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마셔: 어나더 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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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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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해 젊은층의 술 소비가 줄었다지만,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술은 그 자체로, 그것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인생의 한 요소다. 인류의 역사는 술을 빼면 반쪽짜리 역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술은 우리가 이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한 조각의 웃음과 기쁨을 선사해 주는 물질이다. 술과 함께 곁들여 먹는 안주는 또 어떠한가.
한은형 작가의 술 에세이는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 보겠다는 호기와는 거리가 멀고, 작가가 다가갈 수 있는 술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취하겠다는 신중한 취사선택의 결과물이다. 여기에 그 좋은 술을 그냥 마시지 않고 좋은 것들과 함께 마신다. 좋은 음식과, 좋은 영화와, 좋은 글과 함께 마시고, “낮과 밤에, 절기와 기후에, 기분과 상황에, 또 술집의 분위기와 안주에 술을 포개” 놓는다. 그렇게 술 위에 취향의 레이어가 켜켜이 쌓여 간다.
“금 위에 꽃을 더하는” 순간들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병이 있다. 책 속에서 본 술과 요리는 먹어 봐야 하는 병. 먹지 않으면 끙끙 앓는다,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기에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좋다”는 작가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를 읽고 망고를 발가락만 한 크기로 자른 망고 카레를 해 먹고, 루쉰의 단편에 나온 인물이 양념한 콩과 사오싱주를 마시는 걸 보고서 콩을 조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술까지 더하면 작가의 표현대로 “금 위에 꽃을 더하는” 순간이다.
책 속에 나온 술을 그대로 따라 마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 식대로의 페어링이 더 좋을 때도 있다. 화가 김환기의 산문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속 제목이 ‘순대튀김’인 글을 읽고서 순대튀김을 따라 해 보는데, 컬컬한 우리 약주와 먹을 것을 권한 선생의 제안을 물리치고 뮈스카 봄 드 브니즈 와인을 준비해 본다. 선생이 좋아한 와인이기도 했지만, 살구와 캐러멜 맛이 나는 뮈스카가 안주를 잘 감싸안는 느낌이라 조용히 감탄을 내지른다. 그러다 오래전 김환기의 푸른색 점화를 보고 마음이 시큰해 한참을 캔버스 앞에 서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뉴올리언스를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그 도시에서는 개와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술집 앞에서 개가 사람을 기다리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 〈패터슨〉을 떠올린다. 영화에 나오는 술집이야말로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개와 함께 걸어서 산책하듯 갈 수 있는 거리에, 주인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곳. 이 책의 장면들로 일러스트를 그린 윤예지 작가의 상상 속에서 개는 술집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는 대신, 바에 앉아 각종 토핑이 얹어진 칵테일 블러디 메리를 마신다. 각자의 꿈과 상상은 술을 매개로 알 수 없는 농도를 더해 간다.
5년간 100편이 넘는 술글,
술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는 이야기
『밤은 부드러워, 마셔』(2023)와 『밤은 부드러워, 마셔: 어나더 라운드』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작가가 일간지에 술을 소재로 연재한 글을 추려 엮은 것이다. 백 편이 넘는 글은 계절로 묶이기도 하고, 술에 관한 사자성어 아래 분류되기도 했지만 술 한잔 걸치는 밤 그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처럼 독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가 되어 있다. “혼술을 좋아한다. 하지만 함께 마시는 술도 좋아한다. 술과 함께 당신의 이야기가 풀려나오고 기분도 흘러들어서 술은 술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니까.”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술에서 시작된 이야기지만, 술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찌르르한 감격을 마시다
책 무덤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절대 고독보다 절대 맥주
볼로냐 로소와 페로니
볼로녜세 스타일 술집
세이 쇼나곤과 과하주
셰익스피어를 위한 월동 준비
‘삼국지 그녀’와 세키토바를
폭풍과 언덕을 마시다
백마를 타고 달리는 기분에 대하여
두 해에 걸친 앵두주
베이징의 미풍양속
주유별장
기벽으로서의 블러디 메리
사월의 물
마시는 밥을 좋아합니다
오뎅 해프닝 데이
막걸리 칵테일을 커버하다
우아한 스탠딩 바라는 역설
요가와 술
놀라 블러디 메리
애피타이저로서의 등산
수정방 위스키 봉봉
화요 토닉 이야기
카레와 와인
주룡시호
호텔방의 코폴라
방사능 레모네이드
쾰슈와 슈탕에
스몰 토킹 유니버스
피노 푸들의 진심
유머이거나 기믹이거나
지공다스 속에 살고 있는 남자
구름의 왕자가 되어
초현실주의자의 술
민트 줄렙의 톤앤매너
어른의 웃음을 닮은 술
고요한 애정과 낙관으로
취생몽사
적나라한 꽃 냄새가 나는 고독
아름답고 명랑한 뮈스카
화산을 마시기
귀하게 썩을지어다
생빈을 아십니까?
