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까지 걷기
2022년 06월 02일 출간
국내도서 : 2021년 11월 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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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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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에 소설 《울지 않기》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작가 리디 살베르가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살베르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홀로 하룻밤을 보내며 떠오르는 영감을 글로 써보라는 출판 기획자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미술관이라는 곳에는 너무 많은 경이로운 것들이 몰려 있어서 싫고, 실컷 멋진 작품들을 봤는데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추한 세상과 다시 부딪혀야 하는 그 급격한 변화가 싫고, 무엇보다도 미술관이 천박한 돈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과 한통속이면서도 우아한 척하는 것이 싫어서다.
그런저런 이유를 나열하며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미련이 남아 있다. 미술관에서 오롯이 마주할 작품이 바로 자신이 오랫동안 열정을 품어온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생 삶의 취약성과 덧없음을 그의 작품의 질료로 삼았던 화가이자 조각가, 자코메티.
살베르는 고민 끝에 〈걷는 사람〉과의 하룻밤을 수락하고 ‘피카소-자코메티’ 전이 열리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들어선다. 하지만 그 밤, 〈걷는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실패의 예술, 삶에 밀착한 예술을 실천한 자코메티의 예술을 사랑하는 리디 살베르의 세레나데.
옮긴이의 말 ...............212
그는 소멸 직전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계속 걷고, 용감하게 계속 걸으며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성큼성큼 걷기를 계속하고, 주춤거리지 않고, 잔유물들의 세계 속에서 쉬지 않고 걷는다.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온갖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는다. 걷기를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므로. 바람과 패배에 맞서 계속 걷는다. 자코메티처럼, 나처럼, 우리처럼. _ 18p
〈걷는 사람〉은 내 앞에 그대로 있었고, 나는 그걸 쳐다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며,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내가 그 작품을 너무도 좋아하고 내 삶과 깊이 결부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우리는 생각하도록 강요당할 때만 생각한다는 들뢰즈의 교훈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었다), 더없이 암울한 방식으로(밤이 시작될 때부터 내 기분은 이유 없이 극도로 암울해졌다) 예전에 내가 그 작품에 감탄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_ 85p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온전하게 개인적인 의견과 취향을 갖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취향을 판단하는 심판들, 찬사와 비난을 배분하는 자들이 암암리에 강요하는 문화적 질서를 등지는 것이 가능할까? _ 87p
이제 나는 자코메티가 대담 때 그토록 자주 말했던 그것(무능)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작업의 어려움을, 모델 속의 존재를 드러내는 어려움을, (…) 세상 속에서 그리고 죽음 앞에서 느끼는 지독한 고독을 표현하는 어려움을 그보다 더 잘 말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불만족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도 없었다. _ 108p
예술은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이 시도, 한 송이 꽃의 완벽성에 도달하려는 이 시도, 삶이 지속되는 동안 좇아 달리는 이 시도에 있다는 데 (동의한다). 도달해야 할 불가능을 인식해야 그것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1936년 내전 때 에스파냐의 절대자유주의자들이 취한 태도였다고 나는 자랑스레 혼잣말을 했다. _ 113p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 표현은 최종본까지 간직하게 될 것 같아. 그러나 나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한 문장이 지금은 정확하고 적합해 보여도 다음날 다시 읽어보면 거짓되고 평범하며 과장되거나 엉성해서 물컹한 크림 디저트 플랑처럼 허물어질 수 있다는 걸. _ 123p
마음으로 다가가 〈걷는 사람〉의 의미 가까이에 다가서는 데도 피카소 미술관에서 보낸 하룻밤이 아니라 여러 밤이, 여러 달이, 어쩌면 여러 해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_ 181p
예술의 용도 -용도라는 말이 딱 들어맞진 않았지만 -는 우리 안에만 있는 것도 우리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더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아마도 그것은 그 둘 사이에 있을 것이다. _ 196p
맹렬하게 사랑하고 맹렬하게 싸우는 순수주의자 리디 살베르,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다.
스페인 독재정권에서 벗어나 프랑스 툴루즈 인근의 오탱빌에 정착한 카탈루냐계 어머니와 안달루시아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리디 살베르는 고향을 떠나게 만든 이데올로기의 싸움, 한때 정의를 위해 싸웠으나 집안에선 폭군인 아버지, 평생 편안하게 느끼지 못한 프랑스어 등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맞서며 쌓인 분노와 격정을 글로 다스려온 작가이다. 평생을 몸담아온 예술과 문학을 향해 느끼는 감정에도 애정과 증오가 양립한다. 오랫동안 사랑해온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있는 피카소 미술관의 하룻밤을 독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마저 그녀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강렬한 저항이었다.
주위의 설득과 긴 고민 끝에 〈걷는 사람〉과의 하룻밤을 수락했지만, 정작 살베르는 오롯이 마주하게 된 〈걷는 사람〉에게서 아무런 감흥도 얻지 못한다. 오히려 불안감만 커질 뿐이다. 무엇 때문인가.
리디 살베르는 스위스 태생으로 이십대 초에 파리에 정착한 자코메티에게서 이주민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다. 예술은 모든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라고 여긴 자코메티에 깊이 공감하며, 그런 자코메티의 예술을 침울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토록 존중하는 마음을 품었던 자코메티의 작품과 대면하고 있는 이 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감동이 일지 않는다. 그 청동 조각상이 자신의 눈앞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밀도 높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떤 아찔함도 기쁨도 영감도 느끼지 못한다.
