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덮인 세계를 본 적 있는가
2025년 12월 05일 출간
국내도서 : 2025년 12월 05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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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21.84MB)
- ISBN 9791193078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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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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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움(AUM)’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비가 세계를 뒤덮은 이후, 움에 대한 면역 여부로 분화한 두 인종의 문명을 그린다. 이야기는 재난이 인류의 생존 조건을 어떻게 바꾸는지부터 출발해, 세대를 거치며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두 인종과 이 분화를 통해 새롭게 조직되는 인류 문명의 흐름을 찬찬히 짚는다. 공희경은 압도적인 상상력과 문장력으로 인류가 분열과 연대를 거듭하는 과정을 통해 지구 단위의 순환을 그려낸다. 특히 이 작품은 제2차세계대전 생체실험, 토착 원주민 착취, 기후 불평등의 최전선에 놓인 난민 및 노동자 등 지극히 현실적인 역사적, 지역적, 경제적 맥락을 깊이 있게 포착했다.
작품의 여러 장면은 독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움 내성 유전자를 지닌 아이를 품은 임산부가 일본군에게 처형당하기 전 아기에게 말을 거는 장면, 더럽다는 이유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 걸어 귀가하는 난민 노동자가 과로사하는 순간까지도 아내를 위해 챙겼던 생수병을 따지 않는 장면, 루시의 과학기술로 인해 입이 없어진 애완 사가르의 슬픔을 다른 사가르가 공감하는 장면 등 작가는 인간이 행하는 폭력들을 노골적으로 서술하는데, 섣부른 계몽이나 감상적 해석에 도취되지 않고 깔끔한 문장으로 인간 사회의 면면을 끈질기게 쫓는다. 이를 통해 폭력과 죽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사이의 ‘무언가’를 끝까지 탐색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돋보인다. “계급과 불평등, 권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종말-창세 신화를 새로 짠 작가는 주제와 소재의 무게를 너끈히 감당해 장편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김성중 소설가)라는 평과 함께 만장일치로 장편 대상에 선정됐다.
500살이 된 상어 ‘바나’의 시점에서 시작하는 소설은 붕괴한 세계 속 인류를 인류 밖에서 조망하며 우리 삶에 대한 여러 “질문을 지적인 구도로 성실하게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적인 이미지로 아름답게”(인아영 문학평론가) 구현한다. 이처럼 거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된 경이로운 장면들은 마치 한 편의 극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며, “우주의 음악 속 작은 패턴인 인류가 감내해야 할 운명을 가만히 응시하는 경험”(강지희 문학평론가)을 제공한다.
2장 - A. D. 2028 집으로 돌아가는 유령들
3장 - A. D. 2035 잘생긴 남자, 말라키
4장 - A. D. 2338 혹은 A. L. 300 개동의 시작
5장 - A. L. 450 깊은 밤을 날아 너에게
6장 - A. L. 451 입속의 꽃
7장 - 개동 151~172 검은 강
8장 - 새벽의 춤
작가의 말
심사평
곧 500살을 맞이할 상어 바나는 몸길이 6미터 10센티미터에 달하는 육중한 몸을 이끌고 북위 87도, 서경 1도를 지나 차가운 북극해를 횡단하고 있다. _ 첫문장
천년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내 이름은 카. 나는 긴 시간을 볼 수 있었고 그만큼의 감정을 품고 살았다. 이것은 조망과 시야의 문제, 게다가 그 시야는 한정적이다. 숲을 멀리 내려다보는 일과 같이,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지 볼 수 있는, 내 시야에 주어진, 어떤 제한된 풍경이 있을 뿐. 먼 과거의 빛을 본다 해도 별을 딸 순 없듯이 비를 그치게 할 순 없어도 언제 비가 그칠지는 알 수 있다. 이런 얕은 재주로 지금껏 살아왔다. _ 149쪽
이제 가자. 나오미가 외쳤다. 아이들은 수영을 아주 잘했다. 나오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한 번 더 파도가 높게 솟구쳤다. 물에 뛰어들기 직전 동생들의 손을 꽉 잡았을 때, 나오미는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처음에는 밀의, 그리고 라일라의 몸이 거품처럼 증발했다. _ 32쪽
…우리는 쉬지 않고 연구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다.”
