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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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1부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생일
특별한 일
혀
펭귄 시각
저, 저, 하는 사이에
해마다 꽃무릇
내색
몸이 커서 수박,
수레국화
그늘의 맛
결혼식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초록 물결 사이 드문드문 비치는 보랏빛 오동꽃 보며
껍질째 먹는 사과
뭐, 그냥 간다
국지성 호우
벚꽃이 달아난다
달빛했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2층이라 부른다
당신이라는 모든 매미
2부 빌려온 빛에 지나지 않습니다
커다란 창
때가 되면
허공은 가지를
폭우
유리의 집
많은 물
뒹구는 대갈통
저 푸른 초원
가출
펭귄들
조등(弔燈)
동파
풍경
공중 무덤
관광버스
분교
발
대구선(線),
파계사에서 생각이
3부 멀리 있는 것에 관하여서입니다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웃지 마세요 당신,
선물
11월
사라진 왕국
꽃나무의 미열
예의
아직도 숨바꼭질하는 꿈을 꾼다
봉봉 한라봉
변두리
청송 사과
들어내다
나의 고전주의
현관문 나서다가
어느 날 라디오에서
비유법
선글라스
락스 한 방울
불안도 꽃
해설 | 러블리 규리씨
| 박상수(시인, 문학평론가)
특별한 일
도망가면서 도마뱀은 먼저 꼬리를 자르지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이 몸을 버리지요
잘려나간 꼬리는 얼마간 움직이면서
몸통이 달아날 수 있도록
포식자의 시선을 유인한다 하네요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외롭다는 말도 아무때나 쓰면 안 되겠어요
그렇다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어느 때, 어느 곳이나
꼬리라도 잡고 싶은 사람들 있겠지만
꼬리를 잡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와중에도 어딘가 아래쪽에선
제 외로움을 지킨 이들이 있어
아침을 만나는 거라고 봐요
관광버스
세 사람 건너면 내게 마이크가 올 차례다
단풍 진 바깥에 눈을 주고 있어도
귀는 노랫가락에 딸려간다
무량수전, 부석, 선묘, 닫집……
이런 단어 몇 개
가랑잎처럼 따라오다
남행열차와 소양강에 휩쓸려가버린다
사뭇 교양적이다가도 돌아가는 길에서는
약속한 듯 모두 급해진다
금방 일치가 된다
생은 늘 뒤에서 덜미를 낚아채니
못 이긴 척 질펀하게 풀어야 할지
차창 밖 멀리 웅크린 산등성이
몇 번 넘고 싶었다
넘어야 할 이유는 많았다, 저 능선들
저녁밥 굶고 모로 누운 가족 등허리 같아
슬쩍 커튼을 가린다
다시 생의 마지막을 소진하듯
헐거운 나이가 허용하는 고성과 방가
외로웠구나, 궂었구나,
돌아보면 어여쁜 것들 천지에서
오늘 함께 젖어보는 거다
가로수 아래 흥건히 떨어지는 단풍잎들도
소진한 것 아니냐
중얼거리는데
어둠처럼 빚쟁이처럼 덜컥,
코앞에 마이크가 도착했다
웃지 마세요 당신,
오랜만에 산책이나 하자고 어머니를 이끌었어요
언젠가 써야 할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서였죠
팔짱을 끼며 과장되게 떠들기도 했지만
이 길을 또 얼마나 걷게 될지
사진관에 들어섰을 때
어르신 한 분이 사진을 찍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급격히 어두워졌어요
나도 저렇게 하는 거냐
이게 요즘 유행이라며
평소에 미리 찍어두는 게 좋다며
나도 젊을 때 찍어둬야겠다며
쫑알대는 내 소리에는 눈도 맞추지 않으시더니
사진사가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쓰자
우물우물 급히 말씀하셨어요
나 웃으까?
그 표정 쓸쓸하고 복잡해서 아무 말 못했어요
돌아오는 길은 멀고 울퉁불퉁했고
웃지 마세요
그래요 웃지 마세요 당신,
파계사에서 생각이
기와불사, 기와불사 한 장 1만 원
1만 원짜리 기와에 써놓은 내 주소와 이름 위에
제비 똥이 먼저 앉아 있다 하얗게,
1만 원의 지붕을 이고 무량청정 그 법문이 벌써 들리기라도 하는 듯
웃는 돼지머리가 상등품이라 입가를 쭉 당겨 찔러넣은 꼬챙이나
등산길, 도토리나무를 사정없이 두들기는 막대기가
나의 기와불사이다
만당은 무릇 무주공산이어서 공산은 또한 주인 잃은 만당이어서
날렵한 지붕을 떠받치기도 전,
부끄러운 주소와 이름을 제비가 슬쩍 가려준 것일까
시인의 말
어떤 그림 속의 도마뱀은
그림에서 나와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 시가 시에서 나와
시로 돌아갈 수 있을까마는
그렇게 된다면
나온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2014년 봄
이규리
● 편집자의 책 소개
“여긴 아직 내색에 무심하다
그러니 꽃이여, 그저 네 마음으로 오면 되겠다”
―지상의 존재들이 빚어내는 삶의 비의에 응답하는 따뜻한 시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저마다의 사연으로 내파(內波)되어 있는 삶의 실제 상황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하는 보편성에 저항하며 각 존재의 개별성을 확보해왔던 이규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가 문학동네시인선 54번으로 출간되었다. 『뒷모습』(2006) 이후 8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에는 일종의 독특한 미학으로 담백함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 쉰여덟 편이 묶여 있다. 관성적으로 스쳐지나가기 쉬운 사소한 풍경에서 포착한 삶의 비의를 개성적인 시적 풍경으로 재구성했던 시인의 애정 어린 관찰력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인은 언어가 주는 소통의 착시 효과를 경계하면서 시로 재구축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섬세하게 더듬어나간다.
