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와 춤을
2018년 09월 21일 출간
국내도서 : 2018년 09월 1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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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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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노인의 내밀한 자화상
모든 사람 너울을 쓴 자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며(가령 달이나 별을 따거나 꽃을 꺾으려고) 순례하듯 길을 나서는 것은 결국 자기 참모습을 찾아내려는 것 아닐까.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그와 나는 사실은 한 사람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한쪽은 허깨비이거나 그림자이고 다른 한쪽은 참모습이 아닐까. 우리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찾아내라고 신이 대면하게 해준 것 아닐까.
―11쪽
“제 도씨는 저보다 늘 한참 젊게, 십 년 이십 년은 더 젊게 사는 놈입니더. 철없던 젊은 시절의 저를 극성스럽게 본떠서 행동하지예. 보라색의 굽 높은 중절모를 쓰고, 오래 입어서 소매 끝이 닳은 진한 벽돌색의 양복저고리에 검정 바지를 입고, 부드러운 밤색 구두를 신는 기라예. 살찐 통마늘 같은 코와 쌍꺼풀진 눈매에 눈썹이 넓고, 자잘하고 눌눌한 옥니가 드문드문하고, 반곱슬머리인 도씨의 모습은 제 눈에는 보이지만 저 이외에 어떤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존재입니더. 모습만 투명한 것이 아니고, 목소리도 하얗게 바래고 체취도 없어서 제 아내도 살았을 적에 이놈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어예. 이놈은 길이 잘 든 애완동물처럼 저를 따르는데, 제가 이놈과 말을 주고받으면 아내는 혼자 뭔 말을 그렇게 중얼중얼해쌓느냐고 애교 어린 볼멘소리를 하곤 했지예.”
―27쪽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라야 한다”는 고재종 시인의 시 한 대목을 떠올리고, 이 여자 앞에서는 이 여자의 권력에 따라주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동시에 암소의 고삐를 잡고 풀을 뜯기는 머리털 허연 노인으로 하여금 위태로운 절벽 가장자리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바치며 「헌화가獻花歌」를 읊게 한 『삼국유사』 속의 귀부인을 생각했다. 가마에 앉아 있는 지체 높은 여인의 자태가 얼마나 고혹적이었으면 노인이 소의 고삐를 놓고 위험을 무릅쓰며 아슬아슬한 절벽에 피어 있는 꽃을 꺾어다 바쳤을까. 귀부인을 가마에 태우고 온 여러 젊은이들은 다 절벽이 위태로워 나서려 하지 않는데 노인이 그리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절벽에 빨간 철쭉꽃들이 난만한 봄에 그 노인은 봄꽃(귀부인)의 고혹적인 권력을 따른 것이고, 그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사랑의 꽃이다.
―115~116쪽
나는 그가 노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회老獪는 늙어서 교활해진 것을 말한다. 교활한 노인은 추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그것을 열심히 합리화하며 산다. 노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탐욕의 삶에서 벗어나(해탈하여) 고고한 사유와 명상과 도락의 삶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영육에 보석 같은 사리가 앙금처럼 켜켜이 가라앉도록 살아야 하는 것인데, 마음 가는 대로 자유자재의 삶을 살아도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다는 공자의 말은 바람처럼 걸림 없는 해탈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깨끗한 모습으로 역사와 자연의 섭리 속으로 사라질 준비를 참하게 해야 하는 것이 늙은이의 당면 과제인 것인데 말이다. 도덕 교과서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스스로가 한심스러워지면서도 나는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호랑이가 고양이를 만나면 조그마하고 쩨쩨한 놈이 건방지게 임금 자리에 있는 자신을 닮았다고 갈가리 찢어 죽인다는 말을 나는 오래전에 들은 바 있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반겼고 여행팀에 합류한 것을 운명적이라고 기뻐했지만 나는 싫은 정이 앞섰다. 나를 닮은 그가 내 속을 속속들이 읽고 많은 것을 훔쳐다가 사용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스러워지곤 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나의 약점들이다. 코를 찡긋거린다든지, 말을 하다가 혀를 내둘러 마른 입술을 축인다든지, 어깨를 으쓱한다든지, 실없는 말을 해놓고 나서 건들바람처럼 웃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싫었다.
