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의 강물을 마시다
2015년 08월 07일 출간
종이책 : 2015년 03월 20일 출간
- eBook 상품 정보
- 파일 정보 ePUB (1.64MB)
- ISBN 9791185687261
- 쪽수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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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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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에필로그
“정윤서. 안에 있으면 문 열어.”
그녀는 경계심을 놓지 않고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어요?”
“올 만한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열어.”
어제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대체 무슨 볼일이기에 저러는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똑바로 태훈의 눈이 부딪쳐 왔다.
“불까지 꺼 놓고. 뭐 하는 거야, 지금.”
윤서는 남자의 말을 흘려듣고 화실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어둠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등 스위치를 켰다.
순식간에 실내가 밝아지고 어둠이 물러갔다. 그녀는 조금 여유를 찾고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화실의 문을 닫고 그녀를 따라 들어온 남자는 이곳에 처음 와 본 듯 주변을 재빨리 훑었다. 아주 민첩하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소파 위의 담요와 베개에 한참을 머물렀다.
윤서는 그의 눈을 피한 채 무심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남자는 말이 없었다. 밤이라서 유독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상하게 윤서의 마음속 불안정함이 커졌다. 아랫입술을 지근지근 깨물던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는 남자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순간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
그의 눈이 몇 시간 전 그녀가 그린 그림에 가 있었다. 마치 치부를 들켜 버린 듯한 기분에 윤서는 성큼성큼 걸어가 이젤을 등지고 섰다. 그와의 거리가 불과 1미터도 되지 않았다.
“그림은 가슴으로 느끼는 거라고 했던가? 글쎄,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너무 선정적이라서 몸이 먼저 반응을 해 버리는군.”
그녀를 향해 돌아선 그의 눈빛이 묘하게 농밀했다. 윤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당황과 분노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고,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무언가가 그에게 까발려진 것 같은 불쾌감이 윤서의 이성을 눌렀다.
“여기에 왜 오셨는지 몰라도 이만 꺼져 주시죠.”
“왜? 또 보이고 싶지 않은 걸 들켰나 보지?”
그가 농담처럼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의 두 눈이 한순간 날카롭게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녀가 예술가들이 흔히 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비웃으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광분하는 작가들 말이다.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그 입 좀 다물어 주시죠.”
“다물어 주지. 대신.”
그가 굳어 있는 윤서에게 천천히 손을 펴 내밀었다.
“열쇠.”
열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현관은 도어록이었기에 열쇠가 따로 필요 없었다.
“열쇠라니요?”
“왼쪽 끝 방과 서재 열쇠.”
그제야 윤서는 소희가 맡겼던 열쇠꾸러미를 기억해 냈다. 그 중에는 그녀가 들어가선 안 될 왼쪽 집의 열쇠가 두세 개쯤 있었다. 하지만 그 열쇠는…….
윤서는 당황스러운 기운을 숨기지 못하고 그와 눈을 맞추었다.
“잃어버렸나?”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가 체념하듯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등을 돌렸다.
“따라와.”
그녀는 쿨한 척하며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자신만만하게 뛰쳐나왔던 집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려니 자존심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별수없는 이 상황을 어찌 할 도리가 없어 함께 걸음을 떼었다.
윤서는 하얀 도화지 위에 빠르게 크로키를 그렸다.
이내 조금씩 그림의 형체가 드러났다.
그림 안에선 남녀가 서로를 갈구하듯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친밀한 사이만 할 수 있는 행위.
저런 행위를 두고 사랑이라 믿었던 적이 있다.
화상처럼 쓰라린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는 한 남자를 떠올리고 만다.
“내 그림을 외설로 취급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예술적인 그림도 때론 육체적인 자극을 줄 수 있지.”
그가 그런 존재였다.
예술적이면서도 외설적인.
탐닉하고 싶지만 위험한.
툭, 상념을 깨치듯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 야릇한 열기에 휩싸인 그녀가 그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줘요, 제발.”
그의 안에서 피어나는 달콤한 향기,
심장의 낙인을 잊게 해 줄 망각의 미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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