그가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재킷 뒤에 세탁소 꼬리표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왜 아무도 말해주지 못했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애써 준비한 말 대신 튀어나온 엉뚱한 말처럼
저 꼬리표 탯줄인지 모른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던 일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 일 누구도 말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저, 저, 하면서도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7년간의 연애를 덮고 한 달 만에 시집간 이모는
그 7년을 어디에 넣어 갔을까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저, 저, 하는 사이에」 전문
이규리가 포착한 삶의 순간은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말의 무력함을 경험하면서, 그저 목격하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삶의 순간이 있음을 인정하는 시인의 ‘담담한 현실주의’는, 아프다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해지지 않은 슬픔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상견례하는 자리에서/ 한쪽 인조 속눈썹이 떨어져나간 것도 모르고/ 한껏 고요히 앉아 있”는,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각기 지닌 삶이 너무 진지해서” 그저 “저, 저,” 망설일 뿐 “말해주지 못”하는 때. 삶의 불가항력과 외로움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쓸쓸함이 담담한 어조에 배어 있다. “숨이 차서, 또 어찌할 수 없어서, 일렁이는 마음 감추려 또 괜한 말을 하는” ‘당신’의 아픈 몸을 가만히 받쳐주면서 시인은 “저 꽃 이름이 뭐지?”라고 말을 반복하는 ‘당신’의 안색에 활짝 핀 고통을 느낀다.(「해마다 꽃무릇」)
그날따라 정신없이 웃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래도 되는지
옆을 돌아보았어요
예의가 아니었나요
예의는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라 하고
너무 가두어도 어긋나는 것이라 하니
예의는 예의를 말할 수 없는 거겠어요
아무도 웃지 않을 때 웃는 건
그야말로 예의가 아니겠죠
하필 그날, 왜 옆에 있던 대형 유리가 깨졌던 걸까요
미안해요 너무 크게 웃어서
슬픈 다른 사람 생각을 못해서
파편들은 극명하게 아픔을 말해주었어요
웃음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는 듯
아마 그날,
우리는 웃지 않아야 할 때 크게 웃었던 거지요
-「예의」 전문
해설을 쓴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박상수는 이규리 시인은 “자기 웃음조차 객관적 시선으로 되살피며 사태와 그 사태를 둘러싼 관계들을 전체 맥락에서 고려”하고 있으며 자신과 아무런 관계 없는 우연조차 “자신의 몫으로 감당하며 미안함을 느끼는 이런 화자의 모습이 오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슬픈 사람을 생각하지 못하고 혼자 웃었던 걸 미안해하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일 거라면서 말이다.
한 줄 문틈을 그은 불빛이 빗장 같아
불 켜진 아이 방 앞에 서서
늦은 시각을 벌컥 열지 못하겠다
자주 먼 곳을 향하는 아이를 훔쳐볼 때
슬그머니 끼이던 낯선 공기
백합나무도 제가 피운 꽃등은 못 보겠지
내가 짚어볼 수 없는 저 아이의 미열은
이제 나무의 것일까
-「꽃나무의 미열」 부분
백합나무는 tulip tree라고도 하며 나무 상단에 튤립 모양의 연둣빛을 띤 노란색 꽃이 핀다. 나무는 키가 큰데 꽃은 위를 향하고 있어 아래서는 좀처럼 꽃을 보기 어렵다. 이는 존재에 대한 탁월한 비유로 읽힌다. 자식과 부모는 혈연으로 맺어진 누구보다 긴밀한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삶을 대신 살苡팁수 없다.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만 하는 고독, 시인은 그 아이의 “쓸쓸한 먼길”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에게 “또 짐짓 이마를 짚으며/ 음, 음, 날씨 얘기나 꺼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려깊은 배려가 서로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아닐지 시인은 가만히 되묻는다.
“어떤 나라에 ‘눈사람 택배’라는 게 있다 하네요/ 눈이 내리지 않는 남쪽 지방으로/ 북쪽 지방 눈사람을 특수포장해 보낸다 해요// 선물도 그쯤 되면 신비 아닌지요/ 받을 때 눈부시지만 녹아 스스로 자랑을 지우니/ 애초에 부담마저 덜어줄 걸 헤아렸겠지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리 살고 싶네요/ 언젠가 녹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왜 손가락을 걸었던지요// (…)// 그런 선물이라면// 그런 아득함이라면”(「선물」)이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녹을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을 걸고는 하지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아리게 하지만, 저는 끝까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래요. 당신의 시집이 우리에게 선물처럼 도착해서 이렇게 녹아 없어지지만, 여기엔 이런 것이 바로 삶이라는, 당신의 수긍과 지혜와 안부와 토닥임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죠.
―박상수 해설 「러블리 규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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