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헨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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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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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 위선의 사회에 맞서 진정한 가치를 찾아
작가연보
발간사
“페르민 신부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그와 겨루며 싸우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 혼자 독식하게 될 먹잇감이었다. 참 내! 사람들은 이 궁색한 제국마저 그에게서 빼앗아가려 한단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그가 멋지게 싸워서 얻어낸 거였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도 어리석을까?” (1권 26면)
“그녀는 더이상 글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야유들을 비웃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멍청한 귀족 남자들에게서 받은 환대를 경멸하고, 그들의 조소를 무시하는 걸로 복수했다. 아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숭배는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신의 뇌리에서 잊힌 유명인사들을 대하듯,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은 신도들을 한명씩 무시했다.” (1권 181면)
“하지만 무슨 사랑? 그 사랑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녀는 그 사랑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수치심 반, 분노 반으로 기억해냈다. 신혼여행은 쓸데없는 자극이자 감각에 대한 허위경고이고, 잔인한 빈정거림 자체였다. 그래, 정말 그랬다. 추억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데, 왜 자기 자신에게 숨긴단 말인가?” (1권 356면)
“아나는 우물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저 아래에 있는 남자의 두 눈 속으로 점점 깊이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쏠리고, 생각들이 뒤죽박죽 엉키고, 도덕적인 개념들이 빛을 잃어가고, 용수철과도 같았던 의지가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이 보였다.” (2권 28면)
“나무들로 뒤덮인 오솔길에서 정처 없이 걷던 신부는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르며 베뚜스따를 향해 내려갔다. 그는 꽃봉오리를 하늘 높이 던졌다가 다시 자기 손으로 받았고, 그때마다 꽃잎이 한장씩 허공에 흩어졌다. 꽃봉오리의 형체가 사라지자 페르민 신부는 이상한 식욕을 느끼며 남은 부분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관능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2권 244면)
“고매한 베뚜스따 사람들은 비탄에 잠긴 위선적인 얼굴로 은밀한 기쁨을 서로 감췄다. 그들에게는 소설 같은 엄청난 스캔들이었고 슬픈 도시의 영원한 지루함을 깨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캔들이라니! 발각된 불륜! 결투!” (2권 664면)
“그녀는 혼자였다. 완벽하게 혼자였다.”
타락한 사회가 벼랑으로 내몬 한 여인의 삶
1870년대 이후 왕정복고기 스페인의 가상 도시 베뚜스따를 배경으로 여주인공 아나 오소레스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며 다른 두 남자에게서 사랑과 구원을 찾는다. 이 작품은 진정한 삶을 추구하던 한 여인이 불륜의 덫에 빠지게 되는 통속적인 줄거리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 계급의 저속한 모습들을 파헤친다.
500여명에 달하는 등장인물과 1300면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작품에서 줄곧 외톨이로 그려지는 아나는 오로지 타인과 사회의 시선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부여되고 운명이 결정된다. 귀족 사회에서 전직 판사의 부인인 아나는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이 선망하고 동경하는 대상이지만, 지조 높은 이상적 여인상이라기보다는 참고할 만한 규범 없이 성(聖)과 속(俗)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 파멸하는 비운의 여인이다. 고아로 자란 유년시절 아버지를 찾아나섰다가 밤사이 집에 돌아오지 못한 사건 이후 아나는 무고하게도 성적으로 타락한 계집아이로 규정되어 신부에게 죄의식을 주입받고, 고모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전직 판사에게 시집보내진다. 결혼생활에서 기대할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고해신부 페르민에게 구하지만 그녀의 고해성사는 신부의 성욕과 지식욕을 은밀히 채워줄 뿐이다. 유부녀인 아나를 공들여 유혹한 바람둥이 독신자 돈 알바로 역시 모두가 선망하기 때문에 아나를 정복하고 싶어했을 뿐 그녀가 원한 사랑까지는 줄 생각이 없었다.
작가가 대부분의 생애를 보낸 스페인 북부 도시 오비에도를 본떠 설정한 도시인 베뚜스따를 묘사하는 방식도 주목할 만하다. 가장 높이 솟아 지역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대성당 종탑은 소설의 시작과 결말을 장식한다. 베뚜스따는 종교가 큰 권위를 갖는 도시이지만 그곳 사람들이 진정으로 숭배하는 종교는 돈과 권력이며, 성당과 교구는 권력의 싸움터다. 도입부에서 페르민 신부는 위압적인 모습의 대성당 종탑에 올라 도시 구석구석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며 야욕을 다진다. 그가 내려다본 도시는 명문대가의 저택과 하층민의 오두막집, 공장, 수녀원이 뒤섞인 모습으로, 갈등 가득한 사회를 예고해준다. 교구 전역을 자신이 “독식하게 될 먹잇감”(1권 24면)으로 생각하는 페르민은 고해신부라는 위치를 이용해 아나를 더욱 고립시켜, 결국 성당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힌다.
