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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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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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구름들 사이로, 비행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모기보다 크지 않은 작은 얼룩처럼 보였다. 근처의 공군 기지에서 온 비행기가 해안을 따라 잠시 비행한 후 다시 기지로 돌아가는 거라 생각했다. 조금씩, 하지만 어려움 없이, 공중을 활공하듯, 비행기는 도시로 다가가고 있었다. 어떤 때는 하늘 높이 떠 있는 원기둥 모양의 구름들에, 또 어떤 때는 바람에 밀려 지붕에 거의 닿을락 말락 떠 있는 바늘 모양의 구름들에 휩쓸려.
(중략) 그리고 비행기는 그곳에서, 그 높이에서, 하늘 위에 시 한 편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종사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광기가 흔했으니까. 나는 허공에서 비행기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회전한 후 바로 도시의 건물이나 광장으로 곤두박질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바로, 그 하늘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듯, 글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을 시리게 할 정도로 붉고도 푸른 하늘이라는 거대한 스크린 위로 시커먼 잿빛 연기가 완벽하게 그려 낸 글자들이었다. (p.41-42)
1973년 말이나 1974년 초쯤에는 후안 스테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맞수인 디에고 소토 역시 자취를 감췄다.
칠레의 하늘이 산산조각 난다고 해도 그들은 항상 함께했고 늘 시를 논했다(물론 우리는 그들을 각기 상대방의 창작 교실에서 보지는 못했다). 키가 크고 금발인 스테인과 작고 까만 머리인 소토, 근육질의 강한 스테인과 장차 물렁살에 토실토실하게 살찔 조짐까지 보이는 몸매에 뼈가 가느다란 소토, 라틴 아메리카 시의 범주 안에 머무는 스테인과 칠레에서 아무도 모르는(그리고 여전히 계속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심히 걱정된다) 프랑스 시를 번역하는 디에고 소토.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땅딸하고 못생긴 인디오가 어떻게 알랭 주프로이와 드니 로슈, 마르슬랭 플레네를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맙소사, 미셸 뷜토와 마티외 메사지에, 클로드 펠리외, 프랑크 브나이유, 피에르 틸만, 다니엘 비가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드노엘에서 책을 출판한 조르주 페렉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소토가 거들먹거리며 사방을 누비고 다닌단 말인가? (p.94-95)
무뇨스 카노에 의하면 그는 몇몇 사진들에서 가르멘디아 자매와 다른 실종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사진들의 무대는 거의 그 장소가 그 장소였고, 그리하여 같은 장소였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들은 마네킹 같았다. 어떤 경우 사지가 떨어져 나가 훼손된 마네킹 같았다. 물론 무뇨스 카노는 여자들이 사진에 찍힌 순간 30퍼센트 정도는 살아 있었을 거라는 가능성을 제외하지 않는다. 화질은 (무뇨스 카노에 의하면) 대체적으로 좋지 않았다. 그 사진들을 본 사람들이 받은 인상은 지극히 생생했지만 말이다. 사진들이 전시된 순서는 임의적이지 않다. 일정한 선(線)을, 일정한 논리를, 일정한 이야기를(연대기적이랄지 정신적이랄지……), 일정한 계획을 따른 것이다. 천장에 붙어 있는 사진들은 지옥, 그러나 텅 빈 지옥과 흡사하다(무뇨스 카노에 의하면). 네 귀퉁이에 (압핀으로) 붙어 있는 사진들은 혼령과 흡사하다. 광기 어린 혼령. 다른 그룹의 사진들에는 애가적인 톤이 지배적이다(하지만 그런 사진에 어떻게 <그리움>과 <애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뇨스 카노는 자문한다). 상징들은 많지 않지만 상당히 암시적이다. 프랑수아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조셉 드 메스트르의 동생)의 책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밤들』의 표지 사진. 대기 중으로 스러질 듯한 젊은 금발 머리 여자를 찍은 사진. 작은 구멍들이 무수히 나 있는 회색 시멘트 바닥에 내던져진, 잘린 손가락의 사진. (p.123-124)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no의 소설 『먼 별Estrella distante』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칠레 피노체트 시대의 시인이자 비행사였던 카를로스 비더의 은밀하고도 매혹적인 악(惡)의 궤적을 뒤쫓는 이 이야기는 볼라뇨가 그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출간하기 전 발표한 소설로, 같은 해(1996년) 출간된 볼라뇨의 가짜 백과사전식 소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장(章)을 확장한 내용이다. 이 소설과 더불어 볼라뇨는 비로소 <볼라뇨 세계>의 한 축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이어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를 휩쓴 작가가 되었다.