선데이 브레드 클럽
더없이 격렬한 앤절스 셰어
베토벤 현악 4중주와 프루스트
한겨울에 굴 먹는 방법은
마데이라 비행
어른을 위한 민트 셰이크
‘글이 된 술’을 함께 마셔 준 당신에게
분위기 하면 이 영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맥주를 부른다. 이상한 일이다. 맥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맥주를 대체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게 있다. ‘절대 고독’에 버금가는 ‘절대 맥주’의 순간이랄지. 그 순간에 대해 이 영화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 〈중경삼림〉은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는 영화다. 레몬을 뿌린 한치 튀김이나 냉두부 같은 화사한 안주가 아닌 감자튀김 같은 길거리 안주에 케첩을 듬뿍 찍어 맥주를 먹고 싶어진다. 스테이크와 함께 먹는 얄따란 프랑스식 감자튀김 말고 어느 정도 기름을 머금은 감자튀김을 말이다. 그래서 ‘중경삼림 식당’으로 가면서 필히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_ 25쪽(절대 고독보다 절대 맥주)
술은 책과 함께 마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을 골라 읽듯이 술도 술꽂이에 꽂아 두고 골라 먹는 사람으로서 드리는 말씀이다. 얼마 전에도 책을 읽다가 술을 마셨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전에도 읽었지만 얼마 전에 새로 번역된 버전으로 『폭풍의 언덕』을 읽다가 생각했다. 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캐서린이나 히스클리프가 아니라 황야이거나 히스구나. 사람이 아닌 자연환경이 주인공이고, 캐서린이나 히스클리프는 황야나 히스의 인간형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이 헤더 허니가 들어간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황야의 히스와 함께 일렁이던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헤더heather의 군락이 히스heath고, 히스는 황야에서 자란다. 황야에서 난 그 꿀이 헤더 허니다. 나는 헤더 허니 향이 나는 술들을 몇 개 알고 있고.
_ 63~64쪽(폭풍과 언덕을 마시다)
〈패터슨〉에 나오는 그런 술집을 나는 꿈꾼다. 뭔가를 아시는 분이 주인인 그런 술집 말이다. 애덤 드라이버의 단골 술집 주인은 만만치 않다. 보통이 아닌 센스를 갖고 있고, 이에 반응하는 손님이 오기에 밤마다 흥미로운 대화를 들을 수 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상적인 환경이 아닐 수 없다. 어디 나만 그럴까? 혼술하는 이들이 꿈꾸는 술집이 아닐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이런 단골 술집을 갖는 게 현생에 이루고 싶은 꿈이다.
뉴올리언스와 개와 술에 대해 생각하다가 뉴올리언스 하면 블러디 메리지 싶었다. 〈패터슨〉을 생각하면 개부터 떠오르듯이 뉴올리언스 하면 블러디 메리가 떠오른다. 칵테일 사제락의 발상지라고 알고 있긴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뉴올리언스는 블러디 메리’라고 박혀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블러디 메리들이 하루 종일 각축을 벌이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뉴올리언스에서는 아침부터 블러디 메리를 마시는데, 또 아침에만 먹는 게 아니라서 ‘하루 종일’이라고 했다. _ 144~145쪽(놀라 블러드 메리)
내가 만든 가정용 스푸모니는 며칠 전 바에서 마셨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몽 조각을 더했기에 더 나아진 면도 있다. 스푸모니는 아름답고도 맛있다. 우아한 이름만큼 맛도 우아하다. 가볍지만 경박하지 않고, 산뜻하지만 무게가 없진 않다. 공작 깃털 세 개의 무게랄지. 가장 좋은 건 쓴맛의 레이어다. 캄파리의 어른스러운 쓴맛에 자몽의 쓴맛이 더해져 쓴맛의 권역이 풍부해졌다. 이 얼마나 적절한 맛인가. 네그로니보다 부드럽고 캄파리 소다보다 우아하며 가리
발디보다 섬세하고 아페롤 스프리츠보다 어른스럽다.
