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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

김신명숙 지음
돌고래

2026년 01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12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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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36.61MB)
ISBN 979119931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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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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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미노아 문명은 동시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 선형문자 A가 해독되지 않았고 왕권과 군사력이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문자 기록과 왕조, 전쟁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기존 문명사에서 늘 주변부에 머물렀다. 그 결과 미노아 문명은 독립된 청동기 문명으로 다뤄지기보다 에게해 세계의 전사(前史)나 주변 문화로 여겨져 왔다.한국에서도 미노아 문명을 독립적으로 조명한 번역서나 국내서가 단 한 권도 출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여신학자 김신명숙이 한국 독자들에게 미노아 문명을 다층적으로 조망하는 첫 번째 안내서를 선보인다. 미노아 문명은 문명사를 보는 기존의 시각을 뒤흔드는 새롭고 혁명적인 문명이다. 미노아 크레타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신화학자, 나아가 소설가와 화가, 페미니스트와 반전주의자 등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를 매료시켜 왔다. 대표적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 니코스 카잔차키스, 헨리 밀러, 마리야 김부타스, 리안 아이슬러 등이 미노아의 문화와 정신에 깊이 매혹되어 각자의 작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는 19세기 후반 칼로 카이리노스가 크노소스 케팔라 언덕에서 첫 삽을 떴던 발굴의 순간에서 출발해 그의 뒤를 이어 기념비적 성과를 이룬 아서 에번스의 행적을 흥미롭게 추적한다. 유럽 문명의 원류이자 미노스 신화의 무대, 나아가 페미니스트와 히피 들의 이상향으로 재현되어 온 역사까지 미노아 문명에 덧씌워진 상상과 해석의 궤적을 풀어낸다. 미노아를 둘러싼 고고학·역사학·문화사학적 해석과 반론의 격돌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가장 생생하고 흥미로우면서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미노아 문명의 진면모를 만날 수 있다.
『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는 역사적 서술을 넘어, 풍부한 도판을 통해 미노아 문명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인장, 프레스코화, 건축, 도자기, 유적지 등 핵심 유물군을 약 100점 엄선해 전면 컬러로 수록했으며, 여신 신앙, 자연, 평화, 현대성이라는 키워드로 미노아 문명의 특징을 섬세하게 짚어나간다. 공신력 있는 연구들과 최신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한 뒤 여기에 여신학자만의 독창적인 시각을 더해 미노아의 상징과 여신상, 유물 들을 입체적으로 해설한다. 미노아 문명을 처음 접하면서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유일무이한 안내서다.
한국의 여신 신앙과 문화를 오랜 시간 연구해 온 저자가 미노아 크레타를 거울 삼아 신라 문화를 재탐색한 내용을 담은 부록 「다시 보는 신라의 여신과 여왕」 역시 이 책의 백미다. 여왕과 여사제, 화랑의 전신이었던 원화, 화백회의와 풍류도의 여성적 영성 등 여러 신라사의 수수께끼는 신라의 여신 문화를 인지할 때 그 비밀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 들어가며
● 1장 크레타, 여신이 품은 공동체 문명
1. 아서 에번스, 크노소스를 발굴하다
2. 미노아 여신: 위대한 어머니, 자연, 재생
3. 시기별 여신상들
4. 여신신앙의 상징들: 양날도끼의 미스터리
5. 미노아 남신들: 사냥꾼, 동물의 주인
6. 성소와 의례
7. 아리아드네는 여신이었나?
●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 에번스가 남긴 유산의 공과 과
2. 미노아 파라다이스의 등장과 소란
3. 미노아 고고학의 역사와 반향
●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1. 미노아 예술 읽기
2. 인장과 반지: 산 어머니의 위엄
3. 프레스코화: 피흘리는 신전과 월경
4. 도자기: 문어 단지의 경이로움
5. 궁전 건축: 영적 경험을 만들다
●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1. 사회의 중심에 선 여성
2. 성난 소를 다루는 여성들
3. 여사제-여신-여왕의 삼중주
4. 미노아 가모장제 논쟁
5. 남성왕은 존재했는가?
6. 선형문자 B가 전하는 크노소스 여성들
7. 미노아 남성성: 소프트 파워
● 부록 - 다시 보는 신라의 여신과 여왕
● 참고 문헌
● 도판 출처