드미트리의 바람과 달리, 필사적으로 녹색 비를 피하려던 사람들은 곧 색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됐다. 국지적으로 내리던 녹색의 비는 점점 넓어지고 옅어졌다. 잉크가 물에 번지듯이 빠르게, 모든 비로 번졌다. 어느 순간부터 투명한 연둣빛 비만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지상에 오래 고일수록 발효하듯 색을 잃었다. 그것은 그냥 비. 수식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약속이란 얼마나 허망한가. 10년 뒤 드미트리는 빗속에서 증발했다. 그의 발이 있던 웅덩이 가에는 낡은 운동화와 옷가지와 금니 세 쪽이 떨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초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_ 48쪽
장병들은 포로들의 목을 엮어 줄을 세우고 수용소 뒤편 숲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하늘이 있었다. 구름은 산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더럽게 파랗다.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곤 스스로에게 놀랐다. 신기할 따름이다.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힘이 있다는 게. 생각이 남아 있다는 게. 소녀는 오랜만에 굴러가는 생각의 톱니바퀴를 자꾸만 굴려본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 짐승처럼. 생이 구르다 구르다 똥통에 처박히면 어떻게 되는가. 멈추는가. 아니다. 썩는다. 그때부터는 썩은 몸을 짓누르며 굴러간다. 감각은 사라지고 굴러간다는 느낌만 남는다. 그때부터 몸은 바퀴가 된다. 내가 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아진다. 구르고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천길 낭떠러지인지 불구덩이인지 알 필요가 없다. 끝장 나기 전까진 그저 굴러간다. 이 무거운 몸을 짓누르는 힘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끌고 가는 거다. 나는 썩었으니까. 바퀴일 뿐이니까. 내게는 위안이 필요없지. _ 23쪽
엄마는 학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유리에게 건네려 한 우산을 한 손에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비바람에 휘청이는 우산을 받쳐 들고,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바보 같은 엄마.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빗줄기에 가려진 엄마의 몸이 희미해 보였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사람 같았다.
엄마는 내게만 보이는 유령일지 몰라. 유리는 엄마에게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갔다. 뜨거운 것이 목에 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유리를 보고 웃었다. 다정한 모녀가 손을 꼭 잡고 집 안에 들어왔을 때, 수조는 비어 있었다. _ 68~69쪽
입이 지워진 소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는데, 그 눈이 지독하게 슬퍼 보였다. 소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향기로운 음식에 취해 무심코 지나쳐 온 순간들이 심장에 박혔는데 가슴이 무너지며 그간에 먹은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는데 폭포처럼 발등을 타고 흘렀는데….
그르르르쿠쿠쿵쿵,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파티장을 감싼 공관들 지붕 너머 얼굴들이 달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무심한 눈동자는 우리를 스친 후 허공을 향해 미끄러졌다. 옥수숫대처럼 자라나는 몸이 건물 벽을 밀치고 하늘을 향해 뻗쳤다. 나는 소녀를 부둥켜안았다. 웃자라는 그들의 몸이 출렁거렸다. 폭풍에 흔들리는 우듬지 같았다. _ 209쪽
우리는 루시 거죽을 뒤집어쓰고 손을 맞잡은 채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해자가 온통 불구덩이였다. 밤새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의 술 취한 노랫소리가 쩌렁쩌렁 돔 하늘을 울렸다. 아이와 여자들도 따라 웃었다.
끈적한 체액이 얼굴을 타고 흘러 입술에 뱄다. 우리는 계속해서 침을 뱉었다. 아주 떫고 시큼한 맛이 났다. 사흘을 굶은 우리는 정신이 혼미해진 사이 서로의 얼굴에 묻은 체액을 빨아 먹고 있었다. _ 236쪽
루시 몸을 타고 다니는 건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나는 점점 더 기운이 빠지고 몸이 무거워졌다. 소년은 하루가 다르게 어깨가 넓어지고 키가 커졌다. 그의 힘줄 하나하나에는 조각처럼 날카로운 근육이 붙었다. 그는 금세 다리를 절지 않게 됐다. 그는 처음 만난 날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소년이 됐다. 키가 같았던 우리는 어느새 눈높이가 달라졌다. 나는 그를 점점 더 올려다봐야 했다. 어느새 나는 둥지 속 아기새가 돼 있었다. 루시의 입속에서 쉬고 있으면 아난이 먹을 걸 물어다 줬다. 나는 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시간을 기다린다.
