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5
2013년 09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1998년 02월 0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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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3203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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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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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한 사람의 생애에서 더러는, 저 혼자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거대한 강물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법이다. 그해 5월, 그 도시에서 바로 그 강과 마주쳤을 때 나는 스물여섯 살의 대학 4년생이었다. 누구도 원치 않았지만,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 격한 물살에 휩쓸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고, 혹은 평생 지우지 못할 정신과 마음의 외상을 얻었다.
그 맞은편 강기슭에 거품처럼 떠밀려 닿았을 때, 나는 참 요행으로 그것을 건넜다고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내 두 손이 누군가가 흘린 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음을 난 깨달았다. 한동안 그 불길한 핏자국을 지워내려고 몸부림쳤지만, 그것은 끝끝내 내게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결국 그것은 내 몸의 일부가 되었고, 조금씩 흐릿해지기는 할망정 그것과 함께 앞으로도 평생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지금 나는 이편 기슭에 주저앉아서 그 도시의 사람들이 건너온 저 거대한 강폭을 다시금 바라본다. 17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날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길도 많이 바뀌었다. 처음 7년은 다만 맹랑한 유언비어 혹은 과장된 전설이었고, 다음 3, 4년은 텔레비전 속의 제법 요란한 국회 청문회 연속극 같은 것이 되더니, 이제는 너나없이 이쯤 해서 역사 속의 해묵은 일지 정도로 정리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거리낌없이 말한다. 오늘 우리들 눈앞을 흐르는 저 강은 그때의 강물이 아니라고. 그 폭풍의 강은 아주 오래 전에 흘러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노라고.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은 잊고 있다. 총구 옆 혹은 뒤편에 비켜나 있었던(물론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람에게 그것은 단지 하나의 중요한 역사나 사건의 항목으로 어렵지 않게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총구 앞에 세워졌던 사람들에겐 그것은 영원한 악몽이거나 좀처럼 치유되기 어려운 생채기라는 사실을. 어차피 고통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러기에 여전히 그 도시 사람들은 저 강기슭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안타깝게 서성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도 억울한 망자들의 넋이나마 한사코 건져내야겠다는 듯이. 아니면, 미처 못다 한 저마다의 눅진한 설움과 분노와 아픔의 호곡을 마저 터뜨리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설사 그것이 다른 사람의 귀에는 지겨운 넋두리나 탄식쯤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도시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수만 명 대한민국 국군의 총과 탱크에 포위된 채 분노와 죽음의 공포에 치떨며, 그 버려진 도시에서 그들만의 힘으로 홀로 견뎌내야 했던 그해 봄날 열흘의 낮과 밤을.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데, 서울! 서울은 무얼 하고 있는가! 부산은, 인천은 왜 이리도 잠잠한가!” 하고 외치며, 방송마저 중단된 먹통 라디오 채널을 애타게 돌려대던 순간들을. 밀려오는 탱크의 굉음에 쫓기며 구원의 손길을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마지막 날 신새벽의 애끓는 절규를…… 그리고 끝끝내 어느 누구도 그 도시를 위해 달려와주지 않은 채, 언제나처럼 밝아오던 그 눈부신 27일의 아침을.
구원의 손길은 끝내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그렇게 그 도시는 소리없이 진압되었으며, 그 도시 사람들에겐 오래도록 폭도의 누명이 씌워졌다. 그리고 이젠 많은 것들이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학살극의 주역인 두 전직 대통령은 옥에 갇혀 있고,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바뀌어졌으며, 말끔히 단장된 망월동 묘역엔 웅장한 추모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모든 것은 마무리된 것인가. 진정 지금은 그 비극적인 사건이 영원히 역사의 장으로 철해져도 무방할 때인가. 남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가. 아니 무엇보다, 아직도 강기슭을 서성이고 있는 그 도시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안했다’는 한마디 대신, ‘화해’니 ‘용서’니 ‘역사의 장에 맡기자’느니 하는 말들을 이렇듯 쉽사리 강요해도 좋을 만큼 이 시대는, 그리고 우리들은 정말 떳떳한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릴 만한 권리도 자격도 실상 내겐 없다. 고백건대, 그 열흘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몇 개의 돌멩이를 던졌을 뿐, 개처럼 쫓겨다니거나, 겁에 질려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했거나, 마지막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기만 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나는 5월을 생각할 때마다 내내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짓눌려야 했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화해’도 ‘용서’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난 언제부턴가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쩌다가 보니 작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최소한 그것만으로도 내가 건너온 그 강에 대하여, 그 뜨거운 불의 기억에 대하여 동시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 소설은 애초엔 전편 격인 『붉은 산, 흰 새』의 연장선상에서 구상되었던 것이다. 『붉은 산……』이 『문학과사회』에 처음 연재된 것이 1988년 가을이니, 그것까지 포함하면 이 소설에만 꼬박 10년을 매달려온 셈이다.
