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꿈의 뉘앙스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4.66MB)
- ISBN 9788937408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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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뉘앙스의 기록자
영원 무렵 13
한 뼘의 경희 14
라니아케아 17
숲과 수첩 20
춤추는 도마뱀의 리듬 22
아가미의 시절 23
구(球) 26
악력(握力) 28
마고는 태어난다 30
위험한 마음 33
서기의 밤 36
델마와 피크닉 38
미광의 밤은 푸르렀네 41
사라지는 43
고독의 첫날 46
연보 51
2부 마음은 모래알처럼 사소하여
몸주 57
백치 60
흰빛 62
302호 65
꿈의 의자를 타고 68
검은 눈 70
술을 삼키는 목구멍의 기분으로 72
수맥 74
눈에 박힌 말들이 떠나간다 76
밤과 꿈의 뉘앙스 78
우츠보라 80
형혹수심 81
유성우 84
3부 미숙한 사랑을 자랑하듯
겨울의 펠리컨 89
수색(水色) 92
서리의 계절 94
까맣고 야윈 달력에게 96
불황의 춤 99
목련 103
산책 106
모래언덕슬픔 108
호문쿨루스 110
회전하는 불운 113
일기예보 116
여름 바다 117
Sana, sana, colita de rana 118
4부 여기 가장 둥근 빛 하나가
연필점 123
섬망 125
포르말린 향이 나는 빛 128
오후와 저녁 130
까마귀를 훔친 아이 132
어미의 정원 134
오키나와 타카요시 136
어두워질 때까지 거대한 돼지는 울었다 138
블라디의 끝 140
검푸른 미아들 142
reflection 145
한 아이가 한 아이를 지우며 148
작품 해설-조재룡(문학평론가)
유리병에 담긴 사랑의 파이 151
우리에겐 애인이 없고
직장이 없고 미래도 없었기에
끝내 바닥난 기분이 발목을 잡아채면
온통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게
지겨워 견딜 수 없어
젖은 속눈썹이 떨려 오면
박차고 일어서던 너의 작은 등을
우리는 대화라고 불렀다
-「한 뼘의 경희」에서
그러니까 어제는 밤이라 말해도 좋고 새벽이라 말해도 옳다 모두들 절반쯤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너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며 무엇을 잊었는지 생각한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볼펜을 돌린다 창밖에는 편백나무 숲이 보인다 한 문장만 반복하던 날들을 사랑이라 불렀던 적이 있다
-「서기의 밤」에서
아름답구나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요상하고 아름답구나
의미 없이 혼잣말을 들려주는 일이 좋아서
어릴 적 죽도록 오빠에게 맞던 기억이나 동생이 연못에 빠졌던 기억들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들려주듯
사랑을 다시 말하기엔 늙었고
이별을 다시 말하기엔 지쳤기에
모르는 사람처럼 각자의 신발을 신고
다시없을 다음을 기약하도록
-「302호」에서
우리는 다행이라고 말한 적 있다
무엇이 다행인지도 모른 채 다행이라서
사람처럼 먹고 자고 다시 넘어질 각오로
달력 한 장을 찢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되어
서로의 닮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을 죽인다
엉망으로 취한 시간에는
모두들 가여운 짐승이 되기도 하는 거라
한 병의 위스키를 마시면 실패하지 않고
기꺼이 이상해지는 운명의 카드가
그의 호주머니에 있다
-「까맣고 야윈 달력에게」에서
■ 밤의 뉘앙스: 슬픔도 기쁨도 아닌 정적
사랑의 프락치들 앞에
시궁쥐처럼 모여 앉아
영혼의 매장량을 세어 본다
-「자서」
모래알 같은 마음에 사랑은 들어올 구석이 없다. 마음은 갈라지고 또 갈라져 단 하나의 감각도 놓치지 않고 비유하고 상징하며 나열한다. 『밤과 꿈의 뉘앙스』의 시어는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그 아름다움으로 구성된 사랑은 이미 “프락치”에게 점령당한 듯하다. 그 앞에 박은정이 부려놓은 마음의 조각들은 각자가 나름의 존재를 부여받은 채로, 그래서 더욱 복잡해진 채로 “모여 앉아 영혼의 매장량을 세어 본다.” 그 과정은 당연하게도 정체불명이고 가늠할 수 없고 슬픔이거나 기쁨일 수 없다. 그런 것들 앞에서 현명한 이들은 침묵을 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박은정의 시를 암송하며 정적에 빠져드는 이유다. 이 마음에 사랑이 틈입하기가 어렵다. “사랑하는 너의 얼굴은 가장 먼 곳에 있다.” 이 밤을 지새워 시를 읽는다 하더라도, 영혼을 센다 하더라도 사랑은 야만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 꿈의 뉘앙스: 그럴 줄 알면서도, 사랑
빛 속에 일렁이는 얼굴
우리는 이 지옥 안에서 사랑에 휘말린다
-「reflection」에서
그러나 시인은 지치지 않고 사랑의 프락치들 앞에서 시궁쥐가 되어 영혼의 매장량을 세는 데 주저함이 없다. 슬픔이 비루함을 살찌우고 다정한 목소리에 질겁하게 될 때까지 하나 또 하나 다음의 숫자를 부르며 나아간다. 기름이 유출된 해변의 모래처럼 시커멓게 된 마음으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수천 장의 밤을 지나” 기억을 더듬고 우리를 호명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짚어 낸다. 과연 시인은 영혼의 수량을 확인하고 마음의 조각을 사랑으로 이어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꿈의 예사로운 겉모습이겠으나, 박은정은 뉘앙스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발아하는 죽음을 일부러 목도하는 사람이자 비극 뒤에 도사렸던 희극의 비극성마저 찾아내는 사람이다. 끝내 패배하거나 사라질 사랑인 줄 알면서도 시궁쥐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아름다움의 광증이 도져서 그 발걸음이 찬란하다. 시집의 입구에서부터 마지막 문장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수기(手記)가 영혼의 물결을 이룬다. 사랑은 이렇게 아름답다. 실패하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것이 밤과 꿈이 내비치는 검푸른 뉘앙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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