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2017년 07월 31일 출간
국내도서 : 2017년 06월 23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15.09MB)
- ISBN 9791186036365
- 쪽수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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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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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산업재해와 직업병 사례들은 어느 의사의 회고로만 끝나지 않는다.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던 부실한 관리감독, 아픈 사람을 방치한 구멍난 제도 등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아픈 노동자들의 몸과 작업 현장을 보며 이런 사실들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러한 의사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에 관한 생생한 고발이자 건강권과 생명권을 수호하려는 실천이 된다.
1장 - 산업재해 혹은 노동권을 뒤흔든 일곱 개의 장면
제일화학의 기억: 끝을 알 수 없는 죽음의 먼지 석면
터널 끝 어둠으로부터 진폐병동까지: 석탄 광부 이야기
마음을 병들게 한 청구성심병원의 일터괴롭힘
간을 망가뜨린 독성물질, 죽음을 막지 못한 건강검진
도시철도 기관사의 정신질환도 직업병입니다
‘골병’의 현장을 바꾼 두원정공 노동자들
아픈 노동자 대우자동차 이상관, 죽음으로 항변하다
2장 - 오늘, 우리시대의 산업재해: 죽음의 공장, ‘관계자 외 출입금지’
열사병, 그리고 저열한 제도에 쓰러진 조선소의 청년
숨겨진 산업재해들, 위험을 방치하고 생명을 무시한 범죄
작업중지권: 얼마나 위험할 때 일을 멈춰도 될까?
건강진단의 모순: 예방하려다 배제되는 불편한 진실
산재노협 활동가 남현섭의 삶과 죽음
3장 - 소리 없는 살인자, 직업병: 당신은 고장 난 쓰레기가 아닙니다
위험한 첨단전자산업, 삼성반도체 피해자들과의 10년
돌먼지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유산과 기형아 출산
조리급식 노동자의 골병이 말하는 것
영혼까지 팝니다: 감정노동의 맨 얼굴
과로사와 과로 자살: 열심히 일한 당신, 죽는다
우울한 사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노동자
4장 - 안전의 외주화: 불안정노동자의 불안전 노동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수은중독
태국 노동자 집단 앉은뱅이병을 일으킨 노말헥산
메탄올 중독사건: 법의 사각지대에서 시력을 잃은 파견노동자들
현장실습이라 불리는 어린 노동자 착취의 굴레
에필로그: 굴뚝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
나는 여전히 환경적으로 석면에 노출된 경우에도 석면 관련 질환이 생긴다는 사실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다. 즉, 공장 밖으로 석면이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올 것이며 이게 정말 일반인에게 위험할 정도였는지 장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 연구 결과가 우연의 일치는 아닐까? 정말 일반인에게까지 문제가 될 정도라면 석면을 직접 취급한 노동자들의 피해는 그보다 훨씬 클 텐데도 그때까지 석면 취급 노동자에게 직업병이 대량 발생했다는 소식이 없던 터였다. (...) 그러던 중 뿔뿔이 흩어져 지내던 제일화학 퇴직자들이 판결 소식과 뉴스를 듣고 모이면서, 2007년 12월 28일에 석면피해자모임 1차 준비회의가 열렸다. 그날 참석한 노동자 30명 중 22명이 폐 관련 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모임에 참석한 나는 전문가로서 심각한 자괴감을 느꼈다. 석면 관련 질환을 앓고 있는 노동자가 별로 없던 것이 아니라, 전문가를 포함한 우리 사회가 이를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21-22p
우리나라 산업보건, 산업의학 1세대인 고 조규상 선생이 1970년대 강원지역의 진폐 병원을 방문했을 때, 한 진폐 환자가 “이 병이 내 잘못이 아니라 일해서 생긴 거라고, 일 때문이라는 걸 밝혀줘서 정말 고맙다”며 화랑담배 2갑을 손에 꼭 쥐여줬다고 한다. 선생은 그 일을 잊지 못하고 “평생 산업보건 일을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이 했던 일에서 이게 잘못됐던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은 세상과 사회의 ‘고맙고 미안합니다’라는 인사다. 탄광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조사하고,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인사하는 법을 배웠지만, 아직도 우리가 배운 것을 다 돌려주지 못하고 있다. 43p
이 노동자는 안타깝게도 건강진단의 조치에 따라 계속 일했고 몸은 점점 더 나빠졌다. 복수가 차서 배가 불러오고 황달로 눈이 노랗게 되자 회사 관계자와 함께 4월 7일 다른 병원을 방문했다. 이때의 간 기능 검사 결과는 전보다 훨씬 더 나빴다. 그런데도 계속 작업을 했고 4월 11일 다시 받은 특수건강진단에서 간 기능은 정상치의 수십 배를 넘을 정도로 심각하게 악화된 상황이었다. DMF의 노출 수준을 반영하는 소변중 대사물질 검사 결과는 허용기준의 10배 이상이었다. 결국, 4월 17일 입원치료를 시작했지만 망가진 간은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4월 29일 사망하고 만다. 몇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 제때 배치전건강진단을 받고 또 제때에 첫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64-65p