처음엔 둘을 함께 묶을까도 생각했으나, 어차피 소재 자체도 다르고 또 다루고 있는 시간대와 무대 공간이 다른 까닭에, 각기 독립된 작품으로 펴내기로 했다. 『붉은 산……』이 내 고향인 전남 완도군 평일도에서 1977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토대로 6·25와 분단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다면, 『봄날』은 1980년 5월 16일부터 27일까지의 한정된 시간을 통해 온전히 ‘5·18 광주 민중 항쟁’ 전기간 동안을 다루고 있다.
그런 사정 때문에, 『붉은 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 ‘한씨 일가’의 두 인물(원구, 무석)은 『봄날』에 다시 등장한다. 1권 초반부에 그들의 이야기가 약간 다루어지는데, 이들의 가족사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는 이미 나온 『붉은 산……』을 읽으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읽지 않았다고 해도 『봄날』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다. 전자가 6·25 세대의 이야기임에 반해, 『봄날』은 전후 세대인 세 아들(무석, 명치, 명기)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또 사실상 이들 세 인물은 스토리라인의 한 중심축을 이루고는 있으나 작품의 전체적인 구조상 앞선 『붉은 산……』과는 거의 연관이 없는 까닭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실제 벌어진 당시의 모든 상황과 정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실상 열흘이라는 기간이 산술상으로는 짧은 시간이지만, 5·18의 경우는 단순한 시간 개념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특수성을 가진다. 한 도시 전역에 걸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이 동시에, 끊임없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상황 안에는 그야말로 서로 다른 수백 수천 가지의 사건과 무대와 장면, 그리고 수만 수십만 가지의 서로 다른 체험과 반응과 해석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가히 거대한 폭포처럼 급격하고 복잡 다양하게 분출되는 그 같은 흐름들을 불과 몇 권의 소설로 충분히 담아낸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나는 그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되, 세부적인 구성에 있어서는 보다 핵심을 이루는 몇몇 중요한 사건과 사실들을 중심 기둥으로 삼아 소설을 전개시키고자 했다. 역사적인 실재 사건을 소설로 다루는 데는 작가의 상상력이란 필수적이면서 또한 위험 부담이 따른다. 사실과 상상력-그 둘 사이에서, 적어도 이번 소설에 관한 한, 나는 최대한 사실성에 의지하려 했다.
그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담이나 증언, 이미 발표된 자료들을 충분히 참고했다. 물론 내 자신의 체험 역시 유용했다. 특히 이 분야에선 기념비적이라고 할 2만 5천여 매의 방대한 자료집인 『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한국현대사사료연구회 편)에 수록된 5백 명의 증언록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 같은 자료들간에는 필연적으로 각기 어느 정도의 편차가 드러나게 마련인데, 나로서는 신중한 검토 과정을 거쳐 나름대로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그것들을 작품 속에 재구성하려고 노력했다.
또 실제 사건 발생 시각에서부터 당시의 시가지 풍경, 건물의 위치, 도로와 골목, 시민들의 분위기 등등에 이르기까지 가급적 사실 그대로 재현하고자 애썼다. 이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어떤 공간이나 상황에 대해 더러 지나치리만큼 세세하고 지루하게 묘사한 부분이 적지 않을 터인데, 그것은 당시의 시간적·공간적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욕심 때문이다. 물론 그 욕심이 때로는 소설적인 긴장감을 다소 이완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로서는 이것이 단지 소설로서만이 아니라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하나의 기록물로서도 남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작품을 써왔던 것이다.
이 소설에 매달려온 지난 10년 동안 몸과 마음이 꽤나 힘들었다. 이젠 세인의 관심도 흥미도 사라져가고 있는 문제를 고집스레 붙들고 집착하는 내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주변으로부터 충고 겸 위로도 많이 받았다. ‘아직도 5월이냐. 어서 그걸 끝내고 새롭게 시작해야지 않겠느냐.’ 그들 대부분은 세상이 어찌 변해가는지도 모르고 답답하게 그러고만 있느냐는 투였다. 여기에만 매달리느라 작품 발표가 뜸하자(사실 이 소설 중 5천 5백 매 분량은 순전히 미발표 원고이다), 이젠 저 친구도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된 게 아닌가라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럴 때면, 혹시 나만 혼자 이렇게 미련스레 동굴 속에 처박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과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그때마다 5·18 당시의 사진들을 벽에 가득히 붙여놓고 이를 악물어보기도 하고, 책꽂이 절반을 채울 분량의 자료들을 뒤적여가다가 나도 모르게 울분에 차올라 혼자 책상에 앉아 컥컥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았다.
당시의 상황을 재현해내는 작업 자체가 참으로 고통스런 반복 체험에 다름아니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내내 5월 그 열흘의 시간을 수없이 다시 체험해야만 했고, 수많은 원혼들과 함께 잠들고 먹고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가끔은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몰라보게 피폐되어가는 듯한 내 자신을 깨닫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고통스런 기억의 반복 체험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소모시키는 것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솔직히 이젠 너무나 지쳤다. 내게 남은 마지막 힘까지 다 쏟고난 심정이다. 그리고 두렵다. 누구보다 광주 시민들의 눈이 두렵다. 이 소설이 행여 5월을 온몸으로 통과해온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그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
- 1997년 11월, 임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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