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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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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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00분의1
현기증
중국어 수업
모자 속의 비둘기
안부를 묻다
정전(停電)의 시간
수취인불명
프라자 호텔
해설·한기욱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2011년 제29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며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서의 저력을 확인한 김미월이 신작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펴냈다.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와 장편소설 『여덟번째 방』에서 이 시대 청춘들의 아픔과 고민을 보듬어온 작가는 두번째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에서 한층 물오른 필력과 젊은 감각, 더욱 깊어진 통찰로 독자들의 기대를 모은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펼쳐보는 따뜻한 손길
진수는 더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어릴 때 그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다. 꿈꾸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꿈은 꾸는 동안에만 아름다웠다. 그는 세상의 주변이었다. 서점 베스트쎌러 진열대 뒤 구석에 꽂힌,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이었다. 엄연히 존재하지만 아무도 입어주지 않는 옷이고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노래였다. 그것을 알아버린 순간부터 그는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꿈이 꾸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25면)
김미월의 소설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남몰래 펼쳐보는’ 이 작가의 섬세한 눈길은 남다른 온기를 머금고 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이라고 해서 섣불리 보잘것없는 삶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제는 무시당하기 일쑤인 이 작은 진리를 작가는 차분하고도 곡진한 목소리로 전한다. 표제작에서, 번번이 꿈을 포기하고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편집자 ‘진수’는 다니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할뿐더러 계약을 따내기 위해 만난 유명 시인과의 술자리에서 행패를 당한다. 하지만 동갑내기면서도 자신보다 훨씬 유능한 팀장에게 거리감을 느끼던 진수가 자신의 득실은 따지지 않고 위험에 처한 팀장을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얼뜨기처럼 보이던 진수의 도덕적인 면모와 순수한 용기에 마음이 끌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정전(停電)의 시간」에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공원에서 일하는 ‘병태’는 공기업에 다니고, 치과를 개업하고, 대형 외식업체를 경영하는 소위 ‘잘나가는’ 친구들에 비해 턱없이 가진 것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세면장에 갇힌 귀뚜라미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결과, “동백꽃 한 송이가 제 그림자를 조준하며 천천히 떨어지”(187면)는 순간을 응시할 줄 아는 눈썰미는 김미월만이 찾아낼 수 있는 병태의 귀한 본모습이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딘지 볼품없는 겉모습이지만 작가는 끈기있게 그들을 지켜보고 지지한다. 소설 속 상황과 별 다르지 않은 처지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작가의 이러한 태도에, 언젠가 나타날 누군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펼쳐봐’주리라 희망하며 안도한다.
같은 꿈을 강요받는 시대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용기
나는 회사에 다니고 싶지는 않다. 장사를 하고 싶지도 않다. 공부에 흥미가 있거나 운동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쪽으로 빠질 리도 없다. 그렇다고 비구니가 되거나 마도로스가 될 것도 아니다. 그럼 어떡하지. 왜 사람은 꼭 뭔가가 되어야만 할까. 세상은 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한다. 하다못해 우리 반의 학급 목표만 해도 그랬다. Girls, be ambitious! 왜 다들 야망을 가지라고 하는 것인가. 나는 야망 따위엔 아무 관심도 없는데. (…) 내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유였다.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29200분의 1」 45~46면)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 입시성적에 매달리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 스펙 쌓기에 전전긍긍하는 시대에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찾는 고등학생은 얼마나 발칙한가. 김미월은 「29200분의 1」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가난한 여고생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어느 하루를 담담히 소묘하며 꿈을 꿀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그러면서도 꿈꾸기를 강요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환기한다. 이런 이중의 비판을 통해 신자유주의시대의 부조리함을 통렬히 그려낸 작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꿈을 꿀 수 없게 만드는 현실과, 꿈꾸기를 강요하는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꿈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현기증」에서 자신의 이름을 ‘달리’로 바꾼 주인공 화자는 사장에게 “우리가 아니어도 자넬 원하는 회사가 얼마든지 많이 있을 걸세”(61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듣고 해고당한다. 이 말은 달리에게 오래전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바로 대학 새내기 시절, 좋아했던 과 동기에게 고백했다가 “나 아니어도 너 좋아해줄 사람 얼마든지 많이 있을 거야”(63, 71면)라고 거절당했던 순간이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더욱 공고히 확인할 따름인 과 동기의 거절 방식에 달리는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런데 부득이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저런 말은 하지 않으리라”(71면) 다짐한다. 이는 ‘달리’가 기존에 거절한 권리를 갖고 있는 기득권과는 다른 인물임을 보여준다.