갑자기 선로에 뛰어내리는 사람을 치지 않고 제동기를 밟아 열차를 멈추기란 불가능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은 대부분 플랫폼의 앞쪽에서 뛰어내리기 때문에 열차의 속도가 상당히 빠른 상태에서 열차와 부딪히게 된다. 기관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죽음을 막을 수 없다. 그런데도 기관사는 이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죽였다’는 감정을 가진다.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 그것도 자신이 운전한 열차에 치여 죽은 사람을 목격하는 것은 엄청난 충격(트라우마)이다. 74-75p
그가 쓰러진 날은 8월. 한낮의 무더운 날씨는 작업장의 열기를 더했을 것이다. 열사병의 가능성은 높았다. 심근경색을 의심했던 검사 결과와 더불어 부검 의사가 급성 간부전의 가능성을 제시할 정도로 높았던 간효소 수치의 상승! 열사병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소견이다. (...) 고인의 죽음이 개인적 소인 때문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 조건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고용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밝히는 과정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조선업, 그것도 하청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상의 위험 요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꿔내지는 못하여 스물셋의 꽃다운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막지 못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에게는 그랬다. 109-112p
“사람이 지게차에 부딪혀 끌려갔다, 지금 빨리 오셔야 할 것 같다”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응급 상황이다. 그러나 7분 만에 공장 입구에 거의 도착한 구조대는 신고 취소 전화를 받게 된다. 회사에선 “별일 아니다. 직원 한 명이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니 우리가 처리하겠다. 돌아가도 된다”고 했다. (...) 그런데 회사 직원이 공장 앞에서 119 구조대원들에게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사고를 당한 직원은 지게차의 뒷부분에 치여 바닥에 쓰러졌고, 그 후에도 지게차 사이에 끼인 채 5미터를 끌려갔다. 단순 찰과상이 아니었다. (...) 산재 노동자는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던 중 ‘과다출혈로 인한 저혈성 쇼크’로 16시 45분에 사망했다. 공장 바닥과 도로에서 골든타임이 사라지던 사이, 공장 안에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게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117-119p
“아픈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 일 때문입니다.”
직업과 질병의 관계를 파헤치는 탐정,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의 이야기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넘어 일하는 사람의 건강을 관리하는 직업의학과 유해한 환경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고 치료하는 환경의학을 직업환경의학이라 한다. 따라서 직업환경의학 의사는 환자의 직업과 작업환경에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들은 가까운 곳에서 노동과정과 일터 환경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일하는 사람이 왜 아픈지, 일하는 곳의 유해요인은 무엇인지,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연구하고 조언한다. 그래서 이들이 환자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직접 현장을 조사하고, 아픈 원인을 진단하는 과정은 마치 노련한 탐정이 끈질긴 수사로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과도 같다. 직업환경의학 의사를 찾아오는 환자의 사연이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직업병 사건들이 워낙 안타깝고 허망할 정도로 심각하기 때문에 이를 파헤치는 것은 때로 의사들에게 무겁고 고통스럽다. 이 책은 산업재해와 직업성 질환을 담당하며 이의 배경을 추적한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직접 그 과정과 소회를 낱낱이 밝힌 최초의 기록이다.
직업성 질환, 산업재해 발생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이 의사들은 “굴뚝 속으로 들어가 질병을 번역하는 수고로운 번역가들”(전주희)이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환자의 증상, 진단명, 질환의 치료뿐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다치고 병들게 한 총체적인 환경, 즉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환경과 과정을 필연적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산업재해와 직업병 사례들은 어느 의사의 회고로만 끝나지 않는다. 유해물질에 노출될 수밖에 없던 부실한 관리감독이 있었고, 아픈 사람을 방치한 구멍난 제도가 있었다. 사람의 생명보다 비용 절감과 이윤을 중시했고, 노동자를 쥐어짜는 시스템과 노조 탄압에 다수가 무관심했다.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은 아픈 노동자들의 몸과 작업 현장을 보며 이런 사실들을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이 의사들의 증언은 우리 사회의 노동현실에 관한 생생한 고발이자 건강권과 생명권을 수호하려는 실천이 된다.
