 ‘소설’이 그에겐 세계와 존재의 탐구를 위해 존재하는, 끝없이 새롭고 끝끝내 다 알 수는 없는 무엇인 듯하다
작가정보
저자 구효서는 1957년 강화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편소설로 『늪을 건너는 법』 『슬픈 바다』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 『낯선 여름』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남자의 서쪽』 『내 목련 한 그루』 『몌별』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소설집으로 『노을은 다시 뜨는가』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도라지꽃 누님』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산문집으로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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