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사과의 마음
2020년 01월 22일 출간
국내도서 : 2020년 01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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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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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상처를 동시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여섯 빛깔, 우리의 이야기
여섯 편의 소설이 멜랑콜리를 테마로 하고 있지만 이 소설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우울증환자라는 병리적인 입장으로 확정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울은 누구에게나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어떤 이에게는 “밀물과 썰물처럼, 계절처럼, 오고 가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거나 “날 때부터 갖고 있던 난치병”과 같은 것이라면, 또 어떤 이에게는 “건강하게 태어났다가 살면서 암처럼 지독하게 들러붙은”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확정하지 않고 그저 가늠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우울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는 한 사람이며 그들이 힘겹게 다잡는 삶의 끈이다.
최민우 · 보라색 사과의 마음
조수경 · 알폰시나와 바다
임 현 ·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
김남숙 · 귀
남궁지혜 · 당신을 가늠하는 일
이현석 · 눈빛이 없어
발문_소유정 · 터지지 않는 풍선에게
다른 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난다면 은영도 사람들도 모두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할 것이다. 호감 가는 인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이별을 통고한 여자 친구의 턱을 주먹으로 때린 뒤 머리채를 붙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다 길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죽여버리겠다면서 포르셰를 몰고 여자에게 돌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제풀에 겁을 먹어 운전대를 꺾었다고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때 골목에서 느닷없이 사람이 튀어나왔을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알고 나면, 남자에 대한 인상은 바뀔지언정 다들 대충 납득은 할 것이다. 불행한 사고였다고. 살다 보면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_최민우, 「보라색 사과의 마음」 중에서
숨 가쁘게 언덕을 내려와 동 루이스 다리 근처에 다다랐을 때, 건너편으로 보이는 히베이라 광장이 아름다워 카메라를 꺼내 들고 야경을 담았어. 매일 저녁마다 바라본 풍경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느꼈기에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지.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다 잠시 눈을 뗀 다음 프레임에 갇히지 않은 세상을 찬찬히 둘러보고. 몇 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아쉬운 걸음을 뗐어. 도루강에서 가벼운 바람이 흘러왔고, 시선은 여전히 강물 쪽에 둔 채 동 루이스 다리 아래층으로 들어서려 할 때, 그때, 위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어. 다리 위층에서 누군가 장난을 치나 보다 생각하고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 사람이, 있었어. 공중에, 붕, 떠, 있었어.
_조수경, 「알폰시나와 바다」 중에서
경조는 운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누가 그걸 찾았다고? 종일 울었다고? 그보다 왜 정아를 이야기하면서 아이의 방을 가리키는 걸까. 경조는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순간만큼은 운주의 말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둘 중 누군가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라면, 그것은 경조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조는 세차게 문을 열었다. 곧장 뒤따라 운주가 경조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잠들었다니까. 그러다 애가 놀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나 문 뒤의 풍경은 예상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아이의 물건들은 그대로였으나 정작 그것을 사용하고 투정을 부릴 정아는 어디에도 없었다.
_임현,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 중에서
함부로 말하지 마.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 네가 도대체 뭘 안다고 그러니. 나는 가만히 서서 예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네가 부럽지 않아.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목구멍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미친년. 진짜 미친 건 너야. 멍청한 예지. 피곤한 예지. 멍청해서 피곤해서 완전히 돌아버린 예지. 예지가 곧바로 나를 비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예지가 가고 난 뒤에도 가만히 카운터에 서 있었다. 여관 주인이 없는데도 어디선가 설익은 토마토를 서걱서걱 씹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_김남숙, 「귀」 중에서
미듬이 제 몸 아래 젖어버린 모래를 점토처럼 둥글게 만들어 해운의 어깨에 던졌다. 성난 해운이 모래를 한 움큼 쥐었을 때 미듬은 보란 듯이 수면에 재주 부리는 돌고래처럼 다시 뛰어들었다. 어찌나 숨을 오래 참는 것인지 한참 동안 머리 하나 내밀지 않았다. 미듬아. 해운은 이름을 불렀고 검은 바다는 고요했다. 미듬아, 나와. 파도가 해운의 발끝까지 넘실거렸다. 쥐고 있던 모래를 던졌다. 작은 알갱이가 손에서 흩어지고 그의 푸른 다리가 정신없이 파도를 헤쳤다. 허리까지 젖어들었을 때 미듬의 얼굴이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거리는 가까웠다. 그는 빗방울에 번진 종이 속 글자처럼 흐린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_남궁지혜, 「당신을 가늠하는 일」 중에서
다급해진 그는 긴 벨트를 따라 신입이 배당받은 작업구역으로 뛰어갔다. 벨트 옆을 따라 그가 달리는 동안 벨트는 그와 같은 방향으로 그가 달리는 속도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그곳으로 달려가는 도중에 조원 한 명이 비상스위치를 내렸다는 무전을 쳤다. 동시에 벨트 돌아가는 속도도 느려졌다. 그러나 전원을 내린다고 바로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벨트는 20여 미터를 더 진행한 후에야 서서히 멈췄다. 신입의 상체와 골반 아래도 그만큼 떨어져 있었다. 우재와 그 자리에 모인 조원들은 신속히 기계를 해체했다. 정신을 완전히 잃은 신입의 상체만이라도 빼내려는 것이었는데 저 멀리서 제어실 직원이 뒤늦게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손대지 말라며, 괜히 손대면 그들이 잘못한 게 된다고 그 직원이 고함을 질렀다.
