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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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4.75MB)
- ISBN 9788954635004
- 쪽수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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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초열기焦熱記 025
유월장逾月葬 051
달실에서 온 여인들 070
개미귀신 094
운명의 칼 134
불천위제不遷位祭 165
푸른 관冠의 어머니 194
제단에 오르다 248
작가의 말 259
한겨레문학상, 무영문학상 수상작가 심윤경의 대표작 『달의 제단』
섬세하고 정갈한 문체로 삶과 사랑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소설가 심윤경의 두번째 장편소설 『달의 제단』이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되었다. 무영문학상을 받고 동인문학상의 최종심에도 오른 바 있는 이 장편소설은, 다채롭고 개성적인 그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평론가와 대중을 아울러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이다. 인간적 삶의 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늘 지체 없이 사랑이라 대답해온 그의 소설세계는, 데뷔작이자 한겨레문학상 당선작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거쳐 『달의 제단』에 이르러 더욱 견고하게 완성되었다고 할 만하다.
심윤경은 종가의 문화적 전통을 내세워 가문의 위상을 지키려는 할아버지와 서자라는 열등감과 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정체성 확립에 어려움을 겪는 손자 상룡, 새어머니인 해월당 유씨와 종가의 살림을 보살피는 달시룻댁, 그리고 그녀의 딸 정실의 이야기를 통해, 급격하게 변해가는 우리 시대의 무너진 가치들 사이에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찾아 유려하게 그려냈다.
어두워지고 나서야 모든 것을 비추는 달,
그 서늘한 제단에 바쳐진 사람들의 애달픈 이야기
한때의 꿈같은 영화가 지나고 이제는 쇠락해버린 서안 조씨의 종가 효계당에 17대 종손인 상룡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다. 할아버지는 한 지방대학의 국문과에 재학중인 상룡에게 봉분을 이장하다 발견된 10대 조모 안동 김씨의 언찰 10여 통의 해석을 맡긴다.
“함부로 소문을 내지 말도록 해라. 우리 집안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무슨 삿된 수작을 펼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몸가짐을 무겁게, 신중히 해야 한다.”(14쪽)
평생 명문가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봉제사와 법도에 애쓴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상룡의 생모인 서영희의 관계를 인정하지 못했고, 결국 자신이 공들여 선택한 해월당 유씨를 아버지와 혼인시켰다. 그러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이에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상룡을 데려와 효계당의 종손으로 삼는다.
할아버지가 왜 상필을 제치고 나를 종손으로 삼았는지, 그 뜻은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 집안에서 나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일을 공공연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할아버지가 없을 때, 나직한 목소리로 은밀히 오갔다. 내가 할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핏줄이 당기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평생 냉담한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일시적인 회한으로 나를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36쪽)
상룡은 새어머니인 해월당 유씨의 손에 길러졌으나,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식모 달시룻댁에게 더 큰 애착을 느낀다. 하지만 달시룻댁의 딸인 정실에 대해선 내내 못마땅한 감정을 품는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저는데다 못생기고 뚱뚱하기까지 한 부엌데기다.
달시룻댁이 효계당의 생활을 구성하는 데 있어 눈에 띄지 않으나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요소라면, 다리병신에 쌀 한 가마의 몸무게를 자랑하는 정실은 효계당의 격을 떨어뜨리고 다소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더하는 희비극적인 존재였다. 정실은 대개 뒷밭 그늘의 두엄집에 파묻혀 살았다. 두엄을 뒤지면서 무슨 놀이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손톱 밑은 새까맸고 치마에는 흙물이 들어 있었고 지나간 자리에는 연한 두엄 냄새가 남았다.(72쪽)
상룡은 우연한 계기로 할아버지의 방에서 생모의 것으로 추정되는 명함을 발견하게 된다. 도심의 어느 호텔에 있는 초콜릿가게에서 그토록 그리던 생모를 만나게 된 상룡. 그러나 차마 알은척을 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움만 간직한 채 그대로 돌아오게 된다. 며칠을 헤매며 마음을 잡지 못하던 상룡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에 괴로워하다 정실에게 이상한 적개심을 품게 되고, 결국 그녀를 범하게 된다.