칠레 출신으로 멕시코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냈던 작가 볼라뇨는 『먼 별』에서 자신의 조국 칠레의 암울한 현실을 목도한다. 볼라뇨가 주목한 현실이란 1973년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인해 전복되면서 시작된 잔혹한 체제, 그 가운데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남은 이들의 어두운 초상이다. 『먼 별』은 바로 이들의 삶을 겹겹이 얽히고설킨 볼라뇨식 화법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추리 소설화한 작품이자, 볼라뇨가 그려낸 시대적 공포의 정수다.
<볼라뇨 세계>의 진정한 시작 - 피노체트 치하, 악몽의 시대를 살아낸 초상들
<1999년 말에 이미 볼라뇨는 볼라뇨가 되었다. 그는 몇 권의 졸작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는 실험실 같은 작품과 더불어 두 편의 걸작, 즉, 내가 판단하기에는 볼라뇨가 쓴 최고의 소설이며 지성과 절제와 과격함이 기적처럼 조화를 이루는 『먼 별』 그리고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출간했다. 볼라뇨는 에랄데 소설상과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했고 모든 사람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호르헤 볼피(멕시코 소설가)
『먼 별』의 서문에서 로베르토 볼라뇨는 이 이야기가 아프리카에서 치열한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했던 동포 아르투로 B.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어 1장에서부터 등장하는 <나>, 즉 화자 아르투로 B.는 다름 아닌 로베르토 볼라뇨의 얼터 에고, 아르투로 벨라노이다. 아르투로 벨라노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이자 『부적』에서는 주인공의 주변인물 중 하나로 등장하는 등 볼라뇨 문학의 주요한 특징인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대표하는 인물로, 볼라뇨의 작품 가운데 바로 『먼 별』에서 그 존재를 처음 드러내고 있다.
한편 『먼 별』의 화자가 그 행보를 줄기차게 뒤쫓는 주인공의 이름은 카를로스 비더, 일명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이다. 그리고 카를로스 비더가 한창 활약하던 시절인 1973년 당시 볼라뇨는 스무 살 청년이었다. 1973년 8월 피노체트 쿠데타(9월 11일)가 발발하기 직전 칠레로 돌아가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했다가 8일간 투옥되었던 볼라뇨는 이후 25년간 칠레 땅을 밟지 않는다. 20년 이상 볼라뇨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었던 이 비극적 현실은 그의 작품 『먼 별』을 통해 비로소 빛을 발한다.
<먼 별>, 놀랍도록 순수한 악(惡)의 화신
볼라뇨 소설의 등장인물들답게 문학, 그중에서도 시(詩)에 사로잡힌 『먼 별』 속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화자 아르투로 B.를 비롯해 주인공 카를로스 비더(독학생 시절의 이름은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 비비아노 오리안(아르투로 B.의 친구), 후안 스테인(이들이 참여했던 <시 창작 교실>의 지도자), 디에고 소토(또 다른 <시 창작 교실>의 지도자). 1971년 또는 1972년 후안 스테인의 시 창작 교실에서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이름의 독학생을 만난 화자는 본의 아니게 이 근사한 독학생의 흔적을 계속 따라가게 된다. 시 창작 교실 시절부터 인기가 많았으며 꽤 괜찮은 시를 썼던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는 어느 날 칠레 남부 도시 콘셉시온의 임시 수용소 위 하늘에 시를 쓰기 시작한다. 피노체트 시대, 칠레의 공군 장교 자격으로 비행기를 조종하며 그 연기로 칠레 창공에 시를 쓰는 <비행 시인>, 카를로스 비더의 출현이다. 한편 화자의 친구인 비비아노 오리안은 화자에게 계속 편지를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후안 스테인, 디에고 소토, 그리고 카를로스 비더의 개인사에 대한 것들이다. 이들의 개인사는 당시 칠레의 냉혹한 현실과 맞물려 각자의 비극을 완성해 간다.