크노소스를 발굴하기 전 에번스 역시 그리스인들이 크레타를 배경으로 만들어낸 신화들과 전설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이 이야기들엔 미노스왕을 비롯해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 미노타우로스와 다이달로스 같은 매혹적인 인물들과 사건들은 물론 제우스나 포세이돈 같은 신들도 등장한다. 슐리만을 동경했던 에번스는 신화에서 역사를 건져낸 그의 업적을 잇고 싶었던 것 같다. (들어가며, 16쪽)

발굴 초기 에번스를 놀라게 한 것은 유적의 연대였다. 미케네 시대의 왕궁이라고 생각하며 발굴을 진행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나온 유물들은 그 이전 시기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물들은 당시까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특히 이집트나 근동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였다.
더 놀라운 것은 벽을 장식한 프레스코화와 수많은 도자기, 여러 종류의 조소상 등 쏟아져 나온 유물들이 선진적 문명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프레스코화들은 많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노아인들의 흥미로운 삶의 단면들을 아름답게 증언했다. (1장 크레타, 여신이 품은 공동체 문명, 34쪽)

호크스에 따르면 크레타가 주변 지역과 다른 특유의 청동기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여성적 원리가 종교적·사회적 가치체계였기 때문이다. 여성적 원리가 무엇인지 구체적 설명은 없으나 그녀가 말하는 여성적 성격과 관련시킬 수 있다. 서구 문화의 맥락에서 호크스가 여성적이라고 해석하는 성질들은 “자연에 대한 친밀한 사랑과 동일시, 스쳐 가는 순간에의 몰입, 춤에 대한 열정, 죄책감이나 처벌에 대한 생각이 없는 가벼운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군사적 정신의 부재” 같은 것들이다. (1장 크레타, 여신이 품은 공동체 문명, 43쪽)

이에라페트라 뱀여신은 특이하게도 요가 자세로 앉아 있다. 새 모양 얼굴에 뱀이 또아리를 튼 듯한 모양새다. 김부타스는 이런 종류의 뱀여신상이 여신의 재생력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묵은 허물을 벗고 새 피부로 거듭나는 뱀의 생태적 특징과 여신을 연관시킨 것이다. 여신의 풍만한 몸에는 흰색 선들이 고르게 그어져 있는데, 이는 강이나 시냇물을 상징한다. 인간 여성과 새와 뱀, 그리고 강이 함께 어우러져 생명의 하나 됨을 표상하며 하늘과 땅, 지하세계가 여신의 몸에 통합되어 있다. (1장 크레타, 여신이 품은 공동체 문명, 68쪽)

사실 우리는 미노아인들이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도 알지 못한다. 편의상 ‘미노아인’이란 명칭을 쓰고 있을 뿐이다. 동시대의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케프티우’라고 불렀다. 케프티우와 미노아인. 청동기시대 크레타인들은 이집트인들이 전하는 이름과 20세기 영국인의 추정을 거친 이름 사이에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존재로 움직인다.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10쪽)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몇몇 전통적 용어들이 고고학 담론에 해석적 족쇄를 씌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비록 ‘마당 단지’가 미노아인들의 가장 중요한 행사 중심지에 대한 가장 멋진 묘사는 아니라 해도, 우리는 ‘미노스왕’을 마당에 묻어야 한다. 춘분을 맞아 마당에서 환희에 차 춤을 추고 자연의 재생을 기뻐하면서!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18-119쪽)