불과 반년 사이 우리는 완전히 변했다. 습관도, 외양도, 마음도. _ 244쪽
이놈이나 저놈이나 잡놈들이다. 빌어먹을 진보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 저들은 사기 칠 궁리만 한다. 저번에는 적선이랍시고 썩은 쌀 두 포대와 폐기물 300톤을 던지고 갔다. 때로 그들은 휴대용 비전과 수상한 약을 나눠주고 아이들을 데려간다. 포만감을 주고 고통도 잊게 해주니 너도나도 약에 손을 댔다. 영양제라지만 난 저들을 믿지 않는다. 중독성이 있는 약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약이라면 자식도 갖다 바치는 병신들이 돼버렸다. 아니, 이들은 원래 그랬다. _ 99쪽
더러운 사피엔스들이 똥까스를 빨아젖히는 사이에도 다른 동식물들은 너무나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개구리밥을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태어나 증발하기 직전까지 자손을 뿌리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줄기도 뿌리도 갖지 않는다. 암수도 없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어떤 방패도 만들지 않는다. 싹을 틔운 지 1시간 만에 잎을 부풀리고 스스로 싹을 뿌린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들은 모든 가치를 버린다.
갓 태어난 어린 곤충조차 이 지랄하는 비로부터 자손을 보호하기 위해 제 몸집보다 큰 방수 껍질로 알을 싸고 또 감싼 뒤 기꺼이 증발한다. 눈도 입도 없이 태어난 이 하찮은 것들은 비가 올 때를 알고 사라질 때를 안다. 더디지만 끈질기게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아는 것들이다. 버림으로써 영원히 사는 법을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진보라는 걸 이 똥 덩어리들만 모른다. 세상이 왜 우리에게 맞춰지질 않냐며 배만 긁는다. _ 106쪽
사람들이 목을 움츠렸다. 나는 노파의 정수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마라가 무엇이냐. 악귀의 그물이다. 우리 고통을 거름 삼아 농사짓는 사악한 것들이다. 우리를 착취하고, 오지로 내몰고, 우리의 아기들을 골라 가져가고, 이 땅에 저주를 내리고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는 간악한 것들이다. 루시.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니, 너희는 마라의 먹이일 뿐이다. 언제까지 빼앗기는 삶을 살겠는가. 그들의 빛은 빛이 아닐지니 마라의 찌꺼기다. 배설물이다. 아느냐. 우리의 빛은 우리의 어둠에 있다.
깊은 밤 검은 물 위로 흔들리는, 등불처럼 흔들리는 겁에 질린 눈동자들을 바라봤다. 연약한 눈동자들. 축축해지는 것들. _ 140쪽
꼬리 없는 도마뱀 샥은 지금 살라의 침대에 누워 있다. 새끼손가락의 마디만 한 이 조그만 녀석의 몸은 핑크빛 내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 빛을 받아본 적 없는 음지 생물의 창백한 살갗. 피부 속에 묻힌 퇴화한 눈. 다신 빛을 볼 일이 없을 거라는 순응, 또는 대를 이은 자포자기의 유전자. 땅이 열리면 가장 먼저 타버릴 나태한 생명. 네가 태양 아래 타오를 날을 꼭 보고 싶다.
사납게 손을 쳐들자 샥은 살라의 담요 속으로,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눈도 없는 주제에. 살라가 눈을 뜬다. 엄마.
세계가 증발하고 있다. 나의 생명, 나의 사랑 살라조차도. 이제는.