이중 특히 주목해야 할 인물은 칠레의 공군 장교이자 비행사인 카를로스 비더이다. 일반적인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행각은 독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알베르토 루이스 타글레라는 독학생으로 위장해 시 창작 교실에 몰래 잠입한 그는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비행기를 타고 칠레 하늘에 선동적인 문구로 점철된 시를 쓰다가, 이 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자신이 머무는 아파트에서 군사 독재 당시의
작가정보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 등장한 최고의 작가, 스페인어권 세계에서 가장 추앙받는 소설가, 라틴 아메리카 최후의 작가.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바치는 찬사들이다. 볼라뇨는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멕시코로 이주해 청년기를 보냈다. 항상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겼던 그는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20대 초반에는 <인프라레알리스모>라는 반항적 시 문학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이어 20대 중반 유럽으로 이주, 30대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투신한다. 볼라뇨는 첫 장편 『아이스링크』(1993)를 필두로 거의 매년 소설을 펴냈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볼라뇨 전염병>을 퍼뜨렸다. 특히 1998년 발표한 방대한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 문학상>이라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하면서 더 이상 수식이 필요 없는 위대한 문학가로 우뚝 섰다. 그리고 2003년 스페인의 블라네스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매달린 『2666』은 볼라뇨 필생의 역작이자 전례 없는 <메가 소설>로서 스페인과 칠레, 미국의 문학상을 휩쓸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범죄, 죽음, 창녀의 삶과 같은 어둠의 세계와 볼라뇨 삶의 본령이었던 문학 또는 문학가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암담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통렬한 성찰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의 글은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중첩되고 혼재하며, 깊은 철학적 사고가 위트 넘치는 풍자와 결합하여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작품으로는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을 비롯해 장편소설 『먼 별』(1996), 『부적』(1999), 『칠레의 밤』(2000), 단편집인 『전화 통화』(1997), 『살인 창녀들』(2001), 『참을 수 없는 가우초』(2003), 시집 『낭만적인 개들』(1995) 등이 있다.
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에서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황금세기 피카레스크 소설 장르에 관한 연구」, 「<돈키호테>에 나타난 소설의 개념과 소설론」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외면』, 『핫 라인』, 『소외』,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 『알라디노의 램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납치 일기』, 산체스 드라고의 『아리아드네의 실』,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등이 있다..
그림/만화 아후벨
열린책들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한국어판 컬렉션 표지를 그린 아후벨은 쿠바의 화가로 삽화가, 만화가, 그림책 작가다. 1956년생으로 어린 시절 엄청난 독서광이었으며, 미학을 공부한 뒤 쿠바 일간지의 풍자 만화가로 활동하다 1991년 스페인에 아트 스튜디오를 열었다. 독특한 그림책 『로빈슨 크루소』, 『자유로운 새』 등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스페인 아동 문학 최고 삽화상(2003), 발렌시아 시립 문화상 최고 삽화 부문(2007), 볼로냐 국제 도서전 최우수상(2009), CJ그림책상(2009) 등 전 세계 유수의 상을 50개 이상 수상했다. 쿠바, 불가리아, 폴란드,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1백 회 이상의 전시를 연 바 있다. 홈페이지 www.ajube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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