공장의 유해물질과 근골격계 질환, 과로와 스트레스, 백혈병…
병들고 다치는 한국사회 노동현장에 관한 생생한 다큐멘터리
1장 ‘산업재해 혹은 노동권을 뒤흔든 일곱 개의 장면’에선 산업재해와 노동안전보건운동의 역사에서 회자되는 사건들을 다뤘다. 특히 1990년 제일화학 방직공장의 ‘죽음의 먼지, 석면’ 보도에 주목해 2006년 공장 주변 주민들을 수소문하고, 그들 대부분이 폐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회에 드러낸 것은 2009년 석면 생산 금지까지 이끌어낸 중요한 사례다. 이는 환경성 석면질환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자괴감을 넘어,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석면의 유해성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린 전문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외에도 진폐증을 앓는 광부, 가학적 노무관리에 의한 최초의 집단 정신질환 사례, 유해 화학물질 중독, 기관사 공황장애와 자살, 근골격계 질환의 산재신청 사례 등 이후의 직업병 논의와 산재 인정 여부에 중요 분기가 된 사례를 가려 실었다. 참담한 역사가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똑바로 지적하며 사회의 역할을 주문하는 서술도 새겨 읽어야 할 부분이다.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현재의 산업재해를 다룬 2장의 내용은 뼈아프다. 한여름 조선소에서 쓰러진 20대 청년의 죽음은 심근경색 때문이 아니라 열사병으로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구토물이 기도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공장 안에서 지게차에 치인 노동자는 회사가 이를 숨기고 119 구급차를 돌려보낸 탓에 빠른 조치를 받지 못하고 숨졌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수 있는 급박한 위험’ 상황에서 ‘작업중지권’을 쓸 수 없어 유해물질을 알지 못하고 계속 일하거나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다 추락하고 만다. 산업재해 추방 운동을 하던 활동가가 파쇄기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 사례도 변화가 더딘 노동환경의 굴레를 보여주는 듯하다. 의사가 들어간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공장 안에선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필사의 노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고인의 작업환경을 되짚어 보며 ‘죽음 이후’에 대처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은 ‘일 때문에 죽었다’는 결론을 끌어내기까지 현장 점검과 분석, 연구 등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노동자를 추모한다.
“한여름의 열기를 고스란히 품은 강철 구조물에 열을 또 가하고, 온갖 거추장스러운 보호구와 장비를 걸친 채로 이십대 장정의 몸을 쪼그리고 구부리고 비틀어야만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인의 작업현장을 되짚어 보고 건조 중인 선체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마치 지옥도에서 벗어나는 길인 듯했다. (...) 다행히 산재로 인정되었다.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먼저 젊은 조선하청 노동자의 외로운 죽음이 업무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입증한 것이 중요한 의미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아주 작은 위안이라도 될 것이다. 한편으로 직업환경의학 의사로서의 보람을 일깨운 일이기도 하다.”(류현철)
굴뚝 위에 함께 서서 노동권과 생명권을 직시하는 의사들,
병든 사회의 민낯을 고발하다
‘소리 없는 살인자, 직업병’을 다룬 3장에선 작업장 내 유해물질뿐만 아니라 ‘골병’을 유발하는 노동강도, 스트레스와 자살로 이어지는 심리적 질환 사례들을 서술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10년 전의 최초 의문으로부터 고 황유미 씨의 산재 인정을 받기까지 무려 10년 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발병 문제를 제기한 의사이자 활동가의 기록도 담겼다. 이 책에 드러난 여러 직업병/직업성질환의 원인이 단일한 유해물질인 경우도 있지만 복합적인 경우도 많아 이를 다각도로 파헤치는 의사들의 노력이 특히 주목된다. 간호사들이 연쇄적으로 유산과 기형아 출산을 겪으며 ‘제주의료원 괴담’으로 불린 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의사는 항암제 흡입이나 전리방사선 노출뿐 아니라 장시간 노동, 스트레스까지 다양한 원인을 찾고 있다. “분명한 ‘주범’을 찾을 순 없지만, 시간, 장소, 사람의 공통점을 가진 역학관계에서 유산과 선천성 기형이 증가했으니 유력한 ‘공범’들이 있다고 본 것이다.”(김인아) 조리급식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을 다룬 부분에선 이들의 노동이 차분한 요리가 아니라 중량물 운반과 반복 작업, 끓는 기름이 튀는 건설현장과 같다고 묘사해 우리가 외면했던 노동의 수고로움까지 공감하게 한다.