또 미노아 궁전들에는 미케네 궁전들과 달리 거대한 성벽이 없었다. 오히려 궁전의 입구가 사방으로 열려 있었고, 군사 시설이나 전쟁과 관련된 흔적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른 문명권에서는 흔한 전쟁 장면을 묘사한 유물조차 출토되지 않았다. 그래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류가 발견되어도 주로 의례용이거나 위세품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미노아 남성들이 유약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바다를 누비고 사냥을 했으며 황소 위로 뛰어올라 재주를 넘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또 복싱이나 레슬링 같은 스포츠로 몸을 단련했다. 다만 그들이 살상이나 무도한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도상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의례와 행사에 참여하거나 즐겁게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장면을 통해 신실하고 건강한 남성미를 드러냈다.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26쪽)

크노소스에는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듯한 현실감이 있다. …… 여성들이 사회 활동에서 중요하고 동등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놀이의 정신이 두드러진다. 요컨대 지배적인 분위기는 기쁨이다. 크노소스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살았고, 내세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받지 않았으며, 조상의 영혼에 대한 과도한 경배에 억눌리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방식으로 종교적이었다. 즉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하고, 흘러가는 매 순간에서 삶의 정수를 뽑아냈다. 크노소스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 세속적이었다.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29쪽)

오늘날 미노아 크레타는 더 이상 낭만적 이상화의 대상은 아니다. 이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시대에 더 이상 그런 순진한 시각은 통용되지 않는다. 새로운 발굴과 해석은 미노아 크레타라는 역사적·문화적 구성물을 더욱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빚어가고 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죽지 않았고, 어느 순간 뛰쳐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미노아 크레타에 대한 유토피아적 시각 역시 사라지지 않고 간헐적으로 얼굴을 내민다. (2장 미노아 문명의 진실을 찾아서, 135쪽)

가장 흥미로운 점은 미노아 예술이 보여주는 현대적 측면이다. 세련된 미감뿐 아니라 가치 측면에서도 현대인들은 미노아 예술에 쉽게 공감한다. 현재도 진행 중인 ‘크레토마니아’ 현상이 이를 잘 말해준다. 자연 사랑과 공존, 여성성과 평화, 우아함과 자부심의 미학은 학계를 넘어 예술가들과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특히 군사적 정신이나 성향이 잘 드러나지 않는 점은 미노아 예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비슷한 시기 이난나, 이슈타르 같은 근동의 여신들이 전쟁과 관련되어 있었음에도, 미노아 여신들은 이를 멀리했다. 호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적 원리를 수호했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153쪽)

특정한 제스처나 포즈가 여러 유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분명히 어떤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미노아인들에게는 자명했을 그 의미들이 우리에겐 수수께끼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179쪽)

「경배자들」과 「피 흘리는 신전」, 그리고 러스트럴 베이신에 대한 앞의 견해들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미노아 문화가 월경, 더 나아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월경은 부정한 것으로서 수치와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기피되어 감춰진다. 하지만 아크로티리나 크레타에서는 월경이 가장 중요한 공적 건물의 존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공공연한 일이었다는 얘기다. 크세스테3은 아크로티리 공동체의 의례 중심지였던 건물로 판단된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182쪽)

이러한 태도는 식물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미노아 풍경화에는 현실에 없는 혼종적 꽃들도 등장한다. 예컨대 파피루스와 백합, 혹은 파피루스와 갈대가 섞인 형태다. 색채의 선택에서도 자연을 그대로 모방한다기보다 자유로움이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미노아인들은 왜 실제와 거리가 있는 식물들을 창조해 그렸을까? 그 이유는 그리핀이나 스핑크스 같은 혼종적 동물들을 참조할 때 짐작할 수 있다. 상상 속 혼종적 동물들이 신성과 관련되듯, 혼종적 식물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창조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동식물의 형상에는 자연 세계에 개입해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신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186쪽)