―215쪽
저는 가끔 절에 가는데 시줏돈 몇 푼을 미끼로 부처님과 스님을 낚고, 부처님과 스님은 해탈과 설법을 미끼로 저를 낚습니더. 기독 신앙이 독실한 친구가 있는데, 친구는 염봇돈 몇 푼과 십일조를 미끼로 신과 천국을 낚고, 사제는 신과 천국에 대한 설교를 미끼로 해서 친구로부터 염봇돈과 십일조를 낚습니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거래를 하고 삽니더. (…) 그런데 그 여자는 신이 저를 낚으려고 내민 미끼입니더. 아니, 신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그 여자를 낚아 올리기 위해 저를 그 여자 앞에 미끼로 내밀었는지도 모릅니더. 그러고 보면 신은 인간이 낚은 가장 편리하면서도 위대하고 성스러운 존재입니더. 그런데 신은 무얼 낚기 위해 저와 그 여자를 미끼로 활용하는 것일까, (…) 신에게 낚이는 것은 신의 세상으로 편입된다는 것입니더. (…) 사랑이라는 것도 하나의 거래입니더. 우리는 신이나 부처님의 미늘 없는 낚시에 낚여서 천국으로 한 발짝씩 걸어가고 있습니더.”
―265~266쪽
한국 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
한승원이 연륜의 에너지로 써내려간
삶과 문학에 대한 자전적 고백이자 문학적 결산
한국 문단의 거목이자 한국 작가들의 스승 한승원의 신작 장편소설 『도깨비와 춤을』이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됐다. 이 소설에는 “나는 살아 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다”를 화두로 5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쓰면서 인생을 성찰해온 여든 노작가의 삶과 문학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어 더욱 뜻깊다.
한승원은 『도깨비와 춤을』에 자신의 정체성을 나누어 가진 쌍둥이 분신을 두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똑같이 79세로, 장흥에 사는 프로 작가 한승원과 남해에 사는 아마추어 음유시인 한승원이 그들이다. 한승원은 ‘장흥의 한승원’을 통해 밝힌 것처럼 이 소설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공작새 수컷이 암컷들과 세상을 향해 꼬리와 날개를 활짝 펴서 찬란한 무지갯빛 어린 문양을 과시할 때 치부인 항문도 노출하듯이” 스스로를 결산하고 치부까지 고백하면서 ‘자기 참모습’을 찾는 문학적 여정에 나선다.
이 여정은 아직도 몸속에는 열일곱 소년의 피가 흐르지만 이제 노년에 이른 인간이 ‘노인은 죽음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죽음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인가?’에 답하기 위해 인생의 의미를 통찰하고, 삶과 죽음을 관조하며, 결국에는 죽음을 아름다운 생의 의지와 분투의 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장흥의 소설가 한승원과 그의 삶을 훔치는 남해의 음유시인 한승원,
도깨비가 두 여든 노인의 핏속에서 열일곱 소년의 뜨거운 피를 깨운다
작가 자신의 사회적 분신인 ‘장흥의 한승원’과 이름도 나이도 생일도 같은 ‘남해의 한승원’은 그가 발표한 소설, 시, 에세이, 칼럼 등을 모조리 섭렵하고, 특히 본인도 외우지 못하는 시를 외워 줄줄이 낭송하면서 그 삶의 패턴을 거울처럼 모방한다. 외모와 옷차림과 버릇은 물론 도깨비와 계약 동거를 하는 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면서 그 집을 ‘해산토굴’이라 명명한 점, 집 앞에 삼층 석탑을 세우고 가묘로 삼아 죽음을 가까이 둔 점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그들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남해의 한승원에게는 아내가 없고, 장흥의 한승원에게는 아내가 있다는 것이다.
