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빛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5.09MB)
- ISBN 9788937439704
- 쪽수 2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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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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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력이 점차 감퇴하고 있는 킬러다. 어느 날 조직으로부터 한때 나의 ‘멘토’였던 L을 죽이라는 통보를 받지만 나는 실패한다. 조직은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나는 조각조각 떠오르는 L과의 기억들을 억누르며 그를 기다리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결국 나는 L의 집을 직접 찾아가게 되는데…….
마이 퍼니 발렌타인 47
애플 시드 77
로커룸 119
야간 비행 153
드라이브 미 189
아케이드 217
프리마 돈나 245
작가의 말 271
작품 해설
이미지 소설과 삶의 관절_ 송종원 275
라이플의 스코프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L은 그것이 내가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아 둔 돈이 정리되는 대로 비행기를 타고 북극으로 갈 것이다. 혼자 눈밭을 걸어간다. 그리고 적당한 언덕을 골라 자리를 잡은 뒤 오로라를 기다린다.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그 빛 아래에 누워 한때 듣던 음악을 떠올리거나 그동안 내 표적이 되었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해 보면 괜찮을 것 같다. 그럴 수 있을까? 북극에서는 오로라를 ‘여우의 빛’이라 부른다. 좋은 이름이다. L은 여우의 빛을 보기 전에 죽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럴지 모른다.
―「여우의 빛」, 19~20쪽
때로 꿈속에도 비가 내린다. 양철 지붕 위에 내리고, 옥상 장독대 위에 내리고, 버려진 구두 안에도 내린다. 듣고 있으면 내게 최면을 걸듯 입을 연다. 잡음은 길고 규칙적이다. 어느새 내 머리 위에도 비가 내려앉는다. 꿈은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비는 아주 단순한 선이다. 그 속으로 손을 내민다. 손금을 두드리는 빗줄기. 혈관을 두드리는 빗줄기. 손바닥에 비를 모은다. 둥그렇게 고인다. 입체가 된다. 손바닥을 얼굴 쪽으로 기울여 고인 빗물을 천천히 마신다. 비릿한 냄새를 코에 남기고 물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나는 따라갈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이, 콧물이, 오줌이, 땀이 되기 전까지 나는 그것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침마다 꿈속에서 마신 물을 버렸다.
―「아케이드」, 235쪽
어느 날부터 병실이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간다. 나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기울어진 곳의 끝에는 아마 어딘가로 연결된 구멍이 있을 것이다. 병실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몸 안에 담긴 피가 내내 불안하다. 끊임없이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애써 균형을 잡으려 한다. 피와 함께 생각이 한쪽으로 뭉친다.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다. 갑갑하다. 참을 수 없이. 맨몸으로 사막을 향해 걷는 여행자. 그 지친 발걸음과 메마른 목젖처럼 나는 어쩔 수 없는 갑갑함을 호소한다.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갈증을 느낀다.
―「프리마 돈나」, 261쪽
■한때의 갈망이 사라진 자리에서
소설집 『여우의 빛』의 인물들은 소중했던 것을 잃은 뒤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것은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될 수도 있고 순수한 마음으로 꿈꿨던 소망이 될 수도 있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주인공은 중고 트럼펫을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고 오랜만에 트럼펫을 꺼내 닦으며 연주를 시작했던 순간부터 그만두었던 때까지를 반추한다. 「로커룸」의 ‘나’는 이혼을 앞두고 지난해진 부부 관계를 돌아보던 중 아내의 새 연인으로부터 그녀의 사진을 갖고 있다는 은밀한 연락을 받는다. 「프리마 돈나」의 화자는 예고 없이 찾아온 질병에 사로잡혀 병실이 자신의 생명력과 함께 기울어 가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들은 과거의 소망을 되찾고자 노력하지 않고, 관계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그저 모든 것이 지나가도록 둔다. 「마이 퍼니 발렌타인」의 주인공이 예전의 나와 꼭 닮은 대학생에게 중고 트럼펫을 넘기고, 「프리마 돈나」의 화자가 병원 침상 위에서 친구 아내의 노래를 청해 듣는 것처럼, 스러져 가는 생명력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잃어버린 꿈은 또 다른 이의 꿈으로 채워진다. 『여우의 빛』이 보여 주는 새로운 세계 인식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삶의 흐름을 분명히 감각하는 순간에 있다.
■깊은 절망으로부터 확장된 존재
『여우의 빛』의 주인공들은 상실로부터 피어난 절망을 피하지 않고 외려 즐긴다. 생채기 난 피부가 작은 자극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이동욱의 상처 입은 화자들은 예민하게 감각되는 세계를 유희한다. 「여우의 빛」의 주인공은 조직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멘토’였던 L을 죽이는 순간, 빈방이 내뿜는 ‘내가 없는 사이 벽이 참았던 호흡’을 느낀다. 「야간 비행」의 인물은 아내와의 지난한 관계를 뒤집고자 떠난 여행 객실에서 화장실 물이 새는 것을 들으며 가만히 초를 센다. 「아케이드」에서 ‘나’는 갑자기 해외로 떠난 연인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대신 연인이 두고 간 건축학 도서를 읽는다. 건축물의 완벽한 형태를 더듬으며 끝없는 공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물들은 절망 이후의 삶에서 새로운 감각들을 길어 올린다. 세계를 해부하듯 조각조각 포착된 감각들은 나아가 상실과 절망까지 작은 입자로 흩트린다. 그리고 작은 입자로 흩어진 절망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우리는 즉각적인 슬픔 너머 삶이 선사하는 수많은 감각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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