아, 이런 건 치아를 드러내지 않고 웃는 어른의 웃음이다. 더 미묘할 수 있지만 구태여 그렇게 복잡한 사람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가벼운 웃음. 스푸모니에서는 그런 자몽색 웃음의 맛이 났다. _ 254쪽(어른의 웃음을 닮은 술)
그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에게는 병이 있다. 책 속에서 본 술과 요리는 먹어 봐야 하는 병. 먹지 않으면 끙끙 앓는다,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기에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좋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책이란 소설이나 소설가가 쓴 산문집이다. 음식 이야기가 나온 후 조리법은 슬쩍 등장하거나 아예 나오지 않기에 오히려 여백을 마음대로 채워 넣을 수 있어 더 좋다. 여기에 술까지 페어링하는 게 나의 확장형 독서다.
무라카미 류가 일본의 요리 프로에 나와 망고 카레 레시피를 소개했다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를 읽고 따라 한 적이 있다. 무라카미 류가 망고를 발가락만 한 크기로 자르라고 했다고 요시모토 바나나가 말한 게 전부. 나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었다(손가락만 한 크기로 자르라고 했다면 했을 것 같지 않다) . 또 루쉰의 단편 「쿵이지」에서 양념한 콩과 사오싱주(소흥주)를 마시는 걸 보고서 ‘항저우식’으로 콩을 조리해 사오싱주와 마시기도 했다. 물론 항저우식이라는 것은 내가 책에서 얻은 항저우에 대한 인상을 토대로 변주한 항저우식이었고. _ 272~273쪽(아름답고 명랑한 뮈스카)
망한 게 망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와인을 둘러싼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아주 힘든 빈티지였던 해를 보내고 난 다음 해가 사상 최고의 빈티지가 된다든가, 또 포도가 어는 바람에 망한 줄 알았는데 당도 높은 아이스 바인이 된다거나, 포도가 곰팡이균에 감염되었는데 단맛이 증폭해 최고의 스위트 와인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나는 낙관론보다 비관론에 마음이 기우는 사
람이지만, 가끔은 희망 쪽에 걸어 보기도 하니까.
포도도 아닌 사람이 귀하게 썩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덜 힘들게 썩는 방법은 알겠다. 귀하게 썩은 와인을 묵혀 두고 20년이 되었든 30년이 되었든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일단 썩힐 와인을 살지어다. 그리고 귀하게 썩을지어다.
_ 293쪽(귀하게 썩을지어다)
나는 이 술이란 물질을 사무치게 좋아한다. 물질이지만 비물질이며 액체지만 액체만은 아닌 이것. “피아노 현의 장력은 한 줄당 평균 73킬로그램이다. 다시 말해 모든 현을 합치면 피아노 한 대가 20톤의 중량을 견딘다는 뜻이다.” 어젯밤 궈창성의 소설 『피아노 조율사』(문현선 옮김, 민음사, 2024)를 읽다가 피아노 조율사와 술의 연관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현상적으로는 피아노의 음을 조율하지만 물리적으로는 사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피아노 조율사를 술에 비유할 수 있겠다고. 술은 사람의 기분을 조율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깨달음! 또 이 가벼운 액체는, 이 가벼운 술 한 병은 몇 사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떤 술은 글이 되고 또 어떤 술은 글이 되지 않는지 모르겠으나 글이 된 술이 여기 있었습니다. 함께 마셔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오늘 밤도 안녕히. _ 343~344쪽('글이 된 술'을 함께 마셔 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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