평론가 한기욱이 밝히듯 김미월의 소설은 “이야기를 통해 시대현실과 개인의 삶을 동시에 성찰하는 소설문학 특유의 미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화려한 기법과 수사, 파격적인 언어 및 형식 실험을 오히려 절제하면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과 꿈의 맥을 차분히 짚어가는 소설적 작업에 정진”(「해설」243면)하는 작가의 정직한 행보는 퍽 믿음직스럽다.
인연의 고리를 따라 흐르는 자연스러운 서사의 줄기
이 소설집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작가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플래시백 화법을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래시백 화법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작품은 「프라자 호텔」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현재의 ‘나’와 아내, 과거의 ‘나’와 대학 시절 첫사랑 윤서의 이야기를 병렬로 진행시킨다. 두 서사가 맞물리면서 나아가다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작가가 내미는 반전은 일반적으로 반전에 동반하는 작위성의 부담은 덜고 담백한 재미를 선사한다. 이 작품은 ‘프라자 호텔’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개인사와 한국 현대사가 사소한 기억들을 통해 교차하는 연출 또한 빼어나다.
한편 「중국어 수업」에는 비정규직 한국어 강사인 ‘수’와 수가 늘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전철 안에서 마주치는 노인의 인연이 등장한다. 같은 시간, 같은 객차에 타는 어린 화교 남매에게 중국어를 배우며 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노인은 수의 제자인 이주노동자 ‘쓰엉’과 비극적으로 얽히는데 그러나 김미월은 이 비극적인 인연에도 오히려 더 웅숭깊은 연대의 실마리를 숨겨놓고 있다.
‘죽음’에 대한 짧지만 곱씹어볼 만한 단상을 담은 「모자 속의 비둘기」에서 취업준비생인 ‘내’가 우연히 주운 휴대폰으로 신분을 숨긴 채 주고받는 스치듯 짧은 인연 역시 화자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
올해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며 “젊은 세대의 힘겨운 삶과 고뇌를 심도있게 탐구하면서도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쾌한 긍정의 세계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은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허황된 낙관도, 세련된 냉소도 아닌 다만 꾸밈없는 현실 직시야말로 격려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일상과 유리된 거대담론이 아닌 잔잔하고 소박하되, 하찮게 여겨서는 안될 귀중한 순간들의 포착을 통한 현실 진단은 놀라우리만큼 적확하다. “시대의 가혹함에도 생기를 잃지 않는 상상력과 어떤 깨달음의 순간을 통해 낯익은 현실을 새롭게 대하는 예술적 방식”(「해설」242면)에서 우리는 김미월에게 한국소설의 건강한 미래를 기대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측은지심을 느낌으로써 나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연민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측은지심의 대상인 타인 또한 나와 같은 인간임을 존중하는 균형감각은 긴 여운을 남긴다. 김미월은 그렇게 따스한 눈짓으로 독자들에게 또 한번 다정한 안부를 건넨다.
소심하고, 머뭇거리고, 그래서 자신의 외로움조차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타인에게 친절하지만,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친절하려고 노력하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무엇이 잘못된 거지?’ 하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몰래 펼쳐본다. 실은 나도 궁금하다고. 우린 아무리 오래 살아봐야 겨우 29200일을 살 뿐인데, 왜 물음표는 날마다 쌓이고, 왜 내일은 내일 같지 않은 것일까? 그래서 가난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아이는 “100년 만에 깨어난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깨어나자마자 다시 잠들고 싶어할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현실을 견디는 것일까? 이 책을 읽다보면 함부로 동정하지 않고 또 함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스스로 이름을 ‘달리’라고 바꾼 청년을 보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고 또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된다. 그 경계에서 소설은 균형을 잃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동백꽃이 자기 그림자를 조준하며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는 작가의 시선 덕분이다. 윤성희_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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