‘도깨비’는 두 한승원에게 “광기의 화신”으로, 광기는 곧 “생명력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장흥의 한승원에게는 “자존심, 저항 의식, 보호 본능, 정체성”을, 아내가 먼저 죽어 절망과 고독 속에 홀로 남은 남해의 한승원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시간”을 일깨우면서 그들의 노화한 혈관에서 열일곱 소년의 뜨거운 피를 각성시킨다. ‘바다’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품어서 수많은 해산물로써 육지에 사는 것들을 치유하고 양생하는 화엄의 바다”로, 두 한승원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치유하고 안식하게 해주는 “구원의 원초적 시공” 혹은 “우주적인 자궁”이다. 바다에서 태어난 두 한승원은 그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날마다 해산海山/解産하며” “자유자재의 걸림 없는 산인散人”으로서의 삶을 꿈꾼다. 두 한승원에게 아내는 바다 같은 존재이자 탄생과 죽음을 관장하는 “곡신谷神”으로, 모성성과 여성성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해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않고 극복하는 방법은 죽음을 가까이 두고 친밀해져 거침없이 죽음을 사는 것인데, 남해의 한승원은 ‘도깨비’와 ‘바다’와 ‘아내’가 꼭짓점을 이루는 그 토대 중에서 아내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내를 추억하며 되찾으려는 남해 한승원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춤추는 신화적 상상력의 세계에서
나이듦에 뒤따르는 소외와 우울과 고독에 맞서며
죽음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노인의 내밀한 자화상
작가는 “노인은 건조하게 살다가 막판에 고려장이 되듯 어두운 곳에 유폐됐다가 폐기처분돼야 하고, 다만 죽음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여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남해 한승원의 도깨비는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 시간 동안 작가는 광기 어린 의지로 나이듦에 뒤따르는 소외와 우울과 고독에 맞서며 미완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지금의 삶을 즐기려 부단히 애쓴다.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것은 육체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에 휘둘리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서로를 거울처럼 되비추는 ‘남해의 한승원’과 ‘장흥의 한승원’은 두 사람이지만 둘 다 참모습을 지니고 ‘한승원’으로 수렴된다. 어쩌면 “남해의 한승원이 도깨비일 수 있다”고 작가가 말했지만, 사실 그들의 무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도깨비’는 ‘한승원’ 자신이기도 하다. 『도깨비와 춤을』은 시간의 불가항력적 흐름에 따라 죽음과 더욱 가까워진 인간이 결국에는 순응하더라捉그 순간까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아름답게 버티기 위해 분투하는 숭고한 이야기이다
작가정보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스승 김동리에게 문학을 배웠고,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목선」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고향인 장흥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들을 꾸준히 써오면서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한국불교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 유수의 문학상들을 수상했다. 중단편집으로 『목선』, 『아리랑 별곡』, 『누이와 늑대』, 『해변의 길손』, 『내 고향 남쪽 바다』, 『검은댕기두루미』, 『잠수거미』, 『희망 사진관』 등이, 장편소설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우리들의 돌탑』, 『시인의 잠』, 『동학제』, 『아버지를 위하여』, 『까마』, 『연꽃 바다』, 『해산 가는 길』, 『포구』, 『꿈』, 『사랑』, 『화사』, 『멍텅구리배』, 『물보라』, 『초의』, 『흑산도 하늘길』, 『원효』, 『키조개』, 『추사』, 『다산』, 『보리 닷 되』, 『피플 붓다』, 『항항포포』, 『겨울잠, 봄꿈』, 『사랑아, 피를 토하라』, 『사람의 맨발』, 『물에 잠긴 아버지』, 『달개비꽃 엄마』 등이, 산문집으로 『허무의 바다에 외로운 등불 하나』, 『키 작은 인간의 마을에서』, 『푸른 산 흰 구름』, 『바닷가 학교』, 『시방 여그가 그 꽃자리여』, 『이 세상을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차 한 잔의 깨달음』, 『강은 이야기하며 흐른다』 등이, 시집으로 『열애 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이별 연습하는 시간』 등이, 그리고 50년 문학 세계와 작가 신념을 농축한 『야만과 신화』와 『꽃과 바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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