왜 이야기를 멈췄어요? 살라가 묻는다. 너는 이미 낮과 밤이 두 번씩 반복되고 나서도 반나절이나 꼬박 눈뜨지 않았는데. 살라는 그 조그만 손가락으로 내 손끝을 톡톡 힘없이 건드리며 이야기해 달라 조른다. _ 150쪽
그들의 삶은 허공 위에 있었다. 어떠한 연결점 없이 지상 2미터 위에 반듯이 떠오른 돔. 우리는 쉽사리 물에 잠기는 땅으로부터 보호됐고, 움과 홍수, 지열, 지진 등의 각종 재해로부터 벗어났다. 바퀴 달린 이동 수단 대신 깃털처럼 가벼운 무소음 보드를 타고 날았다. 우리는 화성이나 달로 가는 대신 지구 위에 기지를 세웠다. 지구에 정착한 외계인들처럼 살았다. _ 159쪽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무엇을 만들려는 거지. 우린 결국 파괴점을 찾아 헤매는 존재야? 내게는 이 인류 전체가, 거대한 문제아로 느껴져. 요 조그맣고 작은 아이야. 작고 연약한 카나리아야. 너희는 석기 시대에 소멸한 다른 호모종과 마찬가지로 점차 소멸하겠지. 점점 더 생각하는 기능은 사라지고 나비처럼, 꽃처럼, 고양이처럼 무해한 존재가 되겠지. 특별하다는 기대나 좌절감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지. 걱정하지 마. 특별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어. 세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단다.” 주인아빠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내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컬을 만졌다.
“착한 아이야. 요 조그맣고 예쁜 머리통으로 생각이란 걸 할 수 있니. 요 앙증맞은 머리통으로 꿈을 꿀 수 있니. 두렵다거나 외롭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니. 그렇다면 꿈꾸지 마. 꿈꾼다는 건 슬픈 일이야.” _ 176쪽
살라야, 사랑을 얻는 것은 온 우주를 가지는 일. 때때로 우리는 모두에게 운명의 실로 연결된 짝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그런 일은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그것은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 주어지는 밥 같은 것이 아니란다. 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자부하는 상위 1퍼센트의 비율보다 희박한 것이다. 사랑을 이루기란 그렇게나 어렵더라. 사랑노벨상이 있다면 그 자리는 매년 공석일 거야.
엄마. 나는 사랑노벨상 받을 수 있어요. 나는 엄마 사랑해요. 살라는 웃는다. 그 애를 닮은 둥글고 환한 눈매로, 소리 없이 웃는다. 그래, 그 말이 맞지. 그럴 거야. 왜 꿈 같은 일은 늘 꿈으로 끝나버릴까. _ 195쪽
“폭력적이고도 허약한 족적을 그려온 인류의
주권을 내려놓는 지구 아카이브 소설.” _심사평 중에서
모든 생물을 증발시키는 비의 출현과 함께
두 개의 종으로 분화한 인류
“사피엔스의 역사는 고기의 역사다. 서로가 서로를 고기로 만들었다.
예쁜 고기. 힘센 고기. 맛있는 고기. 우리는 서로가 가진 불꽃을 보지 못했다.
이 역사를 끝내야 한다.”(291쪽)
2015년, 이국의 작은 섬에 폭우가 내렸다. 비에 젖은 섬의 생명체는 단 한 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특이 현상이 세계로 퍼지며 인류는 사상 최대의 재난, ‘움’을 마주하게 된다. 곧 움 연구가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생존자의 유전자를 이용한 유전자 편집 기술이 개발된다. 이렇게 완성된 움에 대응하는 면역 시술은 죽기 전까지 키가 자란다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재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기에 상용화됐다. 그러나 비용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시술은 부유층의 전유물이 되었고, 세대를 거치며 시술 여부는 곧 사회적ㆍ경제적 지위를 구분하는 신체적 표식이 됐다. 그 결과 신장의 격차는 단순한 외형 차이를 넘어 구조적 불평등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먼 미래, 시술받은 인류의 후손이 ‘루시’라는 새로운 종으로 정의되며 호모 사피엔스는 두 종으로 분화하게 된다. 신인류 루시는 대대로 이어진 부를 통해 돔으로 도시를 덮어 그들만의 문명을 이룩했다. 반면 구인류 사가르는 돔 밖에서 움을 피해 땅이나 동굴 속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야 했다. 사가르가 돔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애완 목적으로 루시에게 입양되거나, 루시를 모시는 노동 계층이 되는 방법뿐이다.
신체적 특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가르를 열등한 종으로 규정하는 루시들의 행보는 마치 인권에 대한 인식이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 재난이라는 변수 앞에서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인권이 무너지는 과정은,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보존하기 위한 다짐과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채도 높게 생동하는 인물들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과 순리대로 흘러가는 자연의 거대한 순환을 묵시록적으로 묘사하며 주제를 색다른 방향으로 승화시킨다.