마린 스타일 도자기에는 문어, 물고기, 춤추는 돌고래, 전진하는 앵무조개, 불가사리, 산호, 해초 등 바다 생태계를 이루는 다양한 생물들이 등장한다. 도공들은 혁신적 기술과 기법으로 생물들의 유연하고 날렵한 움직임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양식화된 자연주의로 불리는 특유의 스타일은 다른 어떤 문화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 도자기들은 미노아인들이 바다와 맺었던 운명적 관계를 증언한다. 바다는 그들에게 생활의 터전이자 경외의 대상이었고, 삶의 한계이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열린 가능성이었다. 바다는 풍부한 먹거리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염료 같은 귀한 재료의 보고이기도 했다. 미노아 예술가들이 바다 생물들에 관심을 갖고 창작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201쪽)

일례로 내부 공간을 가변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피어 앤 도어 파티션Pier-and-Door Partition’ 같은 구조는 미노아인들의 창의적인 공간 활용 능력을 보여준다. 이는 공간 내부에 여러 개의 직사각 기둥들을 나란히 세우고, 그 기둥들 사이에 나무문을 연결한 구조다. 문을 모두 닫으면 공간이 분리되고 열면 확장된다. 또 열린 문의 수를 조절해 입구와 시야를 통제할 수 있었고, 복도 같은 통로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특히 문을 여닫음으로써 내부의 빛과 온도, 공기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었던 점은 놀라운 혁신으로 평가된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20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노소스 궁전의 건축 디자인에서 소수 지배자의 권력과 배타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전제적인 통치와는 매우 다른 포용적인 정치사회 체제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일부 연구자는 크노소스궁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로 ‘통합’을 읽는다. 그들은 크노소스궁이 ‘크레타의 우주론적 중심’으로서 서로 경쟁하는 지역의 파벌 세력들을 아울렀다고 본다. 파벌들은 경쟁적이었고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크노소스궁을 통해 하나의 신앙과 사상 아래 통합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3장 미노아 여신 문화 -자연 사랑, 평화, 현대성, 215-216쪽)

신의 젠더와 세속적 젠더관계의 상관성은 인류학·사회학·종교학의 흥미로운 탐구 주제이기도 하다. 인류학자 샌데이의 연구가 대표적인데,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대체적으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150여 개 부족 사회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창조신의 젠더와 세속적 젠더 권력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여성적 창조 원리가 지배적이거나 남성적 원리와 함께 작동할 때는 젠더관계가 비교적 평등하게 나타났다. 반면 신이 남성적으로만 정의될 때 거의 예외 없이 남성 지배적인 사회를 형성했다. 샌데이는 어떤 사회가 여성의 창조 원칙에 가치를 둘 때 여성의 권위는 존중된다고 말했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21쪽)

반면 여성들은 개성과 주체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의상만 보아도 화려한 색감과 다채롭고 정교한 무늬와 디자인 등이 이집트 여성들의 경우와 대조된다. 이집트 여성의 의상으로는 소매 없이 몸에 붙는 단순한 흰색 리넨 드레스가 많다. 미노아 여성들의 장신구 또한 그대로 따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되었다. 서로 다른 의상과 헤어스타일, 장신구는 각각의 여성들에게 개성을 부여한다. 이는 미노아 여성들의 사회적 위상이나 존재감과 관련이 있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26-227쪽)

미노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주목되는 대상은 여사제들이다. 수많은 유물이 그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미노아 신권정치가 종교 지도자들의 높은 위상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신권정치 체제에서 최고의 여사제는 곧 여왕과 동일한 위상을 지녔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현대와 비교할 수 없이 심대했다. 문화적 가치와 태도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담보했고, 때로 기존 질서를 전복할 수도 있었다. 특히 주기적으로 실행된 의례들은 물질의 재생산뿐 아니라 사회적 재생산에도 관여했고, 종교 지도자는 공동체의 복지에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38쪽)

