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쓰기
2026년 07월 10일 출간
국내도서 : 2026년 07월 1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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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46.75MB)
- ISBN 979119953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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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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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계절을 살아도 붙들리는 장면은 사람마다 다르다. 김연수 소설가에게 여름은 제주 세화의 바닷가에 있다. 그는 미리 골라 둔 옛 노래를 들으며 노을을 보고, 수평선에 뜬 한치잡이 배의 불빛을 헤아린다. 완벽한 며칠이 흐르는 동안, 여름 안에 있으면서도 그 여름이 이미 그리워지는 마음을 그는 오래 들여다본다. 김소연 시인의 겨울은 사뭇 고요하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잠재우고 천천히 지워가는 텅 빈 방으로 들어가는데, 이를 ‘미현실의 방’이라 부른다. 같은 봄이라도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는 아직 잎도 나지 않은 팽나무의 작은 겨울눈 앞에서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고, 은유 작가는 케테 콜비츠가 전쟁으로 잃은 아들에게 건넨 단 한 문장 앞에서 오래 멈춰 선다. "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그 계절에 깃든 마음의 폭에 있다. 떠나보낸 존재를 향한 그리움과 자책, 사라져가는 것들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막막함, 철 모르게 피어난 존재를 마주한 미혹과 두려움, 긴 겨울을 건너온 끝의 안도와 설렘, 그리고 시끄러운 세계에서 물러나 닿는 고요와 충만까지. 계절을 쓴다는 것은, 한 철에 이렇게 여러 겹으로 접힌 마음을, 그 계절의 선연한 노래와 냄새와 풍경에 실어 함께 나누는 일이다. 무심히 흘려보낸 줄 알았던 한 철에도, 실은 이렇게 많은 것이 접혀 있었으니까.
홍한별의 가을 : 오래된 이야기
김소연의 겨울 : 미현실의 방
허태임의 봄 : 봄의 눈
전의령의 여름 : 안녕, 마우
윤경희의 가을 : 장미철
김지승의 겨울 : 통증의 유형
은유의 봄 : 아가야, 봄이 왔다
이 여름이 아름다워서, 저녁에 부는 바람이 시원해서, 우리가 함께 있어서. 매일 해가 지고 완전한 밤이 찾아올 때까지 해 질 무렵의 이 아름다움은 반복됩니다. 여름 안에 있으면서도 여름이 벌써부터 그리워지지요.
_23쪽
보통 내가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숨을 들이마셨을 때 찬 기운이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명치를 아리게 할 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고 어떤 감정이 나를 한바탕 뒤흔들고 지나가려는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_33쪽
그냥 시인의 감수성 저 반대편에 헐겁게 드러누운 채 벌거숭이처럼 실컷 웃고 실컷 울고 실컷 헤프고 싶을 때가 있다. 표현하기를 조금 더 조금 더 지연시키고 싶다. 언어가 멀리까지 저 혼자 가보다가 천천히 돌아와 내 손을 붙잡게 하고 싶다. 나의 말이 오래 지연되도록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겨울이면 시인을 동면에 들게 하고 그 옆에 함께 누워서 오랜 세월 가방 속에 구겨 넣었던 현실들을 펼쳐 미현실의 문지방에 걸쳐둔다.
_58쪽
어린 나는 그 애순을 모으며 식물이 싹을 내밀고 잎을 펼치고 또 말라가는 자연스러운 이치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고마운 식물을 내가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그들의 질서를 인간이 함부로 훼손하지 않도록 지켜줘야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 게 그 무렵이던가. 나는 당신의 눈이었을까.
_77~78쪽
우리가 한국에서 맞이하는 여름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드는 시간이라면, 다낭에서 며칠 갖게 된 여름은 그 시간의 밀려듦 속에서 오목히 올라온 비非-시간이야. 아니면 밀려드는 시간 속에서 확보한 작은 피난처라고나 할까?
_88쪽
전문가가 아닌 우리는 빈손으로 산책을 나서기만 해도 생물계절학에 기여할 수 있다. 올해의 첫 벚꽃은 어느 날에 피었는지 제주에서 섬진강을 지나 철원의 주민이 시간차를 두고 소식을 나누고, 날이 길어지며 새들의 새벽 합창이 점점 더 이른 시각부터 울리는 것을 알아채고, 야구 시즌이 슬슬 달아오를 무렵이면 하루살이 떼가 조명탑 아래 불청객으로 찾아드는 데 불평하고, 늦가을 금강 하구에 돌아온 가창오리의 군무에 경이로운 숭고미를 느끼며, 설악산에 첫 단풍이 드는 날을 다같이 설레며 기다린다.
_104쪽
눈발이 서로의 꼬리를 잡을 것처럼 빙빙 돌아 나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무엇에 휩쓸렸는지도 모른 채 손을 놓친 마음처럼. 그런 마음으로 막막하게 그리워한 날들이 있었다.