“그들이 우릴 길들였다. 루쿨렝? 이름도 거창하다. 진보한 생명체란다. 우리는 그냥 꺽다리 루시라 부른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에는 구린내가 배어 있다.”(100쪽)
시술 부작용으로 거대해진 신체를 앞세워 번성하던 루시 문명은 역설적이게도 그 육체가 무한히 급속도로 팽창하는 ‘집단 거대화’로 인해 멸망한다. 뒤늦게 발현한 부작용인 루시들의 거대화는 돔을 부수고 나서도 멈추지 않았으며, 루시들은 “새로이 탄생하는 생물처럼”(212쪽) 자아를 잃고 “자신들이 이룩한 지상 최대 규모의 건축물들을 조금씩 침식시켜 나가며”(222쪽) 끊임없이 이동했다. 루시의 애완 사가르 소녀 ‘카’는 노동 계층 소년 ‘아난’과 함께 돔에서 빠져나와 도망친다. 카는 루시 문명이 멸망하고 나서야 그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가르들이 목소리를 잃고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카는 착취당해 증발한 작은 존재들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는데, 이후 도달한 사가르들만의 공동체 ‘개동’에도 계급과 폭력이 존재하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우두머리 ‘회’는 신분제에 이의를 제기하는 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한다. “인류의 발아래는 언제나 희생의 강이 흐른다. 우리는 희생을 통해 영원히 살아간다. 버림으로써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 모든 존재가 연결돼 있다.”(270쪽)
김성중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카의 시선을 통해 자가포식이라는 자연의 엄정한 법칙이 제시되었음에 주목했다. “만드는 것 이상으로 파괴되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는 생명의 엔트로피”는 이 소설의 결말을 “새로운 지구를 위한 창조적 파괴”로 이끌었다고 그는 평했다. 존재를 위해 파괴가 불가피하다는 이 철학적 함의는 독자로 하여금 존재의 본질을 다시금 사유하게 하며 작품에 묵직한 깊이를 더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증오와 사랑을 반복하는 인류 문명의 순환
영혼의 숨을 보는 소녀가 읊는 종말과 창세의 역사
“증발하는 모든 것이 하늘로 올라가네.
그들은 부서진 대지를 유영하며 하늘 끝에서
점차로 경계가 허물리고 비눗방울과 같은 덩이가 되어,
대기를 타고 빠르게 상승한다.”(248쪽)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서 “극단에 이른 계급 갈등이 어떻게 하위 계층에서 억압적인 신흥 종교를 탄생시키는지, 상위 계층에서는 시술의 부작용으로 인한 붕괴가 어떻게 무정부 상태를 발현하는지” 치밀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생을 좇아 살아가는 “인물들이 만드는 화려하고 생생한 이미지와 서로 다른 계급으로 만난 소녀와 소년의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정동”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바라봤다.