여사제로 추정되는 프레스코화는 아크로티리의 웨스트 하우스에서도 발굴되었다. 매우 젊은 여성상이어서 ‘젊은 여사제’로 불린다. 그녀의 머리는 꼭대기에 얹어진 뱀 모양의 머리 다발을 제외하고는 푸르게 칠해졌는데 이는 삭발된 상태를 가리킨다. 미노아 도상에서 삭발은 어린 나이를 뜻한다.
하지만 이 여사제의 장신구는 화려하다. 굵은 목걸이를 둘렀고, 바퀴 형태의 큰 귀걸이를 달고 있다. 그런데 이 소녀가 걸친 옷은 매우 예외적이다. 가슴을 활짝 드러내는 보디스(상체를 꼭 조이는 의상)에 화려한 긴 치마 대신 한쪽 어깨에 걸쳐 입는 넉넉한 원피스형 옷을 입고 있다. 이는 미노아 남사제들의 복장과 유사하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46-247쪽)

고르틴 법전에는 여성의 독립적 재산소유권과 이혼권 등이 보장되어 있다. 남편은 아내의 재산을 팔거나 담보 잡힐 수 없으며, 아들 역시 어머니의 재산에 대해 유사한 관계에 있다. 또 여성도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었고, 이혼 시 혼인할 때 가져온 재산을 되찾을 뿐 아니라 혼인 중 그 재산으로 이룩한 부의 절반도 가져갈 수 있었다. 재산상속 및 양육과 관련해서도 모계 사회적 특징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일례로 엄마가 죽었을 때 상속받을 어린 딸의 양육을 외삼촌에게 맡기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육 체제는 모계 사회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토머스는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미노아 가모장제가 존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르틴 법전의 전문가인 윌릿츠도 이 법전이 오래된 모계제 혹은 가모장제 질서에서 가부장제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55쪽)

1992년 미국고고학연구소 연례 회의의 한 패널 토론에서는 미노아 크레타의 통치자 문제가 주제로 다루어졌다. 그런데 이 토론에 참여한 저명한 에게 문명 연구자들은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을 같이했다. “미노아 예술 속에 남성 통치자는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중요한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레하크와 영거는 함께 쓴 글에서 미노아 여성들이 정치적으로도 최상의 지위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신궁전기 프레스코화와 인장의 도상에서 여성과 여신이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을 보면 여성들이 정치적인 영역까지 지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69쪽)

종교직 여성들은 노예들을 거느렸고, 다른 자유민들을 감독하기도 했다. 또 식량이나 직물, 청동 같은 중요한 물품들은 물론 신을 위한 재산, 즉 신전과 그 부속 물품 등도 관장했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산도 있었다. 무엇보다 필로스에서 유일하게 땅을 사용할 수 있는 여성 집단이었다. 그러나 땅의 소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오직 임차를 통한 보유만이 허용되었고 땅의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여사제 에리타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제약이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76쪽)

대다수 학자들은 미노아 크레타가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가부장제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미노아 남성상들만 보아도 그렇다. 유물에 재현된 남성상들이 드러내는 남성성은 미노스왕이 환기하는 가부장적 남성성과는 거리가 있다. 그들은 여신을 경배하고 음악을 연주하며, 의례를 이끄는 여성들을 존중하고 서로 화합한다. 미노아 남성들은 활력이 넘치고 용감해 보이지만, 에게해에 해상왕국을 건설한 제국의 군주로서 미노스의 풍모는 보이지 않는다. 미노스가 일부 지닌 폭군의 이미지까지 생각하면 거리는 더 멀어진다. (4장 여성보다 지위가 높은 남성이 없다, 283쪽)

미노아인들은 전쟁 장면을 예술에 재현하지 않았고 용맹한 전쟁왕의 초상도 남기지 않았다. 남성들의 결투 장면은 있지만 그것도 돌 리톤이나 인장의 작은 공간에 국한시켰다. 미케네인들처럼 전투 장면을 벽에 그려 과시하지 않은 것이다. 프레스코화에는 전쟁은커녕 폭력적 장면도 거의 없다. 이 독특한 측면이야말로 미노아 문명의 정체성이다.
한 고고학자는 미노아인들이 전쟁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예술로 재현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전쟁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측면인지도 모른다. 인간 조건의 한계 속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며 평화를 수호하려 했던 그들의 지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4장 여성보다