팔십 킬로그램은 족히 넘어갈 비둔한 몸뚱이를 어린애 손목만한 두 발목으로 받치고 있는 정실은 쉽게 중심을 잃었다. 내가 신경질적으로 한 번 팔뚝을 잡아끌었을 뿐인데도 정실은 그대로 문지방을 넘어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문디 가스나. 달시룻댁 아니었으면 너 같은 가스나는 진작에 후두끼 났을 기다. 밥만 처묵었지 쓸 데가 어데 있노. 이까짓 가스나 이 자리에서 패죽인들 누가 뭐라 하겠노.(110~111쪽)
기이하고 엇나간 방법으로 시작되었으나 정실에 대한 상룡의 마음은 점점 깊어진다. 어린 시절부터 상룡을 흠모해오던 정실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가 알게 되면 둘은 온전히 지내지 못하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일 터. 가문에 해가 될 내용을 담고 있는 언간을 믿지 않는 할아버지와 이를 믿고 지켜내려는 상룡은, 마침내 사랑을 지키려는 이와 이를 파괴하려는 이의 모습으로 화한다.
비겁한 놈, 무능한 놈. 네 자식을 밴 여자가 개처럼 두들겨맞고 어디론가 끌려갔단 말이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자지러진 네가, 그래도 사내냐? 그 사내들이 정실의 배를 으지직으지직 짓밟는 것을 네 눈으로 보았지? 아이는 성치 못할 것이다. 정실도 성치 못할 것이다. 너는 병신이다.(226쪽)
소설은 아름다운 의고체로 쓰인 언간의 내용을 발판 삼아 절묘하게 나아간다. 쉬이 읽어내기도 어려운 옛 언간의 문체를 작가는 몇 권의 사전을 밤새워 뒤져가며 실감나게 복원해냈다. 그것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했던 과거의 모습들을 뚜렷이 되살린 실례實例이기도 하고, 가부장제 아래에서 고난을 겪었던 여성들의 아픔에 관한 처연한 세밀화이기도 하다.
어은이 보아라.
거둘이 바쁜 걸음에 순부順付하려니 긴 말 어려우나 일지성심一支誠心을 잃지 말 것이며 계집아해 낳더라도 자진하지 말지라. 소산 팔십 칸 집 어느 그늘에 네 모녀 쉴 자리 없으랴. 계집아해 낳거든 밤을 도와 기별하면 내 아모제나 업을아비 보내리니 자진하지 말지라. 애고 내 아해야, 자진하지 말지라.(193쪽)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시아버지에게 희생당한 상룡의 10대 조모 안동 김씨의 이야기는 효계당에서 쫓겨난 정실과 그 안위를 알 수 없는 뱃속의 아이로 재현된다. 긴 세월을 뛰어넘었음에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아릿하게 사라져가는 여인들. 가부장적인 억압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던 효계당의 여인들은 그래서 한없이 애달프다. 어두워지고 나서야 모든 것을 비추는 달처럼, 효계당의 처마 위를 천천히 오르던 저 그림자 같은 여인들은 어디로 간 것인가. 그리하여 마침내, 달의 제단에는 누가 오르는 것인가.
*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가슴의 뜨거움조차 잊어버린 쿨한 세상의 냉기에 질려버렸다. 맹렬히 불타오르고 재조차 남지 않도록 사그라짐을 영광으로 여기는 옛날식의 정열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것이 요즘 유행하고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_‘작가의 말’에서
‘인간적 삶의 진실’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심윤경의 소설은 이 물음에 ‘사랑’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나아가 그녀의 소설은 ‘사랑’의 문제를 ‘가족’과 나란하게 병치시킨다. 그녀의 인물들은 대개 가족적 세계 속에서 인생의 부침(浮沈)을 겪는데, 그 경험의 중심에는 항상 ‘사랑’의 문제가 놓여 있다. 소설이 한 개인의 삶에 대한 법적·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안에서 부침을 반복하는 인물의 내면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삼는 장르라고 말할 때, ‘사랑’은 그 ‘이해’의 세계로 들어가는 가장 강력한 입구가 된다. _고봉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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