싸움과 연대를 반복하는 인류의 모습처럼 이별과 화해를 반복하는 카와 아난 사이의 일화들은 작품 바깥에 있는 독자의 시선으로 볼 때 사소한 작은 점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건 이 모든 폭력과 죽음과 이별을 순간적인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지구 행성적 차원의 순환을 보여주는 데 있다”(강지희 문학평론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규정한 사회·문화적 구별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차별과 사건들은 결국 우주적 순환의 관점으로 볼 때 무의미한 하나의 점이며 모두 같은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는 “슬퍼하지 마. 우리는 아름다운 패턴이야. 우주의 음악이야”(320쪽)라는 문장으로 응축된다. 이 소설이 다루는 거대한 연대기를 따라가는 동안, 독자는 인간 중심의 폭력적 질서를 넘어선 근원적 질문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심사평
『몸으로 덮인 세계를 본 적 있는가』를 당선작으로 선택하는 데 망설이지 않은 이유는 단연 돋보이는 문장력과 광활한 상상력에 있었다. (…) 작가가 의도하는 건 이 모든 폭력과 죽음과 이별을 순간적인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지구 행성적 차원의 순환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러니 이 장편을 두고 폭력적이고도 허약한 족적을 그려온 인류의 주권을 내려놓는 지구 아카이브 소설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비인간의 시점에서 출발해 수백 년에 걸친 시공간의 호흡을 거침없이 건너뛰는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는 궁극에 “슬퍼하지 마. 우리는 아름다운 패턴이야. 우주의 음악이야”라는 대사로 응축된다. 우주의 음악 속 작은 패턴인 인류가 감내해야 할 운명을 가만히 응시하게 해주는 경험 하나만으로도 이 소설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_ 강지희(문학평론가)
장편 심사는 단차가 월등한 작품이 있을 경우 순식간에 종료되는데 올해가 그런 경우다. 전원일치에 가까운 심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수상작의 특징에 대해 좀 더 길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이야기를 통과하면서 오토파지(자가포식)의 개념이 자꾸 떠올랐다. 만드는 것 이상으로 파괴되는 것이 있어야 유지되는 생명의 엔트로피를 상기해 볼 때, 이 소설의 결말은 새로운 지구를 위한 창조적 파괴일 것이다. 계급과 불평등, 권력의 문제를 다루면서 종말-창세 신화를 새로 짠 이 작가는 주제와 소재의 무게를 너끈히 감당해 장편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_ 김성중(소설가)
비를 맞으며 증발해 사라지는 사람들과 온갖 생명체들,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첫 번째 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를 이용해 개발되는 유전자 시술, 그 부작용으로 멈추지 않고 키가 자라는 신인류의 탄생, 문명의 흥망과 성쇠, 기나긴 연대기 끝에서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종횡무진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며 독자를 낯설고 놀라운 미래의 지구로 데려갑니다. 풍부하고 다양한 함의를 담은 이 소설은 주제 또한 하나로 응축하기 힘들 정도로 다면적입니다. 작가가 그만큼 주제에 도전하는 힘과 필력을 지니고 있다는 방증이겠지요. 긴 분량에도 인상적인 장면들은 살아 숨 쉬며 생동하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세계엔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합니다. 인간종 밖에서 인간종을 응시하며,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를 조명하는 솜씨는 발군이었습니다. _ 김희선(소설가)
기후 위기와 계급 갈등이라는 두 기둥이 든든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소설을 생태주의 SF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말 묻고 있는 것은 우리 삶에 대한 질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생존을 위한 경쟁, 계급에 따른 차별로 무참히 붕괴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서로에게 분리주의의 칼날을 겨누어도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 질문들을 지적인 구도로 성실하게 제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시적인 이미지로 아름답게 구현하는 데 이른다. 개인적으로 상어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바다를 유영하는 첫 장면에서 이미 이 소설에 매혹된 것 같다. 거대하고 어지러운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위험한 운명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면서도 자유로운 생명의 리듬을 잃지 않는 존재. 이 이미지가 파괴와 재생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생명의 아름다움을 놓지 않는 소설의 정서를 관통하고 있었다. _ 인아영(문학평론가)
인물정보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연결되는 우주의 얘기이며
음악에 대한 찬가이며
세상 모든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의 노래다
별빛은 이야기를 보낸다. 이야기는 뚝뚝 끊긴다. 밤하늘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떠다닌다. 아직 해독되지 못한 많은 얘기가 있다. 나는 별빛에게 기도한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 주겠다고. 네가 사랑하고 있는 이 세계의 누군가에게. (…)
환기미술관 맨 위층에 앉아 그림을 보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눈에 그림이 닿을 때면 아, 깊은 감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탄식이 들렸다.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하나같이 마지막 맨 위 계단을 밟을 때 탄성을 내뱉었다. 허영도 가식도 없는 순수한 감동의 표정이었다. 그들의 눈에 푸른빛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관찰했다.
너무 아름다운 것에는 공평의 꼬리표가 달려 있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이야기를 캐는 고고학자처럼, 매일 한 점 한 점 감춰진 이야기를 발굴한다.
땅을 파서 돌을 건져 올리고 흙과 먼지를 털어 내고 아래 감춰진 거대한, 공룡의 뼈대 같은 것을,
새하얀 뼈를 만져본다.
새하얀 것이 있다.
이제 아주 조금 드러났다.
그 뼈대가 모두 드러나는 날을 기다린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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