_143쪽
살라고 낳았는데 살리지 못한 아이에게 엄마는 전한다. 봄이 왔다고. 봄, 문제적인 봄. 나의 아가야, 겨울이 왔다, 나의 아가야, 가을이 왔다, 나의 아가야, 여름이 왔다는 뜻도 행간에 숨어 있을 테지만, 죽은 아들을 산 아들마냥 어루만지지 않은 계절과 절기와 시간의 마디가 없었을 테지만, 케테 콜비츠가 꽃망울처럼 말을 터뜨린 건 봄이다. 봄 기운이 바닥에 고인 슬픔의 말을 끌어올렸다. 봄은 이렇게나 힘이 세다. 만물을 땅 위로 솟게 하고 뭉친 걸 터뜨리고 은폐된 걸 천하에 드러내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
_154쪽
철 잃은 꽃 한 송이 앞에 멈춰 서는 일
계절을 쓴다는 것은, 세계의 안부를 묻는 일
이 글들이 특별한 이유는, 여덟 편의 글에 무엇보다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느끼지만, 그 감각을 붙들어 또렷한 문장으로 벼려내는 것은 결국 쓰는 사람의 몫이다. 사계절이라는 구분은 이 땅에 살아온 우리에게 응당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나, 더는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홍한별 번역가가 시장에서 산 가을 꽃게의 배를 갈랐을 때, 그 안에는 이맘때라면 비어 있어야 할 알이 들어차 있었다. 한 해에 한 번 산란하던 꽃게가, 언제부터 두 번씩 알을 배게 된 걸까. 윤경희 문학평론가는 시월의 담장에 철 모르고 핀 장미 한 송이에 이끌려, 그 꽃을 좇아 1년 내내 골목골목을 헤맨다. 오래 쌓인 절기의 이치가 무용해지는 자리에서, 두 사람은 그 어긋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는데, 그 응시가 곧 글이 된다.
『계절 쓰기』는 자기가 사는 땅의 계절을 1인칭으로 적어온 오랜 기록의 전통 위에 놓인다. 동아시아에는 한 해의 절기와 살림을 날마다 적어 온 세시기(歲時記)가 있었고, 서구에는 자연의 열두 달을 기록한 자연 쓰기의 계보가 있었다. 다만 옛 기록이 해마다 되돌아오는 질서를 적었다면, 이 책은 그 질서가 어긋나기 시작한 자리를 적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거창한 장비도, 전문가의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빈손으로 산책을 나서 철 잃은 꽃 한 송이 앞에 멈춰 서는 일, 그 작은 멈춤이 이미 이 시대의 기록이 아닐까. 여덟 편의 글은 기후 위기가 멀고 거대한 통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몸으로 겪는 가장 가까운 사건임을 조용히 증언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한 사람이 겪는 상실은 세계가 겪는 변화와 끝내 이어진다. 전의령 인류학자가 여름내 더위와 싸우다 떠난 고양이를 애도할 때, 그 슬픔은 해마다 혹독해지는 여름의 열기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김지승 작가가 재개발로 사라지는 집을 구하러 다니는 겨울은 수술과 치료로 무너진 몸이 통증을 견디는 시간과 나란히 놓인다. 세계가 잃어 가는 것과 한 사람이 잃은 것이 한 계절 안에서 만날 때, 계절을 쓰는 일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의 안부를 묻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 물음을 따라 계절을 두 바퀴 도는 사이, 우리가 흘려보낸 줄 알았던 시간들이 조용히 곁으로 돌아온다.
인물정보
소설가.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뒤로 소설을 주로 썼다.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 『이토록 평범한 미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세계의 끝 여자친구』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스무 살』,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원더보이』 『밤은 노래한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사랑이라니, 선영아』 『굳빠이, 이상』 『7번국도 Revisited』, 산문집 『시절일기』 『청춘의 문장들』 『소설가의 일』 『여행할 권리』 『우리가 보낸 순간』 『지지 않는다는 말』 등을 냈다.
번역가.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산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라라와 태양』 『밀크맨』 『상실』 『햄닛』 등을 옮겼고, 산문집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 『돌봄과 작업』(공저) 등을 냈다.
비교문학 연구자·문학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지대학교 강사. 산문집 『분더카머』 『그림자와 새벽』 등을 냈고, 앤 카슨의 『녹스』 및 그림책과 그래픽노블 여러 권을 옮겼다.
작가. 산문, 인터뷰, 르포를 쓴다. 『글쓰기의 최전선』 『쓰기의 말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다가오는 말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있지만 없는 아이들』 『크게 그린 사람』 『해방의 밤』 『아무튼, 인터뷰』 『생업』 등을 냈다. 자기 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 언어를 만드는 일의 가치를 나누려 ‘감응의 글쓰기’ ‘메타포라’ 등 글쓰기 수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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