_이현석, 「눈빛이 없어」 중에서
우울은 누구에게나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다. 2018년 자살 사망률이 10만 명당 26.6명으로 2017년 대비 2.3명이 증가했다. 보건복지부는 ‘정신적 문제’를 자살을 선택하는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심리적인 문제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결과다. 어릴 적 경험이나 사고로 남게 된 트라우마가 적절한 시기에 극복되지 않을 때 성인이 되어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심하면 자살로 연결된다는 분석도 있다.
정신의학자이자 『당신이 옳다』의 저자인 정혜신 박사의 말대로, “치유란 그 사람이 지닌 온전함을 자극하는 것, 그것을 스스로 감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래서 그 힘으로 결국 수렁에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여기 새로운 문학의 역할이 있다. 사랑과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우울’을 여섯 빛깔, 서로 다른 얼굴로 깊이 성찰하고 있는 『보라색 사과의 마음』을 읽는 것은 하나의 ‘문학 치료’의 과정이 될 수 있다.
한국문학을 이끌고 있는 여섯 명의 젊은 작가들이 핍진하게 설계한 뜨겁고 쓰라린 초극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계와 너무나 닮았다. 여섯 편의 소설이 멜랑콜리를 테마로 하고 있지만 이 소설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우울증환자라는 병리적인 입장으로 확정 지어서는 안 된다. 우울은 누구에게나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우리가 확정하지 않고 그저 가늠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우울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는 한 사람이며 그들이 힘겹게 다잡는 삶의 끈이다.
터지지 않는 풍선처럼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는 당신
『보라색 사과의 마음』의 발문을 쓴 소유정 문학평론가는 셀로판테이프를 붙인 ‘터지지 않는 풍선’에 비유해 인간의 우울을 설명한다. 크게 풍선을 불고 한쪽에 셀로판테이트를 붙인다. 그리고 셀로판테이프 위를 바늘로 찌른다. 그러면 풍선은 터지지 않는다. 바늘을 더 깊숙이 밀어 넣어도, 바늘을 꽂고 있어도, 바늘을 빼내어도 풍선은 끝까지 터지지 않는다. 자신이 터지지 않는 풍선이라는 걸 모르고, 구멍 사이로 바람이 새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풍선은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잃는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터지지 않는 풍선’처럼 자신의 몸에 구멍이 나 있는 줄 모르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구멍 사이로 바람이 새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원래의 모습을 천천히 잃어가고 있는 풍선처럼 말이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에서도 터지지 않는 풍선과 같은 이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그들을 만나면서 그런 모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하지만, 그 안도 자체에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온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 속 그들은 우리의 어떤 부분과 조금씩 닮아 있다. ‘상실’이라는 이름의 바늘이 꿰뚫고 지나간 자리, 그 상처를 안고 주어진 삶을 살아낸다는 점에서 우리는 닮았다.
당신이, 당신의 가족이
모르고 지나쳤을 내밀한 우울의 서사
임현의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과 최민우의 「보라색 사과의 마음」은 상실의 대상이 가족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소설이 전개된다. 전자는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 후자는 동생을 잃은 언니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가족을 잃음으로써 가정 안에서도, ‘나’의 안과 밖에서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 망가짐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그다음에 잃게 되는 것」에서 주인공 경조의 아내 운주는 어린 딸 정아를 위해 구청에서 운영하는 축구 교실을 등록한다. 축구 교실에서 마련한 야유회 전날, 운주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무언가를 잊는다. 냉동식품 코너에서 야채 코너로 이동한 뒤 간단한 스낵류를 고르는 동안에도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한다. 얼마 뒤 자신이 진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운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확하게 자신이 지나왔던 동선 그대로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분명 옆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에서 주인공 은영은 동생 은주의 죽음 이후 원인 불명의 눈병에 시달린다. 은주를 차로 친 남자는 반년 전 집행유예를 받았다.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하는 남자를 본 은영은 남자가 다른 곳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만난다면 모두 마음에 들어 할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자가 이별을 통고한 여자 친구의 턱을 주먹으로 때린 뒤 머리채를 붙들고 휘두르다 길바닥에 패대기친 다음 죽여버리겠다며 포르셰를 몰고 여자에게 돌진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타인에게 다친 마음
타인으로 인해 치유되는 역설
어쩌면 타인의 슬픔을 더듬는 일을 통해 무심하게 지나친 나의 고통을돌아볼 수 있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병수 박사는 『보라색 사과의 마음』의 추천사를 통해 “우연히 던져진 인생 사건을 겪고 난 뒤에, ‘죽고 싶다!’던 우울증 환자가 삶에 대한 애착을 갑자기 되찾게 되는 역설적 현상”을 자신의 임상 현장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고 고백했다. 타인에게 다친 마음에는 우울증이 쉽게 자라지만, 역설적이게도 타인의 우울, 혹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우울이 치유되기도 하는 것이다. 조수경의 「알폰시나와 바다」와 이현석의 「눈빛이 없어」의 주인공들은 인생 사건을 목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주인공 인생의 행보가 전환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알폰시나와 바다」의 주인공 ‘나’는 J를 그들의 ‘첫 모임’에서 만난다. 저마다의 이유로 자살을 생각하며 가장 자살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모임이다. 어느 날 ‘나’는 포르투갈을 여행한다. ‘나’에게 아름다운 리스본의 풍경은 마지막 목적지인 포르투를 가는 길목으로 제격이었다. 마지막 목적지 포르투를 여행하던 중 그곳의 랜드마크인 동 루이스 다리에서 만족스런 석양을 감상하던 중 ‘나’는 85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청년을 눈앞에서 바라보게 된다.