폭력과 지배의 역사로 인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인류의 발자취 속에 다른 세계가 있었다
고대 문명에서 찾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실마리들

농업혁명 이후 잉여 생산이 가능해지며 부가 축적되고, 계급 분화와 전쟁이 확산되면서 가부장제 사회가 출현했다는 역사 서사는 오랫동안 널리 수용되어 왔다. 이 서사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사례가 바로 미노아 크레타다. 저자는 미노아 크레타가 당대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이후의 미케네 문명과 달리 비교적 덜 호전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사회였다고 본다. 물론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온화한 기후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겠지만, 미노아의 정신 및 문화가 동시대 다른 문명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은 고고신화학자 마리야 김부타스, 고대사 연구자 바흐오펜, 문화사학자 리안 아이슬러 등의 견해와도 맞닿는 부분이다.
이러한 미노아 문명의 특성은 다양한 유물과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저자의 분석을 통해 더욱구체화된다. 저자는 신과 인간, 동식물과 의례 장면 등이 묘사된 다양한 도상들을 면밀히 살피며 미노아 종교와 문화의 핵심적인 원리를 짚어낸다. 특히 동식물과 결합된 여신 관련 유물들은 생명과 자연의 순환이 신성의 핵심 요소로 표현되었음을 암시한다. 반면 남성 지배자가 군림하거나 전쟁과 정복을 이상화하는 장면은 미노아 유물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도상적 대비는 미노아 문화에서 전쟁과 지배가 중심적 가치로 표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각은 크레타의 물질문화를 함께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저자는 크레타에서 대규모 군사 시설과 전쟁의 흔적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창과 칼 같은 무기류의 유물 비중이 현저히 낮다는 점에 주목한다. 더불어 미노아 궁전이 왕권의 과시보다는 공동체의 모임과 의례를 중심으로 건축되었을 가능성을 소개한다. 사방으로 문이 나 있고 주거 지역과 엄격히 분리되지 않은 개방적 구조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다. 미노아 사회의 부와 자원이 비교적 공동체적으로 관리·분배되었을 가능성 또한 눈에 띄는데, 프랑스 고고학자 앙리 방 에팡테르는 특히 신궁전기 이전의 크레타 사회를 ‘원시 민주정’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공동 통치나 집단 통치, 나아가 여왕의 존재 가능성까지 다루며 미노아의 정치 체제를 둘러싼 다양한 가설을 조명한다. 강력한 1인 왕권 체제와 뚜렷한 계급 분화를 전제하는 기존의 역사 인식을 재검토할 때 비로소 진정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렇듯 『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는 도상 분석과 고고학적 자료, 학술 연구를 성실히 종합해 미노아 사회가 폭력과 지배의 서사로 환원되기 어려운, 중요한 사례임을 시사한다.
저자를 따라 미노아 문명을 거닐다 보면 인류의 역사가 곧 전쟁과 폭력의 시간으로만 뒤덮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조금 더 평화로운 국가,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 위계 없는 젠더 관계 등 미래에 대한 비전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미노아 크레타를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최초로 풍경화를 그린 사람들
세련되고 현대적인 예술의 정수
여신과 동식물이 어우러진 풍요의 세계
미노아 문명의 아름다움과 매혹