노동자들이 겪는 심리적 문제와 정신질환도 여러 꼭지에서 다뤄진다. 이제는 일상의 용어가 된 ‘감정노동’의 문제를 비롯해 업무스트레스와 우울감을 야기하는 혹독한 일터 환경은 노동자를 자살이나 과로사로 내몰기도 한다. 가히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회’라 할 정도로 직업적 요인에 따른 심리적 문제의 심각성이 곳곳에 나타난다. 의사들은 그들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는 환경을 아쉬워하며 우리의 ‘너무 힘든 시간’을 지적하고 있다. “통신업체에서 일하던 청소년 노동자의 자살은 이제 막 사회 진출을 준비하는 청소년이 경험하기엔 너무 힘든 감정노동이 원인이 되었다. 파업투쟁 중이던 노동자의 자살, 해고 위협에 놓인 노동자의 자살, 월 300시간이 넘는 노동을 하며 며칠 동안 퇴근하지 못하고 일했던 게임 개발업체 노동자의 자살. 이들의 유서엔 죽지 않고는 지옥처럼 힘든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절망이 담겼다. 노동자에게 이런 삶이 계속되는 한 죽음의 행렬을 막으려는 노력도 공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김형렬)
4장에는 용역?파견노동자, 이주노동자, 청소년노동자와 같은 불안정노동자들의 직업병 사례가 실렸다. 안전까지 외주화된 가장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전구 생산설비를 철거하다 수은에 중독되고, 노트북 컴퓨터를 닦다 앉은뱅이병에 걸리고, 휴대전화 부품을 만들다 눈이 멀고, 현장실습 나가 취업한 직장에서 자살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최근의 일이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라는 점에서 탄식을 자아낸다. 안전과 인권이 무시되는 현장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의 길을 찾고 있는 이들 약자에게 더 가혹한 구조를 보는 의사들의 시선은 날카롭다. “기본적인 인권 감수성이 없어도 너무 없다. 개인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른 사업장에 비해 잘해주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이주노동자의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끔찍한 수준이 바로 우리 사회의 평균이다.“(이혜은)
건강하고 행복한 일터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고장 난 쓰레기’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권리 찾기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안전 수칙을 준수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것, 노동강도를 낮추는 것, 아프면 쉬거나 치료받는 것이다. 간단한 해법이 쉬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도 쉽다. 사람보다 돈이 중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산업재해와 직업병은 돈보다 안전과 생명을 중히 여겼다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에탄올을 사용한다고 감독기관에 신고하고 실제론 노동자들에게 메탄올을 취급하게 한 이유는 메탄올이 더 싸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한 파견노동자들은 메탄올 때문에 실명했다. 하청의 재하청까지 내려오는 과정에서 철거용역 노동자들은 공장 안 물질이 뭔지도 모른 채 일하다 수은에 중독됐다. 1인 승무 기관사들은 2인 승무 체계에서보다 공황장애 비율이 높고 훨씬 많이 자살한다. 삼성반도체의 방진복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제품을 위한 것이었다. 비정규직과 현장실습생들은 가혹한 작업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더불어 인력 부족에 따른 노동강도 강화와 장시간 노동,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는 일터 등은 모두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이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는 ‘주적’으로 지목하는 요인들이다.
이 책의 사례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산업안전보건 체계와 관리감독의 허점도 드러난다. 독성간염을 일으키는 DMF(디메틸포름아미드)에 중독된 노동자는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는데도 계속 일하다 사망했다. “몇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 제때 배치전건강진단을 받고 또 제때에 첫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처음 간 기능 저하가 확인된 때에 작업을 중단했다면, 하다못해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라도 일을 그만뒀더라면 결과는 어땠을까.”(이혜은) 이를 계기로 특수건강진단기관 일제점검을 벌인 결과 120곳 중 119곳에서 법 위반사항이 발견됐다. 이는 의사들에게 우리나라 직업환경의학계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로 여겨지기도 한다.