살베르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홀로 지낸다는, 몹시 기대했던 예술적 시도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데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 귀한 시간에 자신은 왜 예술에 대해 아무 관심도, 아무 욕구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그동안 의식하지 못한 예술에 대한 혐오감이 작동하는 건가.
예술을 향한 애증과 세상을 구원하는 실패의 아름다움이 강렬하게 교차하는 시간.
지나치게 부유하고, 모든 것이 넘치는 과포화의 시대, 21세기의 풍요에 거부감을 느끼는 살베르는 ‘너무 많은 아름다움과, 너무 많은 천재성과, 너무 많은 우아함으로’ 점령된 미술관이라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밤의 분위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감상적이지 않자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불안을 달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관에 대한 반감, 예술이 수익 좋은 최고의 투자처로 전락한 세태에 대한 독설, 더없이 천박한 승부욕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조각상의 허약한 어깨가 세상의 야비함에 대한 환멸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이 피카소 미술관에 있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코메티는 그런 세상과 조금도 발맞추지 않고, 실패를 겁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창작의 조건이자 소재로 삼은 ‘겸손한’ 예술가가 아니던가.
“이제 나는 자코메티가 대담 때 그토록 자주 말했던 그것(무능)을 생각했다. 왜냐하면 작업의 어려움을, 모델 속의 존재를 드러내는 어려움을, 움직임 없는 몸체 속에 생명의 움직임을 재현하는(그리스인들이 참으로 잘 해낸 것처럼) 어려움을, 인간을(외적 인간과 내적 인간을) 온전히 포착해내는 어려움을, 세상 속에서 그리고 죽음 앞에서 느끼는 지독한 고독을 표현하는 어려움을 그보다 더 잘 말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불만족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도 없었다.” _ 108p
그 밤 이후, 살베르는 〈걷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도 자신의 마음이 왜 굳게 닫혔는지를 곰곰이 생각한다. 감정을 토로하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일이 글쓰기라고 생각하는 작가지만 살베르는 자신을, 자신의 결핍을, 남들에게 ‘무척 겸손한’ 사람으로 비추고야 마는 그 열등감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프랑스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부모 밑에서, 세련됨을 배우지 못했던 환경에서 자란 자신이 프랑스어로 글을 쓰며 느끼는 옹색함을, 그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며 부딪쳐야 하는 그 열패감을, 그리고 초고속 리듬의 사회에 적응하며 사는 것이 실행 불가능한 천성을.
그런 생각의 끝에 다다르자 그녀는 그 밤의 무언가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상처를 입혔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다. 무언가가 자신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안을 야기했다는 걸, 무언가가 자신의 감동하는 능력을 마비시켰다는 걸. 적막과 고립 속에서 〈걷는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 자신의 죽음을 일깨웠다는 걸.
바람과 패배에 맞서 계속 걷는다. 자코메티처럼, 나처럼, 우리처럼.
“〈걷는 사람〉은 나처럼, 우리처럼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안다는 사실이 그의 등줄기를 휘게 했고, 무한히 겸손하게 만들었다.” _ 183p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매달려야 한다는 걸 인식함으로써 예술가로 존재했던 사람, 자코메티. 무한한 겸손, 완벽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긴장, 고행 같은 작업 방식, 그 대가로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열정만으로 보상받는 사람. 살베르는 지친 회색이 아름다운 자코메티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모든 면면이 그를 성자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을 향한 그의 팽팽한 노력에서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읽는다.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그토록 품고 싶은 삶에 대한 의지를.
살베르의 작가적 역량과 인간 심리를 깊이 들여다보는 정신과 전문의의 경험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우리로 하여금 예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작가정보
Lydie Salvayre
2014년 공쿠르 상 수상 작가. 1948년 프랑스 중부의 오탱빌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스페인 내전 후 프랑스로 망명한 공화주의자들이었다. 툴루즈 근교의 오트리브 에스파냐 난민촌에서 성장했다. 툴루즈 대학교에서 현대문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1969년 다시 의과 대학에서 정신과 전문의 과정을 공부하고 부크벨레르에서 다년간 정신과 전문의로 일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1990년에 발표한 첫 소설 《선언La Déclaration》으로 에르메스 첫 소설 상을 받았다. 1997년에 발표한 《유령회La Compagnie des Spectres》가 노방브르 상을 수상하고 문예잡지 〈리르〉에서 ‘올해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 이후 벗이자 탁월한 편집자인 베르나르 왈레를 모델로 한 소설 《BW》(2009, 프랑수아 비예두 상 수상)와 전설의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를 모델로 한 《찬가Hymne》(2011)를 발표하는 등 실존 인물들의 초상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살베르의 작가적 역량과 인간 심리를 꿰뚫는 정신과 의사의 능력이 결합한 산문집 《일곱 명의 여자Sept Femmes》(2013) 역시 동일 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2014년에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 《울지 않기Pas Pleurer》로 프랑스 작가에게 최고 영예인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살베르의 작품들은 많은 나라에서 연극으로 각색되어 상연되고 있으며, 전세계 2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그르노블 제3대학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로맹 가리ㆍ밀란 쿤데라ㆍ아멜리 노통브ㆍ피에르 바야르ㆍ리디 살베르 등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중요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겼다. 옮긴 책으로 《웃음과 망각의 책》 《마법사들》 《햄릿을 수사한다》 《흰 개》 《울지 않기》 《예상 표절》 《하늘의 뿌리》 《내 삶의 의미》 《책의 맛》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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