「눈빛이 없어」의 주인공 희곤은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M군 소재 전문대로 내려가 교편을 잡는다. 그곳에서 희곤은 자신이 지낼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 준모와 집주인 우재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집에서 그들과 술자리를 갖게 된 희곤은 이미 문을 닫은 M군 화력발전소에서 근무하면서 그들이 겪었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곳에서 일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죽어 나간 사건들이었다.
다정하고 싶지만 다정할 수 없는
사랑 혹은 또 다른 자아
김병수 박사의 추천의 말처럼, 다정하고 싶지만 다정할 수 없는 인간성 때문에 우리는 소중한 이들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슬픔에 빠진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는 건 그 사람에게 투사된 나의 그림자를 싫어하기 때문이어서 타인을 향한 미움은 결국 내가 나를 미워하는 데서 비롯된다. 남궁지혜의 「당신을 가늠하는 일」과 김남숙의 「귀」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연인 혹은 친구와의 소소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이다. 여기에서 연인 혹은 친구는 또 다른 자아와 다름없을 것이다.
「당신을 가늠하는 일」의 주인공 미듬은 자신이 운영하는 동네 빵집에서 해운을 만난다. 난독증이 있는 해운은 주말마다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가게를 찾는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둘은 기형도의 문장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어느 날 둘의 대화가 어긋나고 해운은 한동안 빵집을 찾지 않는다. 그 사이 미듬은 쉬고 있던 수영을 다시 시작하게 되고, 나날이 기록을 경신하는 어느 폭염의 오후 해운은 미듬 앞에 다시 나타난다. 둘은 그날 밤 즉흥적으로 심야 버스를 타고 바다로 떠나고, 시커먼 밤바다에 몸을 담근다.
「귀」의 주인공 ‘나’는 굉장히 뚱뚱한 거구에 귀머거리다. 그러나 귀가 작을 뿐 ‘나’는 진짜 귀머거리는 아니다. ‘나’는 억수장이라는 이름의 오래된 여관에서 일하고 있고, 또 다른 주인공 예지는 매번 그 여관을 찾는 여자. 여관으로 자기의 사이즈보다 한 치수 작은 바지를 입는 인간들을 데려오는 예지는 오랜 기간 대학 휴학 상태다. 길고 얇은 담배를 피면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지를 묻는 예지에게 주인공 ‘나’ “너는 어른이 되어야 해. 대학생 말고. 진짜 어른.”이라고 말하면서 둘의 불화는 시작된다. 주인공 ‘나’와 예지의 불화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불화가 아닐까.
[추천평]
“크게 풍선을 불고 한쪽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인다. 그리고 셀로판테이프 위를 바늘로 찌른다. 그러면 풍선은 터지지 않는다. 곧바로 터지지 않을지언정 그것은 바늘로 찌르기 이전과 같은 풍선일 수 없다. 여전히 셀로판테이프를 붙이고 있지만, 바늘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으로 남았다. 구멍으로 조금씩 바람이 샌다. 자신이 터지지 않는 풍선이라는 걸 모르고, 구멍 사이로 바람이 새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풍선은 천천히 원래의 모습을 잃는다.
『보라색 사과의 마음』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에서 터지지 않는 풍선과 같은 이들을 여러 번 만났다. 그런 모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다가 오래 슬퍼졌다. 온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소설 속의 그들은 우리의 어떤 부분과 조금씩 닮아 있다. 무엇보다 그들 역시 다만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새어 나가는 통로를, 삶의 탄력을 잃게 만든 자리를 좀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내가 가진 구멍에 대해서라면 정확히 답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타인의 슬픔을 더듬는 일을 통해 무심하게 지나친 나의 고통을 돌아볼 수
작가정보
2012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장편소설 『점선의 영역』이 있고, 번역서로 『분더킨트』(니콜라이 그로츠니), 『뉴스의 시대』(알랭 드 보통),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 등이 있다. 제2회 EBS라디오문학상 우수상과 제3회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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