산재 요양 도중 근로복지공단에 의해 치료 중단 요구를 받자 비관해 자살한 노동자도 있었다. 산업재해 인정 여부는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절실한 투쟁중 하나다. 처벌 수준이 미약해 기업의 산업재해 은폐 시도는 계속 벌어지고, 어느 기업에선 산재보험료를 더 내지 않으려고 공장 안에서 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사람을 담요로 덮어두고 숨겼다. 시민사회는 이런 ‘범죄’를 막기 위해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특정한 일의 적임자를 찾기 위한 취지의 ‘배치전건강진단’이 현실에선 오히려 차별과 배제를 낳기도 한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노동자 건강진단은 어떤 사람을 골라서 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을 골라서 해야 하는가의 문제”(류현철)라고 지적한다. 법에 명시돼 있지만 사용이 어려운 ‘작업중지권’도 있다.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라는 모호한 조건은 차치하더라도, 유해물질을 다루거나 아파트 외벽에 매달려야 하는 노동자들이 일을 거부하고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실에서 작업중지권은 자꾸 사문화된 권리가 된다. 작업중지권을 실제로 쓸 수 있고, 써 본 적이 있고, 특히나 이를 통해 사고를 예방한 경험이 있는 노동자는 줄고 있다.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보건 교육에서도 작업중지권은 점차 다루지 않는 주제가 된다. 이러면서 작업을 거부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해 우리의 ‘합리적’인 판단은 자꾸만 무뎌진다.”(최민)
이처럼 직업환경의학 의사들의 진단은 환자의 ‘몸’에만 머물지 않았다. 병든 사회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폭로했다. 에필로그인 ‘굴뚝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전주희)에서 저자는 환자가 된 노동자는 생산 능력을 잃어버린 ‘산업 폐기물’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 시민으로 보았다. “직업병이란 자본의 기계 시스템과 인간 노동의 결합 능력이 약화되었거나 잘못 관계 맺었다는 신호”이므로 고통을 공유하고 이를 치료하면서 사회적 권리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만나는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노동자와의 연결망이 된다. 스스로 ‘노동안전보건활동가’가 되고자 하는 이 의사들은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일을 통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일하는 사람이 온전한 주체가 되길 바라고 있다.
[책 속으로 추가]
아마 수은중독에 관한 정보 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누구나 괴이하게 생각했을 것 같다. 내가 환자들에게서 들은 증상은 ‘미친모자장이병’에서 나타난 증상과 비슷했다. 수면장애는 공통적인 증상이었고 불안장애, 감정 기복도 나타났다. 근력 저하나 피로와 같은 비특이적 증상에 관해 그들의 고통을 단정할 수 있는 적절한 진단명을 구하기 어려웠다. 늘 심한 감기몸살을 앓는 느낌, 어느 순간 7,80대 노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손발에 열감과 냉감이 교차하고 살갗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하며 세상의 모든 불편감이 몸 안에 가득 찬 느낌. 그것이 수은중독이었다. (...) 증상에 약을 처방하고 불안 해소를 위해 더 많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환자들은 수은중독에 따른 고통과 불편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감내해야 했다. 255p
작가정보
저자(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저자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기획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사람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2003년 출범했다.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것을 넘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일터를 목표로 노동자의 건강권과 인권을 이야기한다. 현장 참여와 연구, 일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교육, 연대 활동을 실천하며 노동안전보건운동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www.kilsh.or.kr
저자 : 강동묵
저자 강동묵은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
저자 : 공유정옥
저자 공유정옥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경기동부근로자건강센터에서 근무하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 중. 2010년 미국 공중보건학회 국제안전보건상 국제부문 수상. 지은 책으로 《곁에 서다》(공저), 번역한 책으로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공역)가 있다.
저자 : 김대호
저자 김대호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근로복지공단 직업성폐질환연구소 연구위원. 직업성 폐질환을 연구하고 직업성 폐질환의 업무관련성을 평가한다.
저자 : 김영기
저자 김영기는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직업환경의학교실 조교수.
저자(글) 공유정옥
작가의 말
1988년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 군은 당시 15세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직업병을 사회 문제로 삼는 불씨가 되었고 본격적인 산재추방, 조직적인 노동자 건강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만일 소년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묻는 의사가 진작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니, 3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까요? 이 책은 이런 질문을 하는 의사들이 썼습니다. 이들이 만났던 노동자 사연을 보면 “지금도 이런 일이 있어?”라고 되물을 법한 일들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굴뚝에 함께 서 있는 이 의사들은 마냥 슬퍼하고 좌절하지만은 않습니다. 이들은 의사인 동시에 스스로 ‘노동안전보건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이 이전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감히 이들의 무던한 노력 덕분이라 말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자”는 절박한 요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일을 하며 아프지 않고 죽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행복하고 더욱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삶보다 이윤이 우선’인 일은 사라져야 합니다. 일의 과정과 결과에서 정작 일하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구조와 생각은 변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일의 진정한 주체가 될 때 일터와 사회의 건강은 비로소 온전할 것입니다.
- 김재광(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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