19세기 스페인 소설의 정점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밀도 높은 서술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은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레헨따』로 성취를 인정받은 소설가일 뿐 아니라 정치비평, 저널리즘 분야에서도 왕정복고기의 혼란한 사회에 필요한 중요한 목소리를 낸 당대의 대표 논객이기도 했다. 급진주의자들이 왕을 끌어내리고 민주적 공화정을 수립한 1868년 ‘9월 혁명’ 당시 16세 청년이었던 끌라린은 혁명과, 그 사상적 기반으로서 근대적 합리성을 옹호한 크라우제 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신앙의 자유와 정교(政敎) 분리를 지지하게 되었다. 공화정이 국정 혼란 속에 11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다시 왕정으로 돌아선 후, 국교로 부활한 가톨릭교회가 권세를 누리는 상황에서 레오뽈도 알라스는 ‘나팔수’를 뜻하는 ‘끌라린’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신문, 잡지에 왕정복고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쏟아냈다.
끌라린의 정치사회적 관점은 그가 문학에서 자국 고유의 자연주의 소설론을 발전시킨 점과도 궤를 같이한다. 스페인의 자연주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프랑스 자연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더 나아가 그 현실을 구성하는 인물의 내면의식과 심리 묘사에 더욱 치중했다. 끌라린은 사회의 발전이 그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의 도덕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 일어나는 일 못지않게 인물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생각과 감정을 묘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나뿐만 아니라 남편, 페르민 신부, 돈 알바로, 그밖의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밀도 높게 서술된다.
인물들의 속마음을 종합해보면, 『레헨따』는 타락한 종교, 억압적 정조관념, 기만적인 관습이 규범으로 자리 잡은 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추락시키는지 꼼꼼하게 추적한 소설이다. 베뚜스따의 상류사회에서 여성의 평판은 정조와 관련해 작동하지만, 사회는 단순히 여성에게 정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관습에 동화되기를 강요한다. 그들 대부분이 일상적으로 불륜관계를 가지며 서로를 속이고 있지만, 스캔들이 되지 않도록 눈속임만 하면 되는 것이 관례다. 따라서 아나가 스캔들에 뒤이어 파멸하는 결말은 그녀의 부정행위 자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라기보다 베뚜스따의 암묵적 관습인 “불륜의 평화 전통”(2권 664면)을 깬 데 대한 응징의 성격을 띤煮募점을 부각한다.
외롭고 공허한 삶을 벗어나려 애쓰며 사랑과 구원을 찾던 아나는 죄의식이 낳은 죄를 굴레처럼 진 채 차가운 시선 아래 더욱 철저히 고립된다. 작가의 사회비평을 방대하게 구현한 『레헨따』는 비정한 결말을 통해 편협하고 위선에 찬 사회를 고발하며 과연 진정 타락한 것은 한 여성인가 사회인가를 묻는다
작가정보
저자(글)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
저자 레오뽈도 알라스 ‘끌라린’(Leopoldo Alas ‘Clar?n’, 1852~1901)은 스페인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비평가. 베니또 뻬레스 갈도스, 에밀리아 빠르도 바산과 더불어 19세기 스페인의 대표 작가로 자리 잡고 있다. 1852년 스페인의 사모라에서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비에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868년 ‘9월 혁명’의 영향 아래 자유주의 사상을 옹호하며 신문 『후안 루이스』를 발행했다. 혁명 이후 사회변혁을 사상적으로 주도한 크라우제 철학에 매료되었고, 이는 저작활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1875년 ‘나팔’을 뜻하는 ‘끌라린’이라는 필명으로 신문과 잡지에 정치비평과 문학비평을 발표하면서 왕정복고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냈다. 1881년 스페인 소설가 베니또 뻬레스 갈도스의 소설 『무산자』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고, 1882년 『라 디아나』지에 「자연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며 스페인 고유의 자연주의 문학론을 정립했다. 같은 해에 사라고사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이듬해에는 오비에도 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쳤다. 1884년과 1885년에 걸쳐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인 『레헨따』를 출간하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외에도 『?라요의 포옹』 『그들의 유일한 아들』 『내리막길』 세편의 장편소설, 그리고 다수의 산문과 단편소설이 있다. 1901년 49세의 나이에 오비에도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역자 권미선은 고려대 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에서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경희대 스페인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사볼타 사건의 진실』 『브리다』 『먼 별』 『운명의 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영혼의 집』 등이 있다.
작가의 말
『레헨따』는 타락한 종교를 상징하는 페르민 신부와 비겁한 연인 돈 알바로 사이에서 진정한 신념과 사랑을 꿈꾸다 좌절하는 아나 부인을 통해 스페인 귀족사회와 성직자사회의 저속하고 타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작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하고자 인물의 내면 묘사를 강화했다.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캐릭터를 지닌 등장인물들 덕분에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해석과 색채를 가미할 수 있는 명작으로 거듭나고 있다. ―권미선 (경희대 스페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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