단연코 『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가 선사하는 가장 큰 매력은 미노아 유물의 시각적 아름다움이다. “최초로 풍경화를 그린 사람들”, “꽃을 사랑하는 미노아인들”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 미노아 미술에서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중심 주제로 등장한다. 또 미노아인들은 현실에 없는 혼종적인 꽃들을 그려내는 등 상상과 자유로움에 기반한 상징적 풍경을 즐겨 그렸다. 「백합」, 「푸른 원숭이들」, 「영양」, 「돌고래」 등 대표적인 벽화들은 자연의 리듬과 생명력을 전면에 보여준다.
이러한 미노아 예술의 현대적 감각은 ‘파리지엔느’라 불리는 그림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짙은 눈매와 붉은 입술, 과감한 색채 대비로 표현된 이 인물은 신화적 상징이나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개별적인 얼굴과 태도를 지닌 인물로 다가온다. 굵고 유연한 선, 평면적인 구성, 강렬한 색감은 미노아 예술이 왜 오늘날까지도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느껴지는지를 단번에 이해시킨다.
미노아 예술의 아름다움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노아의 이미지와 감각은 예술과 디자인을 비롯해 패션, 대중문화, 새로운 영성 담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되며,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지속적인 매혹을 ‘크레토마니아(Cretomania)’라 부른다. 어쩌면 이 여성적 예술에 대한 끌림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도 미노아 크레타를 다시 찾게 되는 본능적인 이유가 아닐까?


가부장제는 고대 문명의 전제가 아니었다
평등과 평화를 이룬 미노아의 젠더 질서에 주목하다

과연 고대 문명의 특징을 가부장제의 산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여성학과 여신학을 공부해 온 저자는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아 미노아 문명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둘러싼 주요 논의들을 살펴본다.
이 책은 미노아 종교에서 여신이 신앙의 중심에 놓였다는 점과 함께, 이러한 종교적 위상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분리되지 않았음을 다양한 시각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미노아 프레스코화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자주, 더욱 중심적인 인물로 등장하며, 「그랜드 스탠드」와 「행진」처럼 공적인 행사를 묘사한 그림에서도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같은 시기 근동 지역에서남사제들이 두드러졌던 것과 달리, 미노아의 유물에는 여사제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여성의 몸을 재현하는 방식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경배자들」과 「피흘리는 신전」 같은 벽화를 근거로, 여성의 피와 월경이 공적 건물의 존재 이유가 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해석한다. 이렇듯 『처음 만나는 미노아 크레타』는 확인 가능한 유물 및 자료들을 총망라해 여성이 차지했던 중심적 위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미노아 문명의 남성성에 대한 해석이다. 크레타를 남성 왕이 지배했다는 고고학적 증거마저도 확실한 게 없고, 숱한 인물상 중에서도 학자들이 남성 왕의 것이라고 합의한 도상이 하나도 없다. 그 대신 의례와 스포츠, 공동체 활동에 참여하는 남성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여신을 경배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의례를 이끄는 여성들과 화합한다. 그나마 남성 왕의 도상으로 논의되는 「백합 왕자」 역시 위엄 있는 통치자라기보다 백합 장식 관을 쓰고 경쾌한 움직임을 보이는 젊은 남성에 가깝다. 미노아 사회에서 남성성은 지배와 폭력보다 협력과 연대의 가치와 맞닿아 있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미노아 사회가 여성 우위 사회였는지 혹은 가모장제 사회였는지를 두고는 여전히 다양한 견해가 공존한다. 이 책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며 결론을 내리기보다, 각 유물을 둘러싼 여러 학자의 해석과 근거를 다층적으로 제시하며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저자는 방대한 시각 유물에 나타난 여성 도상과 여사제 관련 문헌 기록을 종합해, 미노아 사회가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성별 간 위계가 완강하지 않은, 비교적 동등한 사회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이러한 논의는 평등한 젠더 관계를 고민하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참조점을 제공한다.

인물정보

저자(글) 김신명숙

가부장제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성적 신성이 되살아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여신학(Goddess Studies) 분야를 홀로 개척하고 있는 연구자. 최근까지 대학에서 강의했고, 서울대학교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신 전통과 유산을 연구하고 있다.
10대부터 영적인 문제와 세상 문제 모두에 관심을 두고 살아왔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화두로 살다 보니 30대에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40대 중반에 여신을 만났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를 알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고, 50대 초반에 국내 최초로 여신학 분야의 박사논문도 썼다. 지은 책으로 『여신을 찾아서』, 『여성관음의 탄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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